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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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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미술 평론가로, 민예 운동을 주도하며 동양 전통 미학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민중 중심의 미의식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1889년 도쿄에서 태어나, 가쿠슈인에서 니시다 키타로, 스즈키 다이세쓰 등에게 배우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한국의 공예품에 매료되어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하고 광화문 철거에 반대하는 등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보여주었다. 1957년 문화공로자로 표창받았으며, 1984년에는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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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야나기 소에쓰
야나기 (1950년)
이름야나기 소에쓰
본명야나기 무네요시
로마자 표기Yanagi Muneyoshi
출생일1889년 3월 21일
출생지일본 도쿄 도쿄부아자부구 시헤이초 2초메 (현 도쿄도미나토구 (도쿄도)롯폰기)
사망일1961년 5월 3일
사망지일본 도쿄도메구로구 일본민예관 서관 (구 야나기 소에쓰 저택)
묘지도쿄도히가시무라야마시하기야마초 (히가시무라야마시) 1초메 16–1 고다이라 영원 27구 13측 2번
국적일본
직업
직업사상가
미학자
종교철학자
학력도쿄제국대학문과대학철학과 심리학 전공 졸업
활동 분야미학
공예
민예
주요 연구 주제영미문학
일본 민예
아이누, 오키나와, 조선, 타이완 문화
소속 운동시라카바파
민예운동
종교기독교
가족
배우자야나기 가네코 (구 中島)
자녀야나기 소리 (장남)
야나기 소겐 (차남)
야나기 소민 (삼남)
부모야나기 나라에쓰 (부)
가쓰코 (모)
친척가노 지고로 (숙부, 가쓰코의 동생)
야나기 에쓰타카 (조카)
이시마루 시게하루 (조카)
이마무라 시게카즈 (조카)
영향
영향 받은 인물윌리엄 블레이크
월트 휘트먼
스즈키 다이세츠
버나드 리치
영향을 준 인물시가 나오야
무샤코지 사네아쓰
가와이 간지로
하마다 쇼지
기타 정보
수상문화공로자 (1957년)
한국 문화 훈장대한민국 문화훈장 3등급
서명
웹사이트
참고
참고 사항'소에쓰'의 로마자 표기는 'Soetsu'이며, 본인도 영문 설명에서 'Yanagi Soetsu'로 표기함. 공식 웹사이트의 영문 표기도 'Soetsu'임.

2. 생애

야나기 무네요시는 1889년 제국 해군 수로측량사였던 야나기 나라요시와 가쓰코 사이에서 태어났다.[3] 그의 아들 야나기 소리는 저명한 산업 디자이너였으며,[3] 증손 조카인 야나기 신야는 유명한 직조가로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4]

1919년 삼일 운동 당시 일본 경찰과 군대에 의해 수천 명의 한국인이 사망하자, 야나기는 1919년과 1920년에 한국인들에 대한 동정과 한국 예술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글을 썼다.[6]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교토로 이주하였으며, 1924년부터 전국의 목식불 조사를 실시했다.[13][17] 1925년부터 "민예"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민중의 생활 속에서 태어난 아름다움의 세계를 소개하고자 했다.[15] 1931년 잡지 《공예》를 창간하여 민예 운동의 기관지로 삼았고, 1934년 일본민예협회를 설립했다.

1957년 "민예 이론의 확립, 일본민예관의 설립, 민예 운동의 실천적 업적"으로 문화공로자로 표창되었으며, 1960년 아사히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1년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향년 72세였다. 일본민예관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2. 1. 초기 생애 (1889-1913)

야나기 무네요시는 1889년 3월 21일 도쿄부 아자부구 이치베에초 2정목에서 전 해군 소장 야나기 나라요시와 그의 아내 가쓰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1] 아버지는 야나기가 2살 때 인플루엔자로 사망하여, 이후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3] 아버지는 귀족원 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1895년 가쿠슈인 초등학과에 입학하여,[3] 니시다 기타로에게 독일어를, 간다 노부와 스즈키 다이세쓰에게 영어를 배웠다. 중등과 시절에는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시가 나오야 등과 교류하며 동인지 『백화』 창간을 준비했다.[11] 1909년 9월, 가쿠슈인 재학 중 버나드 리치를 방문하여 교류를 시작했다.

