아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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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야치는 쿠빌라이의 아들로, 몽골 제국 시대의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는 보르쿠의 딸 후슈친이며, 1272년 쿠빌라이로부터 말을 하사받았다. 1280년 고려 대청도로 유배되었다가 1281년 원나라로 소환되었고, 1287년 나얀의 반란 진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1288년에는 하사품을 받았으며, 이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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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치 | |
---|---|
기본 정보 | |
성씨 | 아야치 (Ayachi, 阿弥地) |
본관 | 불명 |
인구 | 184명 (2015년 기준) |
특이 사항 | 일본에 분포하는 성씨 중 하나 |
인물 정보 | |
아야치 히로시 (일본어: 綾地 比呂志) | 일본의 게임 크리에이터, 시나리오 작가 |
아야치 유키 (일본어: 綾地 雪) | 일본의 게임 브랜드 "아자라시 소프트"의 대표 |
2. 생애
『집사』에 따르면, 아야치의 어머니는 몽골 제국 건국의 공신인 보르쿠의 딸 후슈친(후슈친/ᠬᠦᠰᠢᠵᠢᠨmn)이었다고 한다.[1] 후슈친은 쿠빌라이의 비(하툰)들 중에서는 비교적 신분이 낮았고, 후슈친에게서 태어난 아야치와 코코추는 쿠빌라이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도 대우가 낮은 존재였다.
아야치의 출생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지위안 9년(1272년)에는 쿠빌라이로부터 말을 하사받은 기록이 있다.[1] 그러나 다른 형제들(적출의 3명, 후게치와 아울루크치)이 잇달아 왕호를 받아 각지의 통치에 관여하는 데 반해, 아야치는 10년 가까이 아무런 왕호도 받지 못했고 그 행적은 불명하다.
지위안 21년(128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동생 코코추가 제5계급의 닝위안왕에 봉해지고, 아야치 또한 초 21643정을 하사받았으며[2], 다음 해 지위안 22년(1285년)에 은인을 받았다.[3] 이로써 왕호를 받지는 못했지만, 독자적인 울루스의 형성이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 아야치의 소속 부대는 하서 지방에 위치해 있었다.[4]
지위안 24년(1287년)에 옷치긴 가문의 나얀을 중심으로 동방 삼왕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쿠빌라이가 이끄는 본대와는 별도로 아야치는 요동·요서 방면군을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다. 아야치가 이끄는 별동대는 아야치와 첨원의 한조·감사의 탈탈대가 이끄는 부대, 자라이르부 출신의 타추와 자라이르 왕가 출신의 알라우딘이 이끄는 부대, 베이징 선위사의 이역살합과 베이징 선위사 도사 왕덕량이 이끄는 부대 등 3개 부대로 구성되었다.[5]
아야치가 상대한 것은 함평에 침공한 카사르 가문의 시쿠두르였는데, 동방 삼왕가에 호응하여 출병한 여진의 공격으로 아야치가 이끄는 부대는 일시적으로 패퇴했다. 이때 아야치는 사로잡힐 뻔했지만, 타추 등의 분전으로 요하를 건너 도망칠 수 있었다.[6] 6월에는 반란의 주모자인 나얀이 쿠빌라이가 이끄는 본대와의 결전에서 패하여 붙잡혀 죽은 일도 있어, 7월에는 전열을 정비한 아야치가 이끄는 부대에 의해 시쿠두르 세력도 평정되었다.[7][8]
다음 해 지위안 25년(1288년)에는 나얀의 난 진압 공적으로 금·은·사·면·금소폐·견·마·양·낙타·소 등 많은 하사를 받았다.[9] 이 이후 아야치에 관한 기재는 없고, 나얀의 난 진압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 1. 어린 시절
