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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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테루이는 일본 사료에 '아테루이' 또는 '아테리이'로 표기되며, 현대에는 일반적으로 아테루이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에미시 군사 지도자로, 789년 스부세 전투에서 조정군을 상대로 승리했으나, 802년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에게 항복한 후 가와치국에서 처형되었다. 아테루이는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사후 복권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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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루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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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아테루이 |
로마자 표기 | Aterui |
일본어 표기 | アテルイ |
한자 표기 | 阿弖流爲 |
출생 년도 | 750년경 |
사망 년도 | 802년 |
사망 장소 | 헤이안쿄 |
주요 활동 | |
직업 | 에미시의 지도자 |
활동 시기 | 8세기 후반 |
주요 활동 |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 초기의 일본 조정에 대항 |
연관 전투 | 이사와 성 전투, 기타카미 강 전투 |
추가 정보 | |
특징 | 용맹한 전사 뛰어난 전략가 에미시 부족의 지도자 |
평가 |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 강인한 지도력과 용기로 유명 에미시 부족의 저항 정신을 상징 |
기타 | 아테루이를 기리는 사당과 기념물이 세워짐 아테루이를 주제로 한 영화, 소설, 연극 등 다양한 작품이 제작됨 일본의 지방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물 |
2. 한자 표기와 읽는 법
일본 사료에는 '아테루이(阿弖流爲)', '아테리이(阿弖利爲)'라는 표기가 나타나며, 이를 '아테루이(あてるい)' 또는 '아테리이(あてりい)'로 읽는다. 정확한 독음은 확실하지 않지만, 현대에는 일반적으로 아테루이(アテルイ)라고 부른다.
성씨인 “大墓公”에 대해서는 “타모노키미”라고 읽는 설이 유력했다. 그러나 “타모”에 “大墓”를 붙이는 것이 부자연스럽다는 이유로, “大墓”를 “큰 무덤”으로 해석하여 각츠카 고분과 연관지어 “오오츠카노키미”, “오오하카노키미” 등으로 읽는 견해도 주목받았다. 하지만 “公” 성씨는 와도 3년(710년) 에미 족장들에게 본거지 지명에 “君”이라는 관위를 붙인 성씨를 부여하고, 덴표호지 3년(759년)에 “君”을 “公”으로 변경한 것에서 유래하므로, “大墓公”을 훈독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름의 경우 “阿弖流為”는 “아테루이”, “阿弖利為”는 “아테리이”라고 읽으며, 이전에는 “阿弖流為=아테루이”로 여겨졌다.
2. 1. 이름 표기
일본 사료에는 '아테루이(阿弖流爲)' 또는 '아테리이(阿弖利爲)'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이를 대체로 '아테루이(あてるい)' 또는 '아테리이(あてりい)'로 읽는다. 정확한 독음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대에는 통상 아테루이(アテルイ)라고 불리고 있다.
대묘공 아테루이(大墓公阿弖流爲) 또는 대묘공 아테리이(大墓公阿弖利爲)는 고대 일본 율령 국가에서 "수륙 만경(水陸万頃)에 이르러, 왜구(蝦夷)가 생존한다"(속일본기 연력 8년 7월 정사(丁巳)(17일) 조)[1], "적노(賊奴)의 깊은 지역이다"(속일본기 연력 8년 6월 경진(庚辰)(9일) 조)[2]라고 불린, 현재 이가와 이북의 키타카미가와 유역 평야부가 되는 이와이군·에사시군·다자와군 일대(이와테현 남부)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다자와의 에미지(蝦夷) 족장이다.
에미지 사회가 기록한 사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고대 일본 율령 국가가 편찬한 육국사는 그의 이름을 네 번 기록하고 있다. 그 내역은 모두 구자체로, 연력 8년 스부시 전투 기사에 "아테루이(阿弖流爲)"(속일본기 연력 8년 6월 갑술(甲戌)(3일) 조)[3]로 한 번, 연력 21년 항복 기사에 "대묘공 아테리이(大墓公阿弖利爲)"(류주국사 연력 21년 4월 경자(庚子)(15일) 조)[4],[5],[6]로 두 번, "대묘공(大墓公)"(일본기략 연력 21년 가을 7월 갑자(甲子)(10일) 조)[7]로 한 번 기록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본래 이름은 "대묘공 아테루이(大墓公阿弖流爲)" 또는 "대묘공 아테리이(大墓公阿弖利爲)"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에 대해서는, 조정으로부터 주어진 "공(公)"의 성이 붙어있다[6]。사카노우에 타무라마로 휘하에 귀순한 직후의 기사이므로, 대묘공의 성은 항복 후에 율령 국가로부터 받았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가와치국(河内国) 스기야마(椙山)에서 참수된 점, 율령 국가가 귀복한 인물에게 굳이 성을 주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 국가에 따른 에미지 족장이 이반했을 때 성을 박탈당한 예가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대묘공의 성은 조정군과 싸운 연력 8년 이전에 율령 국가로부터 받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 또는 대묘공 일족이 과거 율령 국가와 상당히 좋은 정치적 관계를 쌓았음을 보여준다.
이름에 대해서는, 『속일본기』는 "아테루이(阿弖流爲)", 『일본후기』에 근거한 『일본기략』『류주국사』는 "아테리이(阿弖利爲)"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정식 한자 표기가 "아테루이(阿弖流爲)"인지 "아테리이(阿弖利爲)"인지는 불명확하다. 또 본인이 어떻게 한자로 표현했는지도 불명확하다. 다카하시 타카시는 정사의 표기도 의심스럽고, 정부 측이 그의 이름의 음을 듣고 적당히 한자로 표기했기 때문에 두 가지 표기가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https://researchmap.jp/read0055375 鈴木拓也|스즈키 타쿠야]는 이어(夷語)의 음역 문제이며, 실제 발음은 "아테루이(アテルイ)"와 "아테리이(アテリイ)"의 중간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성씨는 종래 “大墓公”을 “타모노키미”라고 읽는 설이 유력했다. 한편으로는 “타모”에 “大墓”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이유로, “大墓”를 문자 그대로 “큰 무덤”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각츠카 고분의 매장자 일족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율령 국가에 인정받았기 때문에 대묘공의 성씨가 주어진 것이 아니냐는 추측에서 “大墓公”을 일본어로 “오오츠카노키미”, “오오하카노키미” 등으로 읽는 견해가 주목받았다. 그러나 “公” 성씨는 와도 3년 4월 21일(율리우스력 710년5월 23일)에 에미 족장들에게 본거지(본관지)의 지명에 “君”의 관위를 붙인 성씨를 주어 편호에 준하는 대우를 보장했고[8], 덴표호지 3년 10월 8일(율리우스력 759년11월 2일)에 제성의 “君”자가 “公”자로 바뀐 것을 받아 에미 족장들의 “君” 성씨도 “公” 성씨로 바뀐 데서 유래하기 때문에[9], 원래 “大墓”라는 글자로 나타내는 것은 에미 거주 지역의 지명이므로, “大墓公”의 해석에 일본어로 의미를 가진 훈독은 피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이름은 “阿弖流為”를 “아테루이”, “阿弖利為”를 “아테리이”라고 읽고, 종래 “阿弖流為=아테루이”라고 여겨져 왔다.
