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노 사쿠조
1. 개요
요시노 사쿠조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정치학자로, 1878년 미야기현에서 태어나 1933년에 사망했다. 그는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유학 후, 도쿄 제국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정치사상과 정치이론을 가르쳤다. 요시노는 민본주의를 주창하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헌정 정치를 옹호하고 군부의 정치 개입을 비판했다. 그는 조선과 중국의 민족주의 운동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비판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헌정의 본의' 등이 있다.
-
다이쇼 데모크라시 -
호헌 3파
호헌 3파는 1920년대 초 일본에서 헌정 옹호와 보통 선거 실행을 목표로 제2차 호헌 운동을 주도한 입헌정우회, 혁신구락부, 헌정회를 지칭하는 말이다. -
다이쇼 데모크라시 -
호헌 운동
-
일본의 에스페란티스토 -
기타 잇키
기타 잇키는 일본 제국 헌법의 천황제를 비판하고 군사혁명을 통한 국가 개조를 주장한 사상가이자 혁명가로, 그의 사상은 2·26 사건에 영향을 미쳤으며, 진보적인 면모와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경향을 동시에 지녔다는 평가를 받으며 2·26사건 연루 혐의로 사형당했다. -
일본의 에스페란티스토 -
미야자와 겐지
이와테현 출신의 일본 시인이자 소설가, 동화 작가, 농업기술 지도자인 미야자와 겐지는 불교적 신앙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헌신이 담긴 작품들을 남겼으며 사후 재평가를 통해 일본 문학사의 중요한 작가로 인정받았다. -
일본의 정치학자 -
아키라 이리에
아키라 이리에는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외교사에 문화적 관점을 통합하여 국제 관계 연구를 확장하고 미국과 동아시아 관계, 냉전 시대 아시아 등에 대한 연구로 학계에 기여했으며, '역사의 국제화'를 주장하며 국제사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일본의 정치학자 -
우에하라 에쓰지로
일본의 정치인이자 학자인 우에하라 에쓰지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에 참여, 중의원 부의장과 국무대신, 내무대신을 역임하며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으나, 전후에는 일본 헌법 제9조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등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2. 생애
요시노 사쿠조는 1878년 미야기현에서 태어나 1895년 미야기 진조 초등학교(현재 센다이 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898년 개신교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1904년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했다. 1906년 청나라로 건너가 위안스카이 아들의 개인 교사를 맡았다. 1909년에 귀국하여 1924년까지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에서 정치사 및 정치 이론을 가르쳤다. 1910년에는 독일 제국, 대영 제국, 미국으로 3년간 유학했다. 귀국 후 정치 부패와 보통 선거 등 일본 민주 정부 구현 문제를 논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고, 주오코론에 에세이를 게재했다. "입헌정치의 의의에 대하여"는 프로이센 왕국 모델의 우월성에 대한 대중적 믿음에 대한 반박으로, 민주주의가 천황 주권 개념과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태양의 편집자도 역임했다.
1918년 12월, 레이메이카이를 설립해 공개 강연을 후원하는 등 민주주의 사상 전파에 힘썼다. 조선 독립 운동가나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에게 공감하며 여운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쑨원의 신해혁명에도 공감했다.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비판하기도 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오스기 사카에 등과 함께 육군 암살 대상이었다.
2.1. 초기 생애 (1878년 ~ 1904년)
요시노 사쿠조는 1878년 미야기현 시다군 오오가키촌(현 오사키시 후루카와)에서 면직물 원료를 취급하는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요시노 가문은 미야기현 북부의 가독 상속 풍습에 따라 장남이 가업을 잇지 않았고, 1892년에 장녀의 사위가 가업을 상속했다.
1898년 개신교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1904년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했다. 1906년에는 청나라로 건너가 위안스카이 아들의 개인 교사를 맡았으며, 1909년에 귀국하여 1924년까지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에서 정치사 및 정치 이론을 가르쳤다. 1910년에는 3년 동안 독일 제국, 대영 제국, 미국에서 유학했다.
