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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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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쓰국은 일본의 옛 행정 구역으로, 7세기 초에 설치되어 1869년 5개 구니로 분할되기 전까지 존재했다. 처음에는 '미치노오쿠'라고 불렸으며, 현재의 일본 도호쿠 지방의 넓은 지역을 포괄했다. 712년 데와국 분리, 718년 이와키, 이와세국 분할 등 행정 구역 변화를 겪었으며, 에미시와의 전쟁을 통해 영역을 확장했다. 헤이안 시대에는 아베씨, 데와 기요하라씨, 오슈 후지와라씨 등 호족들이 세력을 떨쳤으며,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무사들이 지배했다. 에도 시대에는 여러 번(藩)이 설치되었으며, 1869년 보신 전쟁 이후 리쿠오, 리쿠추, 리쿠젠, 이와시로, 이와키의 5개 구니로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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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쓰국
지도
1868년 일본의 지방 지도 (무쓰 지방 강조)
1868년 일본의 지방 지도 (무쓰 지방 강조)
기본 정보
공식 명칭무쓰국
다른 이름오슈 (奥州)
리쿠슈 (陸州, 로쿠슈)
소속도산도
영역아오모리현, 이와테현, 미야기현, 후쿠시마현, 아키타현 북동부
국력대국 (령제국)
거리원국
35군 193향
국부1. 미야기현센다이시 (郡山官衙遺跡)
2. 미야기현다가조시 (다가 성터)
국분사미야기현센다이시 (무쓰국분사)
국분니사미야기현센다이시 (무쓰국분니사)
이치노미야시오가마 신사 (미야기현시오가마시)
쓰쓰코와케 신사 (후쿠시마현히가시시라카와군다나구라정 내 2사)
행정 구역
하위 행정 구역리쿠오 지방
리쿠추 지방
리쿠젠 지방
이와시로 지방
이와키 지방
역사
시작 연도654년
종료 연도1869년
이전무쓰 지방
이후리쿠오 지방
리쿠추 지방
리쿠젠 지방
이와시로 지방
이와키 지방
현대 지역
현재 지역후쿠시마현
미야기현
이와테현
아키타현
아오모리현

2. 역사

무쓰국은 처음에는 '미치노오쿠'(みちのおく)라고 불렸으며, 헤이안 시대까지는 '미치노쿠'(みちのく)라고도 불렸다. 그 후에는 '무쓰'(むつ)라고 불렸다.[5][6][7]

기나이에서 보면 산길(후의 도산도)과 카이도우(후의 도카이도)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중앙 정부에 새롭게 복종한 지역을 같은 국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범위는 변천했다. 북쪽으로는 아직 복종하지 않는 에미시와 접했다.

고사기에는 “도오쿠(道奥)”라고 나와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무쓰(陸奥)”가 많지만, 옛 시대에는 “도오쿠(道奥)”도 보이며, 둘 다 “미치노오쿠(みちのおく)”로 읽는다. 와명초는 “무쓰(陸奥)”를 “미치노오쿠(みちのおく)”로 한다. “도(道)”는 옛 시대에는 “국(国)”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도오쿠(道奥)”의 어원은 “수도에서 보아 먼 곳”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헤이안 시대의 와카에서 “무쓰(陸奥)”는 “미치노쿠(みちのく)”로 노래되었다.

효덕 천황 재위 말년(654년)에 아시가라 고개 동쪽에 히타치 국을 비롯한 8개 국을 설치했다는 기록(『일본서기』)이 있으며, 여기에 미치노오쿠가 포함된다고 해석되고 있다. 당시 무쓰국은 현재의 도호쿠 지방 중에서 점차 율령 국가인 일본에 편입된 지역, 즉 미야기현 마쓰시마 이남까지의 광대한 영역을 잠정적으로 포함하는 변방의 대국이었다.

