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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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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코추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아들로, 몽골 제국 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1275년 이복 형 노무간 휘하에서 카이두와의 전투에 참전했으나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귀환했다. 이후 몽골 국경 지대 방어에 참여했으며, 영원왕에 봉해졌다. 1298년 카이두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1307년 불루간 카툰에 대항하여 쿠데타에 참여했다. 이후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가 131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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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추
기본 정보
원나라의 위치
원나라에서의 위치
한국어 이름코코추
다른 이름왕망구 (王莽古), 해랄 (海剌)
묘호익종 (翼宗)
시호환헌경목황제(桓獻景穆皇帝)
개인 정보
출생1275년
사망1313년
아버지카말라
어머니쿠틀룩켈미시
배우자아르칸부카
자녀테케
바바
만지
에르케부카
칭호 및 직위
봉호녕왕 (寧王)
기타
존호무고왕 (武功王)
시호 (추존)환헌경목황제(桓獻景穆皇帝)

2. 생애

코코추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아들로, 어머니는 몽골 제국 건국의 공신 보로클의 딸 후시친이다. 어머니의 신분이 비교적 낮아 코코추와 동복 형 아야치는 쿠빌라이의 다른 아들들에 비해 낮은 대우를 받았다.

지원 12년(1275년), 이복형 노무간을 따라 중앙아시아의 카이두와의 전투에 참전했으나, 토크 테무르와 시리의 반란으로 노무간과 함께 포로가 되어 조치 울루스로 보내져 오랫동안 억류되었다[1]지원 21년(1284년)에 풀려나 쿠빌라이에게 돌아와 다섯 번째 등급인 영원왕(寧遠王)에 봉해졌다. 이는 쿠빌라이의 다른 아들들에 비해 낮은 등급의 왕호였지만, 왕호를 받지 못한 동복 형 아야치 등 다른 서자들에 비해서는 나은 대우였다.

대덕 2년(1298년) 겨울, 카이두 휘하 두아의 기습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패배했으며, 부마 코르크즈가 포로로 잡히는 등 군사적으로 큰 실책을 저질렀다. 이 일로 칸의 처벌을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의 소환에 불응하다가, 결국 아지키가 파견된 후에야 조정에 출두했다[2]。 이 사건을 계기로 몽골고원의 대 카이두 전선 사령관은 코코추에서 카이산(훗날 원 무종)으로 교체되었다[3]。 이러한 조치에는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불간 하툰이 유력한 칸 후보였던 카이산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테무르 칸 사후 벌어진 황위 계승 분쟁에서, 코코추는 아유르바르와다가 불간 하툰과 아난다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에 협력했다. 이후 카이산이 몽골고원의 제왕들의 지지를 받아 칸으로 즉위하자, 코코추는 기존의 영원왕에서 최고 등급인 영왕(寧王)으로 승격되었다[5]

그러나 지대 3년(1310년), 카이산에 대한 반역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코코추는 처형은 면했지만, 그의 아내 올제이는 사사되었다[6]。 카이산이 사망하고 아유르바르와다가 칸(원 인종)으로 즉위한 후에도 코코추는 한동안 생존해 있었으나[7], 황경 2년(1313년)에 사망했다[8]

2. 1. 생애 초반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후슈친 황후 허루친씨(烏式眞 皇后 許兀愼氏)이다. 페르시아어 사서에는 كوكچو|쿠케치fa로 표기된다.

중국원사 종실세계표에는 그의 생모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페르시아계 사서인 집사(集史)에 따르면, 칭기즈 칸의 공신 중 한 명인 기양왕(淇陽王) 보로클(博爾忽 또는 孛羅忽勒)의 딸 후슈친 황후 허루친씨(هوشیجین|후슈친fa)였다고 한다. 후슈친 황후는 몽골 제국의 개국공신인 보로클의 딸이었으나, 보로클의 정실 혹은 첩실 소생인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후슈친은 쿠빌라이 칸의 황후(카툰)들 중에서 비교적 신분이 낮은 편이었다. 집사에 따르면 동복 형으로는 아야치 황자가 있다. 일설에는 고려 충렬왕의 왕비 제국대장공주로 추정되는 쿠틀룩 켈미쉬(忽都魯 揭里迷失) 역시 그의 동복 누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진남왕 토곤 역시 그의 동복 형제라는 설이 있다. 코코추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원사, 원사연의 등 사서에 자세히 나타나지 않는다. 『집사』에 따르면, 어머니 후슈친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코코추와 동복형 아야치는 쿠빌라이 칸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았다.

