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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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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로클은 1177년 또는 1178년 경 칭기즈 칸의 측근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 인물이다. 그는 칭기즈 칸의 개인적인 동반자로서 칭기즈 칸의 절친한 친구 보오르추 다음가는 최고위급 뇌케르가 되었으며, 1203년 칼라칼지드 모래 전투에서 오고타이 칸의 생명을 구한 공로로 1206년 쿠릴타이에서 큰 영예를 얻었다. 보오르추, 무칼리와 함께 몽골 우익의 병력을 지휘했으며, 칭기즈 칸의 신뢰를 받아 카사르를 옹호하는 데 기여했다. 1217년 투메드 부족 정벌 중 매복 공격을 받아 사망했지만,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몽골 제국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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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클
정보
몽골 제국
몽골 제국
한국어 이름박이홀
몽골어 이름ᠪᠦᠷᠭᠦᠳ
몽골어 (키릴 문자)Борохул
로마자 표기Borokul
출생ca. 1162년
사망알 수 없음
활동 시기12세기 후반 - 13세기 초반
직업장군
복무몽골 제국
계급천호장
소속보르지긴 가문
케식
배우자알 수 없음
자녀코코추, 일치다이, 토다
부모알 수 없음
친척훌란
종교텡그리 신앙
칭호바가투르
작위천호장
다른 이름박이홀(博爾忽)
설명칭기즈 칸의 장군이자 동반자

2. 생애와 경력

보로클은 1177년 또는 1178년경 템무진(후의 칭기즈 칸)이 아내 보르테와 결혼한 직후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1] ''몽골 비사''에 따르면, 보로클은 원래 주르킨 부족의 위신 혈통 출신으로, 몽골의 주요 장군 제베에게 구출된 후 템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에게 유기 아동으로 길러졌다.

1197년경 테무진이 주르킨 씨족의 당주 사차 베키, 타이추 형제를 멸망시켰을 때 항복해 온 자라이르 부족의 수장들 중 제브케라는 인물이 주르킨 씨족 막영지에서 유아였던 보로클을 데려왔다. 제브케는 보로클을 테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에게 바쳤고, 보로클은 메르키트 부족에게서 얻은 구추, 타이치우트 부를 공격했을 때 얻은 코코추, 타타르 부족을 멸망시켰을 때 얻은 시기 쿠투쿠 등 다른 유아들과 함께 호엘룬 밑에서 양육되었다. 하지만 폴 펠리오는 보로클이 주르킨 씨족에서 얻어졌다는 이야기는 확실하지만, 이전에 있었던 일이 잘못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템무진의 ''뇌케르''(개인적인 동반자)로서 보로클은 템무진의 절친한 친구 보오르추 다음가는 최고위급 ''뇌케르''가 되었다. 1203년 칼라칼지드 모래 전투에서 템무진은 동맹 토그릴에게 배신당해 크게 패하고 후퇴했다. 이때 템무진의 17세 아들 오고타이가 목에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는데, 보로클은 밤새도록 오고타이의 상처에서 혈전을 빨아내며 그의 생명을 구했다. ''몽골 비사''에는 보오르추가 도착했을 때 "보로클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

1206년 5월, 템무진이 소집한 쿠릴타이에서 보로클은 큰 영예를 얻었다. 보오르추와 무칼리 다음으로 높은 보상과 면제를 받았으며, 사형 면제와 술 시중꾼, 집사와 같은 지위를 얻었다.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의 ''자미 알 타와리크''에 따르면, 보로클과 보오르추는 칭기즈 칸(템무진)에게 무칼리, 제베, 수부타이 등 다른 장군들과 달리 구체적인 군사 명령을 받지 않을 정도로 존경받았다고 한다.[1] 두 사람은 무칼리, 칠라운과 함께 몽골 제국 근위대 ''케식''의 명목상 지휘권을 공유했다.[1] 칭기즈 칸은 이들 넷을 자신의 "군마"로 칭하고, "사냥개"(수부타이, 제베, 젤메, 쿠빌라이 노욘) 및 동료 유기 아동 시기 쿠투쿠와 함께 칸의 "팔라딘", 즉 내부 위원회를 구성했다.[1]

