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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쇼 황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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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이쇼 황태후는 1835년 태어나 1897년 사망한 일본의 황족이다. 1845년 고메이 천황과 결혼하여 친왕비가 되었으며, 1860년 메이지 천황을 양자로 맞이했다. 1868년 메이지 천황에 의해 황태후로 책립되었으며, 황후를 거치지 않고 바로 황태후가 되었다. 고메이 천황의 영향을 받아 노(能)를 좋아했으며, 일본 최초의 노가쿠 극장 설립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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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쇼 황태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이쇼 황태후 초상
에이쇼 황태후 초상 (아라키 간포 그림)
구조 아사코 (九条夙子)
존칭에이쇼 황태후 (英照皇太后, Eishō-kōtaigō)
출생1835년 1월 11일
출생지헤이안쿄, 일본
사망1897년 1월 11일
사망지도쿄 시, 일본
매장지센뉴지, 히가시야마구, 교토, 일본
종교신토
신분
배우자고메이 천황
자녀요리코 내친왕, 후키노미야
양자메이지 천황
씨족구조 가문 (후지와라 씨)
가계
아버지구조 히사타다
어머니가라하시 메이코
생애
입궁고카 2년 (1845년) 9월 14일
여어 선하가에이 원년 (1848년) 12월 15일
준후가에이 6년 (1853년) 5월 7일
지위
경력여어 → (준삼궁) → 황태후
훈등훈일등 보관장
기타
사후 칭호에이쇼 황태후 (英照皇太后) (1897년 (메이지 30년) 1월 30일 추호 칙정)
재위 기간
황태후1868년 - 1897년

2. 생애

에이쇼 황태후(구조 아사코)


1835년 1월 11일, 구조 히사타다의 딸로 태어났다.[10] 1845년 12세의 나이로 당시 황태자였던 오사히토 친왕과 혼인하였다.[2][10] 오사히토 친왕이 고메이 천황으로 즉위한 후 1848년 뇨고(女御)가 되었으나,[3][10] 에도 막부의 반대로 황후에는 오르지 못하고 1853년 정3위 준삼궁(准三宮)에 봉해졌다.[10][16]

고메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두 딸(준시 내친왕, 후키노미야)을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다.[16][10] 이 때문에 1860년 칙령에 따라 고메이 천황후궁 나카야마 요시코가 낳은 무쓰히토 친왕(훗날의 메이지 천황)을 자신의 아들(実子)로 삼았다.[10][16]

1867년 남편 고메이 천황이 사망하고, 1868년 3월 18일 양자인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면서 황후를 거치지 않고 바로 황태후로 책봉되었다.[5][10] 같은 해 교토에 황태후를 위한 교토 오미야 고쇼가 지어졌다.[10] 메이지 유신 이후 황실이 도쿄로 이전하자, 1872년 아카사카 이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1874년에는 아카사카 어용지 내의 아오야마 어소로 다시 이전하였다.[4]

1897년 1월 11일 도쿄 아오야마 어소에서 64세(만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4][18] 1월 30일 '''에이쇼'''(英照)라는 시호를 받았으며,[18] 장례는 대장례(大喪)의 예로 치러졌다.[18] 능묘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센뉴지 내의 노치노쓰키노와노 토호쿠노 미사사기(後月輪東北陵)로, 남편 고메이 천황의 능 옆에 마련되었다.[6][10][18]

2. 1. 출생과 혼인



1835년 1월 11일, 야마시로국 아타고군 시모가모촌(현 교토시 사쿄구 시모가모)의 미나미오지 가문 저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 관백이었던 구조 히사타다이고, 어머니는 가모 신사 씨족인 미나미오지 나가타다의 딸 스가야마이다.[2] 처음 이름은 '모토키미(基君)'였다. 구조 미치타카의 누나이며, 데이메이 황후(세이메이 황후)의 고모이다. 따라서 쇼와 천황에게는 의붓 증조모이자 혈연상 고모할머니가 되고, 상황에게는 의붓 고조모이자 혈연상 증조고모가 된다.

1845년 9월 14일 (고카 2년), 12세의 나이로 3살 연상의 황태자인 오사히토 친왕(훗날의 고메이 천황)과 혼인하여 친왕비가 되었다.[2] 이듬해 닌코 천황이 사망하고 오사히토 친왕이 고메이 천황으로 즉위하자, 천황은 아사코를 뇨고(女御)로 삼았다. 뇨고는 간무 천황 시대 이후 황족이나 고위 귀족의 딸에게 주어지는 높은 지위의 후궁 직위였다.[3] 1848년 12월 7일 (가에이 원년) 종3위에 서임되었고, 같은 달 15일에 입궁하여 뇨고 선하를 받았다.