2. 2. 성씨와 본관지
아테루이의 성(姓)은 조정에서 부여한 '공(公)'이라는 성이 붙어있다.[10] 사카노우에 타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휘하에 귀순한 직후의 기사이므로, 대묘공의 성은 항복 후에 율령 국가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10] 그러나 가와치국(河内国) 스기야마(椙山)에서 참수된 것을 보면, 율령 국가가 귀복한 인물에게 굳이 성을 주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국가에 따른 에미지 족장이 이반했을 때 성을 박탈당한 예도 몇 가지 보이기 때문에, 대묘공의 성은 조정군과 싸운 연력 8년 이전에 율령 국가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있다.[10] 어느 쪽이든 아테루이 또는 대묘공 일족이 과거에는 율령 국가와 상당히 좋은 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10]이름에 대해서는, 『속일본기』는 "아테루이(阿弖流爲)", 『일본후기』에 근거한 『일본기략』『류주국사』는 "아테리이(阿弖利爲)"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정식 한자 표기가 "아테루이(阿弖流爲)"인지 "아테리이(阿떼利爲)"인지는 불명이다.[3][11] 또 본인이 어떻게 한자로 표현했는지도 불명이다.[5] 다카하시 타카시는 정사의 표기도 의심스럽고, 정부측이 그의 이름의 음을 듣고 적당히 한자로 표기했기 때문에 두 가지 표기가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있다.[5] [https://researchmap.jp/read0055375 鈴木拓也|스즈키 타쿠야]는 이른바 이어(夷語)의 음역 문제이며, 실제 발음은 "아테루이(アテルイ)"와 "아테리이(アテリイ)"의 중간일 것이라고 하고 있다.[11]
성씨는 종래 “大墓公”을 “타모노키미”라고 읽는 설이 유력했다.[11] 한편으로는 “타모”에 “大墓”의 글자를 붙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이유로, “大墓”를 문자 그대로 “큰 무덤”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이와테현 오슈시 단자와민토다에 있는 각츠카 고분의 매장자 일족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율령 국가에 인정받았기 때문에 대묘공의 성씨가 주어진 것이 아니냐는 추측에서 “大墓公”을 일본어로 “오오츠카노키미”, “오오하카노키미” 등으로 읽는 견해가 주목받았다.[10][11] 그러나 “公” 성씨는 와도 3년 4월 21일(율리우스력 710년5월 23일)에 에미족장들에게 본거지(본관지)의 지명에 “君”의 관위를 붙인 성씨를 주어 편호에 준하는 대우를 보장했고,[12] 덴표호지 3년 10월 8일(율리우스력 759년11월 2일)에 제성의 “君”자가 “公”자로 바뀐 것을 받아 에미족장들의 “君” 성씨도 “公” 성씨로 바뀐 데서 유래하기 때문에,[13] 원래 “大墓”라는 글자로 나타내는 것은 에미 거주 지역의 지명이기 때문에, “大墓公”의 해석에 일본어로 의미를 가진 훈독은 피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14][10]
일반적으로 이름은 “阿弖流為”를 “아테루이”, “阿弖利為”를 “아테리이”라고 읽고, 종래 “阿弖流為=아테루이”라고 여겨져 왔다.[3]
만약 "大墓公(다이보코)"를 "다모노키미"라고 읽는다면, 대묘(大墓)가 가리키는 지명 후보로서, 연력 8년(789년) 정이 중 둥지엎기 전투에서 에미시(蝦夷) 군이 조정군에게 기습 작전을 걸었던 곳이기도 한 오슈시(奥州市) 미즈사와 하타다정(羽田町)의 다모야마(田茂山)를 "대묘(大墓)"의 유칭지로 보고 "다모(たも)"라고 읽는 견해가 있으며, 현재는 다모야마설을 채택하는 연구자가 가장 많다고 히구치(樋口)는 말한다.[10] 또한 이와테현 오슈시 에사시(江刺)에 다이만칸(大萬館)·쇼만칸(小萬館)이라고 불리는 관터가 있는 것과 관련지어 "대묘공(大墓公)"은 "다이만공(大萬公)"의 오기가 아니냐는 설도 있다.[5]
또한 성씨가 아니라 이름이 지명에 유래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여, 아토로이(跡呂井)가 출생지였을 것이라고 관련짓는 경우도 있다.[5]
그러나 대묘공(大墓公), 아테루이(阿弖流為), 아테리이(阿弖利為)의 해석은 모두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며, 이러한 설에 대해 다카하시 타카시는 안이하게 유사한 지명을 찾고 정사의 전사에 따른 오기라고 하는 생각은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다.[5]
3. 사료에 등장하는 아테루이
아테루이라는 이름은 일본 측 사료에 두 번 등장한다. 하나는 아테루이와의 스부세 전투(789년)에서 패배한 조정 측 정동장군(征東將軍) 기노 고사미가 패전 소식을 보고한 《속일본기》이고, 다른 하나는 아테루이의 항복 소식을 전하는 《일본기략》이다.
일본 사서가 에미시의 동향을 간략하게만 기록했기 때문에 아테루이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엔랴쿠 21년(802년)에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에게 항복한 사실을 전한 《일본기략》은 아테루이를 '다모노키미(大墓公)'라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 '다모'는 지명일 가능성이 높으나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키미(公)'는 과거 일본 조정이 아테루이에게 내렸던 지위의 존칭으로 해석하는 추측도 있다.
분명한 것은 아테루이가 에미시의 군사 지도자로서 활약했다는 사실이다. 덴오(天應) 원년(781년) 5월 24일, 조정 측 정동대사(征東大使)였던 후지와라노 오구로마로(藤原小黑麻呂)의 보고서에는 '그 한 사람의 목숨이 적군 천 명의 수급과도 맞먹는 자'로서 「이사세코(伊佐西古)」, 「모로시메(諸絞)」, 「야소시마(八十島)」, 「오토시로(乙代)」의 이름이 언급되고는 있지만 아테루이의 이름은 없다.
아테루이는 현재 이와테현 오슈시(奥州市) 미즈사와 구(水沢区)에 해당하는 히타카미노쿠니(胆沢郡) 이사와(胆沢)에서 태어났다. 787년 수후세 마을 전투 이전의 그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795년의 또 다른 공격도 실패했으며, 801년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 간무 천황으로부터 에미시 정벌 임무를 받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802년 다무라마로는 미치노쿠로 돌아와 이사와 영토 한가운데에 이사와 성(胆沢城)을 건설하고, 4월 15일 에미시 지도자 아테루이와 모레가 500명이 넘는 전사들과 함께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사카노우에 장군은 7월 10일 아테루이와 모레를 수도로 호송했다. 이는 에미시 정벌사의 중요한 순간이었으며,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은 아마도 아테루이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많은 일본인들에게 그는 오랫동안 "악로왕(悪路王, Akuro-ō)"으로 악마화되었다. "Aku"는 "악한"뿐만 아니라 "사나운"과 "강한"을 의미할 수도 있다.
