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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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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경신은 대한애국부인회와 대한광복군 총영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애국부인회에서는 군자금 모금 및 전달 임무를 수행했으며, 1920년에는 상해 임시정부로 피신하여 대한광복군 총영에 가담, 무력 투쟁을 통한 독립을 추구했다. 1920년 평양에서 일어난 폭탄 투척 의거에 참여하여 체포되었으며,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안경신은 무력 투쟁을 통한 독립을 굳게 믿으며,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강인한 투쟁 정신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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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신
기본 정보
안경신 선생
안경신 선생
출생1888년 11월 11일
사망1964년 1월 2일 (향년 75세)
국적대한민국
직업독립운동가
주요 활동
평남도청 폭탄 투척 의거1927년
소속대한독립단
훈장
서훈건국훈장 애족장 (1990년)

2. 대한애국부인회 활동

안경신은 평안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단체는 3.1 운동 이후 국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결성되었으며, 주로 군자금 모금과 연락 활동에 주력했다. 안경신은 대한애국부인회 내에서 교통부원으로 활동하며, 각 지부에서 모금된 군자금을 상해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기지로 전달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았다. 특히 강서군 지회 등 여러 지역 조직과 본부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며 조직 운영에 기여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발각되면서 활동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안경신은 이후 중국으로 피신하여 대한광복군 총영에 가담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2. 1. 군자금 모금 및 전달

대한애국부인회는 임원을 선출하고 지부를 설치하여 조직을 확장했다. 평양감리회지회, 평양장로회지회, 진남포감리회지회, 진남포장로회지회, 강서군감리회지회, 함종감리회지회, 증산감리회지회, 순천장로회지회 등 8개 지부가 가입했으며, 이는 기존의 지방 부인회를 지회로 흡수한 형태였다. 전체 회원은 100여 명에 달했다.

안경신은 대한애국부인회에서 본부와 지부 간의 연락 및 군자금 전달을 담당하는 교통부원으로 활동했다. 그녀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강서군에 기반을 둔 강서지회에서 모금한 군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강서지회는 1919년 3.1 만세운동 직후 한독신(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출신) 등 4명의 여성이 만든 국민향촌회가 모태가 되어, 같은 해 6월 5명으로 재조직된 단체였다.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강서지회 주요 인물
직책이름비고
회장한독신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출신
부회장 겸 서기박영복당시 29세
회원강마리아당시 27세
회원박경순당시 49세
회원홍순실당시 60세



강서지회 회원들은 군자금 모집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모인 자금은 안경신을 통해 상해임시정부로 전달되었다. 강서지회는 약 2년간 활발히 활동했으나, 1921년 6월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회원 전원이 체포되었다.

한편, 대한애국부인회 본부 역시 1920년 10월 일제의 대대적인 검거를 당했다. 이때까지 대한애국부인회가 모금한 군자금은 총 2400KRW여 원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화폐 가치로 상당한 금액이었으며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억 원에 이르는 큰 돈이었다. 이 검거 과정에서 많은 임원과 회원들이 체포되었지만, 안경신은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2. 2. 조직 발각과 피신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워지자, 안경신은 상해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피신했다. 1920년에 조직된 대한광복군 총영에 가담하여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조직은 상해 임시정부의 군사 기관이었다. 안경신은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 "나는 3·1 운동에 참여하였지만 그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우리 백성의 단결력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 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무력 응징 밖에 없다. 투탄(投彈), 자살(刺殺), 사살(射殺)과 같은 공격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방략과 일치하는 것이었으며, 안경신이 대한광복군 총영에 가담한 이유이기도 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남만주와 북만주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무장 단체들은 통일 전선을 형성하여 일본과 싸우고자 했다. 임시정부 평북독판부,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한독립단 등의 대표들이 남만주 관전현에서 첫 회합을 가졌고, 이후 남만주의 한족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모여 다음과 같은 '통일 5원칙'을 마련했다.

