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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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쓰국은 일본의 옛 행정 구역으로, 7세기 초에 설치되어 1869년 5개 구니로 분할되기 전까지 존재했다. 처음에는 '미치노오쿠'라고 불렸으며, 현재의 일본 도호쿠 지방의 넓은 지역을 포괄했다. 712년 데와국 분리, 718년 이와키, 이와세국 분할 등 행정 구역 변화를 겪었으며, 에미시와의 전쟁을 통해 영역을 확장했다. 헤이안 시대에는 아베씨, 데와 기요하라씨, 오슈 후지와라씨 등 호족들이 세력을 떨쳤으며, 가마쿠라 시대 이후에는 무사들이 지배했다. 에도 시대에는 여러 번(藩)이 설치되었으며, 1869년 보신 전쟁 이후 리쿠오, 리쿠추, 리쿠젠, 이와시로, 이와키의 5개 구니로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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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도 - 리쿠젠국
리쿠젠국은 1869년 무쓰국에서 분리되어 설치된 일본의 옛 행정 구역으로, 보신 전쟁 이후 미야기현과 이와테현으로 분할 편입되었으며, 14개의 군으로 구성되었다. - 도산도 - 미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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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쓰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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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무쓰국 |
다른 이름 | 오슈 (奥州) 리쿠슈 (陸州, 로쿠슈) |
소속 | 도산도 |
영역 | 아오모리현, 이와테현, 미야기현, 후쿠시마현, 아키타현 북동부 |
국력 | 대국 (령제국) |
거리 | 원국 |
군 | 35군 193향 |
국부 | 1. 미야기현센다이시 (郡山官衙遺跡) 2. 미야기현다가조시 (다가 성터) |
국분사 | 미야기현센다이시 (무쓰국분사) |
국분니사 | 미야기현센다이시 (무쓰국분니사) |
이치노미야 | 시오가마 신사 (미야기현시오가마시) 쓰쓰코와케 신사 (후쿠시마현히가시시라카와군다나구라정 내 2사) |
행정 구역 | |
하위 행정 구역 | 리쿠오 지방 리쿠추 지방 리쿠젠 지방 이와시로 지방 이와키 지방 |
역사 | |
시작 연도 | 654년 |
종료 연도 | 1869년 |
이전 | 무쓰 지방 |
이후 | 리쿠오 지방 리쿠추 지방 리쿠젠 지방 이와시로 지방 이와키 지방 |
현대 지역 | |
현재 지역 | 후쿠시마현 미야기현 이와테현 아키타현 아오모리현 |
2. 역사
무쓰국은 처음에는 '미치노오쿠'(みちのおく)라고 불렸으며, 헤이안 시대까지는 '미치노쿠'(みちのく)라고도 불렸다. 그 후에는 '무쓰'(むつ)라고 불렸다.[5][6][7]
기나이에서 보면 산길(후의 도산도)과 카이도우(후의 도카이도)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중앙 정부에 새롭게 복종한 지역을 같은 국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범위는 변천했다. 북쪽으로는 아직 복종하지 않는 에미시와 접했다.
고사기에는 “도오쿠(道奥)”라고 나와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무쓰(陸奥)”가 많지만, 옛 시대에는 “도오쿠(道奥)”도 보이며, 둘 다 “미치노오쿠(みちのおく)”로 읽는다. 와명초는 “무쓰(陸奥)”를 “미치노오쿠(みちのおく)”로 한다. “도(道)”는 옛 시대에는 “국(国)”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도오쿠(道奥)”의 어원은 “수도에서 보아 먼 곳”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헤이안 시대의 와카에서 “무쓰(陸奥)”는 “미치노쿠(みちのく)”로 노래되었다.
효덕 천황 재위 말년(654년)에 아시가라 고개 동쪽에 히타치 국을 비롯한 8개 국을 설치했다는 기록(『일본서기』)이 있으며, 여기에 미치노오쿠가 포함된다고 해석되고 있다. 당시 무쓰국은 현재의 도호쿠 지방 중에서 점차 율령 국가인 일본에 편입된 지역, 즉 미야기현 마쓰시마 이남까지의 광대한 영역을 잠정적으로 포함하는 변방의 대국이었다.
