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알렉스 그라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알렉스 그라만은 미국의 야구 선수로, 투수 포지션에서 활동했다.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1999년 뉴욕 양키스에 지명되어 마이너 리그에서 6시즌을 보냈다. 2004년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시카고 화이트삭스,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 신시내티 레즈에서 활동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일본 프로 야구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뛰었으며, 2008년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12년에는 KIA 타이거즈와 계약했으나, 메디컬 테스트 불합격으로 계약이 무산되었다. 은퇴 후에는 유소년 야구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인디애나주 출신 야구 선수 - 칼 어스킨
    칼 어스킨은 [주제]에 대한 역사, 현황, 쟁점, 전망과 과제, 관련 단체 및 기관 등 한국 사회에서의 다양한 측면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관련 통계 및 데이터를 제공하는 문서이다.
  • 인디애나주 출신 야구 선수 - 토미 헌터
    토미 헌터는 2007년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하여 2017년 탬파베이 레이스에서 활약했으며, 컷 패스트볼 등 다양한 구종을 구사하며 여러 팀을 거쳐 2023년 은퇴한 미국의 야구 선수이다.
  • 세이부 라이온스 선수 - 송재박
    송재박은 일본과 한국 프로 야구에서 선수와 코치로 활동하며, 일본에서는 세이부 라이온스와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스에서, 한국에서는 OB 베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은퇴 후 두산 베어스 코치로 활동하며 우수 코치상을 수상했다.
  • 세이부 라이온스 선수 - 마쓰자카 다이스케
    마쓰자카 다이스케는 '헤이세이의 괴물'이라 불리며 고시엔에서 활약한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NPB와 메이저 리그에서 활동하며 WBC MVP를 두 차례 수상했고 올림픽에도 참가했다.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선수 - 앤디 밴 헤켄
    앤디 밴 헤켄은 미국 출신의 야구 선수로, 메이저 리그와 한국, 대만 프로야구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넥센 히어로즈에서 20승을 기록하며 골든글러브를 수상하고, 은퇴 후에는 투구 코치로 활동한다.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선수 - 오카모토 신야
    일본과 한국 프로야구에서 중간 계투로 활약하며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최우수 중간 계투상을 수상하고 여러 팀에서 우승을 경험한 오카모토 신야는 은퇴 후 음식점 운영과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알렉스 그라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알렉스 그래먼
원어 이름Alex Graman
출생일1977년 11월 17일
출생지인디애나주 헌팅버그
포지션구원 투수
투타좌투좌타
선수 경력
고등학교사우트리지 고등학교
대학교인디애나 주립 대학교
프로 입단1999년 (MLB 드래프트 3라운드)
선수 생활뉴욕 양키스 (2004년 ~ 2005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006년 ~ 2011년)
MLB 경력
데뷔 리그MLB
데뷔일2004년 4월 20일
데뷔 팀뉴욕 양키스
마지막 출장일2005년 7월 27일
뉴욕 양키스 (2004년 ~ 2005년)
NPB 경력
데뷔 리그NPB
데뷔일2006년 3월 29일
데뷔 팀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마지막 출장일2011년 11월 3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006년 ~ 2011년)
수상 경력
주요 수상아시아 시리즈 우승 (2008년)
일본 시리즈 우승 (2008년)
NPB 통산 기록
승패11승 17패
평균 자책점3.86
세이브51
탈삼진145
기타 정보
계약금 (프로 입단 시)5만 달러
연봉 (2010년)30만 달러

2. 대학 시절

알렉스 그라만은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밥 웜 코치의 지도하에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에서 3년 동안 선수로 활동했다. 1998년 미주리 밸리 컨퍼런스(MVC)에서 2팀 올스타로 선정되며 선수 경력을 마쳤다. 그라만은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 역사상 통산 10개 이상의 탈삼진 경기가 5경기로 4위에 랭크되었으며, 단일 시즌 탈삼진 112개로 학교 기록 7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뉴욕 양키스에 3라운드로 지명되었다.