# 각 단체의 행동 통일 기관을 설치하고 국내 왜적의 행정기관 파괴 사업을 실행하되, 각 단체의 개별적 명의로 하지 말고 반드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정하는 명의로 할 것

# 연호는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할 것

#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이상 사실을 보고하고 통일 법명을 요청할 것

# 통일 기관은 국내와 접근한 압록강 연안 적당한 지점에 둘 것

# 통일 기관 경비는 원칙적으로 각 단체가 평균 부담하되 국내로부터 특별 수입금은 통일 기관 군사비에 보충할 것

3. 대한광복군 총영 활동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발각된 후 중국으로 망명한 안경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 조직인 대한광복군 총영에 합류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 운동 이후 무력 투쟁을 통한 독립 쟁취를 중요한 전략으로 삼고 있었으며, 대한광복군 총영은 이러한 방침에 따라 국내 일제의 통치 기관 파괴 및 요인 암살 등을 목표로 활동하는 특수 임무 조직의 성격을 띠었다. 안경신은 이러한 무력 투쟁 노선에 깊이 공감하며, 직접 폭탄 제조 기술을 배우고 이를 활용한 국내 거사 계획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는 그녀가 3.1 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보다 직접적인 방식의 항일 투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후 평양에서의 폭탄 투척 의거를 실행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3. 1. 독립전쟁 참여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워지자, 안경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피신했다. 1920년, 그녀는 임시정부의 군사 기관으로 조직된 대한광복군 총영에 가담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안경신은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에게 자신의 결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3.1 운동에 참여하였지만 그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우리 백성의 단결력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 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무력 응징밖에 없다. 투탄(投彈), 자살(刺殺), 사살(射殺)과 같은 공격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안경신의 생각은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진하던 독립 전쟁 방략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하고, 만주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단체들의 통일 전선 구축을 모색했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평북독판부,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한독립단 등의 대표들이 남만주 관전현에서 첫 회합을 가졌고, 이후 남만주의 한족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모여 다음과 같은 '통일 5원칙'을 마련했다.

# 각 단체의 행동 통일 기관을 설치하고 국내 왜적의 행정기관 파괴 사업을 실행하되, 각 단체의 개별적 명의로 하지 말고 반드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정하는 명의로 할 것.

# 연호는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할 것.

#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이상 사실을 보고하고 통일 법명을 요청할 것.

# 통일 기관은 국내와 접근한 압록강 연안 적당한 지점에 둘 것.

# 통일 기관 경비는 원칙적으로 각 단체가 평균 부담하되, 국내로부터 특별 수입금은 통일 기관 군사비에 보충할 것.

1920년 2월, 대한독립단, 한족회, 대한청년단연합회 등의 대표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방문하여 이러한 결의안 시행에 대한 승인을 요청했고 허락을 받았다. 이에 임시정부는 1920년 7월 26일 군무부 직할의 대한광복군사령부 설치안을 의결하고 규정을 제정, 8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포했다. 사령부 본부는 관전현에 두었으며, 8월 10일 사령장 조맹선을 비롯한 간부진과 임원을 임명했다. 당시 조맹선은 중·러 국경지대에서 독립군 양성에 전념하고 있었기에 참모장 이탁이 사령장 대리를 겸임했다. 대한광복군사령부의 편제가 완성되고 조직이 출범하면서, 대한광복군 총영도 그 예하 조직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대한광복군 총영의 창립 시기와 조직 성격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여러 관점이 존재한다. 광복군 총영을 대한광복군사령부 창립 이전 조직으로 보거나, 두 조직을 동일하게 보거나, 혹은 사령부 기능 상실 후 재조직된 것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김영범은 저서 ''의열투쟁 I : 1920년대''(2009)에서 두 조직이 별도로 창립되었다고 보았는데, 그 근거로 광복군 총영의 총영장이던 오동진을 광복군사령부 제2영장으로 임명한 점을 들었다.

어떤 관점에서 보든, 대한광복군 총영은 대한광복군사령부 창립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 기관으로 활동했음은 분명하다. 대한광복군사령부는 만주에서 국내 진공 작전을 수행하는 임시정부 직속 정규군의 총지휘부였고, 대한광복군 총영은 "적의 통치기관 건축물 파괴, 적괴(적의 괴수)·창귀(倀鬼, 악당) 암살, 적의 행정기관 교란"을 목표로 하는 국내 폭탄 투쟁을 주요 임무로 삼았다.

