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제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엘리제궁은 프랑스 파리 55번가에 위치한 대통령 관저로, 1718년 건축가 아르망 클로드 몰레가 건축한 건물이다. 퐁파두르 부인, 나폴레옹, 샤를 10세 등 여러 인물이 거쳐 갔으며, 1873년부터 프랑스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거주하고 있으며, 프랑스 공화국 친위대가 엄중히 경비한다. 궁전 내부는 특정 참관일을 제외하고는 견학할 수 없으며, 1층에는 베스티뷸 도뇌르, 살롱 다르장, 살르 데 페트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방들이 있다. 2층에는 대통령 집무실, 개인 공간 등이 위치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722년 완공된 건축물 - 블레넘궁
블레넘 궁은 앤 여왕이 초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에게 하사한 잉글랜드 옥스퍼드셔 소재의 저택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영국 바로크 건축의 대표적 사례이며, 윈스턴 처칠의 출생지이자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현재 말버러 공작가의 저택이다. - 파리의 궁전 - 팔레 루아얄
팔레 루아얄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역사적인 건물로, 리슐리외 추기경의 저택에서 왕궁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여러 정부 기관과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며, 현대 미술 작품과 르 그랑 베푸르 레스토랑이 위치해 있다. - 파리의 궁전 - 부르봉궁
부르봉궁은 1722년 개인 저택으로 건설되어 프랑스 혁명 이후 여러 입법 기관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프랑스 국민의회의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프랑스 정치사의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엘리제궁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일반 정보 | |
이전 이름 | Hôtel d'Évreux (에브뢰 호텔) |
주소 | 프랑스, 파리 8구,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 55번지 |
착공일 | 1718년 |
완공일 | 1722년 |
건축가 | 아르망-클로드 몰레 |
소유주 | 프랑스 정부 |
층수 | 3층 |
건축 유형 | 저택 |
건축 양식 | 18세기: 고전주의, 루이 14세 양식, 루이 15세 양식, 프랑스 바로크 건축, 신고전주의 19세기 추가: 제정 양식, 네오 바로크 건축, 제2제정 양식 |
의뢰인 | 루이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에브뢰 백작 |
현재 거주자 | 에마뉘엘 마크롱(프랑스 대통령)과 그의 부인 브리지트 마크롱 |
![]() | |
![]() | |
용도 | |
현재 용도 |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관저 |
이전 용도 | (정보 없음) |
역사 | |
대통력 관저 시작 | 1873년부터 |
2. 역사
1718년 건축가 '아르망 클로드 몰레'는 현재 엘리제 궁이 위치한 마을의 소유권과 도로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1718년 루이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에게 땅을 팔았는데, 자신이 직접 궁정은 앞, 건물 뒷부분은 정원으로 건축을 한다는 조건이었다.[1] 1722년 건축이 완료되었지만, 지속적인 보수와 수리를 통해 현재까지도 고전적인 건축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1753년 몰레가 사망할 때까지 엘리제 궁은 파리에서 가장 격식이 높은 건물로 꼽혔다. 루이 15세는 애첩 퐁파두르 후작 부인에게 엘리제 궁을 선물했다.[11] 퐁파두르 부인을 혐오하던 사람들은 "왕의 매춘부가 사는 곳"이라는 팻말을 들고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그녀가 죽은 후 엘리제 궁은 왕가 재산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1773년 당대 프랑스 최고 부자이자 궁정 은행가였던 니콜라 보종이 엘리제 궁을 사들였다. 그는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건물을 사들여 수많은 명작으로 장식하고, 건축가 에티엔 루이 불레를 고용하여 영국풍 정원과 건물 전체를 보수했다. 건축이 완료될 무렵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홀바인), 프란스 할스의 "보헤미안" 등 여러 명작이 전시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엘리제 궁을 소유하다 루이 16세에게 양도하였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통치 기간에는 엘리제 궁이 가구 창고, 인쇄공장, 무도회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1814년 파리를 점령한 러시아 제국 코사크 기병대가 엘리제 궁에 머물기도 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대에 들어서 엘리제 궁은 정부 공식 관저로서의 지위를 획득했고, 2차 공화국에서는 '엘리제 국립 궁'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관저로 공인되었다.
1853년 나폴레옹 3세는 건축가 조셉 외젠 라크로와에게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맡겼고, 1867년 완공 이후 엘리제 궁전의 외형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1870년 공화제가 다시 들어서면서 엘리제 궁은 대통령궁으로서 권위를 되찾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인근 동물원에서 탈출한 고릴라가 궁전에 난입하여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의 영부인이 끌려가는 소동이 벌어졌으나, 궁전 경호원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1920년 정신착란증 증세로 사임한 폴 데샤넬 대통령은 고릴라 소동에 심취하여 CSCE 회의 동안 나무에 올라가 직접 연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엘리제 궁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폐쇄되었다가 전후에도 빈 상태로 방치되었다. 1959년부터 프랑스 제5공화국의 샤를 드골 대통령이 머물면서 정계의 영향을 받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도록 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엘리제 궁을 거의 사적 공간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공식 업무가 끝나면 자신의 사택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호했다. 반면,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1995년부터 2007년까지 두 번의 임기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엘리제 궁에 머물렀다.