보로클은 보오르추와 함께 몽골 우익 38,000명의 병력을 지휘했으며, 칭기즈 칸의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로서 무칼리와 함께 칭기즈 칸의 동생 카사르가 무당 코코추와 분쟁을 벌일 때 카사르를 옹호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

''집사'' 후신 부족지에 따르면, 보로클은 칭기스 칸을 섬긴 초기에 칭기스 칸의 시위 집단인 케식의 일원으로서 대선직에 임명되었고,[1] 이후 케시크의 우두머리인 케시크투가 되었으며, 동시에 만호장도 되었다고 한다. 또한 우익군의 부사령관으로 부임했다고 추정된다.

1217년, 보로클은 북부 투메드 부족을 정벌하는 원정에 나섰다. 원정 초기에 보로클은 몽골 장군 쿠투카 베키를 사로잡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주력 부대와 떨어져 있던 보로클은 투메드 정찰병에게 기습을 당해 전사했다. 보로클은 출정하기 전에 이번 원정에서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강한 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분노한 칭기즈 칸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투메드족을 응징하려 했으나, 무칼리보오르추가 간곡히 만류하여 뜻을 접었다. 대신 칭기즈 칸은 맏아들 조치와 장군 도르베이 도크신을 파견하여 1217년부터 1218년까지 이어진 혹독한 겨울 작전 끝에 투메드 부족을 굴복시켰다. 보로클의 복수를 위해 100명의 투메드 부족민들이 희생되었다.

칭기즈 칸은 보로클의 자녀들을 거두어 보살폈고, 그들에게 영예를 내리고 앞날을 챙겨주었다. 보로클이 속했던 위신 씨족은 몽골 제국에서 유력한 귀족 가문으로 성장했다. 그의 가문은 쿠빌라이 칸 치하에서도 ''케식''의 명목상 지휘권을 계속 보유했으며, 보로클의 후손 중 한 명인 오치체르는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이 직위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2. 1. 칭기즈 칸의 측근

보로클은 1177년 또는 1178년경 템무진(후의 칭기즈 칸)이 아내 보르테와 결혼한 직후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1] ''몽골 비사''에 따르면, 보로클은 원래 주르킨 부족의 위신 혈통 출신으로, 몽골의 주요 장군 제베에게 구출된 후 템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에게 유기 아동으로 길러졌다. 템무진의 ''뇌케르''(개인적인 동반자)로서 보로클은 새로운 군주 아래에서 번성하여 템무진의 절친한 친구 보오르추 다음으로 최고위급 ''뇌케르''가 되었다.

오렌지색 옷과 뾰족한 녹색 모자를 쓴 몽골 남자의 초상화; 그의 콧수염과 수염은 길고 가늘다.
1203년 칼라칼지드 모래 전투에서 보로클이 구한 오고타이원나라 초상화


1203년 칼라칼지드 모래 전투에서 템무진은 동맹 토그릴에게 배신당해 큰 패배를 겪고 후퇴해야 했다. 이때 보로클은 목에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은 템무진의 17세 아들 오고타이의 생명을 구했다. 보로클은 밤새도록 오고타이의 상처에서 혈전을 빨아내며 템무진의 진영으로 이동했다. ''몽골 비사''에는 보오르추가 도착했을 때 "보로클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공로 등으로 보로클은 1206년 5월 템무진이 소집한 쿠릴타이에서 큰 영예를 얻었다. 보오르추와 무칼리 다음가는 보상과 면제(사형 면제 포함)를 받았으며, 술 시중꾼과 집사와 같은 지위도 얻었다.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는 ''자미 알 타와리크''에서 보로클과 보오르추가 칭기즈 칸으로부터 무칼리, 제베, 수부타이 등 다른 장군들과 달리 구체적인 군사 명령을 받지 않을 정도로 존경받았다고 기록했다. 두 사람은 또한 무칼리와 칠라운과 함께 몽골 제국 근위대인 ''케식''의 명목상 지휘권을 공유했다. 칭기즈 칸은 이 네 명을 자신의 "군마"로 칭하고, "사냥개"(수부타이, 제베, 젤메, Khubilai (guerrier)|쿠빌라이 노욘프랑스어)와 동료 유기 아동 시기 쿠투쿠와 함께 칸의 "팔라딘", 즉 내부 위원회를 구성했다.

