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카타시는 오사카부 북동부에 위치하며, 오사카시와 교토시의 중간 지점에 있는 도시이다. 1947년 시로 승격되었으며, 2014년 중핵시로 지정되었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군수 산업과 섬유, 의류 제조업이 발달했다. 현재는 다양한 기업들의 본사 및 사업소가 위치하고 있으며, 히라카타 파크, 히라카타 T-사이트 등 관광 명소도 보유하고 있다. 히라카타시는 시장과 시의회로 구성된 정부를 가지고 있으며, 여러 도시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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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핵시 - 기후시 기후시는 일본 기후현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오다 노부나가가 근거지로 삼아 발전했고, 메이지 시대 시로 승격, 재난을 극복 후 현재는 제조업과 관광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여러 도시와 자매 관계를 맺고 약 4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중핵시 - 미토시 미토시는 이바라키현의 현청 소재지이자 최대 도시로, 나카강이 흐르고 가이라쿠엔, 미토성, 센바 호 등 역사·문화·자연 명소가 있으며, 에도 시대 미토번의 중심지이자 미토학파의 근거지로서 현대에는 중핵시로 지정되었다.
히라카타시는 오사카부 북동부에 위치하며, 오사카시와 교토시의 거의 중간 지점인 요도가와 강 좌안에 자리 잡고 있다. 동서로 12km, 남북으로 8.7km의 삼각형 모양이며, 면적은 65.12km2이다.[14] 동쪽으로는 이코마 산지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요도가와 강이 흐른다. 시의 동쪽은 산지, 중심부에서 서쪽은 오사카 평야의 북동단에 해당한다.
히라카타시는 오사카부 북동부에 있으며, 오사카시와 교토시의 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요도가와 강의 왼쪽 강둑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서로 12km, 남북으로 8.7km의 삼각형 모양이다. 동쪽으로는 이코마 산과 접해 있다.[14]
시의 동쪽은 이코마 산지에 속하는 산지이며, 중심부에서 서쪽은 오사카 평야의 북동쪽 끝부분이다. 언덕 지역의 지층은 약 200만 년 전부터 수만 년 전에 걸쳐 빙하기와 간빙기에 퇴적된 오사카층군으로 불리는 지층으로, 제2해성층부터 제7해성층에 해당하며, 여러 종류의 화산재층으로 구성되어 있다.[15] 이 지층에서는 동양 코끼리나 고대 일본 사슴 등의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18][15]
; 주요 산
이코마 산지
; 주요 구릉지
나가오 구릉
코리 구릉
시내를 흐르는 하천은 대부분 동쪽의 이코마 산지에서 발원한다. 1급 하천인 후나바시강, 호타니강, 아마노강도 이코마 산지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흘러 요도가와에 합류한 뒤 오사카만으로 이어진다.
이코마 산지와 오사카 평야의 경계 부근에는 이코마 단층대라고 불리는 활단층대가 있으며, 이 단층대에 포함되는 다구치 단층, 가타노 단층, 히라카타 단층이 시내를 남북으로 가로지른다.[19]
다구치 단층은 시 북부의 오토코야마 산지 서쪽 끝에서 남남동쪽으로 뻗어 나가다가 남남서쪽으로 굽어진다. 가타노 단층은 이코마 산지의 서쪽 가장자리를 남북으로 지나고, 히라카타 단층은 코우리 언덕 서쪽 끝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으며, 가타노 단층과 히라카타 단층은 각각 시조나와테시 부근에서 이코마 단층과 이어진다.[20]
; 주요 대지
히라카타 대지
2. 2. 기후
히라카타시는 맑은 여름과 약간의 강설 또는 강설이 없는 시원한 겨울이 특징인 습윤 대륙성 기후(쾨펜 기후 구분 ''Cfa'')를 보인다. 세토내해식 기후 구역에 속하며 비교적 온난하고 강수량은 적다.[21] 여름에는 열섬 현상의 영향으로 오사카시 부근에서 뜨거워진 공기가 오사카만 연안부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타고 유입되어, 히라카타시 부근에서 이코마 산계에 막힌다. 그렇기 때문에 오사카 시내보다 기온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국내에서 가장 높은 기온을 기록하는 경우도 있다. 겨울의 적설은 거의 없다. 33℃ 이상의 시간은 1980년대에는 40~80시간/년이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는 150시간/년 전후이다.