3. 프로 경력

1999년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 산하에서 6시즌을 보냈다. 1999년에는 스테이튼아일랜드 양키스(Staten Island Yankees)에서 6승 3패를 기록했고, 뉴욕-펜 리그(New York–Penn League)의 유망주로 선정되었다. 2000년에는 플로리다 주 리그(Florida State League)의 탬파 양키스(Tampa Yankees)에서 8승 9패를 기록했고, 이스턴 리그(Eastern League)의 노리치 내비게이터스(Norwich Navigators)로 더블 A 승격을 했다. 2001년과 2002년 일부를 내비게이터스에서 보냈고 17승 11패를 기록했으며, 2002년에는 인터내셔널 리그(International League)의 콜럼버스 클리퍼스(Columbus Clippers)로 트리플 A 승격을 했다. 그는 다음 4시즌(2002–2005)을 콜럼버스에서 보냈고, 31승 31패를 기록했다. 2004년에는 인터내셔널 리그(International League)에서 탈삼진(129개) 1위를 기록했고, 콜럼버스 클리퍼스(Columbus Clippers)에서 '''올스타'''로 선정되었다. 2005 시즌은 신시내티 레즈(Cincinnati Reds)의 최상위 팜 클럽인 루이빌 배츠(Louisville Bats)에서 2승 1패로 마쳤다.[1]

마이너 리그 경력 투구[1]
GGSCGWLERAKBBIP
177167864563.73820352963.1



뉴욕 양키스의 팜 시스템에서 6시즌을 보낸 후 2004년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데뷔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첫 선발 등판에서 2⅔이닝 동안 5실점을 기록했다.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와의 다음 선발 등판에서는 ⅓이닝 만을 소화하며 5자책점을 내줬지만, 두 경기 모두 패배는 면했다. 그는 탬파베이와의 경기가 끝난 후 콜럼버스 클리퍼스로 강등되었다. 그 해 그는 19.8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2005년에는 약간 나아진 모습을 보였지만, 1⅓이닝 동안 2자책점을 기록한 후 양키스에서 지명 할당되었고, 이후 방출되었다. 2005년 8월 10일, 그라만은 신시내티 레즈와 계약했다. 그는 산하 트리플 A팀인 루이빌 배츠에서 5경기에 출전했지만, 3.0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2005년 9월 12일에 방출되었다.

양키스에서 5번의 메이저 리그 경기에 출전하여 6⅔이닝을 투구했고 17안타와 13자책점을 내주어 18.4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2006년 일본 프로 야구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 계약을 체결하고 2011년까지 활약한다.

2006년 1월 15일, 세이부 라이온스와 1년 5천만 엔(약 US$467,000) 계약을 체결했다.[2] 그 해 3월 29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 (기타큐슈)에서 일본 진출 첫 선발 첫 승을 거두었지만, 세・퍼 교류전에서는 연달아 이른 이닝에 KO당하며 2군으로 강등되었다. 재승격 후에도 1승밖에 추가하지 못하고, 8월 이후에는 2군 생활을 했다. 13경기 등판으로 4승 6패를 기록했다.

2007년에는 좌완 에이스 호아시 가즈유키가 부상으로 출전이 늦어지면서, 유일한 좌완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으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부진으로 2승 6패, 평균자책점 5점대로 팀에 기여하지 못해 시즌 도중에 구원 투수로 전환했다. 짧은 이닝에 전념함으로써 구속이 대폭 상승했다. 6월 1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의 9회에 등판한 것이 첫 구원 등판이었고, 그 4일 후에는 구원으로 처음으로 승리 투수가 되었다. 7월부터는 부진한 오노데라 치카라를 대신해 클로저로 활약하며, 7월 7일 소프트뱅크전에서 첫 세이브를 올렸다. 리그 5위인 17세이브를 기록했다. 구원 투수 전환 후에는 1패도 하지 않았고, 30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은 2.08로 뛰어난 안정감을 자랑했다.