1910년 가쿠슈인을 졸업하고,[11] 졸업 시 메이지 천황에게서 은시계를 하사받았다.[12] 이 무렵, 훗날 아내가 되는 나카지마 가네코(도쿄음악학교에서 성악 전공)를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1910년 4월 『백화』를 창간하고,[13] 창간 당시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근세에 있어서의 기독교 신학의 특색’(1910년 6월호)이라는 논문을 투고했다. 1910년 10월 도쿄 제국 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에 진학하여 심리학을 전공했다.

삶의 문제에 대한 과학적 해답을 심리학에서 찾고자 했던 야나기는 1911년 첫 저서 『과학과 인생』을 출판했다. 이 시기 서양 근대 미술을 소개하는 기사를 담당하며, 오귀스트 로댕 등 서양 근대 미술을 일본에 소개하는 데 힘썼고, 윌리엄 블레이크에 심취하였다.[13]

『백화』는 오귀스트 로댕 70회 탄생 기념호를 발간했고, 야나기는 "종교가로서의 로댕"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백화』는 우키요에 30점을 로댕에게 보냈고, 1911년 9월 로댕에게서 답례 편지를 받았다. 로댕은 청동상 3점("로댕 부인 흉상", "어떤 작은 그림자", "파리 건달의 목")을 『백화』에 증정했고, 야나기는 직접 요코하마에 가서 수령해 왔다.

2. 2. 민예운동 (1913-1945)

1913년 야나기 무네요시는 아사카와 하쿠쿄가 가져온 조선의 도자기 "이조 채색 추초문 면취호"를 보고, 고조선인이 형태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인식하여 조선의 공예품에 주목하게 되었다.[13] 1916년 이후, 여러 차례 조선반도를 방문하여 조선의 고불상이나 도자기 등의 공예품에 매료되었다.[15] [17]

1919년 삼일 운동이 일어나 일본 경찰과 군대에 의해 수천 명의 한국인이 사망하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1919년과 1920년에 한국인들에 대한 동정심과 한국 예술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글을 썼다.[6]

1923년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교토로 이주하였다. 1924년부터 전국의 목식불 조사를 실시했다.[13][17] 민중의 생활 속에서 태어난 아름다움의 세계를 소개하기 위해, 1925년부터 "민예"라는 말을 사용하고,[15] 이듬해 도예가 도모토 겐키치, 하마다 쇼지, 가와이 칸지로와 함께 "일본민예미술관 설립 취지서"를 발표했다.[21]

1931년에는 잡지 《공예》를 창간하여 민예 운동의 기관지로 삼았다. 1934년 민예운동의 활동 모체인 일본민예협회가 설립되었다. 1936년에는 실업가 오하라 손사부로의 지원으로 야나기 무네요시가 초대 관장이 되어 도쿄 고마바에 일본민예관을 창설했다.[15]

2. 3. 전후 활동과 사망 (1945-1961)

1952년 5월부터 매일신문사의 후원으로 국제공예가회의 참석을 위해 시가 나오야, 하마다 쇼지, 우메하라 류자부로 등과 함께 유럽과 북미를 순회 여행했다(시가와 우메하라는 건강 악화 등으로 8월에 귀국). 이듬해인 1953년 2월에는 18년 만에 일본을 방문한 버나드 리치와 재회하여 함께 귀국했다.[23] 1954년부터 이듬해 1955년까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선집」 전 10권이 간행되어 널리 알려졌지만, 1956년 말부터 류머티즘심장마비로 투병하면서도 민예 운동의 발전을 위해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1957년 11월, "민예 이론의 확립, 일본민예관의 설립, 민예 운동의 실천적 업적"으로 문화공로자로 표창되었다. 1960년에는 아사히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1년 4월 29일, 일본민예관에서 점심 식사 후 담화를 나누던 중 뇌출혈로 쓰러져 혼수상태가 계속되었으나, 5월 3일 오전 4시 2분에 사망했다. 향년 72세. 5월 7일, 일본민예관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3. 사상

