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드라시 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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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언드라시 줄러는 헝가리 정치가로,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수립 후 초대 헝가리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자유주의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도 정치 시위에 참여했으며, 1848년 헝가리 혁명에 가담했다. 망명 생활 이후 1867년 총리가 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을 이끌었고, 1871년부터 1879년까지 외무장관으로 재임하며 독일과의 동맹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했다. 그의 외교 정책은 발칸 지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권을 일시적으로 확대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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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드라시 줄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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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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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언드라시 줄러 데 치크센트키라이 에트 크라스나호르카 백작 |
국적 | 헝가리 |
출생일 | 1823년 3월 3일 |
출생지 | 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 (1526-1867), 올라흐퍼터크 (현재 슬로바키아, 블라호보) |
사망일 | 1890년 2월 18일 |
사망지 | 오스트리아-헝가리, 볼로스카 (현재 크로아티아, 볼로스코) |
배우자 | 커틴커 켄데피 |
자녀 | 티버더르 언드라시 일로나 언드라시 마노 언드라시 줄러 |
정당 | 데아크 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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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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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시작 | 1867년 2월 17일 |
임기 종료 | 1871년 11월 14일 |
이전 | 베르털런 세메레 |
이후 | 메니헤르트 로니어이 |
군주 | 프란츠 요제프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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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시작 | 1871년 11월 14일 |
임기 종료 | 1879년 10월 8일 |
이전 |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백작 보이스트 |
이후 | 하인리히 카를 폰 하이메를레 남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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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시작 | 1861년 4월 17일 |
임기 종료 | 1869년 4월 22일 |
선거구 | 샤토랄야우이헤이 |
기타 정보 | |
직업 | 정치인 |
2. 전기
언드라시 카로이(Károly Andrássy) 백작과 서파리 에텔커(Etelka Szapáry)의 아들인 언드라시 줄러는 1823년 3월 3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였던 코시체(헝가리어: 카샤, 현 슬로바키아의 코시체)에서 태어났다.[1] (헝가리의 역사적 지역 참조) 자유주의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당시 정부에 반대하는 것은 위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에 반대했다. 언드라시는 어린 나이에도 정치 시위에 뛰어들었으며, 민족주의자 진영에 속해 있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언드라시는 오스트리아 정부는 중립이라는 점을 단호하게 고수했다. 1870년 7월 28일, 그는 연설에서 오스트리아가 1863년 이전의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복구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1871년 11월 6일, 보이스트의 프리드리히가 총리직을 사임하자 언드라시는 그의 업무를 이어받았다. 그의 총리 재임 기간은 변혁의 시기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과 스스로의 제국을 분리해 생각한 적이 없었으나, 이탈리아와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이중 제국이 성립되자 근동의 발칸반도 민족들에게 외교적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깨달았다. 문제는 이 민족들이 독립할 것인지, 아니면 술탄의 폭정에서 차르의 폭정으로 주체만 바꿀 것인지였다. 이전의 오스트리아는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움직임에 무관심하거나 전리품을 나눴지만, 이제는 유럽에서 잃은 것을 벌충하려 했다.
언드라시는 유럽 궁정들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처음에는 독일 황제, 이후에는 베를린, 빈, 상트페테르부르크, 베니스 회의에서 이탈리아와 러시아에 친밀하게 다가갔다.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복구는 1875년 보스니아 소요 사태 이후 증명되었다. 빈, 베를린,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부는 동방 문제에 대한 견해를 이해했으며, 이는 언드라시가 보이스트 백작에게 보낸 “언드라시 문서”에서 잘 나타난다.
언드라시는 이 문서에서 반란 진압 노력이 문제를 키우고, 반역자들은 피해를 받지 않았으며, 오스만 제국의 개혁 약속은 믿을 수 없고, 오스만 황제는 이런 생각을 한 적도, 할 의지도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열강들이 오스만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본적인 개혁 개요에는 기독교 관용과 인정, 영농 세금 부과 체계 폐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기독교도 농부 자유 개종 허용, 무슬림 지주의 소작료 제한 등이 있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의회가 열리고, 법관이 임명되었으며,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합심해 위원회를 조직해 개혁을 감독했다. 술탄이 약속을 실행하는 것을 묵인한 덕분에 반란 위험이 줄었고, 언드라시 문서로 열강 간 협상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영국과 프랑스도 동의했다.