히라카타시의 연평균 기온은 16.2°C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389.5mm이며, 6월이 가장 강수량이 많은 달이다. 기온은 평균적으로 8월에 약 28.3°C로 가장 높고, 1월에 약 4.9°C로 가장 낮다.[4]
1952년 (쇼와 27년): 오사카 육군 조병창 히라카타 제조소(구 육군 조병창 오사카 공창 히라카타 제조소)가 고마츠 제작소에 불하 결정. 히라카타 사건 발생.[94][27] 백제사 터 특별 사적 지정. 오사카부립 도서관 히라카타 북 스테이션 개설.[95] 국도 2호가 국도 1호로 개칭. 오사카 가스가 도시 가스 공급 시작.[91]
1997년 (헤이세이 9년): 나고시 (오키나와현) 우호 도시 제휴[108][27], FM 히라카타 개국[27]
1998년 (헤이세이 10년): 시내 전역에서 고도 정수 처리수 공급 개시[120], 라포르 히라카타 개관[121][27]
1999년 (헤이세이 11년): 제78회 전국 고교 럭비 대회에서 게이코 가쿠엔 고등학교 우승. 유후군 오타키촌 (홋카이도, 현 다테시), 요시노군 아마가와촌 (나라현), 히가시소노기군하사미정 (나가사키현) 시민 교류 도시 선언.[108][27] 소년 야구팀 히라카타 리틀이 리틀 리그 세계 대회에서 우승.
2000년 (헤이세이 12년): 제79회 전국 고교 럭비 대회에서 도카이대 부속 쿄세이 고등학교가 첫 우승.
2001년 (헤이세이 13년): 특례시 이행[122][27], 히라카타 숙 겐야 자료관 개관[123][27]
2002년 (헤이세이 14년): 제81회 전국 고교 럭비 대회에서 게이코 가쿠엔 고등학교 우승. 시의 새 "물총새" 지정.
2003년 (헤이세이 15년): 제82회 전국 고교 럭비 대회에서 게이코 가쿠엔 고등학교 2연패. 제2 게이한 도로 부분 개통, 히라카타히가시 IC 병용 개시[124], 히라카타시역, 구즈하역에 특급 종일 정차 개시(평일 낮 시간대·토, 일요일 종일).
2004년 (헤이세이 16년): 제83회 전국 고교 럭비 대회에서 게이코 가쿠엔 고등학교 3연패, CHOYA 히라카타 공장이 히가시오사카시로 이전.
2005년 (헤이세이 17년): 제84회 전국 고교 럭비 대회에서 게이코 가쿠엔 고등학교 4연패. 구즈하 몰이 KUZUHA MALL로 전면 개장[27], 간사이 외국어 대학 가타호코 학사 터에 평생 학습 겸 지역 교류 시설 "테루키 플라자 키라라", "중앙 도서관" 개관[125][27], 히라카타 대국 인형전 폐막[27]
2006년 (헤이세이 18년): 구라시키 방적 히라카타 공장 터에 간사이 의과 대학 부속 히라카타 병원 개원[27], 중앙 도서관 시역전 위성 개관, 제28회 전국 선발 고교 테니스 대회에서 남녀 모두 나가오카니 고등학교 첫 우승.
2007년 (헤이세이 19년): 제86회 전국 고교 럭비 대회에서 도카이대 부속 쿄세이 고등학교가 7회 대회 만에 2번째 우승. 2월 9일, 시의 꽃 "벚꽃" 지정. 제29회 전국 선발 고교 테니스 대회에서 나가오카니 고등학교 단체전 여자 2연패. 7월 31일, 나카시 히로시 시장(당시)가 담합 의혹으로 체포, 9월 10일 실직.
히라카타시의 현대적인 지역은 고대 가와치국에 속해 있었다. "히라카타"라는 지명은 매우 오래되었으며, ''고지키'', ''니혼쇼키'' 및 기타 고대 문헌에 등장한다. 아스카 시대에는 초기 불교 사찰인 구다라데라가 건설되어, 초기부터 백제에서 온 많은 이민자들이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헤이안 시대에는 가타노에서 히라카타 일부에 이르는 언덕을 "가타노가하라"라고 불렀으며, 황실의 사냥터이자 벚꽃으로 유명했다.