히타치 국에서 분리되는 형태로 성립하여, 이후 헤이안 시대까지 무쓰(미치노쿠)라고 불렸다. 7세기 설치 당시의 범위는 대략 현재의 미야기현 중남부, 야마가타현 내륙부, 후쿠시마현 거의 전역, 이바라키현 북서부에 해당하며, 내륙 분지뿐만 아니라 아부쿠마 고지 동쪽에 위치하는 태평양 연안인 후쿠시마현 하마도리(구 이와키현)와 미야기현 연안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이호 율령 제정 직후 발표된 부역령 조용물조에 관한 민부성 격식(『령집해』수록)에 기재된 여러국의 배열이 시모쓰케국 다음에 무쓰국, 즉 도산도의 위치에 놓여 있다. 이 격식의 발령 시기에 대해서는 다이호 연간설과 와도 연간설이 있으나, 늦어도 8세기 초에는 무쓰국이 도산도에 소속되어 있었음이 밝혀진다.[9]
와도 5년(712년)에 모가미가와 유역의 모가미군과 오키타마군을 에치고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시켜 데와국(현재의 쇼나이 지방)에 넘겼다. 요로 2년(718년)에는 무쓰국・이시키국・이세키국의 세 곳으로 분할되었다가, 요로 4년(720년) 이후 신메이 원년(724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서 이들 3국은 무쓰국에 재편입되었다.
에미시 영역에 접하는 무쓰국에는 무쓰・데와 양국을 통괄하는 무쓰안찰사가 설치되었다. 무쓰 국부에는 진수부가 설치되어 진수장군(후에 진수부장군)이 양국을 군사적으로 통괄하였다. 다이도 3년(808년) 이전에는 무쓰・데와 안찰사, 진수장군 모두 무쓰노카미가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엔랴쿠 21년(802년)에 단자와성이 축조되면서 진수부는 여기로 옮겨졌고, 이후 진관[10]이 국사와 별도로 임명되었다. 국부 다가성은 단자와성 진수부를 후방에서 지키는 역할이었다.[11]
무쓰국은 에미시와의 전쟁을 거쳐 점차 영역을 북쪽으로 확대하여, 최종적으로 면적이 큰 나라가 되었다. 판도 확대에는 성책을 설치하는 정책이 취해졌다.
와명류주쇼에 의한 논의 면적은 51440.75ha, 엔키식에 의한 조인(조의 세수)은 속이었다. 도쿄로의 공진물은 다시마・연다시마・책다시마・세다시마・광다시마, 약초, 붓, 영양의 뿔 등이었다. 교역 잡물에는 사슴가죽, 독한(라쿤 또는 개의 털), 사금, 다시마 등이 있었다. 또한 특산물인 금, 명마, 모피, 깃털은 도쿄의 귀족들에게 귀중하게 여겨졌다.
명목 | 지출(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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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 | {{cvt|603|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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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쓰국(りくおう) 지역에 있던 번은 다음과 같다.
메이지 정부의 지방 지배 체제는 이후 폐번치현과 진대 등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에 메이지 원년의 무쓰국 분할은 정치, 지역권, 문화권 형성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분할 후 국명은 철도역 이름이나 리쿠젠타카타시 등 지명에 사용되고 있다. 또한 무쓰·리쿠추·리쿠젠 3개 국을 총칭하는 "산리쿠"라는 명칭은 산리쿠 해안 등 현재에도 널리 쓰이고 있다.