고메이 천황은 아사코를 황후로 책봉하기를 원했으나, 당시 정치적 실권을 쥐고 있던 에도 막부는 먼저 준삼궁(准三宮)의 지위를 내려야 한다며 반대했다. 결국 황후 책봉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1853년 5월 7일 (가에이 6년) 정3위 준삼궁에 봉해졌다.

고메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1850년 (가에이 3년) 첫째 딸 준시 내친왕(順子内親王, 1850년–1852년)과 1858년 (안세이 5년) 둘째 딸 후키노미야(富貴宮, 1858년1859년)를 낳았지만, 두 딸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자녀들이 요절했기 때문에, 1860년 7월 10일 (만엔 원년) 칙령에 따라 고메이 천황의 후궁나카야마 요시코가 낳은 둘째 황자 무쓰히토 친왕(당시 9세, 훗날의 메이지 천황)을 자신의 친아들(実子)로 삼았다.

2. 2. 뇨고 시절

1835년 1월 11일, 야마시로국 아타고 군 시모가모 촌(현 교토시 사쿄구 시모가모)의 미나미오지가에서 관백 구조 히사타다와 그의 첩실인 미나미오지 스가야마 사이에서 태어났다.[10][16] 처음 이름은 모토키미(基君)였다.[10] 부친 히사타다는 관백을 지냈으며, 모친 스가야마는 가모 신사 씨족인 미나미오지 나가타다의 딸이다.[10] 구조 미치타카의 친누나이며, 데이메이 황후의 고모에 해당한다.[10]

1845년 9월 14일 (고카 2년), 12세의 나이로 3살 연상이었던 동궁 오사히토 친왕(統仁親王)과 혼인하여 친왕비가 되었다.[10][16] 이듬해 오사히토 친왕이 고메이 천황으로 즉위하였다.[10][16] 1848년 12월 7일(가에이 원년) 종3위에 서임되었고, 같은 달 15일 궁에 들어가 뇨고(女御) 선하를 받았다.[10] 고메이 천황은 그녀를 황후로 세우고자 했으나, 막부는 준삼궁(准三宮) 서임을 먼저 해야 한다며 반대했다.[10][16] 결국 황후 책봉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1853년 5월 7일(가에이 6년) 정3위 준삼궁에 봉해졌다.[10][16]

고메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16] 첫째 딸인 준시 내친왕(順子内親王)은 1850년(가에이 3년)에 태어나 1852년에 사망했고,[10] 둘째 딸인 후키노미야(富貴宮)는 1858년(안세이 5년)에 태어나 이듬해인 1859년에 사망했다.[10] 자녀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1860년 7월 10일(만엔 원년) 칙령에 따라 고메이 천황후궁나카야마 게이코(中山慶子)가 낳은 둘째 황자 무쓰히토 친왕(睦仁親王, 당시 9세, 훗날의 메이지 천황)을 자신의 実子|짓시일본어로 삼았다.[10][16]

2. 3. 자녀

고메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다. 첫째 딸은 가에이 3년(1850년)에 태어난 준시 내친왕(順子内親王)이고, 둘째 딸은 안세이 5년(1858년)에 태어난 후키노미야(富貴宮)이다. 하지만 두 딸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준시 내친왕: 1852년 사망, 후키노미야: 1859년 사망).

두 딸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만엔 원년(1860년) 7월 10일, 칙령에 의해 고메이 천황후궁이었던 나카야마 요시코가 낳은 둘째 황자 무쓰히토 친왕(睦仁親王, 훗날의 메이지 천황)을 '친자'(実子)로 삼았다. 당시 무쓰히토 친왕은 9세였다. 메이지 천황은 양어머니가 된 에이쇼 황태후에게 강한 정서적 유대감을 느꼈으며, 이는 고메이 천황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4]