보로클은 보오르추와 함께 몽골 우익의 38,000명의 병력을 지휘했으며, 칭기즈 칸의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로서 그들과 무칼리는 칭기즈 칸의 동생 카사르가 무당 코코추와 분쟁을 벌이는 동안 카사르를 옹호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1197년경 테무진이 주르킨 씨족의 당주 사차 베키, 타이추 형제를 멸망시켰을 때, 항복해 온 자라이르 부족의 수장들 중 제브케라는 인물이 주르킨 씨족의 막영지에서 유아였던 보로클을 데려왔다고 한다. 제브케는 보로클을 테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에게 바쳤고, 보로클은 메르키트 부족에서 얻은 구추, 타이치우트 부를 공격했을 때 얻은 코코추, 타타르 부족을 멸망시켰을 때 얻은 시기 쿠투쿠 등 다른 유아들과 함께 호엘룬 밑에서 양육되었다.

성장하면서 칭기스 칸의 측근으로 활약했으며, 나이만 부에 습격당한 케레이트 부를 위해 원군을 이끌고 활약했다. 케레이트 부와 대립하여 결전에 이르렀을 때 중상을 입은 오고타이를 구출해 내고, 타타르 부에 아내가 사로잡힌 툴루이를 구출했다.

''집사'' 후신 부족지에 따르면, 보로클은 칭기스 칸을 섬긴 초기에 칭기스 칸의 시위 집단인 케시크의 일원이자 대선직에 임명되었다.[1] 그 후 케시크의 우두머리인 케시크투가 되었고, 동시에 만호장도 되었다고 한다. 우익의 지휘관이 되었으며, ''집사'' 칭기스 칸 기의 칭기스 칸 휘하의 제군 편성 목록 중 우익군 총사령관 보오르추에 준하는 부사령관으로 부임했다고 생각된다.

1206년 오논 강 하구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몽골 제국이 성립되었을 때 88명의 천호장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고, 다르한의 특권이 주어졌다.

2. 2. 칼라칼지드 모래 전투와 오고타이 구출



1203년 칼라칼지드 모래 전투에서 템무진(후의 칭기즈 칸)은 동맹이었던 토그릴에게 배신당해 크게 패했다. 이 전투에서 템무진의 아들 오고타이(당시 17세)는 목에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보로클은 밤새도록 오고타이의 상처에서 혈전을 빨아내며 그의 생명을 구했다. 몽골 비사에는 보오르추가 도착했을 때 "보로클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

2. 3. 몽골 제국 건국 초기 활동

보로클은 1177년 또는 1178년경 템무진(칭기즈 칸)이 보르테와 결혼한 직후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1] ''몽골 비사''에 따르면, 보로클은 주르킨 부족의 위신 혈통 출신으로, 몽골의 주요 장군 제베에게 구출된 후 템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에게 유기 아동으로 길러졌다. 템무진의 ''뇌케르''(개인적인 동반자)로서 보로클은 템무진의 절친한 친구 보오르추 다음가는 최고위급 ''뇌케르''가 되었다.[1]

1203년 칼라칼지드 모래 전투에서 템무진은 동맹 토그릴에게 배신당해 크게 패하고 후퇴했다. 이때 템무진의 17세 아들 오고타이가 목에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는데, 보로클은 밤새도록 오고타이의 상처에서 혈전을 빨아내며 그의 생명을 구했다. ''몽골 비사''에는 보오르추가 도착했을 때 "보로클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