히타치 국에서 분리되는 형태로 성립하여, 이후 헤이안 시대까지 무쓰(미치노쿠)라고 불렸다. 7세기 설치 당시의 범위는 대략 현재의 미야기현 중남부, 야마가타현 내륙부, 후쿠시마현 거의 전역, 이바라키현 북서부에 해당하며, 내륙 분지뿐만 아니라 아부쿠마 고지 동쪽에 위치하는 태평양 연안인 후쿠시마현 하마도리(구 이와키현)와 미야기현 연안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이호 율령 제정 직후 발표된 부역령 조용물조에 관한 민부성 격식(『령집해』수록)에 기재된 여러국의 배열이 시모쓰케국 다음에 무쓰국, 즉 도산도의 위치에 놓여 있다. 이 격식의 발령 시기에 대해서는 다이호 연간설과 와도 연간설이 있으나, 늦어도 8세기 초에는 무쓰국이 도산도에 소속되어 있었음이 밝혀진다.[9]

와도 5년(712년)에 모가미가와 유역의 모가미군과 오키타마군을 에치고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시켜 데와국(현재의 쇼나이 지방)에 넘겼다. 요로 2년(718년)에는 무쓰국・이시키국・이세키국의 세 곳으로 분할되었다가, 요로 4년(720년) 이후 신메이 원년(724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서 이들 3국은 무쓰국에 재편입되었다.

에미시 영역에 접하는 무쓰국에는 무쓰・데와 양국을 통괄하는 무쓰안찰사가 설치되었다. 무쓰 국부에는 진수부가 설치되어 진수장군(후에 진수부장군)이 양국을 군사적으로 통괄하였다. 다이도 3년(808년) 이전에는 무쓰・데와 안찰사, 진수장군 모두 무쓰노카미가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엔랴쿠 21년(802년)에 단자와성이 축조되면서 진수부는 여기로 옮겨졌고, 이후 진관[10]이 국사와 별도로 임명되었다. 국부 다가성은 단자와성 진수부를 후방에서 지키는 역할이었다.[11]

무쓰국은 에미시와의 전쟁을 거쳐 점차 영역을 북쪽으로 확대하여, 최종적으로 면적이 큰 나라가 되었다. 판도 확대에는 성책을 설치하는 정책이 취해졌다.

와명류주쇼에 의한 논의 면적은 51440.75ha, 엔키식에 의한 조인(조의 세수)은 속이었다. 도쿄로의 공진물은 다시마・연다시마・책다시마・세다시마・광다시마, 약초, 붓, 영양의 뿔 등이었다. 교역 잡물에는 사슴가죽, 독한(라쿤 또는 의 털), 사금, 다시마 등이 있었다. 또한 특산물인 금, 명마, 모피, 깃털은 도쿄의 귀족들에게 귀중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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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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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중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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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중 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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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분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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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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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급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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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시오가마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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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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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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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쓰국 남서부(후의 이와시로국) 아이즈 지방에서는, 807년(다이도 2년) 창건 전승을 가진 에이지지가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11세기에서 12세기에 최성기를 맞이하여 무쓰국에서 호쿠리쿠 지방 북부까지 영향력을 가졌다.

헤이안 시대 후기 중앙 통제가 느슨해지자, 포로의 우두머리 아베씨가 무쓰 북부(현재의 이와테현·아오모리현), 오쿠로쿠군에서 시모키타반도, 쥬사미나토[12]에서의 대륙 교역에 이르는 막대한 권익을 가지게 되었다. 아베씨는 국사에 따르지 않고, 전9년의 역에서 싸워 멸망했다. 이때 데와국에서 참전한 키요하라씨가 무쓰·데와 양국에서 세력을 가졌지만, 후3년의 역에서 멸망했다. 이를 대신하여 히라이즈미를 본거지로 하는 오슈후지와라씨가 무쓰·데와의 지배자가 되었다.

오슈 후지와라씨는 후의 리쿠츄국 영역(이와테현) 히라이즈미를 본거지로 하여, 헤이시정권 아래에서도 반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1189년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무쓰 국에 간토 지방 무사들을 지토로 배치했다. 오슈 지방 토착 무사들은 쇠퇴했고, 가마쿠라 시대 이후 무사들이 센고쿠 시대까지 무쓰 국에 흩어져 세력을 형성했다. 그중 가사이 키요시게 등 가사이씨가 시모우사국에서 이시노마키시로 이주하여 헤이안 통치를 맡고 "오슈소부교" 직책에 취임했다. 슈고는 배치되지 않았다.

고다이고 천황겐무 신정 시기에는 한때 친왕임국으로 지정되어 요시나가 친왕이 무쓰국 태수로 부임하였다. 남북조 시대 혼란기에는 다가성이 남조와 북조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그 후 가마쿠라 쇼군 아시카가 우지쓰나 지배하에 들어가지만, 아들 아시카가 미츠카네 시대에 시노가와 고쇼·이나무라 고쇼를 설치했으나 다테 마사무네의 반란을 초래하였다. 또한, 오슈 지방 영주가 막부와 직접 주종 관계를 맺는 교토 후지슈 관계를 맺었다.