3. 1. 스부세 전투 (789년)
연력 8년(789년) 정벌에서 조정군은 3월 9일 (789년4월 8일) 다가성을 출발했다. 3월 28일 (789년4월 22일) 육로로 진군하던 2~3만 명의 군대는 의가와에 진영을 설치했다.[3] 정동장군 기고사미는 4월 6일 (5월 5일) 보고에서 의가와에 군영을 설치했다고 보고했지만, 이후 30일이 넘도록 전황 보고가 없었다. 관무천황은 연력 8년 5월 12일 (789년6월 9일)에 의가와 영에 오래 머무는 이유와 에미시 측 소식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4]간무 천황의 질책이 오슈에 전달된 것으로 보이는 연력 8년 5월 19일 (789년6월 16일)경, 고사미는 출병 명령을 내렸다. 5월 하순에서 말경, 중군과 후군에서 각각 2000명씩 선발된 총 4000명의 군사가 의가와 영을 출발하여 키타카미가와 본류를 건너 동쪽 강둑을 따라 북상했다. 이들은 아테루이(阿弖流為)의 거주지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에미시 군 약 300명과 교전하였다.[3][4]
에미시 군이 북쪽으로 후퇴하자, 조정군은 이를 추격하며 중간의 마을들을 불태우고 북상하여, 선봉대와 합류 지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스부시(巣伏) 마을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앞에서 약 800명의 에미시 군이 나타나 조정군을 밀어붙이자, 동쪽 산 위에 잠복해 있던 약 400명의 에미시 군이 조정군의 뒤로 돌아와 퇴로를 끊었다. 강과 산에 둘러싸인 좁은 곳에 몰린 조정군은 에미시 군에게 농락당하여 무너졌다.
조정군의 피해는 전투에서 사망자 25명, 화살에 맞은 부상자 245명, 익사자 1036명, 알몸으로 헤엄쳐 살아남은 자 1257명이었다. 단자와(胆沢)의 에미시는 조정에 큰 타격을 입혔다. 전사자는 오슈국 이와키 군(磐城郡)의 별장 조부선리(사후 외종칠위하에서 외종오위하로 승진), 진사 고다 미치나리(高田道成), 오슈국 아이즈 군(会津郡) 사람으로 추정되는 아이즈 소우마로(会津壯麻呂)·야스카도 요시아시(安宿戸吉足)·오오토모 이오츠구(大伴五百継) 등이다. 『속일본기』에는 "적의 우두머리 에미시 아테루이(阿弖流為)가 있는 곳에 이를 때"라고만 기록되어 있어,[3][4] 단자와의 에미시 군은 아테루이(阿弖流為)의 거주지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조정군과 교전했지만, 아테루이(阿弖流為)가 에미시 군을 지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카하시 타카시(高橋崇)는 에미시 측 저항 전선의 중심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3. 2. 조정군의 침공과 아테루이의 항복 (802년)
802년(엔랴쿠 21년) 4월 15일,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무쓰국에서 헤이안쿄로 "다모노키미(大墓公) 아테루이와 이와구노키미(盤具公) 모레가 500여 명의 일족을 이끌고 항복해 왔습니다."라는 보고를 보냈다.[5]夏四月庚子 造陸奧國膽澤城使 田村麻呂等言 夷'''大墓公阿弖利為''' 盤具公母禮等率二種類五百餘人一降。|일본후기 延曆廿一年일본어[6]〇夏四月庚子十五日 造陸奧国胆沢城使 陸奧出羽按察使従三位坂上大宿禰田村麻呂らが、「夷大墓公阿弖利為 ・盤具公母礼らが五百余人の仲間を率いて降服しました」と言上してきた。|일본후기 延曆廿一年일본어아테루이 등의 근거지인 이사와는 이미 정복되었고, 북쪽 에미시 수장 중에는 이미 복속한 자도 있었기 때문에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7]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이사와 성을 쌓은 뒤 이와 같은 성과를 보고했다.[5]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를 따라 헤이안쿄로 향한 아테루이는 802년(엔랴쿠 21년) 7월 10일에 헤이안쿄에 도착하였다.[8]〇甲子十日 造陸奧国胆沢城使坂上田村麻呂が帰京した。夷大墓公阿弖利為と盤具公母礼ら二人を従えていた。|일본후기 延曆廿一年일본어[11][12] 교전 중에 포획한 경우 승리의 증거로서 조정에 바치는 원칙을 적용한 것으로 생각된다.[8]
802년(엔랴쿠 21년) 8월 13일, 아테루이와 모레는 가와치국에서 처형되었다.[13]丁酉斬二 夷'''大墓公阿弖利為''' 盤具公母禮等一、 此二虜者並奧地之賊首也、斬二二虜一時、将軍等申云、此度任レ願返入招二其賊類一、而公卿執論云野性獸心反覆無レ定、儻縁二朝威一、獲二此梟帥一、縱依二申請一、放二還奧地一、所謂養レ虎遺レ患也、即捉二兩虜一、斬二於河内國□山一、|일본후기 延曆廿一年일본어[14]
공경 회의에서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아테루이와 모레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그들에게 현지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했지만, 공경들은 "야생 짐승의 마음으로, 변덕이 심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우연히 조정의 위엄으로 이 흉악한 우두머리를 잡았다. 만약 청원에 따라 오지로 돌려보낸다면, 이른바 호랑이를 길러 재앙을 남기는 꼴이다"라고 반박하여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3]夷大墓公阿弖利為・盤具公母礼等を斬す。此の二虜は、並びに奥地の賊首なり。二虜を斬する時、将軍等申して云へらく、「此の度は願に任せて返入せしめ、其の賊類を招かむ」とまうす。而るに公卿執論して云へらく、「野性獸心にして、反覆定まりなし。たまたま朝威に縁りてこの梟帥を獲たり。もし申請に依りて奥地に放還すれば、いわゆる虎を養ひて患いを遺すならむ」といへり。即ち両虜を捉えて、河内国の……山に斬す。(『日本紀略』延暦二十一年八月丁酉〔十三日〕条)|樋口知志| 자료가 매우 적어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조정을 중시하여 군사(에미시 정벌)의 정당화에 집착한 간무 천황의 의지에 따라 아테루이 등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는 설도 있다.[7]
3. 3. 처형
802년 (엔랴쿠 21년) 4월 15일, 일본기략의 보고에 따르면 다모노기미 아테루이와 이와구노키미 모레가 5백여 명을 거느리고 항복했다.[1]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는 7월 10일 이들 두 사람과 함께 헤이안쿄(平安京)로 들어왔다.[1] 다무라마로는 이들의 목숨을 구명해 줄 것을 호소했지만, 헤이안쿄 귀족들은 「야만스러운 본성에 짐승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라 반역하고 복속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다」며 반대했다.[1] 결국 8월 13일, 아테루이와 모레는 가와치국(河内国)에서 처형되었다.[1] 《일본기략》은 두 사람이 처형된 땅에 대해 「식산(植山)」, 「창산(椙山)」, 「두산(杜山)」의 세 가지로 기술했지만, 이들 지명은 가와치 국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1] 「식산」은 히라카타시(枚方市)의 우산(宇山)이 에도 시대(江戸時代) 초기에 「우에야마(上山)」로 개칭된 것으로 주목받았으나, 발굴조사 결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1]4. 아테루이 사후
802년 아테루이와 모레가 처형된 후, 에미시는 약 100년 동안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는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이 아테루이의 군사적 능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일각에서는 온묘도(陰陽道)의 귀문(鬼門) 미신 때문에 아테루이가 수도 밖에서 처형되었고, 간무 천황(桓武天皇)이 아테루이의 망령으로부터 수도를 보호하려 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2]
아테루이의 머리는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에 의해 카타노 신사(片野神社)에 묻혔으며, 이후 1200년 동안 신도 사제들에 의해 연례적인 비공개 의식이 거행되었다.[2]
많은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아테루이를 "악로왕(悪路王, Akuro-ō)"으로 불렀는데, "Aku"는 "악한"이라는 뜻 외에도 "사나운", "강한"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2]
4. 1. 에미시의 저항