지원 12년(1275년), 코코추는 이복형이자 몽골고원을 통괄하던 북평왕 노무간의 지휘 아래 중앙아시아의 카이두 세력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노무간은 카이두 군을 공격하기 위해 알말리크로 향했으나, 소게두의 아들 토크 테무르와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과 코코추 형제, 그리고 안톤을 사로잡았다. 이 사건을 시리기의 난이라 한다. 노무간과 코코추는 시리기 등에 의해 조치 울루스의 몽케 테무르에게 보내져 오랫동안 감금되었다.[1]

지원 21년(1284년), 코코추는 쿠빌라이 칸에게 돌아와 다섯 번째 등급인 영원왕(寧遠王)에 봉해졌다. 이는 쿠빌라이 칸의 다른 아들들인 친킴, 후게치, 아우루크치 등에 비하면 낮은 등급의 왕호였지만, 왕호를 받지 못한 동복 형 아야치 등 다른 서자들에 비해서는 나은 대우였다.

2. 2. 포로 생활과 석방

지원 12년(1275년) 코코추는 이복형이자 몽골고원 일대를 다스리던 북평왕 노무간의 휘하에 들어가, 중앙아시아에서 쿠빌라이 칸에게 저항하던 카이두와의 전투에 출정하였다. 이때 코코추는 승상 안통, 노무간 등과 함께 카이두 군을 타도하기 위해 알말리크로 기습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1276년 몽케 칸 가문의 시리기를 중심으로 툴루이의 서자 소게두의 아들 토크 테무르, 몽케 칸의 아들 시리기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시리기의 난). 이들은 역습을 감행하여 알말리크의 숙영지에 있던 노무간, 코코추, 안통을 밤중에 체포하였다. 코코추는 몽케 칸의 손자 무사이에게 사로잡혔다.

노무간과 코코추는 시리기 측근들에 의해 킵차크 한국(주치 울루스)의 뭉케 테무르 칸에게 보내져 감금되었다[1]. 시리기 일파는 서방의 몽골 왕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코코추 등을 서방으로 보냈지만, 카이두와 킵차크 한국은 이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후 노무간은 탈출에 성공하였다.

쿠빌라이 칸은 카이두와 협상을 벌여 지원 21년(1284년) 코코추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코코추는 쿠빌라이 칸남송 전선에 바얀을 파견하여 교전하던 시기에 쿠빌라이 칸에게 송환되어 원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 3. 군사 활동

지원 12년(1275년), 코코추는 이복 형이자 몽골리아를 통괄하던 북평왕 노무간의 지휘 아래 중앙아시아의 카이두와의 전투에 참여했다. 노무간 군이 알마리크를 기습하려 했으나, 소게두의 아들 토크 테무르와 몽케의 아들 시리가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과 코코추 형제, 안톤 등을 포박했다. 이들은 조치 울루스의 몽케 테무르에게 보내져 오랫동안 억류되었다[1]

지원 21년(1284년), 쿠빌라이에게 돌아온 코코추는 바얀, 북평왕 노무간, 카말라 등과 함께 몽골의 국경 지대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1289년 12월 12일, 쿠빌라이 칸은 코코추를 영원왕(寧遠王)에 봉했다. 이는 쿠빌라이의 적자인 후게치, 오그룩치에 비하면 낮은 서열이었으나, 왕 작위를 받지 못한 동복형 아이아치보다는 나은 대우였다. 그의 영지로는 후난 성(湖南省)이 주어졌다. 1291년 12월 17일, 쿠빌라이 카안의 명으로 쌀을 하사받아 굶주린 백성(饑民)을 구제하였다.