러시아와 오스만 정부 간 전쟁이 재발하자 언드라시는 러시아와 협상했으나, 러시아는 거부했다. 산스테파노 조약으로 근동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패권이 위협받자, 언드라시는 독일과 영국의 공감을 얻어 유럽 회담을 통해 문제를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드라시는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오스트리아 전권 대사로 참여해 러시아의 이익을 줄이고 이중 제국의 이익을 증대시켰다. 회의 전 언드라시와 솔즈베리 후작은 오스트리아가 영국의 요구를 지지하는 대가로 영국은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요구를 동의한다는 것에 합의했다.[12]
언드라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점령과 행정 외에도 노비 파자르의 산자크 주둔 권리(행정은 오스만 담당)를 얻었다. 산자크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독립을 지켰고, 오스트리아-헝가리 병력은 살로니카 진격로를 얻어 발칸반도 서쪽 절반을 오스트리아 영향력에 묶었다.[13] 이 점령에 대한 여론은 헝가리에서 경제적 이유와 마자르인들의 친터키 성향 때문에 좋지 않았다.
1878년 10월 10일, 프랑스 외교관 멜시오르 드 보귀에는 헝가리의 불만이 고조되고, 보수적인 마자르 인종의 본능이 자극받았다고 서술했다. 이 본능은 소수 인종이 다수 인종 간 갈등을 유발하며 통치하는, 문화적으로 중요한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경향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점령이 슬라브 요소를 헝가리에 침투시키고, 크로아티아에 힘을 더해 마자르 지배 균형을 깨뜨릴 것을 경고했다.[16]
언드라시는 지쳐 1879년 10월 8일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 전날 독일과 공수 동맹을 체결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입지를 강화했다. 사임 후에도 언드라시는 위원회원, 상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1885년 하원 개혁을 격려했고, 1867년 조치는 불가침 영역으로 남기려 했다. 1889년 3월 5일 상원에서 군대 배타성 지지자들에게 군대 문제에 참견 말라는 연설을 했다. 그는 말년에도 영향력과 인기를 유지했다. 1890년 2월 18일, 66세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제국에 국난으로 받아들여졌다. 볼로스코에 명판이 남아 있고, 현재 암포라 레스토랑이 있다.
언드라시는 몇 세기 만에 전 유럽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마자르 정치인이었다. 그는 마자르 대귀족과 근대 신사를 연합시켰다는 평을 받았다. 그의 좌우명은 “약속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걸 실행하는 것은 쉽다.”였다. 데아크가 근대 헝가리 국민국가의 설계자라면, 언드라시는 건축가라 할 수 있다.
그는 1856년 파리에서 켄데피 커틴커 백작 부인과 결혼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두 아들 모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2. 1. 초기 생애와 정치 입문
언드라시 카로이(Károly Andrássy) 백작과 서파리 에텔커(Etelka Szapáry)의 아들인 언드라시 줄러는 1823년 3월 3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였던 코시체(헝가리어: 카샤, 현 슬로바키아의 코시체)에서 태어났다.[1] (헝가리의 역사적 지역 참조)그의 아버지는 자유주의 성향으로, 당시 정부에 반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에 속해 있었다. 언드라시는 어린 나이에도 정치 투쟁에 뛰어들어 애국적인 입장을 취했다.
세체니 이슈트반 백작은 언드라시의 능력을 처음으로 알아봐 준 인물이었다. 1845년, 언드라시는 상(上) 티서강 환경청의 회장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846년, 언드라시는 코슈트 러요시의 반정부 선언문인 '페슈티 히를러프(Pesti Hírlap)'에 매료되었다. 1848년, 그는 의회의원 후보들 중 가장 급진적인 성향을 띤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의 관대하면서도 충동적인 성격은 그를 철저한 애국주의자로 만들었다.
요시프 옐라치치 휘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헝가리의 메지무르예(Međimurje) 지방을 크로아티아로 합병하려 하자, 언드라시는 젠트리로서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괴르게이 어르투르의 부관으로 파코즈드(Pákozd)와 슈베하트(Schwechat) 전투에 참가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혁명정부는 언드라시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오스만 제국이 최소한 중립을 지키도록 설득하는 임무를 맡겼다.