이코마 산지와 오사카 평야의 경계 부근에는 이코마 단층대라고 불리는 활단층대가 있으며, 이코마 단층대에 포함되는 다구치 단층, 가타노 단층, 히라카타 단층이 시내를 남북으로 종단한다[19]。
다구치 단층은 시 북부의 오토코야마 산지 서쪽 가장자리에서 남남동으로 뻗어 있다가 남남서로 굴곡진다. 가타노 단층은 이코마 산지의 서쪽 가장자리를 남북으로 지나고, 또한 히라카타 단층은 코우리 언덕 서쪽 가장자리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으며, 가타노 단층과 히라카타 단층은 각각 시조나와테시 부근에서 이코마 단층에 이어진다[20]。
1880년(메이지 13년) 미야무라 정념사에 히라카타 군청이 개청되었다.[63][27]1881년(메이지 14년) 사카이현에서 오사카부에 편입되었고,[62][27]1882년(메이지 15년) 츠다에 우편 취급소가 설치되었다. 1885년(메이지 18년) 요도가와 대홍수가 발생하여 시내 이카가 부근의 제방이 붕괴되어 피해가 확대되었고, "이카가 절단"이라는 이름이 남았다.[64][65][27]
1889년(메이지 22년) 정촌제 시행으로 히라카타 정, 사다촌 (이상 이바라키군), 가와고에촌, 야마다촌, 마키노촌, 쇼다이촌, 구와하촌, 츠다촌, 스가와라촌, 효무로촌 (이상 가타노군)이 새로 탄생했다.[66][27]1890년(메이지 23년) 히라카타 구 재판소가 설치되었다.[67][27]
1896년(메이지 29년) 육군 기노 화약고가 완성되었다.[68][27]1898년 (메이지 31년) 4월 12일 간사이 철도 (현 JR 가타마치선)가 개통되어 츠다역・나가오역 두 역이 영업을 개시했다.[159][27] 같은 해 6월 1일 군제 시행으로 이바라키군, 가타노군, 사에라군이 통합되어 오사카부 기타카와치군이 되었다.[69]
1909년 (메이지 42년) 8월 20일 미명, 육군 기노 화약고가 폭발했다.[70][27]1910년 (메이지 43년) 4월 15일게이한 전차게이한 본선이 개통되어 구와하역, 마키노역, 히라카타 히가시구치역 (현 히라카타 시역), 히라카타역 (현 히라카타 공원역), 12월에는 고젠지역이 설치되었다.[160][27]1911년(메이지 44년) 전화가 개통되었다.[71]
1912년 (다이쇼 원년) 국화 인형전이 네야가와시에서 이전되었다.[72][27]1920년 (다이쇼 9년) 히라카타 최초의 민간 근대 공업인 일본 메리야스 주식회사 (후의 구라시키 방적 히라카타 공장)와 주식회사 쵸야 셔츠 제조소 (현 CHOYA) 히라카타 공장이 개업했다.[73][27]
3. 5. 근현대
1889년 4월 1일: 군구정촌 편제법 시행과 합병으로 맛타 군 히라카타 정이 탄생하였다.
히라카타시는 시장과 32명의 시의원으로 구성된 단원제 시의회를 통해 운영되는 시장-의회 형태의 정부를 가지고 있다. 히라카타시는 인접한 가타노시와 함께 오사카부 의회에 4명의 의원을 선출하며, 국가 정치와 관련해서는 일본 중의원의 오사카 11구에 속한다.
2010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히라카타시의 인구는 407,978명으로 이전 조사 대비 0.97% 증가했으며, 이는 오사카부 내 43개 시정촌 중 12위, 72개 행정 구역 중 27위에 해당한다.
4. 1. 행정
히라카타시는 시장과 32명의 시의원으로 구성된 시의회를 통해 운영된다. 히라카타시는 가타노시와 함께 오사카부 의회에 4명의 의원을 선출하며,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는 오사카 11구에 속한다.[115]
1989년 평화의 날을 제정하고, 1993년에는 인권 존중 도시를 선언하는 등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해 왔다.[118][27]1995년에는 호주의 로건시와, 2008년에는 대한민국의 영암군과 우호 도시 제휴를 맺어 국제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다.[114][27]
2014년4월 1일중핵시로 지정되어[122][27] 행정 권한이 확대되었으며, 시민 병원을 재건축하여 시립 히라카타 병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126][27]
히라카타시는 네야가와시, 가타노시와의 합병을 통해 인구 약 70만 명 규모의 정령 지정 도시를 구상하기도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기타카와치 지역 전체의 협력을 통해 주민 생활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재정 적자를 겪었으나, 재정 건전화 노력을 통해 흑자로 전환하였다. 2021년 현재 시세 수입은 약 531억엔이며, 라스파이레스 지수는 98.2로 중핵시 중 53위를 기록하고 있다.
1995년 결산부터 실질 수지가 적자를 기록했고, 1999년도에는 누적 적자가 29.8억엔으로 불어났다. 재정 재건 준용 단체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우려 속에 재정 재건이 추진되었고, 2002년도 결산에서 흑자 전환을 이루었다. 시세 수입의 전년도 감소가 지속되는 가운데, 2002년도부터 2004년도까지 3년 연속으로 실질 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세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세 수입은 장기적인 불황의 영향으로 1997년 651억엔을 정점으로 2004년도까지 7년 연속 감소했으며, 2004년도의 시세 수입은 544억엔이었다. 세입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시채가 발행되었으며, 그 총액은 2004년도까지 약 148.88억엔에 달한다. 2021년도 현재 시세 수입은 약 531억엔이다.
2021년 4월 현재 라스파이레스 지수는 98.2 (중핵시 53/62위)이다.