1293년 7월부터 황태손인 조카 테무르를 따라 북쪽 국경(北邊)의 방어를 맡았다. 1294년 1월 부황 쿠빌라이 카안이 사망하고 그해 5월 테무르가 칸으로 즉위하자(원 성종), 코코추는 단독으로 북방 방어를 책임졌으나 뚜렷한 공적을 세우지는 못했다. 1294년 6월 13일, 원 성종이 왕족들에게 포상할 때 서평왕 오그룩치, 진남왕 토곤, 토곤의 아들 이센테무르와 함께 금 5백 냥, 은 5천 냥, 지폐(鈔) 2천 정(錠), 폐백(幣帛) 각 2백 필을 하사받았다.

1298년 9월 12일, 원 성종의 명으로 제국대장공주 사후 홀로 지내던 고려충렬왕을 위문하고 포도주를 하사했다.[9] 이때 코코추는 평장사 직책으로 좌승(左丞) 합산(哈散, 카산)과 함께 충렬왕에게 "공주께서 세상을 떠난 뒤 왕께서 홀로 무료하게 지내실 것이라 하여 황제께서 포도주를 하사하셨습니다. 또한 저희와 함께 국사(國事)를 의논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전했다.[9] 그해 11월 3일 코코추가 고려를 떠날 때, 충렬왕이 직접 개경의 서문인 선의문(宣義門) 밖까지 나와 전송했다.[10]

1298년 겨울, 카이두 휘하의 두아가 비밀리에 군대를 이끌고 몽골리아로 출병하여 코코추의 군대를 기습 공격했다. 당시 코코추는 연회를 열고 술에 취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진중에서 술주정을 부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습으로 코코추의 군대는 패배했고, 휘하 장수 중 유일하게 분전한 원 성종의 부마 코루쿠츠는 두아에게 사로잡혔다. 이 패배는 코코추의 군사적 명성에 큰 타격을 주었다.[2] 성종 테무르의 처벌을 두려워한 코코추는 여러 차례의 소환 명령에도 응하지 않다가, 성종이 차가타이의 손자 부리의 아들인 아지키를 보낸 후에야 비로소 조정에 출석했다.[2]

코코추의 이러한 군사적 실책과 태만은 결국 1299년 원 성종 테무르 칸이 그를 대 카이두 전쟁의 사령관 직에서 해임하는 결정으로 이어졌다. 후임 사령관으로는 퀼리그 칸 카이산(훗날 원 무종)이 임명되었다.[3]

2. 4. 북변 사령관 해임 이후

1307년 1월 원 성종 테무르 칸이 사망하자, 불루간 대카툰 등은 안서왕 아난다를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이에 반감을 품은 중서우승상 하라하슨 등은 다르마발라의 아들들인 퀼리그 칸 카이산과 아유르바르와다를 지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1307년 3월 3일, 코코추는 아유르바르와다가 주도한 정변에 참여하여 대도의 황궁을 점령하는 데 협력했고, 불루간 대카툰 세력에 대한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데 기여했다. 아구타이 등이 처형된 후, 코코추는 야쿠두(牙忽都) 등과 함께 今罪人斯得 太子實世祖之孫 宜早正天位|금일 죄인들은 처벌되었으며 세조의 자손이 태자가 되었다. 이로서 마땅히 천하가 바로 섰다중국어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후 코코추와 야쿠두 등은 아유르바르와다에게 퀼리그 칸 카이산을 의식하지 말고 칸으로 즉위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아유르바르와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형 퀼리그 칸 카이산에게 칸의 지위를 양보했다.[4] 6월 21일 퀼리그 칸 카이산이 칸(원 무종)으로 즉위한 후, 그는 코코추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1307년 6월 26일 코코추의 익대지공(翊戴之功, 즉위를 도운 공)을 인정하여, 기존의 영원왕(寧遠王)에서 더 높은 등급인 영왕(寧王)으로 진봉하고 사자 문양의 금인(金印) 도장을 하사했다.[5] 또한 식읍으로 청주(清州)를 받았다.