2. 1. 설치 당시
처음에는 미치노오쿠(道奧)라고 불렸다. 히타치 국 《풍토기》에 따르면 고토쿠 천황 재위 말년인 654년에 히타치국 등 8개 구니(国)가 설치되었는데, 여기에 미치노오쿠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1] 당시 무쓰국의 영역은 지금의 미야기현 중남부, 야마가타현 내륙부, 후쿠시마현 거의 전역에 해당하며, 점차 북쪽으로 확대되었다. 6세기까지 무쓰 지역에는 10개의 구니노미야쓰코(国造)가 있었으나, 고토쿠 천황 치세 후반에 구니노미야쓰코 제도가 고리(評) 제도로 바뀌면서 미치노오쿠국(道奧国)이 설치되었다.[8]2. 2. 율령제 하의 무쓰국
와도(和銅) 5년(712년)에 모가미 강 유역의 모가미 군(모가미 지방 및 무라야마 지방)과 오키타마 군(오키타마 지방)이 에치고국(越後國)에서 분리되어 새로 성립한 데와국에 속하게 되면서, 무쓰국은 미야기현과 후쿠시마현 지역에 한정되었다.[9] 요로 2년(718년)에는 무쓰, 이와키, 이와세의 3개 구니로 분할되었다. 이때 무쓰국의 범위는 아부쿠마강 하류의 북안에서 미야기현 중부까지의 좁은 범위였다. 그러나 진키(神龜) 원년(720년)에서 4년(724년) 사이의 언젠가의 시점에서, 세 구니는 다시 합쳐져 원래의 무쓰국이 되었다.[9]일본 동북쪽 변경의 이민족인 에미시와 경계를 접하고 있던 무쓰에는 무쓰·데와 양국을 통괄하는 무쓰안찰사(陸奥按察使)가 파견되었다. 무쓰국의 고쿠후에는 진슈후(鎭守府)가 설치되었고, 다른 구니에서 보내온 진병의 통괄을 맡았으며 진슈후의 장군인 진슈쇼군(鎭守將軍, 나중에 진슈후쇼군으로 바뀌었다)이 양국을 군사적으로 통괄했다.[10][11] 다이도 3년(808년) 이전에는 무쓰 · 데와의 아제치나 진슈쇼군도 모두 무쓰노카미가 겸임하는 것이 많았다.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에미시와의 전쟁을 통해 확대된 곳마다 성과 목책을 설치하면서 차츰 영역을 넓혀갔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편찬된 《와메이뤼쥬쇼》에 따르면 당시 무쓰국 경내의 논의 면적은 51440.75ha였다. 《엔기시키》에 기록된 당시 무쓰국에서 바치는 조세 수입은 속이었다. 조정에 바치는 주요 공납품으로는 다시마를 비롯한 해산물과 감초, 진교, 대황, 석곡, 인삼, 부자, 저지 같은 약초, 문구류인 붓, 영양의 뿔이 있었다.
명목 | 지출(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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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 | {{cvt|603|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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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무쓰 국(리쿠오) 지역에 있던 번은 다음과 같다.
메이지 정부의 지방 지배 체제는 이후 폐번치현과 진대 등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에, 메이지 원년의 무쓰 국 분할은 정치, 지역권, 문화권 형성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분할 후의 국명은 철도역 이름이나 리쿠젠타카타시 등 지명에 사용되고 있다. 또한 무쓰·리쿠추·리쿠젠 3개 국을 총칭하는 "산리쿠"라는 명칭은 산리쿠 해안 등 현재에도 널리 쓰이고 있다.
3. 무쓰국의 명칭과 유래
처음에는 '미치노오쿠(道奧)'라고 불렸으며, 《히타치국풍토기(常陸國風土記)》에는 고토쿠 천황 재위 말년인 654년에 히타치국을 비롯한 여덟 개의 구니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미치노오쿠가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道)'는 '국(国)'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미치노오쿠(道奧)'의 어원은 '수도에서 보아 먼 곳'에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5]
