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카스티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페드로 1세는 1334년 스페인 부르고스에서 태어난 카스티야의 왕이다. 1350년 왕위에 올라, 흑사병으로 사망한 약혼녀 조안과의 결혼이 무산된 후, 부르봉의 블랑슈와 정략 결혼했으나 곧 관계를 끊었다. 그는 마리아 데 파디야를 평생의 연인으로 삼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었다. 페드로는 이복 형제인 엔리케 2세와의 카스티야 내전에서 패배하여 1369년 몬티엘 전투에서 살해당했다. 그는 '잔혹왕'과 '정의왕'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으며, 카스티야 왕실과 귀족 간의 오랜 갈등의 중심에 있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369년 사망 - 라마티보디 1세
라마티보디 1세는 1350년 아유타야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4개의 관청을 설립하고 타이 법전을 제정했으며, 명나라와 동맹을 맺고 영토를 확장했으나, 사후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 1369년 사망 - 쩐 유종
쩐 유종은 쩐 왕조의 제7대 황제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초기에는 섭정을 받았으나 친정 이후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고 후사 없이 사망하여 왕조 계승에 혼란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 1334년 출생 - 변안렬
변안렬은 고려 말 무신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고 이성계와 함께 황산대첩에서 왜적을 격파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우왕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순절했다. - 1334년 출생 - 하얌 우룩
하얌 우룩은 14세기 마자파히트 왕국의 군주로, 가자 마다의 지도력 아래 왕국의 영토 확장에 기여했으며, 그의 치세는 자바 문화의 인도화를 촉진했다.
페드로 (카스티야) | |
---|---|
기본 정보 | |
![]() | |
별칭 | 돈 페드로 |
출생일 | 1334년 8월 30일 |
출생지 | 부르고스, 카스티야 |
사망일 | 1369년 3월 23일 |
사망지 | 몬티엘, 톨레도 |
매장지 | 세비야 대성당 |
통치 정보 | |
작위 |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 |
왕조 | 카스티야 이브레아 가문 |
아버지 | 알폰소 11세 |
어머니 | 마리아 데 포르투갈 |
통치 기간 | |
1차 통치 | 1350년 3월 26/27일 - 1366년 3월 13일 |
이전 통치자 | 알폰소 11세 |
다음 통치자 | 엔리케 2세 |
2차 통치 | 1367년 4월 3일 - 1369년 3월 23일 |
이전 통치자 (2차) | 엔리케 2세 |
다음 통치자 (2차) | 엔리케 2세 |
배우자 및 자녀 | |
배우자 | 마리아 데 파디야 블랑슈 드 부르봉 후아나 데 카스트로 |
자녀 | 베아트리스, 카스티야의 인판타 콘스탄사, 랭커스터 공작 부인 이사벨, 요크 공작 부인 알폰소, 카스티야의 인판테 외 다수... |
기타 정보 | |
별명 | 잔혹왕 (에스파냐어: el Cruel) 정의왕 (에스파냐어: el Justo) |
2. 초기 생애
페드로는 1350년, 거의 16세가 되던 해부터 어머니와 그녀가 총애하는 사람들의 통제를 받으며 통치를 시작했다.[2] 처음에는 어머니 포르투갈의 마리아의 통제를 받았지만, 페드로는 어머니의 사촌인 포르투갈 장관 주앙 아폰수 데 알부케르케 백작의 격려로 왕위에 올랐다.[3] 1353년 마리아 데 파디야와 비밀리에 결혼했으나, 같은 해 여름 어머니와 귀족들의 강요로 부르봉의 블랑슈와 결혼했다. 그는 블랑슈가 자신의 이복 형제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그녀를 버렸다. 페드로는 마리아와 결혼한 사실을 부인해야 했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지속되었고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페드로는 카스트로의 후아나와 결혼식을 올리고, 블랑슈와의 이전 결혼이 무효라고 설득했다. 아빌라와 살라망카의 주교들은 동의를 요청받았고, 달리 말하기를 두려워했다. 페드로와 후아나는 쿠엘라르에서 결혼했고, 후아나는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선포되었으나[2] 이틀 밤을 보낸 후 그는 그녀를 버렸다. 둘 사이에는 페드로 사후에 어려서 죽은 아들이 있었다. 왕이 한동안 압도되어 사실상 투옥되었던 혼란의 시기가 뒤따랐지만, 그를 강요하려는 세력 내의 불화로 토로에서 세고비아로 탈출할 수 있었다.[3]
1361년, 블랑슈 여왕은 메디나 시도니아에서 사망했다. 프랑스 역사가들은 페드로가 두 명의 유대인에게 그녀를 살해하도록 명령했다고 주장하며, 다른 이야기에서는 독살, 혹은 십자형 석궁에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흑사병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같은 해 마리아 데 파디야가 세비야에서 사망했고, 이후 페드로는 그녀가 자신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적법한 아내였다고 선언했다.