1206년 5월, 템무진이 소집한 쿠릴타이에서 보로클은 큰 영예를 얻었다. 보오르추와 무칼리 다음으로 높은 보상과 면제를 받았으며, 사형 면제와 술 시중꾼, 집사와 같은 지위를 얻었다.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의 ''자미 알 타와리크''에 따르면, 보로클과 보오르추는 칭기즈 칸(템무진)에게 무칼리, 제베, 수부타이 등 다른 장군들과 달리 구체적인 군사 명령을 받지 않을 정도로 존경받았다고 한다.[1] 두 사람은 무칼리, 칠라운과 함께 몽골 제국 근위대 ''케식''의 명목상 지휘권을 공유했다.[1] 칭기즈 칸은 이들 넷을 자신의 "군마"로 칭하고, "사냥개"(수부타이, 제베, 젤메, Khubilai (guerrier)|쿠빌라이프랑스어) 및 동료 유기 아동 시기 쿠투쿠와 함께 칸의 "팔라딘", 즉 내부 위원회를 구성했다.[1]

보로클은 보오르추와 함께 몽골 우익 38,000명의 병력을 지휘했으며, 칭기즈 칸의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로서 무칼리와 함께 칭기즈 칸의 동생 카사르가 무당 코코추와 분쟁을 벌일 때 카사르를 옹호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

''몽골비사''에 따르면, 1197년경 테무진(후의 칭기스 칸)이 주르킨 씨족의 당주 사차 베키, 타이추 형제를 멸망시켰을 때 항복해 온 자라이르 부족의 수장들 중 제브케라는 인물이 주르킨 씨족 막영지에서 유아였던 보로클을 데려왔다고 한다. 제브케는 보로클을 테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에게 바쳤고, 보로클은 메르키트 부족에서 얻은 구추, 타이치우트 부를 공격했을 때 얻은 코코추, 타타르 부족을 멸망시켰을 때 얻은 시기 쿠투쿠 등 다른 유아들과 함께 호엘룬 밑에서 양육되었다.[1] 하지만 폴 펠리오는 보로클이 주르킨 씨족에서 얻어졌다는 이야기는 확실하지만, 이전에 있었던 일이 잘못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장한 보로클은 칭기스 칸의 측근으로 활약하며 나이만 부에 습격당한 케레이트 부를 위해 원군을 이끌었고, 케레이트 부와 결전을 벌일 때 중상을 입은 오고타이를 구출하고, 타타르 부에 사로잡힌 툴루이의 아내를 구출하기도 했다.

''집사'' 후신 부족지에 따르면, 보로클은 칭기스 칸을 섬긴 초기에 칭기스 칸의 시위 집단인 케시크의 일원으로서 대선직에 임명되었고,[1] 이후 케시크의 우두머리인 케시크투가 되었으며, 동시에 만호장도 되었다고 한다. 또한 우익군의 부사령관으로 부임했다고 추정된다.

1206년 오논 강 하구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몽골 제국이 성립되었을 때 보로클은 88명의 천호장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고, 다르한의 특권이 주어졌다.

2. 4. 투메드 부족 정벌과 죽음

1217년, 보로클은 북부 투메드 부족을 정벌하는 원정에 나섰다. 원정 초기에 보로클은 몽골 장군 쿠투카 베키를 사로잡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주력 부대와 떨어져 있던 보로클은 투메드 정찰병에게 기습을 당해 전사했다.

보로클은 출정하기 전에 이번 원정에서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강한 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분노한 칭기즈 칸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투메드족을 응징하려 했으나, 무칼리보오르추가 간곡히 만류하여 뜻을 접었다. 대신 칭기즈 칸은 맏아들 조치와 장군 도르베이 도크신을 파견하여 1217년부터 1218년까지 이어진 혹독한 겨울 작전 끝에 투메드 부족을 굴복시켰다. 보로클의 복수를 위해 100명의 투메드 부족민들이 희생되었다.