야나기 무네요시는 白樺 창간호(1910년 6월)에 "근세에 있어서의 기독교 신학의 특색"이라는 논문을 기고하며 신학에 관심을 보였다.[11]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에서 종교 연구를 이어갔으나,[11] 노년, 질병, 죽음 등 삶의 문제에 대한 종교적 해석에 불만을 느껴 심리학에서 과학적 해답을 찾고자 했다.[11] 1911년에는 심령주의의 영향을 받은 『과학과 인생』을 출판했다.[11]

스즈키 다이세쓰는 가쿠슈인 고등과 시절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어 교사였고, 야나기 무네요시는 평생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며 교류했다.[31] 야나기 무네요시는 스즈키 다이세쓰에게 그의 왕성한 의욕과 전진에 대한 존경을 표했고,[31] 스즈키 다이세쓰는 야나기 무네요시를 "천재"이자 "위대한 동양적인 「아름다움의 법문」의 개척자"라 칭송했다.[31]

야나기 무네요시는 에도 시대 목식(木喰) 행도와 묘호인(妙好人)을 연구했다. 특히 목식불 발견을 계기로 목식 연구에 몰두하여 『목식상인(木喰上人) 선집 제9권』, 『목식오행상인(木喰五行上人) 전집 7』, 신판 『목식상인』 등을 저술했고, 엔쿠(円空)에 대한 논고도 『전집』에 수록했다.

3. 1. 민예(民藝) 이론

1916년,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의 공예에 대한 호기심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이 여행은 1924년 한국민예품박물관 설립과 야나기 무네요시, 도예가 하마다 쇼지(1894–1978), 가와이 칸지로(1890–1966)에 의한 '민예(民藝)'라는 용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5]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름 없는 장인들이 만든 일상용품에서 '용(用)의 미(美)'를 발견했다. 야나기 무네요시에 따르면, 일반 사람들이 만든 실용적인 물건은 "아름다움과 추함을 초월한다".[7]

민예(民藝)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 익명의 장인에 의해 제작됨
  • 손으로 대량 생산됨
  • 저렴함
  • 대중에 의해 사용됨
  • 일상생활에서 기능적임
  • 생산된 지역을 대표함


1925년부터 "민예"라는 말을 사용하고[15], 이듬해인 1926년 도예가 토모토 겐키치, 하마다 쇼지, 카와이 칸지로와 함께 "일본민예미술관 설립 취지서"를 발표했다.[21] 1928년 저서 『공예의 길』에서는 "용과 미가 결합된 것이 공예이다"라고 하며 민예미(民藝美)를 체계화했다.[15][17]

1931년에는 잡지 『공예』를 창간하여 민예운동의 기관지로 삼았다. 1934년에는 민예운동의 활동 모체인 일본민예협회가 설립되었다.[22]

3. 2. 한국과의 관계

야나기 무네요시는 1916년 한국의 공예에 대한 호기심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5] 1919년 삼일 운동 이후, 일본 경찰과 군대에 의해 수천 명의 한국인이 사망한 한국의 독립 운동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인들에 대한 동정심과 한국 예술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글을 썼다.[6]

1920년 6월에는 《개조(改造)》에 「조선의 친구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하여 총독정치의 부정을 사과했다. 당시 일본 지식인 중 일본 측의 정책을 비판한 사람은 이시바시 단잔, 요시노 사쿠조 등 극소수였다.[24]

대부분의 일본 문화인들이 조선 문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미술(특히 도자기 등)에 주목하여 조선의 도자기와 고미술을 수집했다.

1920년대 경성에서 도로 확장을 위해 경복궁 광화문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에 반대하는 평론 「잃어버릴 뻔한 한 조선 건축을 위해」를 조선 신문인 《동아일보》에 기고했다.[26] 이것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1926년 광화문은 경복궁 동쪽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되어 보존되었다.[27]

1924년 4월에는 경성(현 서울특별시)의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15]을 설립했다. 이조시대 무명의 장인들이 만든 민중의 일용잡기를 상설 전시하여 그 미의 가치를 알렸다.