헤이안 시대에는 '미치노쿠(みちのく)'라고도 불렸으며, 이는 '미치노오쿠(みちのおく)'가 변형되어 줄어든 것이다. '미치노쿠'가 '무쓰(むつ)'로 변한 경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설: 육(陸)이 육(六)의 한자로 사용되는 것을 고려하여 육(陸)을 육(六)으로 쓰고, 거기에 음독을 붙여 '무쓰(むつ)'로 했다는 설이다. 실제로 고대·중세에 육주(陸州)는 자주 사용된 약칭이었고, '육옥국(六奥国)', '육옥수(六奥守)', '육국(六国)'과 같은 표기는 헤이안 시대에도 있었다.[6]
- 호다 미쓰노리의 설: '미치노쿠(みちのく)'가 '미치노쿠니(みちのくに)'가 되고, '무쓰노쿠니(むつのくに)'로 음운 변화했다는 설이다. '미치노쿠니(みちのくに)'는 《이세 이야기》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7]
4. 국내 시설
무쓰국의 초기 국부는 미야기현 센다이시에 있는 군산 관아 유적으로 추정된다.[9] 724년(신메이 원년) 미야기현 다가조시에 다가성이 건설되면서 국부도 이곳으로 옮겨졌다.[13] 다가 국부는 10세기에 폐절되었으나, 문헌 자료에서는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위치는 센다이시 북동부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13]
메이지 시대에는 다가성의 위치가 확정되기 전까지 이와키리나 리후에 있었다는 설, 무쿠마에 국후가 있었다는 설, 후쿠시마현에 국후가 설치되었던 시기가 있었다는 추정도 있었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모두 부정되고 있다.[14][15]
다가성과 다가 국부 시대의 "부중" 범위는 동서남북 경계에 동궁(東宮), 서궁(西宮), 남궁(南宮), 북궁(北宮)이라 불리는 신사가 있었다.[16] 이들 신사가 둘러싼 지역 안팎에 국부, 관리와 그 가족 및 가신과 상인 등이 사는 마을, 사찰·신사, 가도·하천(하천항), 국부진(해항) 등이 집중되어 무쓰국의 정치·경제 중심지로서 무로마치 시대까지 이어졌다.[16][17]
동궁은 시치가하마정에, 남궁은 다가조시에, 북궁은 리후정의 가스가 신사 경내사, 서궁은 관천신사로서 야사카 신사 경내사로 남아 있다.[16] 4개의 신사는 모두 시오가마 신사의 경외말사이다.
무쓰 국분사지는 미야기현 센다이시 와카바야시구 키노시타에 있으며, 국의 사적이다. 미야기군에 속하며, 800척(약 242m) 사방으로 추정되는 도다이지식 가람 배치이다. 1189년 오슈 합전으로 소실되었으나, 1607년 다테 마사무네가 재건하여 진언종 지산파 호국산 의왕원 무쓰 국분사(본존: 약사여래)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9]
무쓰 국분니지지는 미야기현 센다이시 와카바야시구 시라하구마치에 있고, 국의 사적이다. 승려 사찰에서 서쪽으로 약 700m 지점에 위치하며, 금당지로 추정되는 토단과 초석만 확인되었을 뿐, 사찰 영역과 가람 배치는 명확하지 않다. 조동종 호국산 국분니지(본존: 관세음보살)가 법등을 계승한다.[9]
연희식 신명장에는 무쓰국에 대사(大社) 15좌 15사, 소사(小社) 85좌 85사, 총 100좌 100사가 기록되어 있다.[20] 주요 신사로는 시오가마 신사(미야기현 시오가마시), 도도코와케 신사(후쿠시마현 다나구라정) 등이 있다.
'''연희식내사'''
『연희식』신명장에 기록된 대사 15사는 다음과 같으며, 모두 명신대사이다.
군명 | 신사명 |
---|---|
시라카와군 | 도도코와케 신사(논사 2사) |
가리타군 | 가리타미네 신사 |
미야기군 | 시바히코 신사, 하나세 신사 |
이로마군 | 다테 신사 |
시부군 | 히가시야누마 신사 |
오지카군 | 레이요우사키 신사(논사 2사), 하이헤이시 신사 |
모모생군 | 케이센마오오시마 신사(논사 수사) |
유키카타군 | 타카 신사(논사 2사) |
쿠리하라군 | 시바히메 신사(논사 3사) |
아이즈군 | 이사스미 신사 |
아즈마군 | 우나기로와케 신사 |
시바타군 | 오오타카야마 신사 |
우타군 | 코부미네 신사 |
'''총사・일궁이하'''
- 총사: 무쓰 총사궁(미야기현 다가시) - 시오가마 신사가 총사를 겸했다는 설도 있다.
- 일궁:
- * 시오가마 신사(미야기현 시오가마시)
- * 도도코와케 신사(후쿠시마현 히가시시라카와군타나구라정 내에 논사 2사)
- 이궁: 이사스미 신사(후쿠시마현 오오누마군아이즈미사토정)
다른 무쓰국 일궁을 자칭하는 신사로 이시도도코와케 신사(후쿠시마현 이시카와군이시카와정)가 있으며, 위에 언급된 도도코와케 신사 2사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전국 일궁회에 가입되어 있다.