2.1.1. 학창 시절
요시노는 1884년 3월, 6세에 후루카와 심상소학교(현 후루카와 제1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한문 서적 『황조사략』을 두 누나에게 배웠다. 1886년 7월, 고등소학교 1학년 때 후루카와 강습회에 참가했다. 1892년 6월, 미야기현 심상 중학교(현 센다이 1고)가 개교하면서 후루카와에서 처음으로 추천받아 14세에 입학했다.
1895년, 구제 중학교 입학 해는 하야시 시헤이의 100주기였으며, 교장 오오츠키 후미히코가 시헤이의 전기를 강의했다. 요시노는 그중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을 적어 잡지 『청년문』 1895년 2월호에 『하야시 시헤이의 일화』라는 제목으로 투고하여 시헤이의 탐구심과 행동력, 주변에 휘둘리지 않는 사려 깊음을 소개했다. 같은 해 7월, 학내지 『여란회 잡지』 제1호의 "송풍록"에도 하야시 시헤이에 대해 기록했다.
중학교에서는 회람 잡지 발행에 열중하여, 2학년 때 『도키와 문학』을 시작했다. 회람 잡지 편집을 통해 친구를 사귀었으며, 그중 한 명은 초등학교 때부터의 친구 미우라 키치베에였다.
1895년 청일 전쟁 승전 당시 요시노는 다음과 같은 와카(和歌)를 읊었다.
1897년 9월, 제2고등학교 법과에 무시험으로 합격했다. 쇼케이 여학교 교장 애니 S. 부젤의 성서 연구회에 참가했다. 1898년 7월 3일, 우치가사키 사쿠사부로·시마지 라이무 등과 함께 침례를 받고 기독교 이름 "필립"을 받았다.
1900년 5월 14일, 20세의 "타마노"와 혼인 신고서를 제출했다. 7월, 제2고등학교를 졸업하고, 9월, 도쿄 제국대학법과대학에 입학했다. 혼고 교회(목사 에비나 단조)에서 미사와 타다시 등과 함께 잡지 『신인』의 편집에 참여하여 협력했다.
2.2. 중국 체류와 귀국 (1906년 ~ 1909년)
1906년 1월, 요시노는 위안스카이의 초빙을 받아 그의 장남 袁克定중국어의 가정교사로 아내 "타마노"와 셋째 딸 미쓰코와 함께 청나라 톈진으로 갔다. 위안스카이 가문이 베이징으로 이주하자, 요시노는 톈진에 남아 1907년 9월부터 1년간 北洋法政專門学堂중국어에서 교편을 잡았다.
1909년 1월에 귀국하여, 2월 5일 도쿄 대학 법과대학 조교수로 취임하였다. 1903년 영어 잡지에서 에스페란토를 알게 되어 런던에서 교과서를 주문하여 공부했고, 1904년 도쿄 제국 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은시계 수령) 동 대학원에 진학하여 동대 공과대학 강사를 맡았다.
2.3. 유럽 유학과 민본주의 주창 (1910년 ~ 1918년)
1910년, 요시노 사쿠조는 3년간 독일 제국, 대영 제국,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그는 정치 부패와 보통 선거 등 일본에서 민주 정부를 구현하는 문제에 대해 논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특히, 유명 문예지 주오코론에 여러 편의 에세이를 발표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중에서도 "입헌정치의 의의에 대하여"는 프로이센 왕국 모델의 우월성에 대한 대중적 믿음에 대한 반박으로 쓰여졌으며, 민주주의가 천황의 주권 개념과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요시노는 태양의 편집자를 역임하기도 했다.