1984년 9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사후에 수여받았다.[29]

2013년에는 한국 서울의 덕수궁 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개최된 「유종열」전에 대해 유종열의 역사적 평가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었다.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으로 볼 것인가, "식민지 이데올로기의 일조"를 맡았다고 부정할 것인가에 대해 한국에서의 평가는 아직도 엇갈리고 있다.[30]

3. 3. 종교 사상

야나기 무네요시는 초기에는 신학에 관심을 가졌고, 1910년 6월에는 『白樺』(백화) 창간호에 "근세에 있어서의 기독교 신학의 특색"이라는 논문을 기고하였다.[11] 1910년 10월, 도쿄 제국대학교 문과대학에 진학하여 종교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다.[11]

삶의 문제(노년, 질병, 죽음 등)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해석”에 불만을 느낀 야나기 무네요시는 “실험과 관찰에 기반한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을 통해 과학적인 해답을 찾고자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였다.[11] 1911년에는 심령주의의 영향을 받은 첫 저서 『과학과 인생』을 출판하였다.[11]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가쿠슈인 고등과 시절 영어 교사였으며, 야나기 무네요시는 평생 그를 스승으로 모시며 교류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스즈키 다이세쓰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님은 끊임없이 희망을 가지고 계획을 세우시고, 항상 무언가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계시지만, 90세의 고령에 이러한 왕성한 의욕을 가지고 전진해 나가시는 것은 놀라울 따름입니다.”라고 존경을 표했다. 스즈키 다이세쓰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사(弔辭)에서 “당신은 천재였습니다. 독창성이 풍부했습니다. ... 일본은 위대한 동양적인 「아름다움의 법문」의 개척자를 잃었습니다.”라며 애도했다.[31]

야나기 무네요시는 에도 시대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불상을 만들고 독특한 미소를 띤 부처를 남긴 목식(木喰) 행도(行道)와 묘호인(妙好人)을 연구했다. 특히 목식 연구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목식불 발견이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목식상인(木喰上人) 선집 제9권』, 『목식오행상인(木喰五行上人) 전집 7』, 신판 『목식상인』(고단샤 문예문고) 등이 있다. 엔쿠(円空)에 대한 논고도 여러 편 있으며, 『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4. 평가 및 유산

야나기 무네요시는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한국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등 양심적인 지식인의 면모를 보였다.[6] 민예 운동을 통해 동양 전통 미학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민중 중심의 미의식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8]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의 활동이 식민지 이데올로기에 기여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5]

1984년, 야나기 무네요시는 사후에 한국의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는데, 이는 외국인 최초 수상이었다.[8] 이는 그의 한국 문화에 대한 공헌을 인정한 것이다. 야나기는 버나드 리치, 이소무 노구치, 브루노 타우트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3]

4. 1. 긍정적 평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한국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등 양심적인 지식인의 면모를 보였다.[6] 그는 삼일 운동 이후 일본 경찰과 군대에 의해 수천 명의 한국인이 사망하자, 1919년과 1920년에 한국인에 대한 동정심과 한국 예술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글을 썼다.

또한, 민예 운동을 통해 동양 전통 미학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민중 중심의 미의식을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1926년 민예 운동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급속한 도시화 속에서 사라져 가던 에도 시대메이지 시대 서민들이 사용하던 값싼 그릇들을 구출했다. 1936년에는 일본민예관을 설립했다.

한국과 오키나와 등 주변 지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문화 교류에도 힘썼으며, 1984년에는 사후 한국의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는데, 이는 외국인 최초 수상이었다.[8]

4. 2. 비판적 평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 예술에 대한 "슬픔의 아름다움"(悲哀の美|비애의 미일본어) 이론을 제시했고, 이는 한국의 '한' 개념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5]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의 활동이 식민지 이데올로기에 기여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4. 3. 유산

1936년에 설립된 일본민예관은 현재까지 민예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8] 1984년, 야나기 무네요시는 사후에 한국의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는데, 이는 외국인 최초 수상이었다.[8] 이는 그의 한국 문화에 대한 공헌을 인정한 것이다.