2. 4. 메이지 천황의 어머니



고메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1850년 첫째 딸 준시 내친왕(順子内親王, 1850년 - 1852년)과 1858년 둘째 딸 후키노미야(富貴宮, 1858년 - 1859년)를 낳았으나, 두 딸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자녀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1860년 7월 10일 칙령에 의해 고메이 천황의 후궁인 나카야마 요시코(中山慶子)가 낳은 둘째 아들 무쓰히토 친왕(睦仁親王, 당시 9세)을 법적인 아들, 즉 '친자(実子)'로 삼았다. 이로써 아사코는 고메이 천황의 후계자인 황태자 메이지 천황의 공식적인 어머니가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그녀에게 강한 정서적 애착을 보였으며, 이는 고메이 천황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불안정한 시기에 특히 중요하게 작용했다.[4]

1867년 남편 고메이 천황이 사망하고, 1868년 3월 18일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면서 황후의 자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황태후로 책봉되었다.

2. 5. 황태후

남편 고메이 천황 사후, 그의 뒤를 이은 메이지 천황1868년 3월 18일(게이오 4년) 구조 아사코에게 황태후의 칭호를 부여했다.[5] 이로써 아사코는 황후를 거치지 않고 바로 황태후가 되었는데, 이는 이례적인 조치였다.[5] 황태후가 되기 전 해인 1867년(게이오 3년)에는 그녀를 위해 교토에 교토 오미야 고쇼가 건립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황실이 교토에서 도쿄로 이전하자, 그녀도 이를 따라 1872년(메이지 5년) 아카사카 이궁으로 거처를 옮겼고,[4] 1874년(메이지 7년)에는 아카사카 어용지 내의 아오야마 어소로 다시 옮겼다.[4]

에이쇼 황태후는 고메이 천황의 영향을 받아 전통 가극인 (能) 관람을 즐겼다.[16] 일본 최초의 노가쿠(能楽) 전용 극장인 시바 노가쿠당(芝能楽堂)은 황태후가 편안하게 노를 관람할 수 있도록 설립된 것이었다.[17]

그녀는 고메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기에, 1860년 칙령에 따라 나카야마 요시코가 낳은 무쓰히토 친왕을 자신의 아들("친자")로 삼았다. 이 관계는 그녀가 황태후가 된 이후에도 이어졌다.

1897년 1월 11일, 도쿄 아카사카구아오야마 어소에서 64세(만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1월 30일에 '''에이쇼'''(英照)라는 시호를 받았으며,[18] 이후 英照皇太后|에이쇼 고타이고jpn로 알려졌다. 이 시호는 당나라 시인의 시 구절("깊은 연못 위의 자주 등나무")에서 유래했으며, 후지와라씨의 일원인 구조 가문 출신인 그녀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졌다.[5] 장례는 대장례(大喪)의 예로 치러졌다.[18] 프란츠 에케르트는 그녀의 장례식을 위해 장송 행진곡 Trauermarschdeu(또는 |Kanashimi no kiwamijpn)를 작곡했다. 능묘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센뉴지 내의 노치노쓰키노와노 토호쿠노 미사사기(後月輪東北陵)로, 남편 고메이 천황과 같은 곳에 마련되었다.[6][10] 메이지 천황과 쇼켄 황후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해 봄 교토를 방문하여 능묘에 참배했다.[7]

2. 6. 도쿄 천도 이후

1867년 남편 고메이 천황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이듬해인 1868년 3월 18일 양자 메이지 천황에 의해 황태후로 책립되었다. 이는 황후를 거치지 않고 바로 황태후가 된 이례적인 조치였다.[5]

메이지 시대에 황실이 교토에서 도쿄로 이전(도쿄 천도)하자, 황태후도 이를 따라 1872년 아카사카 이궁(현 영빈관)으로 거처를 옮겼고,[4] 1874년에는 아카사카 어용지(아오야마 어소)로 다시 옮겨 생활했다.

황태후는 고메이 천황의 영향을 받아 전통 가극인 (能) 관람을 즐겼다.[16] 일본 최초의 노 전용 극장인 시바 노가쿠당(芝能楽堂)은 황태후가 편안하게 노를 관람할 수 있도록 설립된 것이었다.[17]

1897년 1월 11일, 도쿄 아카사카구의 아오야마 어소에서 64세(만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같은 해 1월 30일 '에이쇼(英照)'라는 시호가 추증되었다. 이 시호는 당나라 시인의 시 구절 "깊은 연못 위의 자주 등나무"에서 따온 것으로, 후지와라 씨의 일원인 구조 가문 출신인 그녀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졌다.[5] 장례는 대상(大喪)의 예로 치러졌으며, 프란츠 에케르트는 황태후의 장례식을 위해 장송 행진곡 Trauermarsch|트라우어마르슈de('깊은 애도' 또는 悲しみの極み|가나시미노키와미일본어)를 작곡했다. 메이지 천황황후는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그해 봄 교토를 방문하여 황태후의 묘소에 참배하며 예를 표했다.[7]