4. 1. 국부(国府)
초기 국부는 미야기현 센다이시에 있는 군산 관아 유적으로 추정된다.[9] 724년(신메이 원년)에 미야기현 다가조시에 다가성이 건설되면서 국부도 이곳으로 옮겨졌다.[13] 다가 국부는 10세기에 폐절되었으나, 문헌 자료에서는 그 이후에도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위치는 약간 서쪽(현재의 센다이시 북동부)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13]메이지 시대에는 다가성의 위치가 확정되기 전까지 다가성·다가 국후가 이와키리나 리후에 있었다는 설도 있었다.[14] 또한, 무쿠마에 국후가 있었다는 설이나, 후쿠시마현에 국후가 설치되었던 시기도 있었다는 추정도 있었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모두 부정되고 있다.[15]
다가성과 다가 국부 시대의 "부중" 범위는 대략 알려져 있는데, 동서남북 경계에 동궁(東宮), 서궁(西宮), 남궁(南宮), 북궁(北宮)이라 불리는 신사가 있었다.[16] 이들 신사가 둘러싼 지역 안팎에 국부, 관리와 그 가족 및 가신과 상인 등이 사는 마을, 사찰·신사, 가도·하천(하천항), 국부진(해항) 등이 집중되어 무쓰국의 정치·경제 중심지로서 무로마치 시대까지 이어졌다.[16][17]
현재 동궁은 시치가하마정에, 남궁은 다가조시에 남아 있다.[16] 북궁은 리후정의 가스가 신사 경내사로, 서궁은 관천신사로서 야사카 신사 경내사로 남아 있다.[16] 4개의 신사 모두 시오가마 신사의 경외말사이다.
4. 2. 국분사(国分寺)・국분니사(国分尼寺)
- 무쓰 국분사지(미야기현 센다이시 와카바야시구 키노시타): 국의 사적. 무쓰국의 미야기군에 속한다. 추정 사찰 영역은 800척(약 242m) 사방으로 추정되며, 도다이지식 가람 배치이다. 1189년 오슈 합전으로 소실되었으나, 게이쵸 12년(1607년) 다테 마사무네가 같은 위치에 재건하여 진언종 지산파의 호국산 의왕원 무쓰 국분사(본존: 약사여래)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9]
- 무쓰 국분니지지(미야기현 센다이시 와카바야시구 시라하구마치): 국의 사적. 승려 사찰과 마찬가지로 미야기군에 속하며, 승려 사찰에서 서쪽으로 약 700m 지점에 위치한다. 지금까지 금당지로 추정되는 토단과 초석만 확인되었을 뿐, 사찰 영역과 가람 배치는 명확하지 않다. 추정 사찰 영역과 중복되는 조동종의 호국산 국분니지(본존: 관세음보살)가 법등을 계승한다.[9]
4. 3. 신사(神社)
연희식 신명장에는 무쓰국에 대사(大社) 15좌 15사, 소사(小社) 85좌 85사, 총 100좌 100사가 기록되어 있다.[20] 주요 신사로는 시오가마 신사(미야기현 시오가마시), 도도코와케 신사(후쿠시마현 다나구라정) 등이 있다.'''연희식내사'''
『연희식』신명장에 기록된 대사 15사는 다음과 같으며, 모두 명신대사이다.
군명 | 신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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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카와군 | 도도코와케 신사(논사 2사) |
가리타군 | 가리타미네 신사 |
미야기군 | 시바히코 신사, 하나세 신사 |
이로마군 | 다테 신사 |
시부군 | 히가시야누마 신사 |
오지카군 | 레이요우사키 신사(논사 2사), 하이헤이시 신사 |
모모생군 | 케이센마오오시마 신사(논사 수사) |
유키카타군 | 타카 신사(논사 2사) |
쿠리하라군 | 시바히메 신사(논사 3사) |
아이즈군 | 이사스미 신사 |
아즈마군 | 우나기로와케 신사 |
시바타군 | 오오타카야마 신사 |
우타군 | 코부미네 신사 |
'''총사・일궁이하'''
- 총사: 무쓰 총사궁(미야기현 다가시) - 시오가마 신사가 총사를 겸했다는 설도 있다.