가마쿠라 쇼군과 무로마치 막부의 관계 악화로, 막부는 오슈 탄다이를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오사키 씨가 오슈 탄다이를 세습했으나, 남북조 시대 혼란 이후 지방 영주 권한이 강해져 그 권위는 명목상에 불과했고, 권위가 미치는 범위도 제한적이었다. 전국 시대에 무쓰국 남부(현재 후쿠시마현 북부) 다테 씨가 대두하여 다테 타네무네가 무쓰국 수호를 맡게 되고, 오사키 씨가 다테 씨 세력 아래에 편입되면서 오슈 탄다이 지위도 다테 씨에게 빼앗겼다.

대표적인 번으로는 히로사키 번, 모리오카 번, 센다이 번, 나카무라 번, 이와키 히라 번, 후쿠시마 번, 니혼마쓰 번, 시라카와 번, 요네자와 번, 아이즈 번 등이 있다.

1869년1월 19일(메이지 원년 12월 7일), 보신 전쟁에서 패한 오슈에쓰 열번 동맹 처분에 따라 무쓰국과 데와국은 분할되었고, 무쓰국(むつ)은 무쓰국(りくおう)·리쿠츄국·리쿠젠국·이와시로국·이와키국 5개 국으로 분할되었다. 무쓰국(りくおう)은 현재 아오모리현이와테현 북서쪽 니토군을 더한 지역으로, 초기 무쓰국(미치노쿠)에서 300km나 떨어진 지역이었다.

'''엔기시키에서의 조인 배분'''
명목지출(속)
정세{{cvt|603|K|}
분할 후 5개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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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쓰국(りくおう) 지역에 있던 번은 다음과 같다.



메이지 정부의 지방 지배 체제는 이후 폐번치현진대 등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에 메이지 원년의 무쓰국 분할은 정치, 지역권, 문화권 형성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분할 후 국명은 철도역 이름이나 리쿠젠타카타시 등 지명에 사용되고 있다. 또한 무쓰·리쿠추·리쿠젠 3개 국을 총칭하는 "산리쿠"라는 명칭은 산리쿠 해안 등 현재에도 널리 쓰이고 있다.

2. 1. 설치 당시

처음에는 미치노오쿠(道奧)라고 불렸다. 히타치 국 《풍토기》에 따르면 고토쿠 천황 재위 말년인 654년에 히타치국 등 8개 구니(国)가 설치되었는데, 여기에 미치노오쿠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1] 당시 무쓰국의 영역은 지금의 미야기현 중남부, 야마가타현 내륙부, 후쿠시마현 거의 전역에 해당하며, 점차 북쪽으로 확대되었다. 6세기까지 무쓰 지역에는 10개의 구니노미야쓰코(国造)가 있었으나, 고토쿠 천황 치세 후반에 구니노미야쓰코 제도가 고리(評) 제도로 바뀌면서 미치노오쿠국(道奧国)이 설치되었다.[8]

2. 2. 율령제 하의 무쓰국

와도(和銅) 5년(712년)에 모가미 강 유역의 모가미 군(모가미 지방 및 무라야마 지방)과 오키타마 군(오키타마 지방)이 에치고국(越後國)에서 분리되어 새로 성립한 데와국에 속하게 되면서, 무쓰국은 미야기현후쿠시마현 지역에 한정되었다.[9] 요로 2년(718년)에는 무쓰, 이와키, 이와세의 3개 구니로 분할되었다. 이때 무쓰국의 범위는 아부쿠마강 하류의 북안에서 미야기현 중부까지의 좁은 범위였다. 그러나 진키(神龜) 원년(720년)에서 4년(724년) 사이의 언젠가의 시점에서, 세 구니는 다시 합쳐져 원래의 무쓰국이 되었다.[9]