칭기즈 칸은 보로클의 자녀들을 거두어 보살폈고, 그들에게 영예를 내리고 앞날을 챙겨주었다. 보로클이 속했던 위신 씨족은 몽골 제국에서 유력한 귀족 가문으로 성장했다. 그의 가문은 쿠빌라이 칸 치하에서도 ''케식''의 명목상 지휘권을 계속 보유했으며, 보로클의 후손 중 한 명인 오치체르는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이 직위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3. 가계와 계승

보로클은 1177년 또는 1178년경 테무진이 아내 보르테와 결혼한 직후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1] ''몽골 비사''에 따르면, 보로클은 원래 주르킨 부족의 위신 혈통 출신으로, 제베에게 구출된 후 테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에게 유기 아동으로 길러졌다.

테무진의 ''뇌케르''(개인적인 동반자)로서 보로클은 보오르추 다음가는 최고위급 ''뇌케르''가 되었다.[1] 칭기즈 칸이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많은 작전을 이끌었지만, 보로클이 가장 큰 찬사를 받은 것은 1203년 칼라칼지드 모래 전투 직후였다.

토그릴에게 배신당한 테무진은 칼라칼지드 모래에서 패배하고 후퇴했는데, 이때 그의 17세 아들 오고타이가 목에 화살을 맞아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 보로클은 밤새 상처에서 혈전을 빨아들여 오고타이의 생명을 구했다. ''몽골 비사''에는 보오르추가 도착했을 때 "보로클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공로로 보로클은 1206년 5월 테무진이 소집한 쿠릴타이에서 큰 영예를 얻었다. 그는 보오르추무칼리 다음으로 높은 보상과 면제를 받았는데, 여기에는 사형 면제와 술 시중꾼, 집사와 같은 지위가 포함되었다.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는 ''자미 알 타와리크''에서 보로클과 보오르추가 칭기즈 칸으로부터 무칼리, 제베, 수부타이와 같은 다른 장군들과 달리 구체적인 군사 명령을 받지 않을 정도로 존경받았다고 기록했다. 두 사람은 또한 무칼리, 칠라운과 함께 몽골 제국 근위대인 ''케식''의 명목상 지휘권을 공유했다.

칭기즈 칸은 이 네 명을 자신의 "군마"로 지명했으며, 그의 "사냥개"(수부타이, 제베, 젤메, 쿠빌라이 노욘)와 동료 유기 아동 시기 쿠투쿠와 함께 칸의 "팔라딘", 즉 내부 위원회를 형성했다. 보로클은 보오르추와 함께 몽골 우익의 38,000명의 병력을 지휘했으며, 칸의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로서 그들과 무칼리칭기즈 칸의 동생 카사르가 무당 코코추와 분쟁을 벌이는 동안 카사르를 옹호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217년, 보로클은 북부 투메드 부족을 상대로 원정을 지휘하던 중 투메드 정찰병에 의해 매복 공격을 받아 죽었다.

3. 1. 후손

칭기즈 칸은 보로클의 자녀들의 복지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들에게 영예를 수여하고 그들의 경력에 관심을 기울였다.[2] 보로클이 속한 위신 씨족은 몽골 제국에서 강력한 귀족 가문이 되었다.[3] 그의 가족은 쿠빌라이 칸 아래서도 계속해서 ''케식''의 명목상 지휘권을 받았으며, 보로클의 후손 중 한 명인 오치체르는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이 직위에서 엄청난 개인적 부를 축적했다.[4]

보로클의 자손은 그 공적에 의해 제1 케식(怯薛)의 숙위장을 세습했다.