3. 2. 폭탄 제조 훈련

3·1 운동 직후 만주에 있던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망명한 청년들의 독립 정신을 한데 모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중국 상해의 공동 조계 안에 폭탄 제조 학습소 겸 권술 수련소를 비밀리에 설치하였다.

1919년 6월, 약 40명의 청년들이 "작탄(폭탄)으로 구국의 책임을 부담할 목적"으로 구국모험단을 결성하고 폭탄 제조법 강습을 시작했다. 폭탄 제조 교육은 영국인과 광동인을 교사로 초빙하여 이루어졌다. 구국모험단은 이 훈련을 통해 거사용 폭탄 12개를 제조했으며, 이는 임득산이 안동(오늘날 단둥)의 이륭양행까지 운반한 뒤 의용단의 각 지단으로 보내졌다.

광복군 총영에서는 이 폭탄을 사용하여 서울, 평양, 신의주 등 세 도시에서 폭탄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훈련받은 대원 13명을 선발하여 3개 결사대로 나누어 비밀리에 파견하였다. 각 결사대의 구성과 담당 지역은 다음과 같다.

결사대대원담당 지역
제1대김영철, 김성택, 김최명서울
제2대장덕진, 박태열, 문일민, 우덕선, 안경신평양
제3대이학필, 임용일, 김응식선천, 신의주



이 중에서 안경신이 속한 제2대만이 폭탄 거사에 성공하였다.

4. 평양 폭탄 투척 의거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

4. 1. 평양 경찰서 폭파 시도

대한광복군총영 소속 제2대는 의용단 평양지단과 협력하여 평양 시내의 일제 통치기관에 폭탄을 투척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 이들은 음력 5월 하순 대한광복군총영 본영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국내에 들어온 후에는 2개 조로 나뉘어 활동했는데, 제1조는 벽동 읍내로 들어가 친일파 황계익을 처단하고 경고문을 배포하여 그의 죄상을 알렸다. 이후 서하면 파출소를 공격하고 집결지로 복귀했다. 다시 합류한 대원들은 의주, 삭주, 구성을 거쳐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검문하려던 일본 경찰을 사살하고, 1920년 8월 1일 평양 잠입에 성공했다.

평양에서는 의용단 평양지단과 만나 거사 계획을 진행했다. 의용단원 한준관이 운영하는 포목점을 연락 장소로 삼았으며, 안경신은 평양까지 폭탄을 비밀리에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녀는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8월 1일 대동군 박치은의 집에 몸을 숨겼다.

거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의용단원들은 평양 시내 곳곳에 "관공서 근무자 퇴직 명령, 독립군 염탐자 회개 명령, 부호 자금 출연 권고, 일반 국민 단결 권고" 등의 내용이 담긴 긴급 경고문을 뿌렸다.

1920년 8월 3일 밤 9시 30분, 의용단과 광복단 대원들은 3개 조로 나뉘어 거사를 단행했으며, 안경신도 제2조에 합류했다.

  • 제1조: 목표는 평안남도청이었다. 의용단원 김예진과 당시 17세의 숭실중학교 2학년생이었던 김효록이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했다. 이에 문일민과 우덕선이 다시 폭탄을 던져, 신축 중이던 평남경찰부(제3부) 건물의 담장이 무너지고 유리창이 깨졌으며 일본 경찰 2명이 폭사했다.
  • 제2조: 장덕진, 박태열, 안경신으로 구성된 제2조는 평양경찰서 앞에서 폭탄 도화선에 불을 붙였으나, 빗물 때문에 불이 붙지 않아 실패했다.
  • 제3조: 의용단원 여행렬과 표영준이 평양부청에 폭탄을 던졌으나 이 역시 불발되었다.

4. 2. 체포와 재판

대동경찰서는 안경신이 숨어 있는 곳을 파악하고 1921년 3월 20일 그녀를 체포하였다. 원산을 거쳐 3월 25일 평양으로 압송되었고, 다음 날인 26일에는 출산한 지 12일 된 아기를 안고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으로 호송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검사는 안경신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이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안경신이 평남도청 폭탄 사건과 무관하다는 내용의 투서를 보냈다. 당시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보창로에 있던 광복군 사령장 이탁의 자택에서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와 장덕진 등이 모여 "평남도청 폭탄 사건은 임시정부 특명으로 광복군 사령장의 지휘 하에 결사대장 장덕진이 동지들과 함께 투탄한 것이며, 안경신은 전혀 무관하니 방면하라"는 내용의 투서를 작성했다. 이 투서에는 김구, 이탁, 장덕진 등이 연서하여 조선총독부로 발송되었다.