일본 동북쪽 변경의 이민족인 에미시와 경계를 접하고 있던 무쓰에는 무쓰·데와 양국을 통괄하는 무쓰안찰사(陸奥按察使)가 파견되었다. 무쓰국의 고쿠후에는 진슈후(鎭守府)가 설치되었고, 다른 구니에서 보내온 진병의 통괄을 맡았으며 진슈후의 장군인 진슈쇼군(鎭守將軍, 나중에 진슈후쇼군으로 바뀌었다)이 양국을 군사적으로 통괄했다.[10][11] 다이도 3년(808년) 이전에는 무쓰 · 데와의 아제치나 진슈쇼군도 모두 무쓰노카미가 겸임하는 것이 많았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에미시와의 전쟁을 통해 확대된 곳마다 성과 목책을 설치하면서 차츰 영역을 넓혀갔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편찬된 《와메이뤼쥬쇼》에 따르면 당시 무쓰국 경내의 논의 면적은 51440.75ha였다. 《엔기시키》에 기록된 당시 무쓰국에서 바치는 조세 수입은 속이었다. 조정에 바치는 주요 공납품으로는 다시마를 비롯한 해산물과 감초, 진교, 대황, 석곡, 인삼, 부자, 저지 같은 약초, 문구류인 붓, 영양의 뿔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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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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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중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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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중 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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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분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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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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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급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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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시오가마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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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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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 초기, 중앙 정부는 에미시 정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802년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가 이사와성(胆沢城)을 축조하고 진수부를 이곳으로 옮겼다.[1] 이후 진관[10]이 국사와 별도로 임명되어, 단자와성 성주에 진관을 충당하였다. 국부 다가성은 단자와성 진수부를 후방에서 지키는 역할이 되었다.[11]

헤이안 시대 후기에 이르러 중앙 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포로의 우두머리 아베씨 일족이 무쓰 북부(지금의 이와테현 · 아오모리현), 오쿠로쿠군에서 시모키타반도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고, 나아가 쥬사미나토[12]에서의 대륙 교역을 통한 막대한 이익으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고쿠시(國司)를 따르지 않고 반독자적 권력을 누리던 아베씨는 전9년의 역에서 패망했다.

전9년의 역에서 승리하여 데와국에서 참전한 기요하라씨 일족이 무쓰·데와 양국에서 위세를 떨쳤으나 이마저도 후3년의 역으로 패망했다. 이후 오슈 후지와라 씨(奧州藤原氏) 일족이 히라이즈미를 거점으로 무쓰·데와 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들은 모두 현지에서 힘을 키운 호족으로, 중앙 정부인 교토에서 파견된 고쿠시가 통치한다는 율령제의 대원칙을 점차 침식하면서 오슈 후지와라씨 일족의 지배기에 이르러 자치적 영역을 쌓아 올리게 되었다.

오슈 후지와라씨의 세력권은 무쓰 전역에 걸쳐 있었고, 남부에 해당하는 지금의 후쿠시마현 지역은 시누부사토씨 집안이 시누부군(현재의 후쿠시마시)를 본거지로 하여 미야기 현 남부와 야마가타 현 남부, 후쿠시마 현 츄도리 중부를 지배했고, 에이지지 세력이 쇠퇴한 뒤에는 아이즈까지 지배했다. 후쿠시마 현 남동부(나중에는 이와키 국이 됨)에서는, 전9년의 역에 종군한 뒤 이시카와군에 눌러살게 된 세이와겐지의 이시카와씨나 하마도리 남부를 지배한 간무헤이시의 이와키씨도 있었지만, 모두 오슈 후지와라 씨에게 복속해 있었다.[24]

오슈 후지와라씨는 훗날의 리쿠추국 지역(지금의 이와테현)에 해당하는 히라이즈미를 본거지로 삼아, 헤이시정권 치하에서도 반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1189년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3]

한편, 무쓰 남서부(훗날의 이와시로국)의 아이즈 지방에서는, 807년에 창건되었다는 전승이 있는 에이지지가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최전성기를 누리며 무쓰에서 호쿠리쿠 지방 북부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2. 4. 가마쿠라 시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오슈 후지와라씨를 멸망시킨 후, 간토(関東) 무사들을 지토(地頭)로 임명하여 무쓰국을 통치했다.[9] 이로써 오슈 토착 무사 세력은 쇠퇴하고, 가마쿠라 시대부터 전국시대까지 이들의 후손이 무쓰에 할거하며 다스렸다. 그 중 시모우사 국(下總國)에서 오슈로 이주해 온 가사이 기요시게(葛西清重)의 후손인 가사이씨(葛西氏)가 히라이즈미의 통치를 맡아 오슈소부교(奥州総奉行) 직에 취임했다. 슈고(守護)는 없었다. 가마쿠라 시대 후기에는 에조(蝦夷)들의 대규모 반란(안도씨의 난(安藤氏の乱))이 일어났다.