2. 1. 출생과 가족 배경
페드로 1세는 1334년 스페인 부르고스에 있는 산타마리아 라 레알 데 라스 후엘가스 수도원의 방어탑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와 포르투갈의 마리아였다.알폰소 11세는 애첩 레오노르 데 구스만과의 사이에서 10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페드로가 태어나기 전인 1334년 1월 13일에 엔리케를 낳았다. 엔리케의 동복 형제는 요절했고, 트라스타마라 백작 지위를 받은 엔리케가 실질적인 장남으로 성장했다.
2. 2. 어린 시절과 교육
페드로 로페스 데 아얄라의 기록에 따르면, 페드로 1세는 창백한 안색, 푸른 눈, 밝은 금발 머리를 가진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는 박식했고 예술 후원자였으며, 오락, 음악, 시를 즐겼다.[2]2. 3. 정략결혼과 흑사병
페드로 1세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딸 조안과 결혼할 예정이었다.[2] 그러나 조안은 카스티야로 오는 길에 흑사병이 만연한 도시들을 지나다가 병에 걸려 1348년 1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잉글랜드에는 아직 흑사병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위험을 과소평가했을 가능성이 높다.[2]3. 즉위와 통치
페드로는 1350년 아버지 알폰소 11세가 사망하자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2]
3. 1. 초기 통치와 권력 장악
페드로는 1350년 아버지 알폰소 11세가 사망하자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2] 초기에는 어머니 포르투갈의 마리아와 그녀의 측근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3] 곧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머니의 사촌인 주앙 아폰수 데 알부케르케 백작의 격려로 왕위에 올랐으며, 애첩 마리아 데 파디야와의 관계는 그의 통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3] 마리아는 그가 알부케르케를 반대하게 만들었고, 알부케르케는 포르투갈로 도망쳤다.1353년 여름, 페드로는 어머니와 귀족들의 강요로 부르봉의 블랑슈와 결혼했지만, 곧 그녀를 버렸다.[2] 이 결혼으로 인해 페드로는 마리아와 결혼한 사실을 부인해야 했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지속되었고 그들은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3. 2. 결혼과 여성 관계
1353년 여름, 페드로는 어머니와 귀족들의 강요로 부르봉의 블랑슈와 결혼했다. 그러나 페드로는 블랑슈가 자신의 이복 형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그녀를 버렸다.[2] 이 결혼 때문에 페드로는 마리아 데 파디야와의 결혼을 부인해야 했지만, 마리아와의 관계는 계속되었고 둘 사이에는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페드로는 카스트로의 후아나와도 결혼식을 올렸는데, 블랑슈와의 결혼이 무효라고 설득하여 이루어졌다. 아빌라와 살라망카의 주교들은 이에 동의했다. 페드로와 후아나는 쿠엘라르에서 결혼했고, 후아나는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선포되었으나, 이틀 밤 후 페드로는 그녀를 버렸다. 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페드로 사후에 어려서 죽었다.
1361년, 블랑슈 여왕은 메디나 시도니아에서 사망했다. 프랑스 역사가들은 페드로가 두 명의 유대인에게 그녀를 살해하도록 명령했다고 주장하며,[4] 다른 이야기에서는 독살설, 십자형 석궁에 맞아 죽었다는 설도 있지만,[4] 흑사병으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같은 해, 마리아 데 파디야도 세비야에서 사망했다. 마리아가 죽은 후, 페드로는 그녀가 자신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적법한 아내였다고 선언했다.