아테루이라는 이름은 일본측 사료인 《속일본기(続日本紀)》와 《일본기략(日本紀略)》에 등장한다. 《일본기략》은 아테루이를 「다모노키미(大墓公)」라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 「다모」는 지명일 가능성이 높으나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키미(公)」는 과거 일본 조정이 아테루이에게 내렸던 지위의 존칭으로 해석하는 추측도 존재한다.[1]아테루이는 에미시의 군사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덴오(天應) 원년(781년) 5월 24일 조정측 정동대사(征東大使)였던 후지와라노 오구로마로(藤原小黑麻呂)의 보고서에는 「그 한 사람의 목숨이 적군 천 명의 수급과도 맞먹는 자」로서 이사세코(伊佐西古), 모로시메(諸絞), 야소시마(八十島), 오토시로(乙代)의 이름이 언급되고는 있지만 아테루이의 이름은 없었다.[1]
아테루이는 현재 이와테현 오슈시(奥州市) 미즈사와 구(水沢区)에 해당하는 히타카미노쿠니(胆沢郡) 이사와(胆沢)에서 태어났다. 787년 수후세 마을 전투(須乎勢村の戦い) 이전의 그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786년, 기노 아사미 코사미(紀朝臣古佐美)는 간무 천황(桓武天皇)으로부터 동쪽 정벌의 새로운 장군으로 임명되어 아테루이 정벌의 임무를 받았다. 787년 6월, 코사미는 그의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기타카미 강(北上川) 양쪽으로 코로모가와(衣川)에서 북쪽으로 진군하여 미즈사와에 있는 아테루이의 본거지를 기습하려 했다. 진군하며 가옥과 농작물을 불태웠지만, 동쪽 언덕에서 에미시(蝦夷) 기병이 급습하여 그들을 강으로 몰아넣는 기습을 받았다. 무거운 갑옷 때문에 1,000명이 넘는 무장 보병이 강에 빠져 죽었다. 9월, 코사미는 교토(京都)로 돌아와 간무 천황에게 패배의 책임을 추궁당했다.[2]
795년의 또 다른 공격도 실패했으며, 801년이 되어서야 일본 장군이 에미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 해, 미치노쿠(陸奥) 감찰관 대리 및 이데하(伊出羽) 지사, 미치노쿠 국(陸奥国)의 국주, 평정 장군, 정夷대장군(征夷大将軍)의 직책을 역임했던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가 간무 천황으로부터 에미시를 정벌하는 임무를 받았다. 그와 그의 4만 명의 군대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9월 27일 천황에게 "에미시 반란군을 정벌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2]
하지만 여전히 에미시 지도자 아테루이와 모레(毛禮)는 체포를 피했다. 802년, 다무라마로는 미치노쿠로 돌아와 이사와 영토 한가운데에 이사와 성(胆沢城)을 건설했다. 그러고 나서 4월 15일, 그는 이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성공을 보고했다. 에미시 지도자 아테루이와 모레가 500명이 넘는 전사들과 함께 항복한 것이다. 사카노우에 장군은 7월 10일 아테루이와 모레를 수도로 호송했다. 사카노우에 장군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들을 가와치 국(河内国) 모리야마(森山)에서 처형했다."[2]
이는 에미시 정벌사의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 이전까지 일본은 포로로 잡힌 여성과 아이들을 서일본으로 이주시킨 다음, 그들의 남편과 아버지인 전사들을 새로운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합류하도록 유인하는 정책을 고수해왔다. 포로로 잡힌 전사들을 죽이지도 않았다. 아테루이와 모레의 처형은 그 이후 약 100년 동안 에미시의 격렬한 저항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다. 야마토 조정(大和朝廷)은 아마도 아테루이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했을 것이며, 일부 일본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테루이는 온묘도(陰陽道)의 북동쪽 귀문(鬼門) 미신 때문에 처형 전에 수도 밖으로 추방되었고, 따라서 간무 천황은 아테루이의 망령으로부터 수도를 보호하려 했을 것이다.[2]
아테루이 왕의 머리는 쇼군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에 의해 그의 적에 대한 존경심으로 아테루이의 조상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카타노 신사(片野神社)에 묻혔다. 지난 1200년 동안 신도 사제들에 의해 아테루이 왕을 위한 연례적인 비공개 의식이 거행되어 왔다.[2]
많은 일본인들에게 그는 오랫동안 "악로왕(悪路王, Akuro-ō)"으로 악마화되었다. "Aku"는 "악한"뿐만 아니라 "사나운"과 "강한"을 의미할 수도 있다.[2]
4. 2. 복권 운동
1994년 교토의 기요미즈데라 경내에 헤이안 천도 1200주년을 기념하여 아테루이 모레 현창비가 건립되었다.[95] 2005년에는 아테루이의 기일(9월 17일)에 맞춰 이와테현 오슈시 미즈사와 구 하네다 정에도 아테루이·모레의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 위령비는 아테루이나 모레의 영혼을 일본 신토의 분령(分靈) 형태로 옮겨 고향 땅에서 편안히 잠들기를 바라는 뜻에서 일반 대중의 기부로 만들어졌다. 2007년 3월에는 마키노 공원 내 구비즈카에도 비석이 건립되었다.1982년 제3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을 수상한 사와다 후지코의 『무쓰 갑주기』에서 아테루이를 소재로 다루었다. 1990년대부터 아테루이를 소재로 한 다양한 창작물이 나왔는데, 1992년 이와테 현 초등학교 교사였던 조반니 안도가 창작 그림자 연극 『아테루이의 눈물』을 아동들과 함께 제작·발표하여 이와테 현지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0년에는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한 다카하시 가즈히코의 소설 『화원』과 이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아테루이』(와라비 좌) 등이 공연되었다. 2002년에는 아테루이 사후 1200년을 기념하는 장편 애니메이션 『아테루이』가 제작되었다.
2013년 1월에는 『화원』을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 『화원 · 북의 영웅 아테루이전』(주연: 오오사와 타카오)이 NHK BS 프리미엄으로 방송되었다. 구 수자와시 사회교육과 내에서는 ‘아테루이를 숭앙하는 모임’이, 오사카부 스이타시에서는 ‘간사이 단코 동향회’가 탄생했다.
1988년 2월 28일, 동북 쿠마소 발언 사건이 발생했다.
1989년, 간사이 이와테현인회·간사이 아테루이 숭앙회는 여러 차례 히라카타시에 방문하여 위령비 건립을 청원했지만, 히라카타시는 확증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95][96][97] 1990년 이와테현인회·죠몬 아테루이·모레의 모임이 아테루이 목 塚 안내판 설치를 신청했으나, 히라카타시는 불허했다.[96][97]
키쿠치 케이이치는 1990년 6월 1일 「북천귀신-아테루이·다무라마로 전」을 출판하면서, 아이자와 시로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마키노 공원에 뱀 무덤(에미시즈카가 변화한 것)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근처에 에미시 지도자가 처형되어 매장되었다는 전승이 있는 고분도 있어 이곳이 아테루이와 모레의 매장지일 것이라고 추정했다.[99]
2002년은 아테루이 사후 1200주년으로, 이와테현을 중심으로 아테루이 붐이 일면서 동북 지방 주민들에게 아테루이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과거 일본 역사에서 반역자로 묘사되었던 아테루이의 복권 운동은 새로운 일본 역사상을 재구축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아테루이 복권 운동은 과거 중앙 중심의 정이(征夷) 사관을 뒤집어 국가와 에미시 사회의 대립, 국가의 침략성과 에미시 사회의 자율성·주체성에 기반한 ‘정의’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아테루이를 동북인의 중앙에 대한 자립과 저항의 상징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카하시 타카시는 저서 『사카노우에 타무라마로』에서 아테루이의 항복에 대한 고향 사랑적인 측면에 대해 "사료적 근거가 부족한 해석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논하고 있다.