- 일궁:
- * 시오가마 신사(미야기현 시오가마시)
- * 도도코와케 신사(후쿠시마현 히가시시라카와군타나구라정 내에 논사 2사)
- 이궁: 이사스미 신사(후쿠시마현 오오누마군아이즈미사토정)
다른 무쓰국 일궁을 자칭하는 신사로 이시도도코와케 신사(후쿠시마현 이시카와군이시카와정)가 있으며, 위에 언급된 도도코와케 신사 2사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전국 일궁회에 가입되어 있다.
5. 지역
무쓰국은 넓은 지역을 차지하여 시대에 따라 행정 구역에 변동이 있었다. 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는 36군 160향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후 점차 증가하여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는 54군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무쓰국의 군 수는 시대에 따라 늘거나 줄어 일정하지 않았다.
5. 1. 군(郡)
군명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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캇타군 (刈田郡) | |
이구군 (伊具郡) | |
와타리군 (亘理郡) | |
시바타군 (柴田郡) | |
나토리군 (名取郡) | |
미야기군 (宮城郡) | |
쿠로카와군 (黒川郡) | |
카미군 (賀美郡) | |
시카마군 (色麻郡) | 해소, 카미군과 합병 |
타마츠쿠리군 (玉造郡) | |
시다군 (志太郡) | |
쿠리하라군 (栗原郡) | |
나가오카군 (長岡郡) | 고치현의 나가오카군과 구분됨 |
니이타군 (新田郡) | 군마현의 니이타군과 구분됨; 해소, 쿠리하라군에 흡수됨 |
오다군 (小田郡) | 해소, 현재 미야기현 토메시에 속함 |
토다군 (遠田郡) | |
오시카군 (牡鹿郡) | |
토메군 (登米郡) | |
모노군 (桃生郡) | |
후타군(富多郡) | 728년 설치, 799년 시카마군에 병합. |
다가군(多賀郡) | 785년 설치, 905년 이전 미야기군에 재통합. |
《화명류취초(和名類聚抄)》에는 36군 160향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후 점차 증가하여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는 54군이 되었다고 한다. 무쓰국의 군 수는 시대에 따라 증감하여 일정하지 않았다.
6. 인구
연도 | 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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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1년 (교호享保 6년)|1721년 (교호 6년)일본어 | 196만 2836명 |
1750년 (간엔寬延 3년)|1750년 (간엔 3년)일본어 | 183만 6134명 |
1756년 (호레키寶曆 6년)|1756년 (호레키 6년)일본어 | 180만 6192명 |
1786년 (덴메이天明 6년)|1786년 (덴메이 6년)일본어 | 156만 3719명 |
1792년 (간세이寬政 4년)|1792년 (간세이 4년)일본어 | 156만 8218명 |
1798년 (간세이 10년)|1798년 (간세이 10년)일본어 | 158만 9108명 |
1804년 (분카文化 원년)|1804년 (분카 원년)일본어 | 160만 2948명 |
1822년 (분세이文政 5년)|1822년 (분세이 5년)일본어 | 165만 629명 |
1828년 (분세이 11년)|1828년 (분세이 11년)일본어 | 168만 102명 |
1834년 (덴포天保 5년)|1834년 (덴포 5년)일본어 | 169만 509명 |
1840년 (덴포 11년)|1840년 (덴포 11년)일본어 | 150만 6193명 |
1846년 (고카弘化 3년)|1846년 (고카 3년)일본어 | 160만 7881명 |
1872년 (메이지 5년)|1872년 (메이지 5년)일본어 | 229만 4915명 (옛 무쓰 국 다섯 구니 포함) |
※분국 이후 1872년(메이지 5년), 무쓰 국의 인구는 47만 3244명이었다.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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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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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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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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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事記伝
筑摩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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蝦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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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史図書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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鎮守府の鎮守将軍・副将軍・軍監・軍曹などの官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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律令国と蝦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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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에는 이미 유구가 존재했음이 국립역사민속박물관 등의 조사에 의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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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みちのくの都 多賀城・松島、中世陸奥国府の研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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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東北の歴史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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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および中世の宮城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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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台市史 通史編2 古代中世
仙台市史編さん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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せんだい 歴史の窓
河北新報出版センター
201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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類聚国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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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徳天皇実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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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諸国一宮制の基礎的研究
岩田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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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階上に関する諸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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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陸奥の別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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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안동씨의 기원과 12세기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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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헤이안 시대 무쓰 및 데와 국 경계와 오슈 후지와라 씨 세력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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