4. 두 페드로의 전쟁과 카스티야 내전
1356년부터 1366년까지, 페드로는 아라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그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지원하거나 프랑스, 아라곤에 맞서 지중해에서 카스티야의 이익을 지키는 데 있어 능력이나 기술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라곤의 왕은 페드로의 사생 형제들을 지원했다.[3]
1366년, 카스티야 내전이 시작되어 페드로는 폐위될 위기에 처했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 휴 칼블리를 포함한 용병 부대를 이끌고 있는 이복 형제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의 공격에 페드로는 부르고스, 톨레도, 세비야에서 차례로 후퇴한 후, 전투 없이 왕국을 버렸다. 페드로는 국고를 가지고 포르투갈로 도망쳤으나, 삼촌인 포르투갈의 페드루 1세에게 냉대받고 갈리시아로 갔다.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 위치한 갈리시아에서 그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주교 수에로와 참사 페랄바레스를 살해하라고 명령했다.[3]
4. 1. 아라곤과의 전쟁 (두 페드로의 전쟁)
1356년부터 1366년까지, 페드로는 아라곤과 '두 페드로의 전쟁'이라 불리는 전쟁을 끊임없이 벌였다.[3] 이 전쟁에서 페드로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지원하거나, 프랑스, 아라곤에 맞서 지중해에서 카스티야의 이익을 지키는 데 있어 뚜렷한 능력이나 기술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라곤의 왕은 페드로의 이복형제들을 지원했다.[3]4. 2. 카스티야 내전과 엔리케 2세의 등장
1366년, 페드로 1세의 이복형제인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 (엔리케 2세)는 프랑스와 아라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베르트랑 뒤 게클랭, 휴 칼블리를 포함한 용병 부대를 이끌고 있는 엔리케 2세의 공격에 페드로 1세는 부르고스, 톨레도, 세비야에서 차례로 후퇴한 끝에, 전투를 벌이지 않고 왕국을 버렸다.[3]페드로 1세는 국고를 가지고 포르투갈로 도망쳤으나, 삼촌인 포르투갈의 페드루 1세에게 냉대받았다. 이후 갈리시아로 피신했는데,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 위치한 갈리시아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주교 수에로와 참사 페랄바레스를 살해하라고 명령했다.[3]
4. 3. 흑태자 에드워드의 지원과 나헤라 전투
1366년, 페드로 1세는 이복형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가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엔리케 2세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휴 칼블리를 포함한 용병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 페드로 1세는 잉글랜드의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피신하여 도움을 요청했다.[3]
1367년, 흑태자 에드워드는 나헤라 전투에서 페드로 1세를 도와 엔리케 2세를 격파하고 그를 왕좌에 복귀시켰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뛰어난 활약으로 카스티야-프랑스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흑태자는 곧 건강이 악화되었고, 페드로 1세가 약속한 전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자 잉글랜드군은 곧 카스티야에서 철수했다.[3]
5. 유대인과의 관계
엔리케 2세는 페드로를 "유대인의 왕"으로 묘사하며 반유대주의 정서를 이용했다.[5] 사무엘 하-레비가 페드로의 재무관이었다는 사실은 페드로가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다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당시 카스티야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상황은 차별과 박해로 점철되어 있었다.[5]
5. 1. 엔리케 2세의 반유대주의 선동
엔리케 2세는 페드로를 "유대인의 왕"으로 묘사하며 반유대주의 정서를 이용했다.[5] 그는 카스티야에서 반유대 폭동과 강제 개종을 선동했다.[5] 페드로는 이에 맞서 폭동의 반유대 지도자 최소 5명을 처형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5]5. 2. 페드로 1세의 대응