1914년(다이쇼 3년) 1월, 요시노는 『중앙공론』 편집 주간 타키타 쵸인의 부탁으로 「학술상으로 본 일본 문제」를 기고하여,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서 일본인의 자세에 비판적인 시선을 보였다. 같은 해 4월호에는 「민중적 시위 운동을 논하다」를 기고하여, 일본의 민중 운동에도 민중의 자각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1916년(다이쇼 5년), 요시노는 주오코론 1월호에 대표작 「헌정의 본의를 설하고 그 유종의 미를 이루는 길을 논하다」를 발표하며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떠올랐다. 1918년(다이쇼 7년), 백홍 사건이 일어나자, 요시노는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고 낭인회의 폭행 사건을 비난하며 공개 연설회를 열어 청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2.3.1. 레이메이카이(黎明会) 활동
요시노는 1918년 12월, 민주주의 사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레이메이카이(黎明会)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공개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민주주의 사상 전파에 힘썼다. 요시노는 민본주의를 존중하는 사상가로, 민주주의(Democracy)와 민본주의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주의는 수단의 민주성을, 민본주의는 결과의 민주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요시노는 조선 독립 운동가나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에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운형과 같은 조선 독립 운동가를 도덕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쑨원이 이끈 신해혁명에도 공감했다. 또한,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3. 사상
요시노 사쿠조는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중시한 사상가였다. 그는 민본주의가 민주주의("Democracy"의 번역어)와는 다르다고 보았다. 민주주의는 수단의 민주성을, 민본주의는 결과의 민주성을 추구한다고 정의했다.
1916년(다이쇼 5년) 1월 주오코론에 기고한 「헌정의 본의를 설하고 그 유종의 미를 이루는 길을 논하다」라는 평론을 통해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대표하는 논객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글에서 민본주의에 기반하여 헌정(憲政)의 본래 의미를 설명하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시노는 민본주의가 일본의 국체(國體, 국가의 근본 체제)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19년(다이쇼 8년) 1월 발표한 글에서 "우리 일본의 국체에는 실로 만국에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고 언급하며, 국체의 본의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여 국민들에게 확신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요시노가 천황제를 부정하지 않고, 민본주의를 천황제 아래에서도 실현 가능한 정치 체제로 보았음을 보여준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요시노와의 대론에서 일본이 "군주 민본"의 국가이며, 천황이 백성을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불쌍히 여겨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요시노는 일본이 "군주 민본"이라는 인식에는 동의했지만, "데모크라시"라는 말이 "민주 민본"과 동의어가 아니며, 서양의 "민본주의"도 정당한 유형이 들어온다면 일본의 민본주의를 도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대항해야 할 것은 "군주주의"가 아니라 "관료주의"라고 덧붙였다.
요시노는 군부의 통수권 문제도 비판했다. (하위 섹션에서 구체적으로 다룸)
3.1. 민본주의(民本主義)
요시노 사쿠조는 민본주의(民本主義)를 존중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민본주의가 민주주의("Democracy"의 번역어)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요시노는 민주주의는 수단의 민주성을, 민본주의는 결과의 민주성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요시노는 1916년(다이쇼 5년) 1월호 주오코론에 기고한 「헌정의 본의를 설하고 그 유종의 미를 이루는 길을 논하다」라는 평론을 통해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부상했다. 이 글에서 요시노는 민본주의에 입각하여 헌정(憲政)의 본래 의미를 설명하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시노는 민본주의가 일본의 국체(國體, 국가의 근본 체제)와 양립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1919년(다이쇼 8년) 1월에 발표한 글에서 "우리 일본의 국체에는 실로 만국에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고 언급하며, 국체의 본의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여 국민들에게 확신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요시노가 천황제를 부정하지 않고, 민본주의를 천황제 하에서도 실현 가능한 정치 체제로 보았음을 시사한다.
요시노는 조선 독립 운동가나 중국의 민족주의자들에게 공감하며, 여운형을 도덕적으로 긍정 평가하고, 쑨원의 신해혁명에 공감하는 등, 한국과 중국의 민족 운동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또한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요시노 사쿠조와의 대론에서 일본이 "군주 민본"의 국가이며, 천황이 백성을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불쌍히 여겨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요시노는 일본이 "군주 민본"이라는 인식에는 동의하지만, "데모크라시"라는 말이 "민주 민본"과 동의어가 아니며, 서양의 "민본주의"도 정당한 유형이 들어온다면 일본의 민본주의를 도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주의"가 대항해야 할 것은 "군주주의"가 아니라 "관료주의"라고 덧붙였다.
