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진 (1916년)
1. 개요
양국진은 일제강점기 만주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대한민국 육군 대령, 준장, 소장, 중장을 역임한 군인이다.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로 임관했으며,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본부 군수과장, 감찰총감, 육군본부 군수국장을 지냈다. 한국 전쟁 중 군수 지원을 담당했으며, 3군단장과 군수참모부장을 역임했다. 4·19 혁명 직전 비리 혐의로 구속되었으나 석방되었고, 5·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 씨명 | 양국진 |
|---|---|
| 한자 표기 | 楊國鎭 |
| 로마자 표기 | Yang Guk-jin |
| 출생일 | 1916년 9월 20일 |
| 사망일 | 1981년 2월 28일 |
| 출생지 | 평안남도 평양부 |
| 사망지 | 경기도 인천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제1묘역 |
| 소속 | 만주국군 대한민국 육군 |
|---|---|
| 군 복무 | 만주국군: 1936년 ~ 1945년 대한민국 국군: 1948년 ~ 1959년 |
| 최종 계급 | 만주국군: 상위 대한민국 육군: 중장 |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
| 지휘 | 육군 제3군단장 |
| 근무 | 육군 제3군단 |
| 웹사이트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국립 묘지 |
| 기타 이력 | 민주당 행정위원 (1965년) 대한식품 부사장 (19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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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김웅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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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정진석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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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이원수 (작가)
이원수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로서 1926년 동시 〈고향의 봄〉으로 등단하여 동요, 동시, 동화, 소년소설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고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아동문학 발전에 기여했으나, 친일 작품으로 논란이 있다. -
육군보병학교 동문 -
김종필
5·16 군사정변 주역이자 초대 중앙정보부장, 두 차례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은 한일 국교 정상화 기여와 '김-오히라 메모' 논란, 9선 국회의원, DJP 연합을 통한 총리 재임 등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권위주의 시대의 어두운 면과 지역주의 정치의 상징으로도 평가받는 정치인이다. -
육군보병학교 동문 -
임동원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정치인이자 외교관인 임동원은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군과 정부의 요직을 거쳐 나이지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대사, 통일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등을 역임하며 김대중 정부 시절 햇볕정책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으나, 제2연평해전 발언과 불법 감청 혐의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2. 생애
양국진은 평양 출생으로,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국군 장교로 복무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미군정 지역으로 와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여 감찰총감, 대령을 거쳤으며, 김구 암살 사건의 배심재판관을 맡았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군수 지원을 담당했고, 준장을 거쳐 소장으로 진급했다.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차장, 제2훈련소장, 제1군단장, 제3군단장을 역임했다.
1959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으나, 4·19 혁명 직전 비리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하지만 5·16 군사정변 이후 다시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곧 풀려났다. 이후 대한식품 사장을 지내며 기업인으로 활동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포함되었다.
2.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평양에서 태어난 양국진은 만주국 펑톈에 설립된 봉천군관학교를 제6기로 졸업하고 만주국군 장교로 임관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만주국군 육군 중위이자 경리 장교로 복무 중이었다.
종전 후 미군정 지역으로 내려와 통위부에 참가하였고, 새로 창설된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감찰총감을 맡았다. 양국진이 만주에서 귀국할 때 만주군 장교 차림 그대로 군복을 입고 칼을 찬 채 들어왔다는 방원철의 증언이 있다. 국방부는 1948년 12월 15일, 감찰총감이던 양국진 등 8명의 중령을 대령으로 특진발령하였다.
1949년 김구 암살 사건 당시, 암살 혐의자인 안두희에 대한 군법회의 재판에 배심재판관으로 참여했다. 당시 계급은 육군 대령이었으며, 재판의 주심재판관은 원용덕이었다.
2.2. 한국전쟁 참전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양국진은 군수 지원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였다.양영조 2003, 7쪽. 1951년 5월 26일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차장에 임명되었다.양영조 2003, 6쪽.
1952년 제2군단 부군단장으로 이동하였고, 같은 해 9월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1954년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차장을 역임하였다. 1955년 제2훈련소장을 거쳐 1957년 7월 제1군단장(중장)에 임명되었으며, 1959년 7월 6일 제3군단장으로 이동하였다.