빌라고시(Világos, 현 루마니아령 시리아)의 재앙 이후, 그는 런던과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1851년 9월 21일, 오스트리아 정부는 헝가리 혁명에 가담한 죄로 그의 모형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는 10년간의 망명 생활 동안 정치학, 특히 유럽 국가들 간의 외교를 공부했으며, 프랑스 제2제국의 화려함 속에 감춰진 약점을 날카롭게 간파했다.
1858년, 언드라시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면을 요청하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정부나 마자르 보수당의 접근도 거절했다. 대신 그는 데아크 페렌츠의 당에 호의를 보였다.
1865년 12월 21일, 언드라시는 의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866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대타협(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타협)을 이끌어낼 헝가리 측 협상단의 대표로 지목되었다.
2. 2. 1848년 헝가리 혁명과 망명
서체니 이슈트반은 그의 재능을 처음으로 제대로 평가했다. 1845년 언드라시는 상 티서 강의 수로 정비를 위한 협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1846년, 그는 커슈트 러요시의 신문인 ''페슈티 흐르라프''에 정부에 대한 매우 비판적인 기사를 게재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는 1848년 의회의 급진파 후보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2]
요시프 옐라치치 휘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당시 헝가리에 속해 있던 메지무레를 크로아티아로 반환하려 하자, 언드라시는 군에 입대했다. 그는 자신의 군의 젠트리 사령관이었으며, 파코즈 전투와 슈베하트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괴르게이 아르투르의 부관(1848)으로 복무했다.
전쟁 말기, 언드라시는 혁명 정부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다.[2] 그는 크로아티아와의 투쟁에서 오스만 제국의 중립을 확보하려 했다.
헝가리가 패배한 빌라고스 항복 이후, 언드라시는 런던과 파리로 망명했다. 1851년 9월 21일, 그는 헝가리 반란에 가담한 죄로 오스트리아 정부에 의해 사형을 효수로, 부재중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2] 10년간의 망명 생활 동안, 그는 당시 유럽 외교의 중심지에서 정치를 공부했다. 그는 겉보기와 달리 제2제정 프랑스의 약점을 간파했다.[2]
2. 3. 귀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
1858년 언드라시는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정치적 견해는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그는 사면을 요청하지도 않았고, 오스트리아 정부나 마자르 보수당(부분적인 자치권을 요구한)의 접근도 계속 거절했다. 대신 그는 데아크 페렌츠의 당에 호의를 보냈다.[2]1865년 12월 21일, 언드라시는 의회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866년 3월에 의회는 그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대타협(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타협)을 끌어낼 헝가리측 협상단의 대표로 지목했다.
당시에는 그가 협상 위원회에서 유일하게 사법권을 가진 법원을 설득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2]
쾨니히그레츠 전투가 일어나자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처음으로 언드라시에게 정식으로 토의하기를 요구했다. 언드라시는 황제에게 해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새 수상을 임명하라고 조언했다.[2]
1867년 2월 17일, 왕은 언드라시를 헝가리 초대 수상으로 임명했다. 이 행사에서 데아크 페렌츠는 언드라시에게 “헝가리가 위급한 이 때에 신께서 헝가리에 내린 정치인”이라는 찬사를 보냈다.[2]
수상으로서 언드라시는 단호했고, 협상에서는 온화한 달변가였다. 그래서 그는 곧 지도자의 위치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데아크의 권위는 타 정당의 지도자들에 비해 왜소했고, 그 때문에 그의 지위는 여전히 불안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그는 탁월한 능력을 뽐냈다.[2]
언드라시는 국방과 외교에도 관여했다. 그는 헝가리 국민군을 조직했다. 그는 자주 군대를 편성하고 부대를 배치하는 일이 자신의 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 불평했다.[2]
3. 헝가리 총리 재임 (1867-1871)
1865년 12월 21일, 언드라시는 의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866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의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을 이끌어낼 헝가리 측 협상단 대표로 지목되었다.[2] 당시 그는 협상 위원회에서 유일하게 사법권을 가진 법원을 설득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2]
쾨니히그레츠 전투 이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언드라시에게 헌법 재정 및 새 수상 임명을 조언받았다.[2] 1867년 2월 17일, 언드라시는 헝가리 초대 수상으로 임명되었고, 데아크 페렌츠는 그를 “헝가리가 위급할 때 신께서 내린 정치인”이라 칭송했다.[2]
언드라시는 수상으로서 단호함과 온화한 달변으로 지도자 위치에 올랐으나, 데아크의 권위 때문에 그의 지위는 불안정했다. 그럼에도 그는 국방과 외교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 헝가리 국민군을 조직하고 군대 편성 및 배치를 자신의 가장 어려운 일로 꼽았다.[2]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발발 시, 언드라시는 오스트리아의 중립을 고수하고, 오스트리아가 1863년 이전의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했다.[2]
3. 1. 보헤미아 아우스글라이히 반대