시라크 대통령은 엘리제 궁의 예산을 105% 증가시켜 9000만유로에 달하는 비용을 썼다. 매년 100만유로는 엘리제 궁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음료 값, 690만유로는 대통령궁 직원들의 특별 급여, 610만유로는 시라크 대통령이 임기 당시 고용했던 특별 직원의 급여로 사용되었다. 1995년 시라크 대통령 취임 이후 프랑스 대통령직의 급여는 81,012유로에 달했다.
2007년 프랑스 대선에서 당선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엘리제 궁에서 머물겠다고 밝혔으나, 그의 전 아내 세실리아는 이에 의심을 표하며 실제로 엘리제 궁에 머물지 않았다. 10월 18일 사르코지와 세실리아는 이혼했으며, 대통령이 된 후에도 두 사람은 엘리제 궁에서 함께 머문 적이 없다. 현재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엘리제 궁에 거주하고 있다.
2. 1. 건립 초기
건축가 아르망 클로드 몰레(Armand-Claude Mollet)는 파리 서쪽, 루르 마을로 가는 길(현재의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Rue du Faubourg Saint-Honoré))에 접해 있고, 샹젤리제(Champs-Élysées)를 통과하는 왕실 소유지인 '그랑 쿠르'에 인접한 부지를 소유하고 있었다.[1] 그는 1718년 루이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에브뢰 백작에게 이 부지를 판매했는데, 몰레가 백작을 위해 명예의 안뜰(Cour d'honneur)과 정원이 딸린 오텔 파르티큘리에|hôtel particulier프랑스어를 건설한다는 조건이었다.

에브뢰 저택은 1722년까지 완공되어 장식되었으며, 이후 많은 수정을 거쳤지만 프랑스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의 훌륭한 예로 남아 있다. 1753년 에브뢰 백작이 사망했을 당시, 에브뢰 저택은 파리에서 가장 널리 존경받는 저택 중 하나였으며, 퐁파두르 후작 부인(Marquise de Pompadour)이 같은 해 12월 24일 73만 리브르에 매입했다.[2] 반대파들은 문에 "왕의 창녀의 집"이라는 표지판을 걸어 정권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냈다.[3] 그녀가 사망한 후, 유언에 따라 왕실에 남겨졌다.
1773년, 이 저택은 궁정의 은행가이자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하나인 니콜라 보종(Nicolas Beaujon)이 구매했는데, 그는 자신의 훌륭한 거장 회화 컬렉션을 보관할 적절한 호화로운 "별장"이 필요했다(당시 파리시는 아직 이만큼 확장되지 않았다). 이를 위해 그는 건축가 에티엔 루이 불레(Étienne-Louis Boullée)를 고용하여 건물에 상당한 개조를 가하고 영국식 정원을 설계하기도 했다. 곧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의 대사들 (홀바인) (현재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 소장), 프란스 할스의 ''보헤미안'' (현재 루브르 박물관 소장)과 같은 유명한 걸작들이 전시되었다.
2. 2. 소유주의 변천
1718년 건축가 아르망-클로드 몰레(Armand-Claude Mollet)가 현재 궁이 위치한 마을의 소유권과 도로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1718년 루이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에게 땅을 팔았는데, 자신이 직접 궁정은 앞, 건물 뒷부분은 정원으로 건축을 한다는 조건이었다.[1] 건축은 1722년 완료되었지만, 지속적인 보수와 수리를 통해 현재까지 고전적인 건축 양식을 유지하고 있다.1753년 아르망이 사망할 당시 엘리제 궁은 파리에서 가장 격식이 높은 건물로 꼽혔고, 루이 15세는 애첩 퐁파두르 후작 부인(Marquise de Pompadour)에게 선물했다.[11]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왕의 매춘부가 사는 곳"이라는 팻말을 들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3] 그녀가 죽은 후 엘리제 궁은 왕가 재산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1773년에는 당대 프랑스 최고 부자이자 궁정 은행가였던 니콜라 보종(Nicolas Beaujon)이 궁을 사들였다. 그는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건물을 사들여 수많은 명작으로 장식하고, 건축가 에티엔 루이 불레(Étienne-Louis Boullée)를 고용하여 영국풍 정원과 건물 전체를 보수했다. 완성 후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홀바인), 프란스 할스의 ''보헤미안'' 등 여러 명작이 전시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엘리제 궁을 소유하다 루이 16세에게 양도하였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통치 기간에는 가구 창고, 인쇄공장, 무도회장 등으로 사용되었다. 1814년 파리를 점령한 러시아 제국의 코사크 기병대가 엘리제 궁에 머물기도 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대에 들어서 엘리제 궁은 정부 공식 관저로서의 지위를 획득했고, 2차 공화국에서는 '엘리제 국립 궁'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관저로 공인되었다.