능묘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센뉴지 내의 노치노쓰키노와노 토호쿠노 미사사기(後月輪東北陵)로, 남편 고메이 천황의 능묘 곁에 있다.[6][10][18]

2. 7. 서거

1897년 1월 11일, 도쿄 아카사카구아오야마 어소에서 64세(만 62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18] 같은 해 1월 30일에 '''에이쇼'''(英照)라는 시호를 받았으며,[18] 대상(大喪)의 예로 장례가 치러졌다. 에이쇼라는 시호는 당나라 시인의 시 "깊은 연못 위의 자주 등나무"에서 유래했으며, 후지와라 씨 혈통인 구조 가문 출신인 그녀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졌다.[5]

독일 출신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는 에이쇼 황태후의 장례식을 위해 장송 행진곡 Trauermarsch|트라우어마르슈de(悲しみの極み|가나시미노키와미일본어, 깊은 슬픔)를 작곡했다. 메이지 천황과 그의 부인인 쇼켄 황후는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그해 봄 교토를 방문하여 황태후의 묘소에 참배하며 존경을 표했다.[7]

능묘는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이마쿠마노에 있는 센뉴지 경내의 노치노쓰키노와노 토호쿠노 미사사기(後月輪東北陵)로, 남편 고메이 천황과 같은 곳에 마련되었다.[10][4][6][18] 서거한 해에 장례 절차를 기록한 와장본 『에이쇼 황태후 대상기사』, 『에이쇼 황태후지 어성덕』, 『에이쇼 황태후 폐하 어대장 사진첩』 등이 출판되었다.

3. 가족 관계


  • '''아버지''' : 구조 히사타다(九条尚忠, 1798 ~ 1871)
  • '''어머니''' : 미나미오지 스가야마(南大路菅山)
  • * 남동생 : 구조 미치타카(九条道孝, 1839 ~ 1906)
  • ** 조카 : 데이메이 황후(貞明皇后, 1884 ~ 1951) - 다이쇼 천황의 황후
  • '''남편''' : 고메이 천황(孝明天皇, 1831 ~ 1867) - 제121대 천황
  • * 장녀 : 요리코 내친왕(順子内親王, 1850 ~ 1852)
  • * 차녀 : 후키노미야(富貴宮, 1858 ~ 1859)
  • * 양자 :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1852 ~ 1912) - 제122대 천황[8]

4. 인물 및 평가

효명천황의 영향으로 노를 좋아하여, 1878년(메이지 11년)에는 아오야마 어소에 노무대가 세워졌다[11]. 1881년(메이지 14년)에 탄생한 일본 최초의 노악당 시바 노가쿠도 역시 황태후가 노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설립 목적 중 하나였다[12].

황태후는 때때로 전문 노악사조차 당황하게 할 정도로 "까다로운" 주문을 하기도 했으며[13], 당시 명인으로 불리던 우메와카 미노루와 호쇼 구로 두 사람에게 각각 같은 곡을 추게 하여 그 기예의 차이를 비교하며 즐기기도 했다[14].

참조

[1]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Emperor of Japan: Meiji and His World, 1852-1912 https://books.google[...]
[6] 서적
[7] 서적 https://books.google[...]
[8]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8-07-02
[9] 문서
[10] 웹사이트 孝明天皇陵・英照皇太后陵・後堀河天皇陵参道 https://www2.city.ky[...] 京都市 2020-06-17
[11] 서적 明治能楽史序説 わんや書店
[12] 서적 能楽盛衰記 東京創元社
[13] 서적 能楽盛衰記 東京創元社
[14] 서적 明治能楽史序説 わんや書店
[15] 간행물 宮廷録事 官報 1888-11-02
[16] 서적 메이지 시대 노가쿠 사서설(1969)
[17] 서적 노가쿠 성쇠기(能楽盛衰記, 1925-1926) 증보 수정판(1992년)
[18] 웹인용 孝明天皇陵・英照皇太后陵・後堀河天皇陵参道 https://www2.city.ky[...] 京都市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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