2008년에는 마무리 투수로서 입지를 굳혀 3승 3패, 31 세이브, 평균자책점 1.42를 기록했다. 세이부의 외국인 투수로서 30세이브 달성은 구단 사상 처음이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안정감을 되찾아, 1차전과 7차전 (둘 다 1점차 경기)에 등판하여, 1차전에서는 1이닝, 7차전에서는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2세이브를 올리며 헹가래 투수가 되는 등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9년에는 개막 후에 왼쪽 어깨 통증을 호소해, 5월에 '왼쪽 어깨 관절낭 파열'로 진단받고 수술을 받았다. 그 후 등판 없이 시즌을 마쳤다.

2010년에는 8월 28일에 시즌 후반에 처음으로 1군에 등록되었다. 그러나 등판해도 많이 맞으며, 7경기 등판에서 10실점 (자책점 9)을 기록하는 등 결과를 남기지 못했다.

2011년에는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일시 귀국했다. 그 영향으로 개막은 2군에서 맞이했지만, 그 후 바로 1군에 등록되었다. 구원 투수로 기용되었고, 5월 15일 소프트뱅크전에서 2년 만에 세이브를 올렸다. 마무리 투수는 신인 마키타 가즈히사가 발탁되었기 때문에, 구원으로 등판 횟수는 늘었지만 29경기에 그쳤고, 평균자책점은 4점대에 머물렀으며, 볼넷도 많아 투구 내용에는 기복이 있는 시즌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2일, 자유 계약이 공시되었다.

3. 1. 미국 프로 야구 시절

wikitext

1999년 뉴욕 양키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이후 6시즌을 마이너 리그에서 보낸 후 2004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전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2005년까지 메이저 리그 생활을 했다.

; 마이너 리그 시절

1999년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 산하에서 6시즌을 보냈다. 1999년에는 스테이튼아일랜드 양키스(Staten Island Yankees)에서 6승 3패를 기록했고, 뉴욕-펜 리그(New York–Penn League)의 유망주로 선정되었다. 2000년에는 플로리다 주 리그(Florida State League)의 탬파 양키스(Tampa Yankees)에서 8승 9패를 기록했고, 이스턴 리그(Eastern League)의 노리치 내비게이터스(Norwich Navigators)로 더블 A 승격을 했다. 2001년과 2002년 일부를 내비게이터스에서 보냈고 17승 11패를 기록했으며, 2002년에는 인터내셔널 리그(International League)의 콜럼버스 클리퍼스(Columbus Clippers)로 트리플 A 승격을 했다. 그는 다음 4시즌(2002–2005)을 콜럼버스에서 보냈고, 31승 31패를 기록했다. 2004년에는 인터내셔널 리그(International League)에서 탈삼진(129개) 1위를 기록했고, 콜럼버스 클리퍼스(Columbus Clippers)에서 '''올스타'''로 선정되었다. 2005 시즌은 신시내티 레즈(Cincinnati Reds)의 최상위 팜 클럽인 루이빌 배츠(Louisville Bats)에서 2승 1패로 마쳤다.[1]

마이너 리그 경력 투구[1]
GGSCGWLERAKBBIP
177167864563.73820352963.1



; 메이저 리그 시절

뉴욕 양키스의 팜 시스템에서 6시즌을 보낸 후 2004년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데뷔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첫 선발 등판에서 2⅔이닝 동안 5실점을 기록했다.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와의 다음 선발 등판에서는 ⅓이닝 만을 소화하며 5자책점을 내줬지만, 두 경기 모두 패배는 면했다. 그는 탬파베이와의 경기가 끝난 후 콜럼버스 클리퍼스로 강등되었다. 그 해 그는 19.8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2005년에는 약간 나아진 모습을 보였지만, 1⅓이닝 동안 2자책점을 기록한 후 양키스에서 지명 할당되었고, 이후 방출되었다. 2005년 8월 10일, 그라만은 신시내티 레즈와 계약했다. 그는 산하 트리플 A팀인 루이빌 배츠에서 5경기에 출전했지만, 3.0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2005년 9월 12일에 방출되었다.