2. 5. 남북조, 무로마치 시대

고다이고 천황이 겐무신정을 실시했을 때, 노리요시 친왕(훗날의 고무라카미 천황)이 무쓰노카미로 부임했다. 이후 무로마치 막부에 의해 오슈 단다이가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아시카가 일족인 사바 집안의 분가로서 무쓰 국 중부(지금의 미야기현 북부)를 세력권으로 하는 오사키 집안이 오슈 단다이를 세습했지만, 그 권위는 제한적이었다. 후에 무쓰 남부(지금의 후쿠시마현 북부)에서 대두한 다테 집안의 다테 다네무네가 무쓰 국의 슈고가 되면서 오사키 집안은 다테 집안의 세력하에 들어가게 되고, 오슈 단다이 지위도 다테 씨에게 빼앗기게 된다.[9]

가마쿠라 시대부터 1868년까지의 무쓰 국

2. 6. 에도 시대

센고쿠 시대에 여러 씨족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에도 시대에는 무쓰국 내에 여러 번(藩)이 설치되었는데, 주요 번으로는 센다이번, 모리오카번, 아이즈번, 니혼마쓰번, 시라카와번 등이 있다.

2. 7. 메이지 시대

1869년1월 19일(메이지 원년 12월 7일), 보신 전쟁에서 패한 오슈에쓰 열번 동맹의 여러 에 대한 처분이 이루어졌다. 같은 날, 무쓰 국은 무쓰 국(리쿠오)·리쿠추·리쿠젠·이와시로·이와키의 5개 국으로 분할되었다.[4] 무쓰 국(리쿠오)은 현재의 아오모리현이와테현 북서쪽의 니토 군을 더한 지역으로, 초기 무쓰 국(미치노쿠)에서 300km나 떨어진 곳이었다.

'''엔기시키에서의 조인 배분'''
명목지출(속)
정세{{cvt|603|K|}
분할 후 5개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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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무쓰 국(리쿠오) 지역에 있던 번은 다음과 같다.



메이지 정부의 지방 지배 체제는 이후 폐번치현진대 등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에, 메이지 원년의 무쓰 국 분할은 정치, 지역권, 문화권 형성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분할 후의 국명은 철도역 이름이나 리쿠젠타카타시 등 지명에 사용되고 있다. 또한 무쓰·리쿠추·리쿠젠 3개 국을 총칭하는 "산리쿠"라는 명칭은 산리쿠 해안 등 현재에도 널리 쓰이고 있다.

3. 무쓰국의 명칭과 유래

처음에는 '미치노오쿠(道奧)'라고 불렸으며, 《히타치국풍토기(常陸國風土記)》에는 고토쿠 천황 재위 말년인 654년히타치국을 비롯한 여덟 개의 구니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미치노오쿠가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道)'는 '국(国)'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미치노오쿠(道奧)'의 어원은 '수도에서 보아 먼 곳'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5]

헤이안 시대에는 '미치노쿠(みちのく)'라고도 불렸으며, 이는 '미치노오쿠(みちのおく)'가 변형되어 줄어든 것이다. '미치노쿠'가 '무쓰(むつ)'로 변한 경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설: 육(陸)이 육(六)의 한자로 사용되는 것을 고려하여 육(陸)을 육(六)으로 쓰고, 거기에 음독을 붙여 '무쓰(むつ)'로 했다는 설이다. 실제로 고대·중세에 육주(陸州)는 자주 사용된 약칭이었고, '육옥국(六奥国)', '육옥수(六奥守)', '육국(六国)'과 같은 표기는 헤이안 시대에도 있었다.[6]
  • 호다 미쓰노리의 설: '미치노쿠(みちのく)'가 '미치노쿠니(みちのくに)'가 되고, '무쓰노쿠니(むつのくに)'로 음운 변화했다는 설이다. '미치노쿠니(みちのくに)'는 《이세 이야기》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7]

4. 국내 시설

무쓰국의 초기 국부는 미야기현 센다이시에 있는 군산 관아 유적으로 추정된다.[9] 724년(신메이 원년) 미야기현 다가조시에 다가성이 건설되면서 국부도 이곳으로 옮겨졌다.[13] 다가 국부는 10세기에 폐절되었으나, 문헌 자료에서는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위치는 센다이시 북동부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13]

군산 관아 유적(미야기현센다이시)


다가성터(미야기현 다가조시)