쿠빌라이 카안의 여섯번째 서자 혹은 여덟번째 서자이다. 원사와 신원사에 의하면 여섯번째 아들인데, 페르시아계 문헌에는 여덟번째 아들이라 한다. 라시드 웃딘을 비롯한 페르시아어 문헌에는 아바아치(اباچی)로 나타난다.[10] 원사에는 그의 생모가 등장하지 않으나, 라시드 웃딘의 집사와 중화민국시대의 신원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칭기즈 칸의 부하이자 몽골 제국 개국공신인 보로클의 딸 후슈친 카툰이었으나,쿠빌라이 카안의 후비들 중에 서열이 낮았다.[10] 후슈친 카툰이 서출인 것 여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집사에 의하면 동복 친동생으로 코코추가 있다. 쿠루투크 또는 케루미슈라는 이름의 동복 누이도 있었는데, 일설에는 고려 충렬왕의 왕비 제국대장공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10] 후슈친에게서 태어난 아야치와 코코추는 취급이 낮았다.[10] 아야치의 정확한 출생년대는 불문명하다.아야치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록도 원사, 원사연의에는 전하지 않는다. 그에게 이자 왕호와 작위, 영지가 하사되지 않은 이유는 원사, 원사연의, 신원사 등에 등장하지 않아 알 수 없다.[10]
1271년 쿠빌라이 카안이 말을 하사하였다.[10] 이후 한동안 원사, 원사연의, 신원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한국의 고려사에 그가 1280년부터 1281년 고려 서해연안의 대청도(大靑島)에 유배된 기록이 나타난다.[10]
2. 2. 고려 유배와 귀환
1280년 8월 7일 원나라 조정에서 그를 대청도로 유배보냈다.[11] 8월 22일 아야치가 고려로 오자 제국대장공주가 그에게 잔치를 베풀었다.[12], 성 밖에서 맞이하여 객관(客館)에서 풍악(風樂)을 울리고 잔치를 베풀려 하자, 따르던 자가 그치게 하며 말하기를, "황자께서 황제의 명으로 폄적(貶謫)되는 곳에서 어찌 풍악을 즐길 수 있겠소?"라고 하자 결국 그만두었다.[13] 그가 어떤 이유로 고려 대청도에 유배되었는지는 원사, 원사연의에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1281년 11월 3일 원나라에서 소환[14], 고려의 국왕 충렬왕과 왕후 제국대장공주가 나와 벽란도에서 아야치를 전송하였다.[15] 1283년 8월 15일 사자를 고려 조정에 보내 예물을 바쳤다.[16]
2. 3. 동방 3왕가의 반란 진압
1287년 테무게 옷치킨의 4대손 나얀을 중심으로 동방 3왕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쿠빌라이 카안이 이끄는 본대와는 별도로 아야치는 요동, 요서 방면군을 이끌고 반란 진압에 출정했다.[17]1287년 7월 주치 카사르 왕가 출신 식투르가 군사를 일으켜 함평을 공격하자 7월 4일 출전하여, 심주 북부에서 식투르 군사를 토벌했다. 그러나 여진족 부대의 공격을 받아 아야치의 군대는 일시적으로 패배하기도 했다. 이때 아야치는 여진족에게 포로로 붙잡혔지만, 타추 등의 분전에 의해 탈출, 랴오허(遼河)를 건너 도망쳤다.[17] 이어 아야치는 선위사(宣慰使) 이키차카에게 병력을 분할하여 의주(懿州)로 보내자 식투르는 도주하였다.
나얀의 반란 진압에 참여한 공으로, 1288년 금, 은, 맹, 면, 금소폐, 실크, 말, 양, 낙타, 소 등을 하사품으로 받았다. 이후 원사, 원사연의 등에는 기록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1295년 4월 24일 원 성종의 명으로 고려에 파견되어, 고려 조정에서 양식을 저장하고 있는지 조사하고[18], 돌아갔다.
후일 원 성종이 왕공족을 소집할 때 소환, 이때 그는 감숙행성의 오랄하이로(兀剌海路, 간수성 근처)를 영지로 하사받았다.
그의 사망 시점과 사망 원인은 미상인데, 신원사 114권에 의하면 병으로 죽었다 한다.