한국 전쟁 중 군수 지원 공로로 김일환, 백선진과 함께 이름이 거론된다.
2.3. 한국전쟁 이후 활동
1949년 김구 암살 사건 당시, 암살 혐의자 안두희에 대한 군법회의 재판에 배심재판관으로 참여했다. 당시 계급은 육군 대령이었으며, 주심재판관은 원용덕이었다. 이후 양국진은 3군단장과 군수참모부장 등을 역임하며 주로 후방에서 근무했다. 1952년 11월 초, 육군행정 참모부장(副長)이었던 양국진 소장은 제2군단 부(副)군단장으로 인사이동되었다. 이후 육군 제1군단장 직무대리(당시 육군 소장)를 거쳐 1959년 3월, 육군 제3군단장에 전임되었다. 1959년 6월, 제3군단장 재직 중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1959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4·19 혁명 직전인 1960년 4월 9일, 비리 혐의로 구속되었다. 양국진은 자신이 육군참모총장과 같은 중장 계급이라며 가택수색 및 문초에 불응하는 등 반발했다. 이 사건은 구속된 양국진이 며칠 만에 전격 석방되고 사의를 표명하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제1공화국 정권 차원의 비호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하고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비리 군인으로 체포되어 혁명재판에 회부되었고, 징역 10년형이 선고되었다. 혁명재판 후 곧 풀려나 1960년대 대한식품 사장을 지내며 군부대에 식품을 공급하는 등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2.4. 부정 축재 및 처벌
1960년 4·19 혁명 직전, 양국진은 비리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는 육군참모총장과 같은 중장 계급임을 내세워 가택수색과 문초에 불응하며 반발했다. 이 사건은 양국진이 며칠 만에 석방되고 사의를 표명하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제1공화국 정권의 비호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하고,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양국진은 비리 군인으로 체포되어 혁명재판에 회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곧 풀려나 1960년대에 대한식품 사장을 지내며 군부대에 식품을 공급하는 등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4. 논란 및 비판
양국진은 미군정 하에서 통위부에 참가했고, 대한민국 국군 창설 후에는 감찰총감을 맡았다. 방원철의 증언에 따르면, 양국진은 만주에서 귀국할 때 만주군 장교 복장 그대로 군복을 입고 칼을 찬 채 들어왔다고 한다. 1948년 12월 15일, 국방부는 감찰총감이던 양국진 등 8명의 중령을 대령으로 특진 발령하였다.
1949년 김구 암살 사건 당시, 양국진은 암살범 안두희에 대한 군법회의 재판에 배심재판관으로 참여했다. 당시 그의 계급은 육군 대령이었으며, 주심재판관은 원용덕이었다.
4.1. 친일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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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출신으로 만주국 펑톈에 설립된 봉천군관학교를 제6기로 졸업하고 만주국군 장교로 임관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만주국군 육군 중위이자 경리 장교로 복무 중이었다.
경력은 다음과 같다.
* 1937년 3월, 중앙육군훈련처 경리 양성부 입학
* 1938년 12월, 중앙육군훈련처 제6기 졸업
* 신징의 육군군수학교 제2기 졸업
* 1942년, 육군군수학교 부속
* 1942년 3월, 군수 중위
* 1945년 8월, 육군군수학교 교관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포함되었다.
4.2. 권위주의적 행태
4·19 혁명 직전인 1960년 4월 9일 비리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때 양국진은 자신이 육군참모총장과 같은 중장 계급이라며 가택수색 및 문초에 불응하는 등 반발했다. 이 사건은 구속된 양국진이 며칠 만에 전격 석방되고 사의를 표명하는 선에서 마무리될 듯한 분위기로 흘러, 제1공화국 정권 차원의 비호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4.3. 4.19 혁명 및 5.16 군사정변 관련
1960년 4월 9일, 4·19 혁명 직전에 양국진은 비리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는 자신이 육군참모총장과 같은 중장 계급이라며 가택수색과 문초에 불응하며 반발했다. 이 사건은 양국진이 며칠 만에 전격 석방되고 사의를 표명하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제1공화국 정권 차원의 비호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하고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양국진은 비리 군인으로 체포되어 혁명재판에 회부되었고,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곧 풀려나 1960년대에 대한식품 사장을 지내면서 군부대에 식품을 공급하는 등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