메이지 시대에는 다가성의 위치가 확정되기 전까지 이와키리나 리후에 있었다는 설, 무쿠마에 국후가 있었다는 설, 후쿠시마현에 국후가 설치되었던 시기가 있었다는 추정도 있었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모두 부정되고 있다.[14][15]

다가성과 다가 국부 시대의 "부중" 범위는 동서남북 경계에 동궁(東宮), 서궁(西宮), 남궁(南宮), 북궁(北宮)이라 불리는 신사가 있었다.[16] 이들 신사가 둘러싼 지역 안팎에 국부, 관리와 그 가족 및 가신과 상인 등이 사는 마을, 사찰·신사, 가도·하천(하천항), 국부진(해항) 등이 집중되어 무쓰국의 정치·경제 중심지로서 무로마치 시대까지 이어졌다.[16][17]

방위명칭현재 위치
북궁북궁신사리후정 가스가 신사 경내사
동궁동궁신사시치가하마정
서궁관천신사야사카 신사 경내사
남궁남궁신사다가조시



동궁은 시치가하마정에, 남궁은 다가조시에, 북궁은 리후정가스가 신사 경내사, 서궁은 관천신사로서 야사카 신사 경내사로 남아 있다.[16] 4개의 신사는 모두 시오가마 신사의 경외말사이다.

무쓰 국분사(미야기현 센다이시)


무쓰 국분사지는 미야기현 센다이시 와카바야시구 키노시타에 있으며, 국의 사적이다. 미야기군에 속하며, 800척(약 242m) 사방으로 추정되는 도다이지식 가람 배치이다. 1189년 오슈 합전으로 소실되었으나, 1607년 다테 마사무네가 재건하여 진언종 지산파 호국산 의왕원 무쓰 국분사(본존: 약사여래)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9]

무쓰 국분니지지는 미야기현 센다이시 와카바야시구 시라하구마치에 있고, 국의 사적이다. 승려 사찰에서 서쪽으로 약 700m 지점에 위치하며, 금당지로 추정되는 토단과 초석만 확인되었을 뿐, 사찰 영역과 가람 배치는 명확하지 않다. 조동종 호국산 국분니지(본존: 관세음보살)가 법등을 계승한다.[9]

연희식 신명장에는 무쓰국에 대사(大社) 15좌 15사, 소사(小社) 85좌 85사, 총 100좌 100사가 기록되어 있다.[20] 주요 신사로는 시오가마 신사(미야기현 시오가마시), 도도코와케 신사(후쿠시마현 다나구라정) 등이 있다.

'''연희식내사'''

『연희식』신명장에 기록된 대사 15사는 다음과 같으며, 모두 명신대사이다.

군명신사명
시라카와군도도코와케 신사(논사 2사)
가리타군가리타미네 신사
미야기군시바히코 신사, 하나세 신사
이로마군다테 신사
시부군히가시야누마 신사
오지카군레이요우사키 신사(논사 2사), 하이헤이시 신사
모모생군케이센마오오시마 신사(논사 수사)
유키카타군타카 신사(논사 2사)
쿠리하라군시바히메 신사(논사 3사)
아이즈군이사스미 신사
아즈마군우나기로와케 신사
시바타군오오타카야마 신사
우타군코부미네 신사



'''총사・일궁이하'''


  • 총사: 무쓰 총사궁(미야기현 다가시) - 시오가마 신사가 총사를 겸했다는 설도 있다.
  • 일궁:
  • * 시오가마 신사(미야기현 시오가마시)
  • * 도도코와케 신사(후쿠시마현 히가시시라카와군타나구라정 내에 논사 2사)
  • 이궁: 이사스미 신사(후쿠시마현 오오누마군아이즈미사토정)


다른 무쓰국 일궁을 자칭하는 신사로 이시도도코와케 신사(후쿠시마현 이시카와군이시카와정)가 있으며, 위에 언급된 도도코와케 신사 2사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전국 일궁회에 가입되어 있다.

