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앙리 드 뤼박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앙리 드 뤼박은 1896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예수회 사제이자 신학자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지스탕스 운동 참여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불교에도 관심을 보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여하여 고대 교회의 부활을 주장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뤼박은 '누벨 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주요 저서로는 『가톨릭주의』, 『중세 성경 해석』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프랑스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 막스 자코브
    막스 자코브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 화가로, 파리에서 피카소, 아폴리네르 등과 교류하며 큐비즘과 초현실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유대인 혈통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드랑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 프랑스의 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 - 장 드쿠
    프랑스 해군 제독이자 식민지 행정관이었던 장 드쿠는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해군 경력을 쌓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으로 임명되어 통치하며 식민지 주민과 베트남인 간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기근에 대한 책임 논란과 일본의 쿠데타로 축출 후 재판을 받았다.
  • 프랑스의 추기경 - 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
    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는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사제가 되어 루이 14세와 15세를 섬기며 루이 15세의 재상이 되어 재정 흑자를 달성하고 국력 회복에 기여했으나, 말년에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하며 권위가 실추된 인물이다.
  • 프랑스의 추기경 - 쥘 마자랭
    쥘 마자랭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30년 전쟁 종식과 프랑스-스페인 전쟁 승리에 기여하고 프롱드의 난을 진압하여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기반을 다진 추기경이자 정치가이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참가자 - 교황 바오로 6세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무리하고 교회 개혁을 추진한 교황으로, 교황청 개혁과 전례 개혁을 단행하고 교회 일치 운동에 기여했으나, 인공 피임 금지 회칙과 교회 개혁 논란으로 복잡한 시기를 겪었으며 시복 및 시성되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참가자 - 교황 베네딕토 16세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제265대 교황으로 재임하며, 가톨릭 교리를 수호하고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보수적인 신념과 스캔들 대처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앙리 드 뤼박
기본 정보
앙리 드 뤼박 추기경 문장
앙리 드 뤼박 추기경 문장
이름앙리 드 뤼박
로마자 표기Henri de Lubak
전체 이름앙리-마리 조제프 소니에 드 뤼박
직함추기경, 예수회 사제/신학자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출생일1896년 2월 20일
출생지프랑스, 캉브레
사망일1991년 9월 4일
사망지프랑스, 파리
서품1927년 8월 22일
추기경 서임일1983년 2월 2일
추기경 임명자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소속예수회
사목
추기경-부제산타 마리아 인 도미니카 성당
임명일1983년 2월 2일
사임일1991년 9월 4일
이전알프레도 오타비아니
이후루이지 포기

2. 생애

앙리 드 뤼박은 1896년 프랑스 북부 도시 캉브레에서 태어나 1913년 예수회에 입회했다.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대독 저항 운동에 참여하여 나치즘에 반대했다.[1]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신학에 이를 반영하기도 했다.

1929년부터 리옹 가톨릭 대학교에서 기초 신학 교수로 재직하며, 장 다니엘루와 함께 초기 기독교 문헌과 교부들의 연구 자료인 ''Sources Chrétiennes''(“기독교 근원”) 시리즈를 발간하여 교부학 연구에 기여했다.

1950년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Humani generis'' 발표 이후, ''새로운 신학''과 관련된 신학자로 지목되어 교수직과 푸르비에르 예수회 숙소에서 해임되었으며, 그의 저서들은 가톨릭 교회 도서관에서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1][2]

1960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 위원회 컨설턴트로 임명되면서 복권되었으며, 공의회에서 ''페리투스''(신학 전문가)로 활동하며 교회론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과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 작성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뤼박은 요제프 라칭거(훗날 교황 베네딕토 16세),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와 함께 신학 저널 ''코뮤니온''을 창간했다.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뤼박을 추기경으로 임명했으며, 뤼박은 주교 서품 없이 추기경에 서임된 첫 사례가 되었다.[1] 1991년 파리에서 9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서품