엔리케 2세는 페드로 1세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비난하며 반유대주의 정서를 자극했고, 이는 1370년부터 1390년경까지 이어진 반유대 폭동과 강제 개종을 일으킨 포그롬으로 이어졌다. 페드로 1세는 이에 맞서 폭동 주동자 최소 5명을 처형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5]사무엘 하-레비가 페드로 1세의 재무관이었다는 사실은 페드로 1세가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다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당시 카스티야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상황은 차별과 박해로 점철되어 있었다. 페드로 1세가 사망한 후, 유대인들은 그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노란색 배지를 착용해야 했다.[5]
6. 죽음과 유산
1369년 3월 23일, 페드로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계략에 넘어가 엔리케 2세에게 살해당했다. 엔리케는 페드로의 시신을 사흘 동안 매장하지 않고 조롱과 학대에 방치했다.[3]
페드로 1세는 '잔혹왕'(el Cruel)과 '정의왕'(el Justiciero)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잔혹한 행위는 비판받지만, 옹호자들은 그가 법에 복종하지 않거나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만 죽였다고 주장한다. 페로 로페스 데 아야라는 국왕의 몰락을 슬퍼한 이들이 많았다고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봉건 귀족의 지배를 받던 농민과 상인들이 포함되며, 이들은 페드로 1세의 통치 아래에서 안전을 누렸다.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의 ''수도사의 이야기''에서 페드로 1세의 죽음을 애도했다. 로버트 사우디는 1818년에 소설가 앤 도허티의 5막 극본 사본을 받았는데, 제목은 ''가혹한 페드로,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이었다.[6]
페드로 1세는 중앙 집권화를 추구했지만, 귀족 세력의 반발을 억제하지 못하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억압했다. 그의 통치 방식은 전제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페드로 1세의 죽음은 플랜태저넷 왕가와 나바라의 동맹을 종식시켰고, 페르난디네 전쟁을 야기했다. 포르투갈 왕국의 포르투갈의 페르디난드 1세가 갈리시아 왕국의 왕위를 주장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랭커스터의 존이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주장을 펼치면서 포르투갈과 영국의 동맹으로 이어졌다.
페드로 1세는 이슬람 술탄(그라나다)과 동맹을 맺은 몇 안 되는 군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페드로 1세는 여러 여성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었다.
6. 1. 몬티엘 전투와 최후
1366년 여름, 페드로는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피신했고, 흑태자는 이듬해 나헤라 전투 이후 그를 왕좌에 복귀시켰다. 흑태자의 건강이 악화되어 그는 이베리아 반도를 떠났으며,[3] 페드로의 딸들인 콘스탄사와 이사벨라 데 카스티야를 빚을 갚을 것을 보증하는 인질로 데려갔다.한편,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는 1368년 9월 카스티야로 돌아왔다. 부르고스의 ''코르테스''는 그를 카스티야의 왕으로 인정했다. 코르도바, 팔렌시아, 바야돌리드, 하엔 등이 그 뒤를 따랐다. 반면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는 페드로를 계속 지지했다. 1369년 3월 14일, 페드로와 엔리케의 군대는 몬티엘 전투에서 만났다. 엔리케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도움으로 승리했다. 페드로는 요새로 피신했는데, 이는 갈리시아 출신의 군사 기사단이 통제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페드로는 엔리케의 사절로 활동하던 뒤 게클랭과 만났다. 페드로는 뒤 게클랭에게 엔리케를 배신하는 대가로 금화 20만 개와 소리아, 알마산, 아티엔자 등 여러 도시를 제안했다. 기회주의적인 뒤 게클랭은 엔리케에게 이 제안을 알리고 페드로를 배신하는 대가로 더 큰 보상을 요구했다.
엔리케와 거래한 뒤, 뒤 게클랭은 페드로에게 돌아갔다. 1369년 3월 23일 밤, 뒤 게클랭은 페드로를 자신의 텐트로 유인하여 그의 제안을 수락하는 척했다. 엔리케가 기다리고 있었다. 역사가 로페스 데 아야라는 이 만남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뒤 게클랭의 텐트로 들어서자, 엔리케는 페테르 왕을 보았다. 그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들이 오랫동안 서로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르트랑의 부하 중 한 명이 '이 사람이 당신의 적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엔리케 왕은 그가 맞는지 물었고, 페테르 왕은 두 번이나 '내가 바로 그입니다, 내가 바로 그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엔리케 왕은 그를 알아보고 칼로 그의 얼굴을 쳤고, 그들은... 땅에 쓰러졌다. 엔리케 왕은 그를 연거푸 쳤다."