5. 평가 및 논란
1994년 교토의 기요미즈데라 경내에 헤이안 천도 1200주년을 기념하여 아테루이 모레 현창비가 건립되었다.[15] 2005년에는 아테루이의 기일인 9월 17일에 맞춰 이와테현 오슈시 미즈사와 구 하네다 정에도 아테루이·모레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 위령비는 일반 대중의 기부로 만들어졌으며, 2004년 가을 히라카타 마키노 공원 내 수총에서 채취된 흙이 묻혀 있다. 2007년에는 마키노 공원 내 구비즈카에도 비석이 건립되었다. JR 히가시니혼은 도호쿠 본선의 미즈사와 역-모리오카 역간 쾌속 열차 1편에 아테루이의 이름을 붙였다.
1982년 사와다 후지코의 『무쓰 갑주기』를 시작으로, 1990년대부터 아테루이를 소재로 한 다양한 창작물이 나왔다. 1992년 조반니 안도의 창작 그림자 연극 『아테루이의 눈물』, 2000년 다카하시 가즈히코의 소설 『화원』과 이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아테루이』, 만화 『아테루이 2세』, 2002년 이치카와 소메고로 주연의 연극 『아테루이』, 장편 애니메이션 『아테루이』 등이 제작되었다. 2013년에는 소설 『화원』을 원작으로 한 TV 드라마 『화원 · 북의 영웅 아테루이전』이 NHK에서 방영되었다.
많은 일본인들에게 아테루이는 오랫동안 "악로왕(悪路王)"으로 악마화되었지만, "Aku"는 "악한"뿐만 아니라 "사나운", "강한"을 의미할 수도 있다.
5. 1. 에미시 논쟁
古代 東北 지역에 거주했던 에미시(蝦夷)에 대해서는 ① 에미시=아이누설과 ② 에미시=일본인설(변민설)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에미시=아이누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바탕으로 "그들은 아이누인이거나, 억지로 말하자면 아이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일본서기』 제이천황(斉明天皇) 5년(659년) 조에 따르면, 이 해에 견당사가 에미시 남녀 2명을 데리고 당나라 고종(高宗)을 알현했다. 견당사의 항해 일지에 따르면, 고종은 "에미시는 몇 종류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했고, "3종류가 있습니다. 멀리 있는 자는 츠카루(都加留), 다음은 아라에미시(麁蝦夷), 가까이 있는 자를 니기에미시(熟蝦夷)라고 부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알현에 대해서는 중국 측 문헌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15]
- 東北의 에미시와 기내(畿内)의 조정 세력은 보규 5년(774년)부터 홍인 2년(811년)까지, 무려 38년에 걸쳐 격렬한 전쟁을 벌였는데, 기내 세력은 에미시와의 협상에 와쿠(訳語)라는 통역(관직)이 필요했다. 사서는 에미시의 언어를 "이고(夷語)"라고 기록하고 있다.[16]
- 언어학자 가네다이치 교스케와 아이누어 지명 연구가 야마다 히데조의 실증적인 연구에 의해, 東北, 특히 東北北部에는 아이누어 어원으로 생각되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17]
"에미시=일본인설"은 전후 고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에미시=아이누설"을 부정한다. 그 주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쇼와 28년(1953년)에 이와테현 미즈사와시(현 오슈시)의 토키와(常盤) 유적에서 벼 이삭 자국이 있는 야요이 시대 토기가 발견되었다. 쇼와 33년(1958년)에는 아오모리현 미나미쓰가루군의 타레야나기(垂柳) 유적에서 야요이 시대의 논 흔적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東北北部에서도 벼농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18] 이 시대 아이누 계통의 사람들은 수렵 채집 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벼농사의 담당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 이와테현 이사와(胆沢) 정(현 오슈시)에는 쓰노즈카(角塚) 고분이라는 전방후원분이 있다. 일본 최북단의 전방후원분으로 국보에 지정되어 있다. 길이 45m, 높이 4m가 조금 넘는 작은 고분이지만, 출토된 하니와 등으로부터 5세기 후반의 축조로 추정된다.[19]
- 이사와는 에미시와 기내 세력과의 38년 전쟁 당시, 에미시의 지도자 아테루이(阿弖流為)가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지만, 그 전쟁의 약 300년 전에 전방후원분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전방후원분은 기내의 조정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축조된 것이며, 이사와도 5세기 후반에는 기내 세력의 영향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에미시=아이누설"과 "에미시=일본인설"에는 각각의 근거가 있으며, 결론은 나지 않았다. 이 논쟁은 고대 東北·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와라비테토(蕨手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되어 복잡한 전개를 보이고 있다.
5. 2. 아테루이 종언의 땅 논쟁
아테루이의 최후에 대한 논쟁은 『일본기략(日本紀略)』 연력 21년(802년) 8월 13일 조의 기록에서 비롯된다. 이 기록에는 "즉각 두 포로를 잡아 河内国□산에서 참수했다"라고만 적혀 있어,[20] 아테루이가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처형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가와치국(현재의 히라카타시, 가타노시, 네야가와시 등 오사카부 일대)의 어딘가라는 것 외에는 알 수 없으며, “□산”에 대해서는 여러 문헌에서 한자 표기가 달라("두산", "식산", "수산" 등) 논란이 있다.[21]
니시모토 마사히로는 두산(杜山)을 牡山의 오기로 보고, 야마시로국 오토코야마(현재 교토부 야와타시 일부)를 포함하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山”에 대한 한자 표기는 『신정증보국사대계』의 『일본기략』에서는 “두산(杜山)”, 『구집국사대계』의 『일본기략』 및 『증보육국사』의 『일본후기』(절문)에서는 “식산(植山)”, 鴨祐之의 『일본일사』에서는 “수산(椙山)” 등으로 나타나, 오랫동안 한자 표기에 차이가 있었다.[21]
신영웅(神英雄)이 여러 사본을 조사한 결과, “두산(杜山)”은 잘못된 표기이며, 원본에는 “수산(椙山)”이라고 쓰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지었다.[22] 그러나 이마이즈미 타카오(今泉隆雄)는 신영웅의 결론에 동의하면서도, 식산설(植山説)과 수산설(椙山説) 중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24]
결국, 우산설(宇山説)·수산설(杉山説) 모두 유력한 비판이 있어, 현재로서는 아테루이가 참수당한 곳이 가와치국(河内国) 어딘가라는 것 외에는 불명확하다.[22]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도, 구 미즈사와시(水沢市) 사회교육과 내 ‘아테루이를 숭앙하는 모임’, 오사카부 스이타시의 ‘간사이 단코 동향회’ 등 아테루이를 기리는 움직임이 있었다. 1988년 동북 쿠마소 발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89년, 간사이 이와테현인회·간사이 아테루이 숭앙회는 히라카타시에 위령비 건립을 청원했지만, 확증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95][96][97] 1990년에는 이와테현인회·죠몬 아테루이·모레의 모임이 아테루이의 목 무덤 안내판 설치를 신청했지만, 히라카타시는 불허했다.[96][97] 같은 해, 역사지리학자 카미 히로오는 아테루이의 최후의 장소를 오사카부 히라카타시 스기(椙)로 추정했다.[98]