4. 1. 국부(国府)

초기 국부는 미야기현 센다이시에 있는 군산 관아 유적으로 추정된다.[9] 724년(신메이 원년)에 미야기현 다가조시에 다가성이 건설되면서 국부도 이곳으로 옮겨졌다.[13] 다가 국부는 10세기에 폐절되었으나, 문헌 자료에서는 그 이후에도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위치는 약간 서쪽(현재의 센다이시 북동부)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13]

메이지 시대에는 다가성의 위치가 확정되기 전까지 다가성·다가 국후가 이와키리나 리후에 있었다는 설도 있었다.[14] 또한, 무쿠마에 국후가 있었다는 설이나, 후쿠시마현에 국후가 설치되었던 시기도 있었다는 추정도 있었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모두 부정되고 있다.[15]

다가성과 다가 국부 시대의 "부중" 범위는 대략 알려져 있는데, 동서남북 경계에 동궁(東宮), 서궁(西宮), 남궁(南宮), 북궁(北宮)이라 불리는 신사가 있었다.[16] 이들 신사가 둘러싼 지역 안팎에 국부, 관리와 그 가족 및 가신과 상인 등이 사는 마을, 사찰·신사, 가도·하천(하천항), 국부진(해항) 등이 집중되어 무쓰국의 정치·경제 중심지로서 무로마치 시대까지 이어졌다.[16][17]

방위명칭현재 위치
북궁북궁신사리후정 가스가 신사 경내사
동궁동궁신사시치가하마정
서궁관천신사야사카 신사 경내사
남궁남궁신사다가조시



현재 동궁은 시치가하마정에, 남궁은 다가조시에 남아 있다.[16] 북궁은 리후정가스가 신사 경내사로, 서궁은 관천신사로서 야사카 신사 경내사로 남아 있다.[16] 4개의 신사 모두 시오가마 신사의 경외말사이다.

4. 2. 국분사(国分寺)・국분니사(国分尼寺)


  • 무쓰 국분사지(미야기현 센다이시 와카바야시구 키노시타): 국의 사적. 무쓰국의 미야기군에 속한다. 추정 사찰 영역은 800척(약 242m) 사방으로 추정되며, 도다이지식 가람 배치이다. 1189년 오슈 합전으로 소실되었으나, 게이쵸 12년(1607년) 다테 마사무네가 같은 위치에 재건하여 진언종 지산파의 호국산 의왕원 무쓰 국분사(본존: 약사여래)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9]
  • 무쓰 국분니지지(미야기현 센다이시 와카바야시구 시라하구마치): 국의 사적. 승려 사찰과 마찬가지로 미야기군에 속하며, 승려 사찰에서 서쪽으로 약 700m 지점에 위치한다. 지금까지 금당지로 추정되는 토단과 초석만 확인되었을 뿐, 사찰 영역과 가람 배치는 명확하지 않다. 추정 사찰 영역과 중복되는 조동종의 호국산 국분니지(본존: 관세음보살)가 법등을 계승한다.[9]

4. 3. 신사(神社)

연희식 신명장에는 무쓰국에 대사(大社) 15좌 15사, 소사(小社) 85좌 85사, 총 100좌 100사가 기록되어 있다.[20] 주요 신사로는 시오가마 신사(미야기현 시오가마시), 도도코와케 신사(후쿠시마현 다나구라정) 등이 있다.

'''연희식내사'''

『연희식』신명장에 기록된 대사 15사는 다음과 같으며, 모두 명신대사이다.

군명신사명
시라카와군도도코와케 신사(논사 2사)
가리타군가리타미네 신사
미야기군시바히코 신사, 하나세 신사
이로마군다테 신사
시부군히가시야누마 신사
오지카군레이요우사키 신사(논사 2사), 하이헤이시 신사
모모생군케이센마오오시마 신사(논사 수사)
유키카타군타카 신사(논사 2사)
쿠리하라군시바히메 신사(논사 3사)
아이즈군이사스미 신사
아즈마군우나기로와케 신사
시바타군오오타카야마 신사
우타군코부미네 신사



'''총사・일궁이하'''


  • 총사: 무쓰 총사궁(미야기현 다가시) - 시오가마 신사가 총사를 겸했다는 설도 있다.
  • 일궁:
  • * 시오가마 신사(미야기현 시오가마시)
  • * 도도코와케 신사(후쿠시마현 히가시시라카와군타나구라정 내에 논사 2사)
  • 이궁: 이사스미 신사(후쿠시마현 오오누마군아이즈미사토정)


다른 무쓰국 일궁을 자칭하는 신사로 이시도도코와케 신사(후쿠시마현 이시카와군이시카와정)가 있으며, 위에 언급된 도도코와케 신사 2사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전국 일궁회에 가입되어 있다.