앙리 드 뤼박은 아르데슈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캉브레에서 태어났다. 그는 6명의 자녀 중 하나였으며, 아버지는 은행가였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1898년 뤼박의 가족은 리옹 지역으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앙리는 예수회 교육을 받았다. 타고난 귀족적인 품위와 외모를 지닌 뤼박은 17세가 되기 전 1년간 법학을 공부한 후, 1913년 10월 9일 리옹에서 예수회에 입회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반교회법으로 인한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예수회 수련원은 일시적으로 이스트 서식스의 세인트 레너즈온시로 이전되었고, 뤼박은 그곳에서 공부한 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해 1914년 프랑스 육군에 징집되었다. 그는 1917년 만성절에 레 제파르주에서 머리 부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평생 재발하는 어지럼증과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1919년 제대 후, 뤼박은 예수회로 돌아와 철학 연구를 계속했으며, 처음에는 캔터베리의 헤일스 플레이스에서, 1920년부터 1923년까지는 세인트헬리어에 위치한 예수회 철학 학교인 메종 생 루이에서 공부했다. 그는 이곳에서 모리스 블롱델과 피에르 루셀로의 사상과 조우하게 된다. 블롱델과의 만남은 특히 중요했다. 1932년, 뤼박은 블롱델에게 편지를 써서 1920년대 초에 ''L'Action''을 접한 경험과, 전체주의 문제에 대한 블롱델의 사상이 뤼박이 자연과 은총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데 핵심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전했다. 뤼박은 1923년부터 1924년까지 론의 몽그레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서 가르쳤고, 1924년에는 영국으로 돌아와 이스트 서식스의 헤이스팅스에 있는 오어 플레이스에서 4년간의 신학 연구를 시작했다. 1926년, 예수회 대학은 리옹의 푸르비에르로 다시 이전되었고, 뤼박은 그곳에서 남은 2년간의 신학 연구를 마쳤다. 그는 1927년 8월 22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2. 2. 교수 및 신학자

1929년, 드 뤼박은 리옹 가톨릭 대학교에서 기초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1961년까지 재직했으나, 두 차례 중단되었다. 첫 번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인해 지하로 피신했던 시기였다. 두 번째는 1950년부터 1958년까지 로마의 압력으로 예수회에서 그를 교수직과 푸르비에르 예수회 숙소에서 해임한 시기였다.[1]

1930년대에 드 뤼박은 가톨릭 대학교에서 교수 및 연구 활동을 했으며, 푸르비에르 예수회 신학교에서 한 과목을 가르쳤다(1934년부터는 그곳에서 거주, 1935년부터 1940년까지 강의).[2] 1938년에는 첫 저서 ''Catholicisme''(영어 제목: ''Catholicism: Christ and Common Destiny of Man'')을 출간했다. 1940년, 동료 예수회원 장 다니엘루와 함께 초기 기독교 문헌과 교부들의 이중 언어 비평 편집본 모음집인 ''Sources Chrétiennes''(“기독교 근원”) 시리즈를 창간하여 교부학 연구와 성전 교리를 되살렸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드 뤼박은 "영적 저항" 운동에 참여하여 나치 저항 지하 신문 ''Témoignage chrétien''|기독교 증언프랑스어 출판을 도왔다. 이 신문은 나치즘의 철학과 활동이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음을 독일 제국비시 프랑스 양쪽 모두에서 보여주고자 했다. 드 뤼박은 독일군을 피해 숨어 다녔고,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체포되어 처형되기도 했다. 은신 중에도 연구와 저술 활동을 계속했다.

프랑스의 나치 점령이 끝난 1944년부터 드 뤼박은 20세기 가톨릭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여러 저서를 출판했다. 여기에는 ''Corpus Mysticum''(1944년 2월), ''Le Drame de l'humanisme athée''(무신론적 휴머니즘의 비극, 1944년 12월), ''De la connaissance de Dieu''(1945년), ''Surnaturel: Études historiques''(1946년)가 포함된다.[1]

2. 3. "암흑기"