연도별 라스파이레스 지수는 다음과 같다.
연도
1997년 4월
2000년 4월
2001년 4월
2002년 4월
2003년 4월
2004년 4월
2005년 4월
2006년 4월
2007년 4월
2008년 4월
2009년 4월
2021년 4월
지수
107.3
105.8
103.5
103.3
102.1
99.1
98.7
98.6
98.3
98.2
96.8
98.2
1998년과 1999년은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전국적으로 고수준이었던 라스파이레스 지수의 하락이 지속되었으며, 2021년 4월 현재에도 국가 공무원보다 낮은 수준이다.
4. 2. 의회
히라카타시의 의회는 시의회, 부의회, 중의원으로 구성된다. 시의회는 정수 32명, 임기 2027년 4월 30일까지이며, 의장은 후지타 유키히사(공명당, 4선), 부의장은 야오 요시유키(연합 시민의 회, 4선)이다. 부의회는 정수 4명, 임기 2027년 4월 29일까지이다. 중의원은 오사카 11구 (히라카타시, 카타노시) 선거구에 해당하며, 임기는 2021년 10월 31일부터 2025년 10월 30일까지이다. 2021년 10월 31일 투표 결과, 나카시 히로시(일본 유신회, 신)가 당선되었다.[128]
히라카타시는 일본 제국 육군에 물자를 공급하는 군수 산업과 여러 민간 섬유 및 의류 제조업으로 시작되었다. 1939년 3월 초, 군수 산업 관련 부지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500명이 사망했다.[10] 종전 후, 이전의 군수 공장은 산업 단지 또는 오사카와 교토의 베드타운으로 전환되어 히라카타시의 성장을 지원했다.
교토부・나라현과의 경계에 위치하며, 2014년4월 1일중핵시로 이행했다. 에도 시대에는 교토 가도 (오사카 가도)의 숙장인 히라카타주쿠가 있었고, 기타카와치 군청도 소재했던 기타카와치 지역 및 게이한 간의 핵심적인 베드타운으로 발전했다.
시 서부는 게이한 본선으로 교토시 및 오사카시와 연결되며, 시 동부는 JR 가타마치선 (학연도시선)으로 교바시・키타신치・아마가사키 및 간사이 문화 학술 연구 도시와 연결된다. 중심역은 히라카타시역으로, 이 역 주변에 중심 시가지가 있으며, 게이한 홀딩스 및 게이한 전기철도의 등기상 본점 및 게이한 전기철도의 본사가 있다. 시 중심부는 국도 1호선 (히라카타 바이패스), 시 동부에는 제2 게이한 도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헤이세이 대합병 때 네야가와시, 가타노시와 합병하여 인구 약 70만 명 규모의 정령 지정 도시를 모색했으나(「기타카와치시 구상」), 주민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기타카와치 지역 전체의 협력 관계 강화를 통해 주민 생활 향상을 꾀하고 있다.
히라카타시의 현대 산업은 일본 제국 육군에 물자를 공급하는 군수 산업과 여러 민간 섬유 및 의류 제조업체에서 시작되었다. 1939년 3월 초, 군수 산업 관련 부지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하여 500명이 사망했다.[10] 종전 후, 이전의 군수 공장은 산업 단지 또는 오사카와 교토의 베드타운으로서 히라카타시의 성장을 지원하는 공공 주택 단지로 전환되었다. 섬유 및 의류 생산은 히라카타시의 주요 산업으로 남아 있다.
히라카타시는 베드타운으로 발전해 왔지만, 산업 면에서는 제조업 비중이 높은 산업 도시이기도 하다. 1978년에는 종업원 수의 36.6%를 제조업이 차지하며 1위를 기록했다.[132]
히라카타의 근대 산업은 다이쇼 시대에 문을 연 일본 메리야스 주식회사와 쵸야 셔츠 제조소에서 시작되었다.[73]메이지 시대에 개설된 육군 키노 화약고를 시작으로,[68]쇼와 시대에는 육군 조병창 오사카 공창 히라카타 제조소, 도쿄 제2 육군 조병창 코우리 제조소가 개설되어,[81][83] 히라카타시는 군수 산업이 활발했다.