1871년, 오스트리아 측 카를 폰 호엔발트 수상이 제국 내 체코인과의 아우스글라이히(보헤미아 아우스글라이히)를 입법화하려 하자, 언드라시 수상은 제국 내 헝가리인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저하되고, 헝가리 영내 슬라브계 주민(슬로바키아인 등)의 민족 의식을 고취할 것을 우려하여 반대하였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도 그와 뜻을 같이하여 동법을 승인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보헤미아 아우스글라이히는 파기되었다.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외무장관 재임 (1871-1879)
1867년 대타협 이후, 언드라시 줄러는 1871년 11월 14일부터 1879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 및 슬라브계 국가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 제국과의 제휴를 추진했으며, 1872년에는 독일, 러시아와 삼제 동맹을 체결하여 부분적인 화해를 이루기도 했다.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는 중립을 지켰다.
1875년 보스니아 소요 사태에 대응하여, 언드라시는 1875년 12월 30일 "언드라시 노트"를 통해 열강들의 공동 대응을 촉구했다. 이 문서에서 그는 오스만 제국의 개혁 약속이 모호하고 현지 적용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열강들이 술탄에게 약속 이행을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언드라시는 오스트리아의 전권 대사로 참여하여 러시아의 이득을 줄이고 이중 제국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회의 결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행정권과 노비 파자르(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사이 회랑 지대) 점령권을 획득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국내외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내에서는 언드라시의 의회 무시 외교에 대한 독일인 자유주의파의 반발이 있었고, 헝가리에서는 슬라브계 주민 비율을 늘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획득에 대한 비판이 높았다. 또한, 베를린 회의 결과에 불만을 품은 러시아가 삼제 동맹에서 이탈하면서 동맹이 붕괴되었다.
언드라시는 1879년 10월 2일 외상에서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사임 전날, 그는 독일과의 공수(攻守) 동맹을 체결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했다.[2]
4. 1. 언드라시 외교의 특징
1875년 보스니아에서 일어난 소요 사태 이후, 빈, 베를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 궁정은 동방 문제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고, 그들의 견해는 1875년 12월 30일 언드라시가 폰 보이스트 백작(세인트 제임스 궁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보낸 "안드라시 노트"라는 외교 문서에 담겨 있었다.[12]이 문서에서 언드라시는 열강들의 반란 진압 노력이 실패할 위험이 있고, 반란군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오스만 제국이 여러 칙령에 담긴 개혁 약속은 원칙적으로 모호한 진술에 불과하며, 현지 적용을 전혀 하지 않았고 아마도 의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반적인 전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열강들이 술탄에게 약속을 이행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공동 행동을 취할 때가 왔다고 촉구했다.[12]
언드라시가 제시한 더욱 중요한 개혁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 기독교의 묵인보다는 인정
- 세금 징수 제도의 폐지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기독교 농민들을 자유로운 소유주로 전환하여 무슬림 오스만 토지 소유주에게 이중으로 종속되는 상황에서 구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선출된 지방 의회가 설립되고, 종신 판사가 임명되며, 개인의 자유가 보장될 예정이었다. 무슬림과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혼합 위원회가 이러한 개혁의 시행을 감시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12]
술탄이 약속의 실현에 대해 유럽에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반란군의 의심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반적인 동의를 보였고, 안드라시 노트가 협상의 기초로 채택되었다.[12]
러시아와 술탄 사이에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안드라시는 러시아 궁정과, 러시아가 승리할 경우 현상 유지가 오스트리아 군주국에 불리하게 변경되지 않도록 합의했다. 그러나 산 스테파노 조약이 근동에서 러시아의 패권을 위협하자, 안드라시는 독일과 영국 궁정과 함께 최종 조정 문제는 유럽 회의에 제출해야 한다고 동의했다.[12]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오스트리아의 주요 전권 대사였으며, 러시아의 이득을 줄이고 이중 군주국을 확장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회의 전, 안드라시와 영국 외무부 장관인 솔즈베리 후작 사이의 협상은 "오스트리아가 회의에 상정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관한 모든 오스트리아 제안에 동의함으로써 종결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요구를 지지할 것"이었다.[12]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점령 및 행정 외에도 안드라시는 오스만 행정 하에 있던 노비파자르 산자크에 주둔지를 설치할 권한을 얻었다. 산자크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분리를 유지했으며, 그곳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주둔군은 "발칸 반도의 서반부를 영구적인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아래에 두게 될" 살로니카로의 진격을 가능하게 했다.[13]
언드라시 외교는 발칸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권을 일시적으로 확대하는 데 성공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병합으로 귀착되어 러시아 및 슬라브 국가와의 비화해적 대립을 초래했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의한) 제국 해체의 원인을 만들어냈다.