5. 2. 1. 히라카타시의 아테루이 전승
□山일본어에 대해서는, 널리 이용되어 온 교과서인 『신정증보국사대계』의 『일본기략』에서는 "두산(杜山)", 『구집국사대계』의 『일본기략』 및 『증보육국사』의 『일본후기』(절문)에서는 "식산(植山)", 鴨祐之의 『일본일사』에서는 "수산(椙山)"으로 되어 있어, 오래전부터 한자 표기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21] “가와치국(河内国)” 뒤에 이어지는 지명은, 신영웅(神英雄)이 사본을 조사한 결과, 주로 다음과 같이 분류되었다.표기 | 해당 서적 및 내용 |
---|---|
두산(杴山) | 나고야시 봉좌문고(蓬左文庫)본(에도 시대 초기), 국립공문서관 린가(林家)본(에도 시대 중기?) |
식산(植山) | 구내청서릉부 다니모리(谷森)본(다니-일구오・에도 초기), 다니모리본(다니-삼사령・에도 중기), 구내청서릉부 쿠니히가궁문고(久邇宮文庫)본(에도 시대 말기), 무큐카이신습문고 기쿠야 코우사부로(菊屋幸三郎) 교본(에도 시대 후기?) |
(결)+산 | 구내청서릉부 마쓰오카(松岡)본, 일본기류(에도 시대 중기) |
수산(椙山) | 구내청서릉부 편년기략(編年紀略)(에도 시대 말기), 일본일사(보영(宝永) 7년(1710년)), 신궁문고 덴메이(天明) 4년봉납본(에도 시대 중기), 삼책본(三冊本)(에도 시대 말?), 무큐카이신습문고 다이가쿠지(大覚寺)본(에도 시대 후기?), 국립공문서관 내무성지리국본(에도 시대 후기?), 동양문고 동양문고본(문정(文政) 7년) |
석산(榲山) | 무큐카이신습문고 아이다케(会田家)장서본(에도 시대 후기?) |
목산(木山) | 신궁문고 메이지(明治) 사본 |
신영웅은 『일본기략』의 사본을 조사한 결과, 신정증보국사대계가 "두산(杜山)"이라고 하는 것은 구내청서릉부 소장 쿠니히가궁문고본의 "식(植)"의 구자(くずし字)를 잘못 읽은 것이며, "두산(杜山)"이라고 기록한 사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22] 또 조사한 약 30권의 『일본기략』 사본 중 판독 불능인 것도 있지만, 24권을 열람 조사하여 대체로 "식산(植山)"과 "수산(椙山)"으로 나눌 수 있었다. "식산(植산)"을 "수산(椙山)"으로 정정한 사본이 여러 권 있으며, "식산(植山)"이라고 기록된 4례의 사본은 모두 고후쿠지 문적 이치조인의 전본과 관련된 동일 계통이라는 점에 대해, "수산(椙山)"이라고 기록된 10례의 사본은 원본을 하나의 계통으로 추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본기략』의 원본에 게재되어 있던 본래의 글자는 "수산(椙山)"이라고 결론지었다.[22]
역사학자 니시모토 마사히로는 두산(杜山)을 牡山의 잘못 쓴 것으로 보고 야마자키바시(산성국 남쪽 끝, 현재의 교토부 야와타시 하시모토부터 오사카부 히라카타시 쿠스노바 나카노시바 부근)의 牡山([https://dl.ndl.go.jp/info:ndljp/pid/2937057/95 남산(男山)]・교토부 야와타시[23])을 아테루이의 처형지로 추정하고 있다.[22]
이마이즈미 타카오는 신영웅의 말대로 "두산(杜山)"은 잘못된 것이지만, 식산설(植山説)과 수산설(椙山説) 중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24]
우산설(宇山説)·수산설(杉山説) 모두 유력한 비판이 있으며, 현재 아테루이가 참수당한 곳이 가와치국 어딘가라는 것 외에는 불명확하다.[22] 河内国植山이라는 기술에서, 주로 "우에야마"라는 지명이 구 가와치 국내에서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히라카타시 북부의 구 우야마 촌(1966년 우야마 정·우야마히가시 정·야부히가시 정·야부니시 정·야부모토 정·야부오카 1~2초메·히가시마키노 정·마키노시모지마 정·마키노혼 정 1~2초메, 1968년 쇼다이타지카 3초메·히가시야마 1~2초메, 1971년 마키노키타 정, 1973년 구즈하면취 정이 됨, 다른 지구와 혼합 구분되어 있음[25])으로 추정하는 설이 있다. 구 가타노군 우야마 촌은 겐나 원년(1615년)에 가미야마 촌에서 개칭되었다고 한다.[22]
1900년, 역사학자 요시다 도고의 저서 『대일본지명사서』는 植山을 宇山이라고 기술하고 있다.[26] 요시다는 『일본기략』에 게재된 아테루이 처형지뿐만 아니라 매장지에 대해서도 구 스가와라 촌 후지사카의 오니즈카라고 기록하고 있다.[26] 오니즈카는 세키 소코·나미카와 세이쇼가 기획하고, 세키의 사후, 나미카와를 중심으로 편찬된 『오기나이시』 등을 근거로 "전 왕인 박사 묘"라고 한다(왕인#유적과 현창 운동 참조).[27] 또한 발굴 조사의 결과, 우야마 언덕은 고분이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28][29] 『대일본지명사서』는 그 후에 출판된 지명 사전류나 전문서 등에 영향을 주어, 『오사카부 전지』(1922년[30]), 『히라카타 시사』(1951년[31]), 『가도카와 일본 지명 대사전』 27권(1983년[32]), 『일본 역사 지명 대계』 제28권(1986년[33]) 등에서도 河内国植山은 宇山이라고 계속 쓰여지고 있다.
역사학자 이마이 케이이치는 백제왕 조묘에 가까운 이곳 우야마에서 베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34]
한편, 히라카타시는 "우야마=우에야마 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a)가와치국 두산이나, (b)가와치국 수산보다, (c)가와치국 우에야마 쪽이 옳다는 것을 논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스즈키 타쿠야는 우야마 정을 아테루이 최후의 땅으로 하려면 "우에야마"가 올바른 한자 표기이며, "우에야마"와 "가미야마"가 연결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22] 전승이나 서적에 기재된 내용은 여러 종류가 있다.
- 1900년 요시다 토고(吉田東伍)의 『대일본지명사전』(大日本地名辞書)에 기록된 아테루이(阿弖流為)가 참수된 우야마(宇山)와 매장된 후지사카(藤阪)의 귀묘(鬼墓)(현재 전 왕인묘(伝王仁墓))[26]
- 1979년 가가와 신보(河北新報) 보도의 "에조(蝦夷)의 통령이 처형된 장소"인 우야마정(宇山町)의 고즈카(古塚)(우야마 2호분)와 "아테루이" 매장지로 여겨지기 시작한 "싸움에서 진 거물 장수의 수장묘(首塚)"라고 전해져 온 마키노사카(牧野阪) 마키노공원(牧野公園) 내의 마운드(구 카타노 신사(片埜神社) 경내)[85]
- 1988년 지역 문화지 만다(まんだ) 등에 게재된 아테루이의 몸통을 매장한 동즈카(胴塚)인 우야마히가시정의 우야마 1호분과, 머리를 매장한 수장묘(마키노사카 마키노공원 내의 마운드)[69]
고즈카(우야마 2호분)가 처형지인지는 발굴로 판정할 수 없지만, 우야마 1호분·2호분은 발굴 결과 헤이안 시대 이전의 고분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에, 고분 위에 매장하는 등의 방법이 아니었다면, 1988년 지역 문화지 만다가 게재한 아테루이 몸통이 매장된 동즈카(우야마 1호분)라는 전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우야마 1호분에서 에도 시대의 제사 유적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매장자를 아테루이로 생각했을 것이라고 세가와(瀬川)는 추정하고 있다.[70] 하지만, 만다의 기재와 가가와 신보가 보도한 현지의 "에조의 통령이 처형된 장소"라는 고즈카(우야마 2호분)의 전승과의 관계성은 미지수이다.