2. 4. 원나라 복귀와 죽음
아야치의 어머니는 몽골 제국 건국의 공신인 보르쿠의 딸 후슈친(هوشیجین Hūshījīn)이었다고 한다.[1] 후슈친은 쿠빌라이의 비(하툰)들 중에서는 비교적 신분이 낮았고, 후슈친에게서 태어난 아야치와 코코추는 쿠빌라이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도 대우가 낮은 존재였다. 아야치의 출생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지위안 9년(1272년)에는 쿠빌라이로부터 말을 하사받은 기록이 있다.[1]지위안 21년(1284년) 동생 코코추가 제5계급의 닝위안왕에 봉해지고, 아야치 또한 초 21643정을 하사받았으며[2], 다음 해 지위안 22년(1285년)에 은인을 받았다.[3] 아야치의 소속 부대는 하서 지방에 위치해 있었다.[4]
지위안 24년(1287년)에 옷치긴 가문의 나얀을 중심으로 동방 삼왕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쿠빌라이가 이끄는 본대와는 별도로 아야치는 요동·요서 방면군을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다. 아야치가 이끄는 별동대는 아야치와 첨원의 한조·감사의 탈탈대가 이끄는 부대, 자라이르부 출신의 타추와 자라이르 왕가 출신의 알라우딘이 이끄는 부대, 베이징 선위사의 이역살합과 베이징 선위사 도사 왕덕량이 이끄는 부대 등 3개 부대로 구성되었다.[5]
아야치가 상대한 것은 함평에 침공한 카사르 가문의 시쿠두르였는데, 동방 삼왕가에 호응하여 출병한 여진의 공격으로 아야치가 이끄는 부대는 일시적으로 패퇴했다. 이때 아야치는 사로잡힐 뻔했지만, 타추 등의 분전으로 요하를 건너 도망칠 수 있었다.[6] 6월에는 반란의 주모자인 나얀이 쿠빌라이가 이끄는 본대와의 결전에서 패하여 붙잡혀 죽은 일도 있어, 7월에는 전열을 정비한 아야치가 이끄는 부대에 의해 시쿠두르 세력도 평정되었다.[7][8]
다음 해 지위안 25년(1288년)에는 나얀의 난 진압 공적으로 금·은·사·면·금소폐·견·마·양·낙타·소 등 많은 하사를 받았다.[9] 이 이후 아야치에 관한 기재는 없고, 나얀의 난 진압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 5. 사후
아야치는 병으로 사망했으나, 정확한 사망 일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영지는 아들 에부겐, 손자 에디그부카, 다른 아들 부얀테무르에게로 이어졌다고 하나, 이들의 이름만 원사에 등장하고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3. 가계
아야치(Ayači, 아이아츠 다왕/愛牙赤大王중국어/아바치 Ābāchī)는 에브겐(Ebügen, 아무간 다왕/阿木干大王중국어)과 부얀 테무르(Buyan Temür, 부얀테무르 왕/孛顔帖木児王중국어)의 조상이다.
참조
[1]
원사
元史』巻7世祖本紀4
[2]
원사
元史』巻13世祖本紀10
[3]
원사
元史』巻13世祖本紀10
[4]
원사
元史』巻14世祖本紀11
[5]
서적
吉野2009
[6]
원사
元史』巻133列伝20塔出伝
[7]
원사
元史』巻14世祖本紀11
[8]
서적
杉山2004
[9]
원사
元史』巻15世祖本紀12
[10]
원사
元史』巻7
[11]
고려사
고려사 世家/卷第二十九/ 忠烈王 6年 8月 丙子
[12]
고려사
고려사 世家/卷第二十九/ 忠烈王 6年 8月 辛卯
[13]
고려사
고려사 권89, 열전 권제2 후비(后妃)편, 충렬왕 후비 제국대장공주
[14]
고려사
고려사 세가/권제29 / 충렬왕 7년 11월 乙丑
[15]
고려사
고려사 세가/권제29 / 충렬왕 7년 11월 庚辰
[16]
고려사
고려사 세가/권제29 / 충렬왕 9년 8월 丙申
[17]
원사
元史』巻133
[18]
원사
元史』卷18 本紀18 成宗1 元貞1年 乙未 閏4月 戊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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