4. 2. 삼제 동맹과 러시아-튀르크 전쟁
오스트리아의 회복된 영향력은 1875년 보스니아에서 심각한 소요 사태가 발생한 후 진행된 협상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빈, 베를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세 궁정은 동방 문제에 대한 입장에 관해 합의에 도달했고, 그들의 견해는 1875년 12월 30일 언드라시가 폰 보이스트 백작(세인트 제임스 궁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에게 보낸 "언드라시 노트"라고 알려진 외교 문서에 담겨 있었다.[12]이 문서에서 언드라시는 열강들의 반란 진압 노력이 실패할 위험이 있으며, 반란군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오스만 제국이 여러 칙령에 담긴 개혁 약속은 원칙적으로 모호한 진술에 불과하며 현지 적용을 전혀 하지 않았고 아마도 의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그는 일반적인 전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열강들이 술탄에게 약속을 이행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공동 행동을 취할 때가 왔다고 촉구했다. 더욱 중요한 개혁의 개요는 다음과 같았다.
- 기독교의 묵인보다는 인정
- 세금 징수 제도의 폐지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기독교 농민들을 자유로운 소유주로 전환하여 무슬림 오스만 토지 소유주에게 이중으로 종속되는 상황에서 구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선출된 지방 의회가 설립되고, 종신 판사가 임명되며, 개인의 자유가 보장될 예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무슬림과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혼합 위원회가 이러한 개혁의 시행을 감시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13]
술탄이 약속 실현에 대해 유럽에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반란군의 의심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전반적인 동의를 보였고, 언드라시 노트가 협상의 기초로 채택되었다.[14]
러시아와 술탄 사이에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언드라시는 러시아 궁정과 러시아가 승리할 경우 현상 유지가 오스트리아 군주국에 불리하게 변경되지 않도록 합의했다. 그러나 산 스테파노 조약이 근동에서 러시아의 패권을 위협하자, 언드라시는 독일과 영국 궁정과 함께 최종 조정 문제는 유럽 회의에 제출해야 한다고 동의했다.[15]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오스트리아의 주요 전권 대사였으며, 러시아의 이득을 줄이고 이중 군주국을 확장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6월 13일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언드라시와 영국 외무부 장관인 솔즈베리 후작 사이의 협상은 이미 "6월 6일에 오스트리아가 회의에 상정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관한 모든 오스트리아 제안에 동의함으로써 종결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요구를 지지할 것"이었다.[16]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점령 및 행정 외에도 언드라시는 오스만 행정 하에 있던 노비파자르 산자크에 주둔지를 설치할 권한을 얻었다. 산자크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분리를 유지했으며, 그곳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주둔군은 "발칸 반도의 서반부를 영구적인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아래에 두게 될" 살로니카로의 돌진을 열어줄 것이다.[13] "높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 당국은 [살로니카를 목표로 하는 ...] 즉각적인 주요 원정을 원했다."[14]
이 점령은 헝가리에서 재정적인 이유와 마자르족의 친투르크 정서 때문에 매우 인기가 없었다.[15]
> 1878년 9월 28일, 재무부 장관 콜로만 폰 첼은 알브레히트 대공이 지원하는 군대가 살로니카로 진격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1878년 11월 5일 헝가리 의회에서 야당은 근동 위기 동안의 정책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점령으로 헌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외무부 장관을 탄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 제안은 179 대 95로 부결되었다. 야당의 일반 의원들은 안드라시에 대해 가장 심각한 비난을 제기했다.[15]
> 1878년 10월 10일, 프랑스 외교관 멜키오르 드 보귀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특히 헝가리에서는 이 "모험"으로 인한 불만이 마자르 민족을 고무하고 그 운명의 비밀인 강한 보수적 본능에 의해 촉발되어 가장 심각한 비율에 도달했다. 이 강력하고 배타적인 본능은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인종과 상반된 열망을 가진 다수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나라를 지배하고 수치상 중요성이나 지적 문화와는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고립된 집단의 역사적 현상을 설명한다. 이 본능은 오늘날 깨어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점령이 신선한 슬라브 요소를 헝가리 정치 조직에 도입하고 크로아티아 야당의 더 넓은 분야와 추가적인 모집을 제공함으로써 마자르 지배가 유지되는 불안정한 균형을 무너뜨릴 위협으로 느끼고 있음을 경고한다.[16]