양키스에서 5번의 메이저 리그 경기에 출전하여 6⅔이닝을 투구했고 17안타와 13자책점을 내주어 18.4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3. 1. 1. 마이너 리그 시절

1999년 뉴욕 양키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이후 6시즌을 마이너 리그에서 보냈다.[1] 그라만은 뉴욕 양키스(New York Yankees) 산하에서 6시즌을 보냈다. 1999년에는 스테이튼아일랜드 양키스(Staten Island Yankees)에서 6승 3패를 기록했고, 뉴욕-펜 리그(New York–Penn League)의 유망주로 선정되었다. 2000년에는 플로리다 주 리그(Florida State League)의 탬파 양키스(Tampa Yankees)에서 8승 9패를 기록했고, 이스턴 리그(Eastern League)의 노리치 내비게이터스(Norwich Navigators)로 더블 A 승격을 했다. 2001년과 2002년 일부를 내비게이터스에서 보냈고 17승 11패를 기록했으며, 2002년에는 인터내셔널 리그(International League)의 콜럼버스 클리퍼스(Columbus Clippers)로 트리플 A 승격을 했다. 그는 다음 4시즌(2002–2005)을 콜럼버스에서 보냈고, 31승 31패를 기록했다. 2004년에는 인터내셔널 리그(International League)에서 탈삼진(129개) 1위를 기록했고, 콜럼버스 클리퍼스(Columbus Clippers)에서 '''올스타'''로 선정되었다. 2005 시즌은 신시내티 레즈(Cincinnati Reds)의 최상위 팜 클럽인 루이빌 배츠(Louisville Bats)에서 2승 1패로 마쳤다.[1]

마이너 리그 경력 투구[1]
GGSCGWLERAKBBIP
177167864563.73820352963.1


3. 1. 2. 메이저 리그 시절

1999년 뉴욕 양키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이후 6시즌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후 2004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전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2005년까지 메이저 리그 생활을 했다.

그라만은 뉴욕 양키스의 팜 시스템에서 6시즌을 보낸 후 2004년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데뷔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첫 선발 등판에서 2⅔이닝 동안 5실점을 기록했다.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와의 다음 선발 등판에서는 ⅓이닝 만을 소화하며 5자책점을 내줬지만, 두 경기 모두 패배는 면했다. 그는 탬파베이와의 경기가 끝난 후 콜럼버스 클리퍼스로 강등되었다. 그 해 그는 19.8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2005년에는 약간 나아진 모습을 보였지만, 1⅓이닝 동안 2자책점을 기록한 후 양키스에서 지명 할당되었고, 이후 방출되었다. 2005년 8월 10일, 그라만은 신시내티 레즈와 계약했다. 그는 산하 트리플 A팀인 루이빌 배츠에서 5경기에 출전했지만, 3.0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2005년 9월 12일에 방출되었다.

양키스에서 5번의 메이저 리그 경기에 출전하여 6⅔이닝을 투구했고 17안타와 13자책점을 내주어 18.4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1999년, 뉴욕 양키스에서 드래프트 3라운드로 지명되어 계약했다.

2004년 4월 20일에 메이저 리그 데뷔.

하지만, 2004년에 3경기, 2005년에 2경기 등판했을 뿐이며, 2005년 7월에 양키스에서 방출되었다.

3. 2. 일본 프로 야구 시절

2006년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 계약을 체결했다. 영입 과정에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경쟁이 있었을 정도로, 일본 입국 전부터 스카우트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6년 1월 15일, 세이부 라이온스와 1년 5천만 엔(약 US$467,000) 계약을 체결했다.[2] 그 해 3월 29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 (기타큐슈)에서 일본 진출 첫 선발 첫 승을 거두었지만, 세・퍼 교류전에서는 연달아 이른 이닝에 KO당하며 2군으로 강등되었다. 재승격 후에도 1승밖에 추가하지 못하고, 8월 이후에는 2군 생활을 했다. 13경기 등판으로 4승 6패를 기록했다.