전후 이러한 군사 시설은 민간에 넘겨져 오사카 육군 조병창 히라카타 제조소(구 육군 조병창 오사카 공창 히라카타 제조소)는 고마츠 제작소 오사카 공장에,[94] 키노 화약고와 도쿄 제2 육군 조병창 코우리 제조소는 주택 단지로서 각각 일본 주택 공단 나카미야 단지, 코우리 단지로 바뀌었다.[99]
전후, 히라카타 중소기업 단지(현 히라카타 기업 단지), 히라카타 기성복 단지(현 히라카타 신사복 단지), 히라카타 가구 단지 등의 공업 단지가 히라카타의 경제 성장을 지원했다.[133] 기업 유치 시 입지를 한 곳에 모으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기업 단지는 어느 정도 모여 있지만 시내에 흩어져 있는 형태가 되었다.[134]
그러나 산업 구조 변화와 택지화 진전에 따라, 최근 이러한 사업소가 시외로 이전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히라카타의 근대 산업 선구자인 구라시키 방적 히라카타 공장(구 일본 메리야스)이 1996년에, CHOYA 히라카타 공장(구 쵸야 셔츠 제조소)이 2004년에 각각 시외로 이전했다.
지역 산업 활성화를 위해 인재 육성, 창업 지원과 함께 츠다 사이언스 힐즈(간사이 문화 학술 연구 도시 히무로・츠다 지구)로의 기업 유치 등이 진행되고 있지만,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5. 2. 상업
히라카타시는 교토부・나라현과의 경계에 있으며, 게이한 본선과 JR 가타마치선(학연도시선)으로 오사카시 및 교토시와 연결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버블 시대부터 주택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많은 노동자들이 도심으로 출퇴근하는 베드타운 (교외 주택 도시)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1997년 JR 도자이선 개통, 2003년 히라카타시역 및 구즈하역 게이한 특급 열차 정차, 2008년 나카노시마선 개통 등으로 인해, 통근 수요뿐만 아니라 상업·관광 수요에서도 도심 지향이 높아져 구매 고객마저 도심으로 유출되는 빨대 효과가 발생했다.
; 히라카타시역 주변
히라카타시역 주변에는 비올네, 이온 히라카타점, 게이한 백화점 히라카타점, 게이한 히라카타 스테이션 몰, 히라카타 선플라자 1호 - 3호, TSUTAYA 빌딩 등 다양한 상업 시설이 밀집해 있다.
이러한 상업 시설의 발전은 선로를 기준으로 북쪽 출구와 남쪽 출구 측으로 나뉜다. 북쪽 출구 측에는 1965년 히라카타역 앞 백화점[135], 1969년 나가사키야 히라카타점[135][136]이 개점하는 등 먼저 개발이 진행되었다. 남쪽 출구 측에는 1968년 미쓰코시 백화점 히라카타점[136], 1970년 이즈미야 히라카타점[136]이 개점하며 개발이 시작되었다. 1971년에는 시가지 재개발 사업[135]으로 히라카타 선플라자 1호관에서 3호관이 건설되었고, 2호관에는 1975년 히라카타 마루모토 백화점(후의 긴테쓰 백화점 히라카타점)이 개점했다[109].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히라카타시역의 이용객은 급증했지만, 주택지가 많은 남쪽 출구 측에 비해 북쪽 출구 측은 점차 쇠퇴했다. 1990년 오카모토 정 재개발 빌딩 "비올네"가 완성[115]되고, 1993년 히라카타시역이 고가화되면서, 1994년 고가 아래에 게이한 백화점 히라카타점과 게이한 더 스토어 히라카타점이 개점하면서[119] 북쪽 출구 측에 다시 활기가 돌았다.
그러나 경기 후퇴로 인해 2002년 나가사키야, 2005년 미쓰코시 백화점[137], 2012년 긴테쓰 백화점 히라카타점이 폐점하는[138] 등 축소가 이어졌다. 2010년에는 비올네의 운영 회사가 도산하기도 했다.
2013년 간사이 의과대학이 개교하고, 2016년 긴테쓰 백화점 자리에 히라카타 T-SITE가 오픈하는 등 히라카타시역 주변은 재정비가 진행 중이다. 2025년까지 히라카타시역 북쪽 출구 지역에 상업 시설, 호텔, 오피스 등이 들어서는 고층 빌딩을 건설하고, 북쪽 출구 로터리를 확장할 예정이다. 남쪽 출구 지역의 재정비는 시청 이전을 포함하여 추후 진행될 예정이다.
; 구즈하역 주변
1967년부터 게이한 전기 철도에 의해 "쿠즈하 로즈 타운" 주택 개발이 진행되면서, 1972년 연선 최대 규모의 쇼핑몰인 쿠즈하 몰 거리가 개점했다[104].
그러나 2004년, 건설 30여 년 만에 폐쇄되고 마쓰자카야 구즈하점은 철수했다[138]. 2005년 "KUZUHA MALL"로 전면 개장하고[139], 게이한 본선 특급 열차가 정차하게 되면서 구즈하 주변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 국도 1호선변
교통량이 많은 국도 1호선변에는 라운드 원, 포레오 히라카타 등 오락 시설과 음식점이 많이 들어서 있다. 2016년에는 국내 최대 규모인 니토리 몰 히라카타가 오픈했다.