이복형제를 처치한 엔리케는 페드로의 시신을 사흘 동안 매장하지 않고 조롱과 학대에 노출시켰다.


6. 2. 평가와 유산
페드로 1세는 '잔혹왕'(el Cruel)과 '정의왕'(el Justiciero)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3] 그의 잔혹한 행위는 비판받지만, 옹호자들은 그가 법에 복종하지 않거나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만 죽였다고 주장한다.[3] 연대기 작가 페로 로페스 데 아야라조차도 국왕의 몰락을 슬퍼한 이들이 많았다고 고백했는데, 여기에는 봉건 귀족의 지배를 받던 농민과 상인들이 포함되며, 이들은 페드로 1세의 통치 아래에서 안전을 누렸다.제프리 초서는 페드로의 통치 기간 동안 카스티야를 방문했으며, ''캔터베리 이야기''의 일부인 ''수도사의 이야기''에서 페드로 1세의 죽음을 애도했다. 초서의 후원자인 랭커스터 공작 존 1세는 페드로 1세 편에서 싸웠다. 영국 호반 시인 로버트 사우디는 1818년에 소설가 앤 도허티의 5막 극본 사본을 받았는데, 제목은 ''가혹한 페드로,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이었다.[6]
페드로 1세는 중앙 집권화를 추구한 군주로서, 강력한 왕실 행정력을 구축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귀족 세력의 반발을 억제하지 못했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억압했다. 이러한 그의 통치 방식은 시대의 기준에서도 전제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페드로 1세의 죽음은 플랜태저넷 왕가가 시작한 잉글랜드와 나바라의 전통적인 동맹을 종식시켰다. 이후 이 동맹은 트라스타마라 왕가와 튜더 왕가에 의해 갱신되었다. 그의 죽음은 페르난디네 전쟁을 야기했고, 포르투갈 왕국의 포르투갈의 페르디난드 1세가 갈리시아 왕국의 왕위를 주장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랭커스터의 존이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주장을 펼치면서 포르투갈과 영국의 역사적 동맹으로 이어졌다.
대중의 기억 속에서 페드로 1세는 이슬람 술탄(그라나다)과 동맹을 맺은 몇 안 되는 군주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동시에 가톨릭 국왕이기도 했다.
6. 3. 자녀와 후계
페드로 1세는 마리아 데 파디야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다.
후아나 데 카스트로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마리아 데 파디야의 사촌인 마리아 데 헤네스트로사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페르난도를 두었다.
아들 알폰소의 유모인 이사벨 데 산도발과의 사이에서 2남을 두었다.
- 산초 (1363–1371)
- 디에고 (1365–1440): 그의 손자 페드로 데 카스티야 이 폰세카 "엘 모조"는 포르투갈 여왕의 연인이었다.
페로 로페스 데 아얄라의 조카인 테레사 데 아얄라와의 사이에서는 딸 마리아를 두었다.
- 마리아 데 카스티야: 어머니와 함께 톨레도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인 산토 도밍고 엘 레알에서 오랫동안 경력을 쌓았으며 트라스타마라 가문과 우호적인 서신을 주고받았다.
참조
[1]
웹사이트
Pope Bl. Urban V
https://www.newadven[...]
[2]
서적
[3]
서적
[4]
서적
Histoire de Bertrand du Guesclin, connestable de France et des royaumes de Léon, de Castille, de Cordoue et de Séville, duc de Molines, comte de Longueville
chez Jean Guignard
1666
[5]
웹사이트
http://jewishhistory[...]
[6]
웹사이트
Attersoll, Ann...
https://www.rc.umd.e[...]
2017-11-11
[7]
웹사이트
Beatriz de Castilla | Real Academia de la Historia
https://dbe.rah.es/b[...]
[8]
서적
Catalina de Lancaster
[9]
웹사이트
House of Ivrea-Castile
http://genealogy.euw[...]
[10]
웹사이트
Don Sancho de Castilla (1363-1371): Apuntes biográficos de un hijo ilegítimo de Pedro I.
https://www.academia[...]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백년전쟁 1337~1453 중세의 역사를 바꾼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이야기
미지북스
2018-03-1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