2007년에는 좌완 에이스 호아시 가즈유키가 부상으로 출전이 늦어지면서, 유일한 좌완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으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부진으로 2승 6패, 평균자책점 5점대로 팀에 기여하지 못해 시즌 도중에 구원 투수로 전환했다. 짧은 이닝에 전념함으로써 구속이 대폭 상승했다. 미국에서도 구원 등판은 거의 없었지만, 이것이 효과를 발휘하여 구위가 비약적으로 증가해 강력한 피칭을 보여주었다. 6월 1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의 9회에 등판한 것이 첫 구원 등판이었고, 그 4일 후에는 구원으로 처음으로 승리 투수가 되었다. 7월부터는 부진한 오노데라 치카라를 대신해 클로저로 활약하며, 7월 7일 소프트뱅크전에서 첫 세이브를 올렸다. 리그 5위인 17세이브를 기록했다. 구원 투수 전환 후에는 1패도 하지 않았고, 30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은 2.08로 뛰어난 안정감을 자랑했다.

2008년에는 마무리 투수로서 입지를 굳혀 3승 3패, 31 세이브, 평균자책점 1.42를 기록했다. 30세이브 이상은 2003년의 도요다 기요시 (38세이브) 이후이며, 세이부의 외국인 투수로서 30세이브 달성은 구단 사상 처음이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안정감을 되찾아, 1차전과 7차전 (둘 다 1점차 경기)에 등판하여, 1차전에서는 1이닝, 7차전에서는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2세이브를 올리며 헹가래 투수가 되는 등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2009년에는 개막 후에 왼쪽 어깨 통증을 호소해, 5월에 '왼쪽 어깨 관절낭 파열'로 진단받고 수술을 받았다. 그 후 등판 없이 시즌을 마쳤다.

2010년에는 8월 28일에 시즌 후반에 처음으로 1군에 등록되었다. 그러나 등판해도 많이 맞으며, 7경기 등판에서 10실점 (자책점 9)을 기록하는 등 결과를 남기지 못했다.

2011년에는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다른 용병 선수들과 함께 일시 귀국했다. 그 영향으로 개막은 2군에서 맞이했지만, 그 후 바로 1군에 등록되었다. 구원 투수로 기용되었고, 5월 15일 소프트뱅크전에서 2년 만에 세이브를 올렸다. 마무리 투수는 신인 마키타 가즈히사가 발탁되었기 때문에, 구원으로 등판 횟수는 늘었지만 29경기에 그쳤고, 평균자책점은 4점대에 머물렀으며, 볼넷도 많아 투구 내용에는 기복이 있는 시즌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2일, 자유 계약이 공시되었다.

3. 2. 1. 세이부 시절 (2006-2011)

2006년 일본 프로 야구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 계약을 체결하고 2011년까지 활약한다.

2006년 1월 15일, 세이부 라이온스와 1년 5천만 엔(약 US$467,000) 계약을 체결했다.[2] 그 해 3월 29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 (기타큐슈)에서 일본 진출 첫 선발 첫 승을 거두었지만, 세・퍼 교류전에서는 연달아 이른 이닝에 KO당하며 2군으로 강등되었다. 재승격 후에도 1승밖에 추가하지 못하고, 8월 이후에는 2군 생활을 했다. 13경기 등판으로 4승 6패를 기록했다.

2007년에는 좌완 에이스 호아시 가즈유키가 부상으로 출전이 늦어지면서, 유일한 좌완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으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부진으로 2승 6패, 평균자책점 5점대로 팀에 기여하지 못해 시즌 도중에 구원 투수로 전환했다. 짧은 이닝에 전념함으로써 구속이 대폭 상승했다. 6월 1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의 9회에 등판한 것이 첫 구원 등판이었고, 그 4일 후에는 구원으로 처음으로 승리 투수가 되었다. 7월부터는 부진한 오노데라 치카라를 대신해 클로저로 활약하며, 7월 7일 소프트뱅크전에서 첫 세이브를 올렸다. 리그 5위인 17세이브를 기록했다. 구원 투수 전환 후에는 1패도 하지 않았고, 30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은 2.08로 뛰어난 안정감을 자랑했다.