5. 지역

무쓰국은 넓은 지역을 차지하여 시대에 따라 행정 구역에 변동이 있었다. 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는 36군 160향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후 점차 증가하여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는 54군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무쓰국의 군 수는 시대에 따라 늘거나 줄어 일정하지 않았다.

5. 1. 군(郡)

군명비고
캇타군 (刈田郡)
이구군 (伊具郡)
와타리군 (亘理郡)
시바타군 (柴田郡)
나토리군 (名取郡)
미야기군 (宮城郡)
쿠로카와군 (黒川郡)
카미군 (賀美郡)
시카마군 (色麻郡)해소, 카미군과 합병
타마츠쿠리군 (玉造郡)
시다군 (志太郡)
쿠리하라군 (栗原郡)
나가오카군 (長岡郡)고치현의 나가오카군과 구분됨
니이타군 (新田郡)군마현의 니이타군과 구분됨; 해소, 쿠리하라군에 흡수됨
오다군 (小田郡)해소, 현재 미야기현 토메시에 속함
토다군 (遠田郡)
오시카군 (牡鹿郡)
토메군 (登米郡)
모노군 (桃生郡)
후타군(富多郡)728년 설치, 799년 시카마군에 병합.
다가군(多賀郡)785년 설치, 905년 이전 미야기군에 재통합.



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는 36군 160향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후 점차 증가하여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는 54군이 되었다고 한다. 무쓰국의 군 수는 시대에 따라 증감하여 일정하지 않았다.

6. 인구

연도인구
1721년 (교호享保 6년)|1721년 (교호 6년)일본어196만 2836명
1750년 (간엔寬延 3년)|1750년 (간엔 3년)일본어183만 6134명
1756년 (호레키寶曆 6년)|1756년 (호레키 6년)일본어180만 6192명
1786년 (덴메이天明 6년)|1786년 (덴메이 6년)일본어156만 3719명
1792년 (간세이寬政 4년)|1792년 (간세이 4년)일본어156만 8218명
1798년 (간세이 10년)|1798년 (간세이 10년)일본어158만 9108명
1804년 (분카文化 원년)|1804년 (분카 원년)일본어160만 2948명
1822년 (분세이文政 5년)|1822년 (분세이 5년)일본어165만 629명
1828년 (분세이 11년)|1828년 (분세이 11년)일본어168만 102명
1834년 (덴포天保 5년)|1834년 (덴포 5년)일본어169만 509명
1840년 (덴포 11년)|1840년 (덴포 11년)일본어150만 6193명
1846년 (고카弘化 3년)|1846년 (고카 3년)일본어160만 7881명
1872년 (메이지 5년)|1872년 (메이지 5년)일본어229만 4915명 (옛 무쓰 국 다섯 구니 포함)
※분국 이후 1872년(메이지 5년), 무쓰 국의 인구는 47만 3244명이었다.


참조

[1] 서적 ''Mutsu'' in Japan Encyclopedia Google Books
[2] 서적 Google Books
[3] 서적 A History of Japan to 1334 Stanford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地名「三陸地方」の起源に関する地理学的ならびに社会学的問題 https://web.archive.[...] 2011-07-18
[5] 서적 古事記伝 筑摩書房
[6] 서적 蝦夷
[7] 서적 新撰陸奥風土記 歴史図書社
[8] 웹사이트 大子町の歩みホームページ http://www.town.daig[...]
[9] 서적 七道制と日本の律令制国家運営 吉川弘文館
[10] 문서 鎮守府の鎮守将軍・副将軍・軍監・軍曹などの官職
[11] 서적 律令国と蝦夷 山川出版社
[12] 문서 12세기에는 이미 유구가 존재했음이 국립역사민속박물관 등의 조사에 의해 알려졌다.
[13] 서적 みちのくの都 多賀城・松島、中世陸奥国府の研究
[14] 서적 東北の歴史
[15] 서적 古代および中世の宮城県
[16] 서적 仙台市史 通史編2 古代中世 仙台市史編さん委員会
[17] 서적 せんだい 歴史の窓 河北新報出版センター 2011-10-30
[18] 서적 類聚国史
[19] 서적 文徳天皇実録
[20] 서적 中世諸国一宮制の基礎的研究 岩田書院
[21] 문서 階上に関する諸説
[22] 문서 陸奥の別称
[23] 문서 안동씨의 기원과 12세기 유적
[24] 문서 헤이안 시대 무쓰 및 데와 국 경계와 오슈 후지와라 씨 세력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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