가와치 소면은 나라현의 미와 소면이나 효고현의 이보노이토와 함께 알려진 수연 소면이다. 덴와 연간 (1681년~1683년)에 야마토국 미와에서 전해진 소면 제조 기술이 기반이 되었다.
경작지가 적은 옛 고노군 츠다 마을을 중심으로 농한기 부업으로 번성하여, 최성기에는 약 80곳에서 생산되었다. 멀리 오미국이나 오와리국까지 판로를 넓혔지만, 최근에는 생산 농가의 고령화가 진행되어 후계자 부족이 문제가 되어 2003년 시점에서는 츠다 지역에 3곳, 호타니 지역에 1곳만 남게 되었다. 당시에는 출하량이 제한되어 시판되지 않았다. 그 후에도 생산자의 감소가 이어져, 전통을 이어오던 마지막 한 곳이 2012년에 폐업하면서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생산자는 끊어졌다. 그 후, 지역 거주자가 기술과 생산의 계승에 힘쓰고 있다고 보도되었다[140] . 시립 히라카타주쿠 카기야 자료관에서는 하계 한정으로 가와치 소면을 유료로 먹을 수 있다[141] .
츠다에는 가와치 소면의 발전에 공헌한 야마시타 마사에몬 (후에 마사타)의 비석 "야마시타 옹 숭덕비"가 남아 있다.
; 양조
이코마 산지의 양질의 지하수를 활용하여 양조도 이루어졌다. 1921년경에는 코키타 양조장 (스가와라 촌), 타나카 양조장 (히무로 촌), 요네야마 양조소 (동), 이케지리 양조소 (츠다 촌), 야마모토 양조소 (동), 코치 양조소 (쿠즈하 촌) 등 6곳[142]이 있었다. 1970년대까지 코키타 양조장 (후지사카 모토마치, "국화 인형", "수가텐배"), 타나카 양조장 (손테이지, "타니가와"), 이케지리 양조 (츠다 모토마치, "성공 정종"), 츠다 양조 (츠다 모토마치, "히라카타 자랑", "미야츠루"), 시게무라 양조장 (호타니, "후지카스미", "호타니", "요도기쿠") 라는 5개의 양조장이 존재했다. 츠다 양조의 미야츠루는 1995년 전국 신주 감평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실적을 남겼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까지 시게무라 양조장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폐업했다. 주택 지도[143]에서 양조업으로 마지막으로 기재되어 있는 곳은, 이케지리 양조는 1979년[144], 타나카 양조장은 1983년[145], 코키타 양조장은 1992년[146], 츠다 양조는 1994년[147] 이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시게무라 양조장도 2012년 3월에 폐업하여, 히라카타 시내에서 양조업자는 사라졌다[148] .
6. 교육
에도 시대 말기, 히라카타시 지역에는 41개의 데라코야(사숙)가 있어 비교적 유복한 계층의 아이들에게 서예, 독서, 주산을 가르쳤다. 스승은 승려가 많았으며, 농민이나 의사도 그 역할을 담당했다.[149]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능을 가르치는 사숙으로 나카미야 마을의 난메이도, 사카무라의 오카다 혼보 주쿠, 같은 마을의 겐준도가 있었다. 난메이도는 교호 시대(1716~1736년)에 의사인 나메다 기사이에 의해 설립된, 히라카타시에서 가장 오래된 사숙이다. 오카다 혼보 주쿠는 덴메이・간세이 시대(18세기 말)에 오카다 혼보에 의해 설립되었다. 오카다 가문은 대대로 이치노미야 신사(가타노 신사)의 사관이었으며, 오카다 혼보는 하타모토미즈노 씨의 사카무라 진야의 대관을 맡고 있었다. 겐준도는 대대로 의사였던 미우라 가문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의사였던 미우라 겐도가 교화에 힘썼다.[150]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베드타운화로 인해 히라카타시의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부족 문제가 심각해졌다.[110] 각 학교에 임시 조립식 교실이 대량으로 만들어졌으나, 1980년대에 신설 학교 설립과 증축을 통해 교실 부족 문제가 해소되었다.
1980년대를 정점으로 초등학교 아동 수가 감소세로 돌아서면서 학교 통폐합이 이루어졌지만, 소인수 교육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향후 통폐합은 원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전망이다. 2004년에는 중학교 학구제가 조정되어 학생들이 희망하는 중학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히라카타시는 시립 학교에 컴퓨터실 도입, 원어민 영어 교사(ALT)에 의한 영어 교육, 소인수 수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다. 과거 고등학교 진학 지도 방식이었던 '타카츠키・히라카타 방식'의 종합 선발을 의사적으로 재현하는 지역 집중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2008년부터 모든 시립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실에 냉난방 시설이 설치되었고, 모든 초등학교 교정에 잔디밭을 조성하여 쾌적한 학습 환경을 확보하였다. 전국 학력 조사에서 히라카타시의 평균 점수는 전국 및 오사카부 평균을 웃돌고 있으며, 전자 칠판 도입, 여름 방학 단축, 겨울 방학 조정 등의 노력을 통해 학력 향상을 도모하고 있다.