1950년 6월, 드 뤼박은 "포르비에르에 번개가 쳤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큰 시련을 겪었다.[1] 포르비에르에 거주했지만 실제로 가르침을 펼치지는 않았던 드 뤼박과 포르비에르 교수 4명은 직무에서 해임되었다. 드 뤼박은 리옹에서의 교수직과 ''종교 과학 연구''의 편집자 직에서도 물러나야 했다.[1] 그들은 리옹 지방을 떠나야 했다. 모든 예수회 관구장들은 그의 저서 3권(''Surnaturel'', ''Corpus mysticum'', ''Connaissance de Dieu'')과 논문 1편을 도서관에서, 그리고 가능한 한 공개 배포에서 삭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조치는 교황청의 압력에 따라 예수회 총장인 장-바티스트 얀센스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교리의 핵심 사항에 대한 해로운 오류" 때문이었다.[2] 두 달 후,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Humani generis''를 발표했는데, 이는 드 뤼박과 ''새로운 신학''과 관련된 다른 신학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가톨릭 교회 교부들의 원전에 대한 새로운 관심, 현대 남녀의 아이디어와 관심사를 다루려는 의지, 사목 활동에 대한 집중, 평신도의 역량에 대한 존중, 그리고 역사를 공유하고 그 영향을 받는 가톨릭 교회를 인식하는 특징을 보였다.

드 뤼박이 "암흑의 시대"라고 불렀던 시기는 거의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가 리옹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1956년이었고, 로마로부터 드 뤼박이 이전에 가르치던 강좌로 복귀하는 것에 대한 구두 승인을 받은 것은 1958년이었다.

이 기간 동안 드 뤼박이 쓴 모든 글은 로마의 검열을 받았지만, 그는 연구하고, 쓰고, 출판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오리게네스의 성경 해석에 대한 연구(1950년), 불교에 관한 책 3권(1951년, 1952년, 1955년), ''교회에 대한 묵상''(1953년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의 본질에 대해 발표된 문서인 ''인류의 빛''에 큰 영향을 미칠 텍스트), 그리고 ''신의 길에서''(1956년)를 출간했다.

2. 4. 복귀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0년 8월, 교황 요한 23세는 앙리 드 뤼박을 다가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위한 준비 신학 위원회의 컨설턴트로 임명했다. 그는 이후 공의회 자체의 ''페리투스''(신학 전문가)가 되었고, 나중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신학 위원회(및 두 개의 사무국)의 구성원이 되었다. 공의회 기간 동안 그의 기여의 정확한 성격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그의 저술은 특히 교회론 분야에서 공의회와 공의회 이후 시대에 확실히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관심사 중 하나는 교회를 단지 성직자만이 아닌, 하느님 백성 전체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드 뤼박이 ''인류의 빛''(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과 ''기쁨과 희망''(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에 미친 영향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공의회 기간 직전과 그 기간 동안, 드 뤼박은 그의 수도회의 축복을 받아 1955년에 사망한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 예수회원인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의 저작을 옹호하는 책과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테야르의 사상은 ''누벨 신학''(nouvelle théologie)의 여러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에서도 극심한 반대에 직면했다.

2. 5. 말년

교황 바오로 6세는 1969년에 앙리 드 뤼박의 저작을 존경하여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드 뤼박은 모든 추기경에게 요구되는 주교가 되는 것이 "사도직의 남용"이라고 믿고 거절했다.[1] 바오로 6세는 예수회 추기경을 임명하기로 결정하고, 대신 드 뤼박의 젊은 동료 장 다니엘루에게 그 영예를 부여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몇 년 동안, 드 뤼박은 "보수 신학자"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의 견해는 생애 초기의 진보적인 평판과는 대조적으로 교도권과 완전히 일치했다. 1972년 드 뤼박이 나중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된 요제프 라칭거,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와 함께 저널 ''코뮤니온''을 창간한 것이 이러한 평판에 기여했다. 이 저널은 ''콘실리움''보다 더 보수적인 신학을 제공하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드 뤼박을 추기경으로 임명하려 했고, 이번에는 주교 서품을 받지 않아도 되는 면제를 받았다. 드 뤼박은 이를 받아들였고, 1962년 추기경은 주교여야 한다는 규칙 이후 주교가 아닌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1983년 2월 2일 교황 선출 회의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87세의 드 뤼박을 추기경단으로 임명했다. 그는 산타 마리아 인 도미니카의 추기경 부제로 임명되었다. 1990년 5월 24일, 드 뤼박은 생존한 추기경 중 최고령자가 되었다. 그는 1991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3. 신학 사상

앙리 드 뤼박은 신학자로서 불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 노력했다. 그의 신학 사상은 이러한 종교 간 대화를 바탕으로 폭넓게 전개되었다.