2008년에는 마무리 투수로서 입지를 굳혀 3승 3패, 31 세이브, 평균자책점 1.42를 기록했다. 세이부의 외국인 투수로서 30세이브 달성은 구단 사상 처음이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안정감을 되찾아, 1차전과 7차전 (둘 다 1점차 경기)에 등판하여, 1차전에서는 1이닝, 7차전에서는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2세이브를 올리며 헹가래 투수가 되는 등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9년에는 개막 후에 왼쪽 어깨 통증을 호소해, 5월에 '왼쪽 어깨 관절낭 파열'로 진단받고 수술을 받았다. 그 후 등판 없이 시즌을 마쳤다.

2010년에는 8월 28일에 시즌 후반에 처음으로 1군에 등록되었다. 그러나 등판해도 많이 맞으며, 7경기 등판에서 10실점 (자책점 9)을 기록하는 등 결과를 남기지 못했다.

2011년에는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영향으로 일시 귀국했다. 그 영향으로 개막은 2군에서 맞이했지만, 그 후 바로 1군에 등록되었다. 구원 투수로 기용되었고, 5월 15일 소프트뱅크전에서 2년 만에 세이브를 올렸다. 마무리 투수는 신인 마키타 가즈히사가 발탁되었기 때문에, 구원으로 등판 횟수는 늘었지만 29경기에 그쳤고, 평균자책점은 4점대에 머물렀으며, 볼넷도 많아 투구 내용에는 기복이 있는 시즌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2일, 자유 계약이 공시되었다.

3. 3. KBO 리그 시절

2012년 1월 15일 KIA 타이거즈에 입단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나, 메디컬 테스트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고[7] 2월 5일 계약이 무산되었다. 한국 프로 야구 KIA 타이거즈와 계약금 5만 달러에 계약을 체결했지만, 신체검사와 투구 훈련에서 통과하지 못했다.[5] KIA에서의 등록명은 '''알렉스'''로 발표되었지만, 왼쪽 팔꿈치 등에 이상이 발견되었고, 스프링 캠프 투구 연습 단계에서 선동열 감독 등 수뇌진의 평가가 좋지 않아 정식 계약에 이르지 못했다.[6]

4. 코치 경력

은퇴 후, 그라만은 유소년 야구 코치 경력을 시작하여 인디애나 불스 여행팀에서 4년, 자이언스빌 고등학교에서 비슷한 기간 동안 활동했다.[3] 그는 또한 인디애나폴리스 근처의 스포츠 개발 아카데미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3]

5. 선수로서의 특징

투구 폼


최고 구속 151km/h의 각도 있는 빠른 공과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 등 다채로운 변화구를 낮게 던지는 투구가 특징이다.

일본 진출 초기에는 페이스 배분에 약해 선발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2007년 중반부터 구원 투수로 좋은 결과를 내며 부진한 오노데라 치카라를 대신하여 마무리 투수로 정착했다. 구속은 145km/h~150km/h 정도를 안정적으로 기록하게 되었고, 마무리 투수로서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2008년에는 시즌 내내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193cm의 장신으로, 2006년에 입단한 팀 동료이자 같은 장신인 크리스토퍼 기젤과 함께 '''쌍둥이 타워'''라는 애칭을 얻었다.

리그 우승 후 맥주를 뿌리는 행사에서 팀 동료였던 크레이그 브라젤과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 촬영에 응하는 등 사이가 좋았다.

6. 기타

참조

[1] 웹사이트 Alex Graman Statistics https://www.baseball[...] 2008-10-20
[2] 기타
[3] 웹사이트 Alex Graman https://proxathlete.[...]
[4] 뉴스 自由契約公示 http://sportsnavi.ya[...] スポーツナビ 2011-12-02
[5] 뉴스 그라만·루르 영입' KIA, 명성보다 경험 택했다? http://news.naver.co[...] NAVER 韓国語サイト 2012-01-16
[6] 뉴스 KIA, 알렉스 대신 선발투수 물색···우완도 OK http://news.naver.co[...] NAVER 韓国語サイト 2012-02-05
[7] 뉴스 양현종, 조기귀국···KIA, 좌완 비상 https://m.sports.nav[...] 스포츠경향 2012-02-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