1878년의 베를린 회의에서 언드라시 외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행정권과 노비 파자르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회랑 지대)의 점령권을 획득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서는 언드라시에 의한 의회 무시 외교가 독일인 자유주의파로부터 반발을 샀고, 헝가리에서도 슬라브계 주민의 비율을 늘리게 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획득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다. 또한 이 회의의 결과,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러시아가 삼제 동맹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동맹은 붕괴되었다.
4. 3. 베를린 회의 (1878)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점령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언드라시는 오스트리아의 주요 전권 대사로서 러시아의 이득을 줄이고 이중 제국을 확장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인 6월 13일 이전에 이미 언드라시는 영국의 외무부 장관 솔즈베리 후작과 협상을 진행했다. 그 결과, 6월 6일에 "오스트리아가 회의에 상정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관한 모든 오스트리아 제안에 동의하고,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요구를 지지한다"는 합의에 도달했다.[12]언드라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점령 및 행정 외에도 노비 파자르의 산자크에 주둔지를 설치할 권한을 얻었다. (단, 행정은 여전히 오스만 정부가 담당) 산자크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분리를 유지했으며, 그곳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주둔군은 "발칸 반도의 서반부를 영구적인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아래에 두게 될" 살로니카로의 진격로를 확보할 수 있게 해주었다.[13] "높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 당국은 [살로니카를 목표로 하는 ...] 즉각적인 주요 원정을 원했다."[14]
그러나 이 점령은 헝가리에서 경제적인 이유와 마자르족들의 친튀르크 정서 때문에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15] 1878년 10월 10일, 프랑스 외교관 멜시오르 드 보귀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특히 헝가리에서는 이 "모험"으로 인한 불만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는데, 이는 마자르 민족을 고무하는 강한 보수적 본능에 의해 촉발되었다. ... 이 본능은 오늘날 깨어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점령이 신선한 슬라브 요소를 헝가리 정치 조직에 도입하고 ... 마자르 지배가 유지되는 불안정한 균형을 무너뜨릴 위협으로 느끼고 있음을 경고한다.[16]
1878년 9월 28일, 재무부 장관 콜로만 폰 첼은 알브레히트 대공이 지원하는 군대가 살로니카로 진격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헝가리 의회에서는 1878년 11월 5일에 야당이 근동 위기 동안의 정책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점령으로 헌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외무부 장관을 탄핵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15]
4. 4.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체결과 퇴진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언드라시의 외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행정권과 노비 파자르(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사이 회랑 지대) 점령권을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2] 그러나 오스트리아에서는 언드라시의 의회 무시 외교에 대한 독일인 자유주의파의 반발이 있었고, 헝가리에서는 슬라브계 주민 비율을 늘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획득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다. 베를린 회의 결과, 러시아가 삼제 동맹에서 이탈하며 동맹이 붕괴되었지만, 언드라시는 독일과의 동맹을 체결했다. (이후 1882년 러시아가 참여하여 삼제 협상으로 발전)[2] 언드라시는 1879년 10월 2일 외상에서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2] 그의 퇴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구스타프 카르노키 외상 아래에서 러시아와의 제휴를 중시하는 외교를 펼쳤다. 언드라시의 외교는 발칸 지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이권을 일시적으로 확대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병합으로 이어져 러시아 및 슬라브 국가들과의 비화해적 대립을 초래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제국 해체의 원인이 되었다.[2]5. 퇴임 이후와 사망
은퇴 후에도 언드라시는 대표단과 상원에서 공공 문제에 계속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85년 그는 귀족원 개혁안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1867년의 타협안의 불가침성은 질투심 있게 옹호했으며, 1889년 3월 5일 상원에서 공동 군대에 대한 어떠한 특정주의적 간섭에도 반대했다. 그는 말년에 인기를 되찾았고, 66세의 나이로 1890년 2월 18일 사망했을 때 국민적 재앙으로 애도받았다. 그가 사망한 볼로스코 (현재 크로아티아의 리에카와 오파티야 사이)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패가 있다. 이 기념패는 레스토랑 암포라 바로 위에 위치해 있다.