1988년, 어느 지역의 전승인지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세가와 요시노리(瀬川芳則)는 동즈카의 아테루이 몸통이 매장되었다는 전승은 간분 4년(1664) "악로왕(悪路王) 수상(首像)" 가시마 신궁(鹿島神宮) 봉납을 계기로 탄생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악로왕이나 다카마루는 전승 민화에서 아테루이와 동일시되는 경우가 있다.
2020년, 마베 타카히로(馬部隆弘)는 에조가 살해당했다는 "전승"을 이야기하는 히라카타 시민(枚方市民)은 존재했지만, 이 "전승"은 1900년 『대일본지명사전』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승이란 선조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전승"은 전승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논문에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2006년, 히라카타시에서 근무했던 마베 타카히로는 『대일본지명사전』(1900년)의 "아테루이가 우야마에서 참수당하고 후지사카에서 매장된다"라는 기재는 일반적으로 퍼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明治33년(1900년) 吉田東伍 『대일본지명사전』 출판[75]
明治40년(1907년) 『대일본지명사전』 제2판 출판[75]
다이쇼 2년(1913년) 『대일본지명사전』 제3판 출판[75]
다이쇼 11년(1922년) 『오사카부 전지』 출판[30]
쇼와 10년(1935년) 역사학자 구마다 아시오는 아테루이가 최후를 맞이한 곳은 우에야마이며, 매장지는 후지사카의 귀묘(전 왕인묘)라고 기록한다.
쇼와 12년(1937년) 『대일본지명사전』 재판[75]
쇼와 26년(1951년) 『히라카타시사』 출판[31]
쇼와 40년(1965년) 역사학자 이마이 케이이치 『백제왕 경복』 출판. 문무천황 4년(700년) 백제왕 엔호 초대 히타치노카미 취임, 덴표 21년(749년) 무쓰노카미·백제왕 경복의 도다이지 대불에 대한 황금 조달 등 백제왕씨 대대로 동북 지방에 대한 공헌, 호케이 11년(780년) 진수부장군 취임부터 연력 14년(795년) 사망까지의 백제왕 준테츠의 위업에 대한 경의에서, 한때 백제왕 준테츠의 부장이었던 사카가미 타무라마로가 데려온 아테루이와 모레를 백제왕씨의 본거지 근처에서 베었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쇼와 42년(1967년) 와카모리 타로 박사 고증의 학습 만화 일본의 역사 3 귀족의 황금 시대 헤이안 시대(슈에이샤) 출판, 일본기략에서는 에미시 대묘 공 아테루이와 반구 공 모레가 500명이 넘는 동료와 함께 항복했다고 쓰여 있지만, 만화에서는 사카가미 타무라마로의 조정군이 산 쪽과 강 쪽에서 아테루이 군을 포위 공격하여 에미시의 성을 함락시키고, 자살하려는 아테루이를 타무라마로가 막아 항복시키는 이야기로 그려져 있다(속일본기에 쓰여진 사카가미 타무라마로가 도호쿠로 파견되기 전의 스시부시 전투에서 강과 산에 끼어 몰려 대패한 것은 조정군 쪽이다). 귀족들은 "아테루이 정도의 남자는 한 번 살려두어도 다시 세력을 회복할 것이다"라고 가와치국에서 처형을 실행하고, 아테루이는 "타무라마로에게 전해다오 다시 만나고 싶었다고"라고 말하고, 타무라마로는 "에미시로 태어난 것만으로 불쌍한 아테루이!"라고 손을 모으고 있다.[78]
쇼와 44년(1969년) 증보판 『대일본지명사전』 출판[75]
1970년(쇼와 45년(1970년)) 화낙 문화재 보호 위원 야마모토 켄조(山本賢三)는 아테루이(阿弖流為)가 우야마(宇山)에서 참수당하고 후지사카(藤阪)의 귀묘(鬼墓, 현재는 전 왕인묘(伝王仁墓))에 매장되었다는 요시다 토고(吉田東伍)의 기록을 지지한다.
1971년(쇼와 46년(1971년)) 역사학자 타카하시 토미오(高橋富雄)는 아테루이(阿弖流為)가 히라카타시(枚方市)에서 참수당했다고 기록한다.
1972년(쇼와 47년(1972년)) 히라카타시사(枚方市史) 제2권 출판, 아테루이(阿弖流為) 히라카타시(枚方市)(우야마(宇山)) 종언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1973년(쇼와 48년(1973년)) https://ci.nii.ac.jp/author/DA02137753 千賀四郎『미치노쿠의 영고(みちのくの栄枯)』, 아테루이(阿弖流為) 히라카타시(枚方市)에서 종언했다고 기록한다.
1988년(昭和63년), 枚方시 문화재 연구조사회가 수개월에 걸쳐 우야마 유적의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에서 헤이타 신보(河北新報)가 "에조의 지도자가 처형된 장소"라고 보도했던 우야마 정(宇山町)의 고분(우야마 2호분)에서 도로를 사이에 두고 동쪽 우야마히가시정(宇山東町) 290외 7필의 고분을 6세기 후반의 https://www.city.hirakata.osaka.jp/cmsfiles/contents/0000000/394/6049.pdf 우야마 1호분으로 명명하고, 아테루이(阿弖流為)의 몸통무덤(胴塚) 전승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했다.[92]
1988년 당시에는 지역에서 몸통무덤(胴塚)이라고 전해져 왔다고 이야기되었지만, 2013년이 되자 우야마 1호분이 발견된 이후로 지역에서는 고분이 발견되기 이전부터 아테루이(阿弖流為)의 목 무덤과 세트로
6. 후세의 평가
1994년 교토의 기요미즈데라 경내에 헤이안 천도 1200주년을 기념하여 아테루이와 모레 현창비가 건립되었다.[128][129] 2005년에는 아테루이의 기일인 9월 17일에 맞춰 이와테현 오슈시 미즈사와 구 하네다 정에도 아테루이·모레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 위령비는 일반 대중의 기부로 만들어졌으며, 아테루이와 모레의 영혼을 일본 신토의 분령(分靈) 형태로 옮겨 고향 땅에서 편안히 잠들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위령비에는 정재 기부자 명단과 함께 2004년 가을 히라카타 마키노 공원 내 수총에서 위령제 때 오슈 시 미즈사와 구의 "아테루이를 표창하는 모임"이 채취한 수총의 흙이 묻혀 있다.[130] 2007년에는 마키노 공원 내 구비즈카에도 비석이 건립되었다.
JR 히가시니혼은 도호쿠 본선 미즈사와 역-모리오카 역 간 쾌속 열차 1편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많은 일본인에게 아테루이는 오랫동안 "악로왕(悪路王, Akuro-ō)"으로 악마화되었다.[1] "Aku"는 "악한"뿐만 아니라 "사나운", "강한"을 의미할 수도 있다.