히라카타시의 학교는 기본적으로 사복 등교가 가능하다. 또한, 한자를 일본에 전한 왕인 박사의 묘로 여겨지는 오사카부 사적 「전 왕인 묘」[151]가 시내에 있어, 「한자의 도시 히라카타」로서의 특색을 살려 작문 콩쿠르를 실시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오사카부립 이소시마고등학교(2004년 히라카타니시와 통합되어 히라카타나기사고등학교로)[100]
무라노 중학교(1974년 - 2001년 폐교)
기타마키노 초등학교(1972년 - 2000년 폐교)
무라노 초등학교(1974년 - 2000년 폐교)
나카미야키타 초등학교(1980년 - 2022년 폐교)
고료 초등학교(1968년 - 2022년 폐교)
6. 1. 대학
오사카 치과대학
간사이 의과대학
간사이 외국어 대학교
간사이 외국어대학 단기 대학부
세쓰난 대학 히라카타 캠퍼스
오사카 공업대학 정보과학부
오사카 국제 대학
6. 2. 고등학교
구분
학교명
공립 (부립)
히라카타고등학교
나가오고등학교
마기노고등학교
고리가오카고등학교
히라카타쓰다고등학교
히라카타나기사고등학교
공립 (시립)
오사카시립고등학교
사립
조쇼케이코가쿠엔고등학교
도카이대학부속고등학교
나가오다니고등학교
6. 3. 중학교
히라카타시는 시립 중학교 19개교와 사립 중학교 2개교를 운영하고 있다.
; 시립 중학교 (19개교)
제1중학교
제2중학교
제3중학교
제4중학교
츠다중학교
히라카타중학교
나카미야중학교
쇼다이중학교
쿠스하중학교
쿠스하 니시중학교
히가시코우리중학교
나가오중학교
스기중학교
야마다중학교
나기사 니시중학교
사쿠라가오카중학교
사다중학교
쇼다이 키타중학교
나가오 니시중학교
; 사립 중학교 (2개교)
조쇼 케이코가쿠엔 중학교
도카이 대학 부속 교세이 고등학교 중등부
6. 4. 초등학교
히라카타시에는 시립 초등학교 44개교와 사립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 시립 (44개교)
히라카타 초등학교
히라카타 제2 초등학교
사타 초등학교
코리 초등학교
카이세이 초등학교
고조 초등학교
카스가 초등학교
사쿠라가오카 초등학교
야마다 초등학교
메이린 초등학교
토노야마 제1 초등학교
토노야마 제2 초등학교
쿠즈하 초등학교
츠다 초등학교
스가와라 초등학교
히무로 초등학교
킨노 초등학교
야마노우에 초등학교
마키노 초등학교
코호쿠 초등학교
카요 초등학교
쇼다이 초등학교
나카미야 초등학교
오구라 초등학교
쿠즈하미나미 초등학교
이소지마 초등학교
사타니시 초등학교
쿠즈하니시 초등학교
타구치야마 초등학교
니시마키노 초등학교
카와고에 초등학교
사타히가시 초등학교
사쿠라가오카키타 초등학교
츠다미나미 초등학교
후나바시 초등학교
스가와라히가시 초등학교
야마다히가시 초등학교
후지사카 초등학교
히라노 초등학교
나가오 초등학교
히가시코리 초등학교
이카가 초등학교
니시나가오 초등학교
; 사립 (1개교)
칸사이 소카 초등학교
6. 5. 특수학교
히라카타시에는 부립 특수 교육 학교 2개교가 운영되고 있다.
오사카부립 히라카타 지원학교
오사카부립 무라노 고등 지원학교
7. 교통
히라카타시는 교토부, 나라현과의 경계에 위치하며, 2014년4월 1일에 중핵시로 지정되었다. 시의 서부는 게이한 본선으로 교토시 및 오사카시와 연결되며, 동부는 JR 가타마치선(학연도시선)으로 교바시, 기타신치, 아마가사키 및 간사이 문화 학술 연구 도시와 연결된다.