3. 1. 불교와의 만남

앙리 드 뤼박은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자신의 신학 저술에 그 영향을 반영하였다.[1]

4. 주요 저서

제목원어 제목출판 연도영어 번역판 제목 (출판 연도)
가톨릭주의, 교리의 사회적 측면Catholicisme: Les aspects sociaux du dogme1938Catholicism (1950), Catholicism: Christ and the Common Destiny of Man (1988)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Mysticum: Essai sur L'Eucharistie et l’Église au moyen âge1944Corpus Mysticum: The Eucharist and the Church in the Middle Ages (2006)
무신론적 인본주의의 드라마Le drame de l'humanisme athée1944The Drama of Atheist Humanism (1995)
하느님 인식에 관하여De la Connaissance de Dieu1945The Discovery of God (1996)
초자연Surnaturel: Études historiques1946Augustinianism and Modern Theology (1967, 부분 번역), Philosophy and Theology (1999, 결론 번역)
역사와 정신: 오리게네스에 따른 성서 이해Histoire et esprit: lintelligence de lÉcriture d'apres Origene1950History and Spirit: The Understanding of Scripture According to Origen (2007)
불교의 측면Aspects du bouddhisme1951Aspects of Buddhism (1953)
불교와 서구의 만남Rencontre du bouddhisme et de l'occident1952-
교회를 위한 명상Méditation sur l'Église1953The Splendor of the Church (1956, 1986)
불교의 측면 2: 아미타Aspects du bouddhisme, t. 2: Amida1955History of Pure Land Buddhism (2002-2003)
중세 성서 해석Exégèse médiévale1959, 1961, 1964Medieval Exegesis (1998-)
테이야르 드 샤르댕: 인간과 그의 의미Teilhard de Chardin: The Man and His Meaning1965-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현대 신학Augustisme et théologie moderne1965Augustinianism and Modern Theology (1969, 2000)
초자연의 신비Le Mystere du surnaturel1965The Mystery of the Supernatural (1967, 1998)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종교The Religions of Teilhard de Chardin1967-
테이야르 해설Teilhard Explained1968-
영원한 여성: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시 연구The Eternal Feminine: A Study on the Poem by Teilhard de Chardin1971-
본성과 은총에 관한 소교리 문답Petite catéchese sur nature et grace1980A Brief Catechesis on Nature and Grace (1984)
세 명의 예수회원이 우리에게 말한다Trois jésuites nous parlent1980Three Jesuits speak (1987)
교회의 모성The Motherhood of the Church1982-
신앙의 역설Paradoxes of Faith1987-
그리스도인의 신앙: 사도신경 구조에 관한 에세이The Christian Faith: An Essay on the Structure of the Apostles' Creed1986-
교회를 위한 봉사: 앙리 드 뤼박, 그의 글을 쓰게 된 환경을 회고하다At the Service of the Church: Henri de Lubac reflects on the circumstances that occasioned his writings1993-
역사 속의 신학Theology in History1996-
더 많은 역설More Paradoxes2002-
바티칸 공의회 노트북 1권Vatican Council Notebooks, vol. 12015-
바티칸 공의회 노트북 2권Vatican Council Notebooks, vol. 22016-
크리스트교 근원Sources chrétiennes1943(공저)
선교의 신학적 근거Le Fondement théologique des missions1946-


참조

[1] 뉴스 Pope Elevates 10 to Cardinal Rank https://timesmachine[...] The New York Times 1962-03-20
[2] 웹사이트 French bishops vote to open sainthood cause of Henri de Lubac https://www.catholic[...] 2023-04-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