야나기는 도예가 버나드 리치, 조각가 이소무 노구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 등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3]

5. 주요 저서


  • 《수공의 일본》[1]
  • 《나무아미타불》[2]
  • 《민예 40년》[3]
  • 《공예의 길》[4]
  • 《조선과 그 예술》[5]

참조

[1] 일반텍스트
[2] 뉴스 ART REVIEW; From Japan, Paintings To Go, but With Charm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94-12-16
[3] 서적 Design as an Attitude JRP | Ringier
[4] 웹사이트 'Mingei; Energy Embodied in Handicrafts' with Shinya Yanagi https://www.motoji.c[...]
[5] 서적 The Culture of Japanese Fascism Duke University Press 2009-04-13
[6] 서적 In Pursuit of Composite Beauty: Yanagi Soetsu, His Aesthetics and Aspiration for Peace https://books.google[...] Trans Pacific Press 2011
[7] 서적 Asian Treasures: Gems of the Written Word https://books.google[...]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8] 웹사이트 야나기 무네요시 전 https://www.jungle.c[...] Design Jungle 2018-09-29
[9] Kotobank 2022-01-21
[10] 웹사이트 About the Museum http://www.mingeikan[...] 日本民藝館 2019-06-11
[11] 웹사이트 思想家紹介 柳宗悦 https://www.bun.kyot[...] 京都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文学部 2019-06-11
[12] 웹사이트 官報. 1910年04月05日 -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 2022-01-21
[13] 웹사이트 「直観」で見る「美」――『柳宗悦と民藝運動の作家たち』展、日本民藝館学芸員・月森俊文氏インタビューの https://synodos.jp/o[...] シノドス 2017-02-10
[14] 웹사이트 『官報』第286号、大正2年7月12日、p.312 https://dl.ndl.go.jp[...]
[15] 웹사이트 民藝運動の父、柳宗悦 http://www.nihon-min[...] 日本民藝協会 2017-02-10
[16] 웹사이트 白樺文学館の沿革、我孫子市白樺文学館 http://www.city.abik[...] 我孫子市ホームページ 2017-02-10
[17] 웹사이트 柳宗悦と日本民藝館 http://www.mingeikan[...] 日本民藝館 2017-02-10
[18] 웹사이트 民藝運動の父、柳宗悦 https://www.nihon-mi[...] 日本民藝協会 2024-06-04
[19] 웹사이트 柳宗悦 - 東文研アーカイブデータベース https://www.tobunken[...]
[20] 웹사이트 同志社人物誌 94 柳宗悦 https://www.doshisha[...]
[21] 웹사이트 沿革 http://www.mingeikan[...] 日本民藝館 2017-02-10
[22] 웹사이트 民藝(民芸)とは https://www.yaora.jp[...] 株式会社カチップ 2024-06-04
[23] 웹사이트 民藝協会のあゆみ 昭和20年〜昭和39年(1945年~1964年) https://www.nihon-mi[...] 日本民藝協会サイト 2023-09-30
[24] 웹사이트 三・一独立運動 https://www.y-histor[...] Y-History 教材工房 2024-06-04
[25] 웹사이트 柳宗悦 https://www.ifsa.jp/[...] NPO法人 国際留学生協会 2024-06-04
[26] 뉴스 日本植民地下、光化門撤去を止めた日本人の直筆原稿を発見 https://globe.asahi.[...] 朝日新聞(東亜日報) 2020-06-13
[27] 웹사이트 日本植民地下、光化門撤去を止めた日本人の直筆原稿を発見 https://globe.asahi.[...] 朝日新聞社 2024-06-04
[28] 일반텍스트
[29] 웹사이트 故柳宗悦に韓国文化勲章 https://www.tobunken[...] 東京文化財研究所 2021-01-30
[30] 뉴스 日本人民藝運動家の『柳宗悦』展が韓国で…工芸運動の観点から再解釈 https://s.japanese.j[...] 中央日報日本語版 2013-06-06
[31] 서적 柳君を憶ふ (잡지) 민예 1961-06
[32] 서적 신오키나와 문학 80호 1989·여름 오키나와 타임스 1989
[33] 일반텍스트
[34] 일반텍스트
[35] 서적 JAPANESE FOLK CRAFTS 柳宗悦コレクション 출판문화산업진흥재단 2020
[36] 뉴스 「韓半島침략」감추려는 日本 동아일보 1982-04-13
[37] 뉴스 야나기 日民藝協會長 先親 柳宗悅씨에 주는 勳章받아 경향신문 198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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