히라카타시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이곳은 게이한 홀딩스와 게이한 전기철도의 등기상 본점 및 게이한 전기철도의 본사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시의 중심부는 국도 1호선(히라카타 바이패스)이, 동부에는 제2 게이한 도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헤이세이 대합병 당시 네야가와시, 가타노시와의 합병이 논의되어 인구 약 70만 명 규모의 정령 지정 도시를 목표로 한 적도 있었으나("기타카와치시 구상"), 주민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오래전부터 히라카타시는 오사카와 교토를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에도 시대에는 게이카이도, 히가시코야 가이도, 야마네 가이도, 이와후네 가이도, 우지 가이도 등 여러 가도가 이곳을 지나갔다[152]。
1982년부터 국도 168호선이 된 도로는 이와후네 가이도라 불렸으며, 히라카타에서 가타노를 거쳐 나라현으로 이어졌다. 고대에는 가타노가하라로 불리며 왕조 귀족들의 사냥터로 이용되기도 했다[153]。
히가시코야 가이도는 헤이안 시대의 관도인 난카이도를 기원으로 하며, 교토에서 고야산으로 가는 순례길이었다[153]。 교토에서 호라가토게를 넘어 히라카타로 들어와 이코마 산지를 따라 남하하여 니시코야 가이도와 합류, 고야산에 이르렀다. 1966년 이후 국도 1호선(호라가토게~데야시키), 오사카부도 18호 히라카타 가타노 네야가와선(데야시키~나스사쿠), 오사카부도 20호 히라카타 도다바야시 이즈미사노선(나스사쿠~나카노)에 해당하며, 데야시키 주변에는 옛 모습이 남아 있다[154]。
야마네 가이도는 호라가토게에서 히가시코야 가이도와 분기하여 기타베를 거쳐 히가시코야 가이도에 합류하는 가도였다[153][154]。
우지 가이도는 히라카타, 타구치, 나가오를 거쳐 야와타에서 우지로 이어지는 길로, "아라사카토게미치" 또는 "나가오미치"라고도 불렸다[152][154]。
1594년 분로쿠 츠츠미가 정비되고 도로로 이용되면서 게이카이도가 정비되었다. 게이카이도는 히가시코야 가이도를 대신하여 교토-오사카 간의 간선 도로 역할을 하며 히라카타 발전에 기여했다[155]。
1932년 게이한 국도로 정비되어 (구) 국도 1호선으로 불렸고, 1966년 히라카타 바이패스(국도 1호선) 개통 후 오사카부도 13호 교토 모리구치선이 되었다[78]。
히라카타 바이패스(국도 1호선)는 정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2010년 전면 개통된 제2 게이한 도로 등으로 정체 완화를 기대하고 있다[156]。
에도 시대에는 요도가와를 이용한 수운도 활발했다. 교토의 후시미항과 오사카의 하치켄야를 잇는 여객선인 산쥬고코쿠부네를 비롯한 다양한 배가 오갔고, 히라카타하마(미츠야하마), 히노우에하마(구스하하마), 데구치하마(마츠가하나하마), 나기사하마, 이소지마하마 등의 선착장이 설치되었다. 히라카타하마는 츠루야라는 여관이 있어 츠루야하마라고도 불렸으며, 공용으로 사용되는 중요한 선착장이었다[157]。
요도가와를 오가는 배에 접근하여 떡이나 술을 파는 쿠라왕카부네가 명물이 된 것도 이 시기이다. 짓펜샤 잇쿠의 "도카이도 중 힛코마게"[58],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교토 명소 중 요도가와", "육십여 주 명소도회 가와치 히라카타 오토코야마" 등 많은 기행문에 기록되어 있다[59]。
요도가와 대안과의 교통은 1930년 (구) 히라카타 대교 개통 전까지 나룻배가 유일한 수단이었다. 타카하마, 우노덴, 마에지마, 이소지마, 오츠카, 미시마에의 나루터가 대안과 연결되었다. 오츠카의 나루터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158]。
메이지 시대에는 증기 외륜선이 등장했으나, 철도 개통과 자동차 발달, 도로 정비로 인해 육상 수송으로 대체되었다.
최근 요도가와의 선박 운송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 2000년 11월 "요도가와 선박 운송 정비 추진 협의회"가 설립되었고, 2017년 9월에는 하치켄야 후나츠키바와 정기 운항선이 취항하여 한 달에 한 번 정도 운항되고 있다.
1898년 현재의 가타마치선[159]이, 1910년게이한 본선이 개업[160]하여 교토-오사카 간 여객 화물 수송을 대체하게 되었다. 가타마치선은 시내에 있던 육군 시설에 대한 군수 수송도 담당했다. 전후 베드타운화에 따른 인구 증가로 통근, 통학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히라카타시역은 게이한 본선 내에서 3번째로 많은 승강객 수를 기록하고 있다. 게이바시역까지 특급으로 최단 15분, 단바바시역까지 특급으로 최단 18분이면 이동 가능하다.
1929년 시키이코마 전기철도 히라카타선 (후의 게이한 가타노선)이 개업했지만, 이코마역까지 연장 계획은 중단되었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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