6. 1. 복권 운동
2002년(헤이세이 14년)은 아테루이 사후 1200주년으로, 이를 기념하여 이와테현을 중심으로 아테루이 붐이 일어나면서 도호쿠 지방 주민들에게 아테루이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과거 일본 역사에서 반역자로 묘사되었던 아테루이의 복권 운동은 새로운 일본 역사상을 재구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하지만 아테루이 복권 운동은 과거 중앙 중심의 정이(征夷) 사관을 그대로 뒤집은 듯, 국가와 에미시 사회의 대립 관계, 국가의 침략성과 에미시 사회의 자율성·주체성에 기반한 ‘정의’가 다소 일방적으로 강조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이러한 시각은 아테루이를 마치 동북인의 중앙에 대한 자립과 저항의 상징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카하시 다카시는 저서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에서 아테루이의 항복에 대한 고향 사랑적인 측면에 대해 "사료적 근거가 부족한 해석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논하고 있다.
6. 2. 현창비
1994년 11월, 교토 기요미즈데라 경내에는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헤이안 천도 1200주년 기념 아테루이, 모레 현창비가 건립되었다.[128][129] 2005년 9월 17일에는 이와테현 오슈시 미즈사와 구 하네다 정에 아테루이·모레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 위령비는 아테루이와 모레의 영혼을 일본 신토의 분령(分靈) 형태로 옮겨 고향 땅에서 편안히 잠들기를 바라는 뜻에서 일반 대중의 기부로 만들어졌다. 위령비에는 정재 기부자 명단과 함께 2004년 가을 히라카타 마키노 공원 내 수총에서 위령제 때 오슈 시 미즈사와 구의 "아테루이를 표창하는 모임"이 채취한 수총의 흙이 묻혀 있다.[130]6. 3. 대중문화
1982년 제3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을 수상한 사와다 후지코의 『무쓰 갑주기』에서 아테루이를 소재로 하였다. 1990년대부터는 아테루이를 소재로 한 다양한 창작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1992년 당시 이와테 현의 초등학교 교사였던 조반니 안도가 창작 그림자 연극 『아테루이의 눈물』을 아동들과 함께 제작 ・ 발표하여 이와테 현지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2000년에는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한 다카하시 카츠히코의 소설 『화원(火怨)』이나, 이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아테루이』(와라비 좌) 등으로 이어진다. 뮤지컬 「아테루이」의 경우 2004년 『월간 뮤지컬』지의 작품부문 10위를 차지했고, 극중 다키나 역을 맡은 마루야마 유코는 오다지마 유우시 상을 받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아테루이를 소재로 한 다카하시 가즈히코의 다른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만화 『아테루이 2세』(『화원』과는 무관)나 2002년에 신바시 연무장에서 공연된 이치카와 소메고로 주연의 『아테루이』(마쓰타케)도 유명하다. 2002년에는 아테루이 사후 1200년을 기념하는 장편 애니메이션 『아테루이』가 제작되었다.
2013년 1월 『 화원 』을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 『화원 · 북의 영웅 아테루이전』(주연 : 오오사와 타카오)이 NHK BS프리미엄으로 방송되었다(NHK에서는 2013년 3월 방영).[1] 아테루이에 관한 민담은 여러 연극과 애니메이션 (''아테루이 2세'')으로 제작되었다.
7590 아테루이는 1992년 10월 26일 엔다테 케이치와 와타나베 케이이치가 발견한 소행성이다.
; 소설
- 『陸奥甲冑記』 - 사와다 후지코 저. 1981년. 1982년, 제3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 수상.
- 『염立つ』 - 다카하시 카츠히코 저. 1992년-1994년. 오슈 후지와라씨의 흥망을 그린 작품으로, 서두에서 아테루이와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의 인연이 그려진다.
- 『화원』 - 다카하시 카츠히코 저. 1999년. 아테루이와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와의 싸움을 아테루이와 에조의 시점에서 그리고 있다. 2000년,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수상.
- 『제도환담』 - 아라마타 히로시 저. 2007년.
; 무대
- 창작 인간그림자극 『아테루이의 눈물』 - 1992년 당시, 이와테현의 초등학교 교사였던 조반니 안도가 아동과 함께 제작·발표하여, 현지 이와테에서 큰 반향을 불렀다.
- 『아테루이』( 극단☆신감선) - 2002년에 신바시 연무장에서 공연되었다. 주연·7대째 이치카와 센고로. 2015년에는 『아테루이』라는 제목으로 가부키화되었다.[136].
- 뮤지컬『아테루이-북의 요성』( 와라비자) - 원작은 소설 「화원」. 2004년 「월간 뮤지컬」지의 작품 부문에서 10위에 랭크인. 타키나 역의 마루야마 유코는 오다지마 유지상을 수상했다.
- 『AKURO 악로』(TS 뮤지컬 팬더이션) - 초연2006년·재연2008년에 공연된 무대. 연출·안무: 셰 주룽. 악로왕을 아테루이로 그린 작품.
- 뮤지컬『아테루이―ATERUI―』( 다카라즈카 가극단별조) - 원작은 소설 「화원」. 각본·연출: 오오노 타쿠시, 주연: 레이 마코토. 2017년 여름에 우메다 예술극장 씨어터·드라마시티, 일본청년관에서 상연[137].
; 영화
- 『홍안의 밀사』 - 1959년의 일본 영화. 아테루이와 동일시되는 악로왕이 주인공의 적으로 등장한다. 악로왕 역: 요시다 요시오
; 드라마
- 『염立つ』 - 원작은 소설 「염立つ」. 1993년 7월부터 1994년 3월의 NHK 대하드라마. 아테루이 역: 사토미 코타로
- 『화원·북의 영웅 아테루이전』 - 원작은 소설 「화원」. 2013년 1월의 NHK BS프리미엄BS시대극 및 토요드라마에서 방송되었다. 주연·오오자와 타카오
; 음악
- 『하늘 아테루이』- 안베 미츠토시의 싱글 CD 타이틀곡. 이와테현 미즈사와시(현 오슈시) 등으로 구성하는 아테루이 사후 1200년 기념 사업 실행위원회가 전국에서 단가로 된 가사를 모집하여, 총 1000수 이상 중 아테루이 관련 11수를 선택, 그것을 안베가 엮어 작곡했다. 작사 명의는 유메아카리. 작곡·편곡, 노래는 안베 미츠토시. 2002년 11월 21일에 콜롬비아 뮤직 엔터테인먼트에서 발매되었다. 커플링 곡은 『먼 바람의 목소리』.
- 『아테루이와 모레의 역습』- 소울 플라워 유니온의 싱글 「극동전선 이상무!?」에 수록.
; 만화
- 『XEMBALA 샹발라』 - 작·츠지라 리카코 - 1996년-1997년. 아테루이와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를 모티브로 한 만화.
- 『아테루이 II세』 - 원작·다카하시 카츠히코, 작화·하라 테츠오. 2000년.
- 『Madman call』 - 작·츠지라 리카코 - 2001년-2004년. 상기 샹발라의 캐릭터인 아테루이들의 유전자를 이은 자들의 현대에서의 싸움.
; 애니메이션
- 『아테루이』 - 2002년, 장편 애니메이션. 사후 1200년을 계기로 제작되었다.
; 게임
- 『아테루이전』 (워게임 일본사)
6. 4. 기타
많은 일본인에게 아테루이는 오랫동안 "악로왕(悪路王, Akuro-ō)"으로 악마화되었다.[1] "Aku"는 "악한"뿐만 아니라 "사나운"과 "강한"을 의미할 수도 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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牡山(七九頁16)現在は男山と表記し、現京都府八幡市の西部、生駒山地最北端に位置する山。……桓武天皇はここに烽火を置くことにしたのである。後に男山には石清水八幡宮が勧請さ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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烽火(七九頁17)和名抄に烽燧とあり、訓は度布比。昼は煙を放ち、夜は火を発して急事を伝達する軍事施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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