안경신은 1심 판결에 불복하고 무죄를 주장하며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그녀의 재판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동아일보는 재판 상황에 대해, 방청석이 입추의 여지 없이 가득 찼고 모든 날카로운 시선이 안경신에게 모였으며, 재판장의 심문에 그녀가 "하지 아니한 일을 하였다니까 불만족이 아니고 무슨 일인인가"라고 답했다고 보도하였다.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투서가 참작되어 안경신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평양감옥에 수감된 지 석 달이 채 되지 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이후 평양 신양리에 거주하던 오빠 안세균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어렵게 낳은 아들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큰 슬픔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동지였던 장덕진마저 1924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중국인과 시비 끝에 입은 중상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안경신은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자식은 병신이오니 어느것이 서럽지 않겠습니까마는 동지 장덕진씨의 비명을 듣고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세상이 모두 원수같이 생각됩니다"라고 말하며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5. 안경신의 독립운동 정신

안경신은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준 인물이다. 그녀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방법으로 외교적 노력보다는 직접적인 무력 투쟁이 필요하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1] 개인적인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이러한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동지들 역시 그녀의 강인한 투쟁 정신과 무력 투쟁 노선을 높이 평가했다.[1] 안경신의 이러한 정신과 활동은 당시 여성 독립운동가의 치열한 항일 투쟁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5. 1. 무력 투쟁 신념

안경신은 1심의 사형 판결에 불복하여 평양복심법원에 공소하였고, 재판 과정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1] 당시 동아일보는 재판정의 상황과 안경신의 당당한 태도를 상세히 보도했다. 안경신은 재판에서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판결받은 것에 대한 불만을 명확히 표현했다.[1] 상해 임시정부의 탄원이 참작되어 최종적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1]

평양감옥에 수감된 지 석 달도 되지 않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출옥 후 평양 신양리에 거주하던 오빠 안세균의 집으로 갔으나 어렵게 낳은 아들이 시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큰 슬픔에 잠겼다.[1] 또한, 동지였던 장덕진이 1924년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중국인과의 시비 끝에 얻은 부상으로 사망했다는 비보까지 접하게 되었다.[1] 이러한 개인적인 비극 속에서도 안경신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슬픔을 토로하면서도 독립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았다.

: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자식은 병신이오니 어느것이 서럽지 않겠습니까마는 동지 장덕진씨의 비명을 듣고는 눈물이 앞을 가리어 세상이 모두 원수같이 생각됩니다."[1]

안경신은 독립운동의 방략에 있어 외교적 노력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으며, 오직 무력 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1] 이러한 신념은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의 증언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한 동지는 안경신에 대해 "비록 몸은 작고 보잘 것 없이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으나 그녀는 결코 그렇지 않다. 외모보다는 내면의 세계가 알차고 강인한 투쟁정신으로 일관되어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고 평가하며, 안경신이 직접 했던 말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 "오늘의 사태를 해결하는 길은 독립의 청원이나 협상으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협론으로 타결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취할 약간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무엇이 가장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무력적 응징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1]

동지 최매지 역시 안경신의 확고한 항일 의열항쟁 신념을 증언했다.

: "독립투쟁가가 많이 있고 여성투쟁가도 수없이 있다. 그러나 안경신같이 시종일관 무력적 투쟁에 앞장서서 강렬한 폭음과 함께 살고 죽겠다는 야말찬 친구는 처음 보았다. 너무 강폭한 투탄 폭살 투쟁으로 오히려 해를 받는다면 항일투쟁에 가담 활동하지 아니함만 같지 못하게 아니냐고 물으면 그녀는 잔잔한 미소만 띠고 긍정하지 않았다."[1]

이처럼 안경신은 개인적인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무력 투쟁 노선을 견지했으며,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폭탄 거사에 과감히 참여하는 등 철저한 독립 의지를 보여주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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