그러나 지대 3년(1310년), 코코추는 퀼리그 칸 카이산에 대한 반역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코코추는 처형은 면했으나, 그의 아내 올제이는 사사되었다.[6] 퀼리그 칸 카이산이 사망하고 아유르바르와다가 칸(원 인종)으로 즉위한 후에도 코코추는 한동안 생존해 있었으나[7], 황경 2년(1313년)에 사망했다.[8]

2. 5. 생애 후반

1310년 킵차크 한국 또는 고려로 유배된 이후, 무종이 사망하고 원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코코추는 오랫동안 석방되지 못했다.

1312년, 태부 개부의동삼사 테케(鐵哥)가 원 인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는 세조 쿠빌라이 카안의 황자인 영왕(코코추)이 아직 살아있으니 마땅히 귀환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 인종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이듬해 석방을 결정했다. 1312년 8월, 석방되기 직전에 원 인종은 코코추에게 금으로 만든 허리띠(금속대, 金束帯) 1개와 은 150냥, 원나라의 지폐인 총(鈔) 2백 정(錠)을 하사했다.

1313년 2월, 마침내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던 중 2월 11일(음력 1월 16일)에 사망하였다. 음력 2월에 사망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코코추가 사망한 정확한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3. 사후

코코추 사후, 그의 지위와 후난 성 영지는 아들인 세체크투薛徹禿|xuēchètū중국어가 물려받았다. 세체크투는 1320년에 영원왕(永元王)으로 봉해졌으며, 1322년에는 다시 영왕(營王)으로 진봉되었다. 코코추가 어디에 묻혔는지(장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시호를 받았는지 여부도 확인되지 않는다.

4. 기타

(내용 없음)

4. 1. 동명이인

코코추의 친척 중에도 동명이인이 있었다. 그는 코코추의 종증조부 벨구테이의 증손자로, 벨구테이의 차남 구운부카의 손자이자 메르기타이의 넷째 아들이다. 이름은 코코추(闊闊出)이며, 정왕(定王) 가문을 형성하였다.

또한, 탕구트족 출신 관료 중에도 코코추와 동명이인이 있었으며,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다.

5. 가계

아버지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카안이고, 어머니는 후슈친 황후 허루친씨(烏式眞 皇后 許兀愼氏)이다. 페르시아어 사서에는 쿠케치(كوكچو|쿠케치fa)로 표기된다.

중국의 역사서인 원사의 종실세계표에는 코코추의 생모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페르시아계 사서인 집사(集史)에 따르면, 그의 생모는 칭기즈칸의 공신 중 한 명인 기양왕(淇陽王) 보로클(博爾忽 또는 孛羅忽勒)의 딸인 후슈친 황후 허루친씨(هوشیجین|후슈친fa)라고 한다. 후슈친 황후는 몽골 제국의 개국공신인 보로클의 딸이었으나, 보로클의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났는지 혹은 첩실에게서 태어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후슈친은 쿠빌라이 카안의 여러 황후(카툰)들 가운데 비교적 낮은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사에 의하면 코코추에게는 동복 친형으로 아이아치 황자가 있었다. 또한, 진남왕 토곤 역시 그의 동복 형제라는 설이 전해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 충렬왕의 왕비였던 제국대장공주(쿠루투크 또는 케루미슈로 추정되기도 함) 역시 그의 동복 누이였다는 설도 존재한다.

코코추의 어린 시절이나 소년 시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원사나 원사연의 등 관련 사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참조

[1] 서적 杉山2004
[2] 서적 松田1982
[3] 간행물 元史 巻22武宗本紀1
[4] 간행물 元史 巻24仁宗本紀1
[5] 간행물 元史 巻22武宗本紀1
[6] 간행물 元史 巻23武宗本紀2
[7] 간행물 元史 巻24仁宗本紀1
[8] 간행물 元史 巻24仁宗本紀1
[9] 간행물 고려사 세가 권제31 1298-09-12
[10] 간행물 고려사 卷三十一/世家 129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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