원사』 권119 보로클전에 따르면 토곤(탈환)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가 아버지의 직권을 이었다고 한다. 이 토곤의 아들에는 시레문(실리문), 타가차르(탑찰아)가 있었으며, 이 형제의 자손은 쿠빌라이 시대 이후에도 대대로 만호장이 되는 등 세습 공신으로 번성했다. 특히 시레문의 아들 오치체르(월적찰아)는 쿠빌라이, 테무르를 섬겼으며, 녹군국중사, 화림(카라코룸) 행성 좌승상이 되었다. 몽골 고원 주둔 시의 카이산에게 근시하여 그를 섬겼고, 태사, 화림 행성 우승상 더 나아가 기양왕에 봉해졌으며, 아버지 토곤도 기양왕으로 추봉되었다.

타가차르의 아들에는 베르그테이(별리호대), 순두타이(송도대)가 있었고, 베르그테이는 몽케 시대에 남송 원정 때 몽골-한군 4만호를 이끌었으나 전사했으며, 순두타이도 몽골군 1만호를 이끌고 쿠빌라이의 남송 원정에 참여하여 상양, 번성의 포위에 참가했으며, 더 나아가 악주, 악주, 한양 등지로 진격하여 무공을 세웠다고 한다.

집사』에 따르면 보로클의 친족에 후시타이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하며, 이 인물은 오르다 울루스를 섬긴 케테의 별명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한, 『집사』에는 보로클의 사후 그 만인대장직을 계승한 것은 주부쿨 쿠빌라이(jūbūkūr qūbīlāī)라는 아들이었다고 하지만, 한문 사료 측이 기록한 토곤, 시레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쿠빌라이의 황후 중 한 명으로 황자 아야치, 코코추의 생모였던 후우신 하툰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녀는 보로클의 딸이었다고 한다.

  • '''보로쿨 노얀'''(Boroqul >博爾忽/bóĕrhū, بورقول نويان/būrqūl nūyān)
  • *'''천인대장 토곤'''(Toγonmn >脱歓/tuōhuān,جوبوکور قوبیلایjūbūkūr qūbīlāī?)
  • **시레문(Širemün >失里門/shīlǐmén)

'''기양왕 오치체르 노얀'''(Öčičer >月赤察児/yuèchìcháér, اوچاچار نويان/ūchāchār nūyān)
*'''기양왕 타라카이'''(Taraqai >塔剌海/tǎlàhǎi طرقاي جنکسانک/ṭaraqāī chīnksānk)
*지추밀원사 마랄 (Maral >馬剌/mǎlà)
**테무르 에부겐 (Temür ebügen >鉄木児也不干/tiěmùér yěbùgān)
**'''기양왕 올제이 테무르'''(Öljei temür >完者鉄木児/wánzhě tiěmùér)
*'''기양왕 태사 아스칸''' (Asqan/Torčiyan/Waidu >阿思罕/āsīhǎn 脱児赤顔/tuōérchìyán 𠇗頭/wāitóu ويتو جنکسانک/wāītū chīnksānk)
*'''기양왕 에센 테무르'''(Esen temür>也先鉄木児/yĕxiāntiĕmùér)

  • *'''행성 병마도원수 타가차르'''(Taγačarmn >塔察児/tǎcháér)
  • **행성 병마도원수 베르구테이 (Belgütei >別里虎䚟/biélǐhŭdǎi)

'''몽골군 만호 미리차르''' (Miričar >密里察児/mìlǐcháér)
*강서도도원수 알쿠이 (Alqui >阿魯灰/ālŭhuī)
**이키레테이 (Ikiretei >亦乞列歹/yìqǐlièdǎi)
*'''몽골군 만호 베르케 부카''' (Berke buqa >別里閣不花/biélǐgé bùhuā)
**복도만호 시리베키 (Siri begi >昔里別吉/xīlǐbiéjí)
***만호 카사르 (Qasar >合撒児/hésāér)
몽골군 만호 순두타이 (Sondutai >宋都䚟/sòngdōudǎi)

참조

[1] 서적 志茂2013
[2] 서적 赤坂2005
[3] 서적 志茂2013
[4] 서적 村上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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