3.1.1. 통수권 문제 비판
요시노 사쿠조는 군부의 통수권 문제를 비판했다. 통수권은 군대를 지휘하고 통솔하는 권한이다. 주어진 자료에서는 요시노 사쿠조의 통수권 비판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과 활동이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군부의 정치 개입을 비판하고 문민통제를 옹호했을 것으로 보인다.
요시노 사쿠조의 통수권 비판은 한국의 군부 문제와 관련하여 시사점을 준다. 한국 역시 과거 군부 독재 시절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고 통수권을 남용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요시노 사쿠조의 비판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부의 역할과 통수권 행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3.2. 조선 및 중국에 대한 관점
요시노는 조선 독립 운동가나 중국의 민족주의자에 대해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조선 독립 운동가인 여운형에 대해 도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변호했으며, 쑨원이 일으킨 신해혁명에 대해서도 공감을 느꼈다. 또한,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한 비판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4. 저작
| 제목 | 출판사 | 출판 연도 | 비고 |
|---|---|---|---|
| 낡은 정치의 새로운 관점 | |||
| 현대 정치 강화 | |||
| 일본 무산 정당론 | |||
| 현대 헌정의 운용 | 미스즈 서방 | 1988년 리프린트판, 2005년 온디맨드판 | |
| 요시노 사쿠조 선집 (전 16권) | 이와나미 서점 | 1995-96년 | 2016년 온디맨드판 |
| 요시노 사쿠조 정치사 강좌 (야나이하라 타다오, 아카마츠 카츠마로, 오카 요시타케 노트) | 이와나미 서점 | 2016년 | 강의록 연구회 편 |
| 중국·조선론 | 헤이본샤 토요 문고 | 마츠오 타카노리 편, 2006년 와이드판 | |
| 요시노 사쿠조 평론집 | 이와나미 문고 | 오카 요시타케 편, 2016년 외 복간 | |
| 요시노 사쿠조 한담의 한담(초) | 일본 도서 센터 | 1998년 | "인간의 기록" 시리즈 |
| 헌정의 본의 요시노 사쿠조 데모크라시 논집 | 주오코론 신사 | 2016년 | 해설 카리베 나오키 |
| 헌정의 본의, 그 유종의 미 | 코분샤 고전 신역 문고 | 2019년 | 야마다 히로오 현대어 번역·해설 |
| ‘인민의 이름으로’: 주권과 인민의 관점에서 본 일본 정치에 대한 설명. | 『퍼시픽 어페어』 4권, 3호 | 1931년 | https://doi.org/10.2307/2750329 |
5. 평가
요시노 사쿠조에 대한 평가는 그의 다양한 저작과 연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미타니 타이치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론 요시노 사쿠조의 시대』에서 요시노 사쿠조가 활동했던 시대를 중심으로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분석하였다. 마츠모토 산노스케는 『요시노 사쿠조 근대 일본의 사상가 11』에서 요시노 사쿠조를 근대 일본의 주요 사상가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곤노 하지메는 『요시노 사쿠조와 우에스기 신키치 - 독일-프랑스 전쟁에서 다이쇼 데모크라시로』에서 요시노 사쿠조와 그의 사상적 대립 관계에 있던 우에스기 신키치를 비교하며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조명했다. 오타 테츠오는 『요시노 사쿠조 사람과 사상』에서 요시노 사쿠조의 생애와 사상을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이노우에 히사시는 『형제』에서 요시노 사쿠조와 그의 동생 요시노 신지 형제의 삶을 평전극 형식으로 묘사했다. 다자와 하루코는 『요시노 사쿠조와 야나기타 구니오 -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낳은 "재야 정신"』에서 요시노 사쿠조와 야나기타 구니오를 비교하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재야 지식인의 역할을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