그는 수세기 동안 유럽의 지위를 차지했던 최초의 헝가리 정치가였다. 그는 헝가리 귀족과 현대적 신사를 하나로 묶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의 좌우명은 "약속하기는 어렵지만, 실천하기는 쉽다."였다. 동명의 차남도 이중 제국 말기의 1918년 10월부터 11월까지 오스트리아 외상(공통 각료 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6. 가족 관계
언드라시는 1856년 파리에서 켄데피 카틴카 백작 부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티바다르, 줄러, 일로나 등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티바다르는 1890년 헝가리 의회 하원 부의장을 역임했고, 줄러 역시 정치 경력을 쌓았다.
언드라시 줄러 백작의 손녀 클라라는 헝가리 귀족이자 사업가인 카로이 오데스칼키 공자와 결혼했다. 한편, 언드라시 백작이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황후와 연인 관계였으며, 오스트리아의 마리 발레리 대공녀가 그의 딸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소문은 황후와 백작 모두 헝가리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함께 헝가리의 미래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마리 발레리는 성장하면서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매우 닮은 외모를 갖게 되었다.
언드라시 백작에게는 클라라, 팔라비치니 후작과 결혼한 보르발라, 미하이 카로이 백작과 결혼한 카탈린, 팔 에스테르하지 공자의 미망인이었다가 요제프 치라키 백작과 재혼한 일로나 등 네 명의 손녀가 있었다.
7. 평가와 유산
언드라시 줄러는 은퇴 후에도 대표단과 상원에서 공공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85년 귀족원 개혁안을 지지했고, 1867년 타협안의 불가침성을 옹호했다. 1889년 3월 5일 상원에서 공동 군대에 대한 특정주의적 간섭에 반대했다. 말년에 인기를 되찾았으며, 1890년 2월 18일 66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국민적 애도를 받았다. 크로아티아 리에카와 오파티야 사이의 볼로스코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패가 있다.
그는 수세기 동안 유럽의 지위를 차지했던 최초의 헝가리 정치가였다. 헝가리 귀족과 현대적 신사를 하나로 묶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의 좌우명은 "약속하기는 어렵지만, 실천하기는 쉽다."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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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Pred 200 rokmi sa (ne)narodil Július Andrássy – naša európska osobnosť. Po tom, ako ho v jeho neprítomnosti popravili, urobil bájnu kariéru
https://standard.sk/[...]
2023-03-08
[2]
간행물
1951-05
[3]
뉴스
Obituary: Prince Paul Odescalchi
https://www.telegrap[...]
The Daily Telegra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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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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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1889
[6]
간행물
Hof- und Staats-Handbuch des Großherzogtum Ba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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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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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Hof- und –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s Bay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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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endario generale del Regno d'It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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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one tipografico-editr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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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Königlich Preussische Ordenslis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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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atshandbuch für den Freistaat Sachsen (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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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 Württemberg
https://books.google[...]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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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Origins of the War of 1914, Volume I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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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igins of the War of 1914, Volume I
Oxford University Press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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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igins of the War of 1914, Volume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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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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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igins of the War of 1914, Volume I
Oxford University Press
[16]
서적
The Origins of the War of 1914, Volume I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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