1853년 나폴레옹 3세는 건축가 조셉 외젠 라크로와(Joseph-Eugène Lacroix)에게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맡겼고, 1867년 완공 이후 엘리제 궁전의 외형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2. 3. 대통령궁으로서의 역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통치 기간에는 엘리제 궁이 주요 가구 창고와 인쇄공장, 무도회장 등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1814년 제정 러시아의 코사크 기병군은 파리를 점령했을 때 엘리제 궁에 머물렀다.[5]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에 들어서야 엘리제 궁은 정부 공식 관저로서의 형식적 지위를 획득했으며, 2차 공화국에 들어서는 엘리제 국립 궁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관저로 공인되었다.
1853년 나폴레옹의 지배가 사실상 끝나면서 나폴레옹 3세는 건축가 Joseph-Eugène Lacroix|조셉 외젠 라크로와프랑스어에게 엘리제 궁의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맡기고 인근의 튈르리 궁전으로 거처를 잠시 옮겼다. 하지만 공사 기간 동에도 그는 애첩들과 엘리제 궁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지금은 없어졌지만 두 거처 사이의 비밀 통로를 통해 서로 만났다고 전해진다. 1867년 라크로와의 공사 완공 이후 엘리제 궁전의 외형적 모습은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1870년 공화제가 다시 들어서면서 엘리제 궁은 다시금 대통령궁으로서 권위를 되찾았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인근 동물원에서 탈출한 고릴라가 궁전에 난입하는 소동이 벌어져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의 영부인이 끌려가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나, 궁전 경호원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1920년 정신착란증 증세로 사임한 폴 데샤넬 대통령은 고릴라 소동에 심취하여 CSCE 회의 동안 나무에 올라가 직접 연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엘리제 궁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폐쇄되었다가 전후에도 빈 상태로 방치되었다. 1959년부터 프랑스 제5 공화국의 샤를 드골 대통령이 머물면서 정계의 영향을 받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도록 했다.
미테랑 대통령은 엘리제 궁을 거의 사적 공간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공식 업무가 끝나면 자신의 사택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호했다. 반면,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1995년부터 2007년까지 두 번의 임기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엘리제 궁에 머물렀다.
시라크 대통령은 엘리제 궁의 예산을 105% 증가시켜 9000만유로에 달하는 비용을 썼다. 매년 100만유로는 엘리제 궁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음료 값, 690만유로는 대통령궁 직원들의 특별 급여, 610만유로는 시라크 대통령이 임기 당시 고용했던 특별 직원의 급여로 사용되었다. 1995년 시라크 대통령 취임 이후 프랑스 대통령직의 급여는 81,012 유로에 달했다.
2007년 프랑스 대선에서 당선된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엘리제 궁에서 머물겠다고 밝혔으나, 그의 전 아내 세실리아는 이에 의심을 표하며 실제로 엘리제 궁에 머물지 않았다. 10월 18일 사르코지와 세실리아는 이혼했으며, 대통령이 된 후에도 두 사람은 엘리제 궁에서 함께 머문 적이 없다. 현재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엘리제 궁에 거주하고 있다.

3. 구조
엘리제 궁은 프랑스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의 훌륭한 예로, 1722년 완공된 이후 여러 차례 개조되었다.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 55번지에 위치하며, 와 교차한다.
건물 구조:
- 정문: 4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있는 기념비적인 문이 둥근 안뜰로 이어진다.
- 주 건물: 프랑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입구 현관은 의례용 안뜰 및 정원과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 내부: 길고 중앙에 있는 건물에는 정원으로 열린 큰 살롱을 중심으로 나뉜 대형 국가 아파트가 있다. 중앙 3층 구역과 두 개의 단층 날개(오른쪽에는 아파트 드 뱅, 왼쪽에는 프티 아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 정원: 프랑스식 정원으로, 중앙 건물과 일직선으로 정렬된 중앙 통로, 패턴화된 화단, 울타리가 있는 밤나무 가로수길로 구성되어 있다.
초기 역사:
- 1718년 건축가 아르망-클로드 몰레[1]는 루이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에브뢰 백작에게 부지를 판매하고, 명예의 안뜰(Cour d'honneur)과 정원이 딸린 오텔 파르티큘리에(hôtel particulier)프랑스어를 건설했다.
- 1753년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저택을 매입했다.[2]
- 1773년 니콜라 보종이 저택을 구매하고, 건축가 에티엔 루이 불레에게 개조를 의뢰하여 영국식 정원을 추가했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 (홀바인), 프란스 할스의 ''보헤미안'' 등 유명 작품을 소장했다.
3. 1. 1층
베스티뷸 도뇌르(명예의 홀)는 엘리제 궁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방이다. 이 방에서 프랑스 대통령은 방문하는 고위 관리, 세계 지도자, 종교 지도자들을 만난다.
살롱 다르장(은색 방)은 궁의 동쪽 별관에 있으며, 요아킴 뮈라의 아내이자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캐롤라인 뮈라가 장식했다. 벽, 벽난로, 테이블, 소파와 의자 등에 은색 테두리가 둘러져 있고, 의자 옆면에는 백조 조각이 있어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 방에서는 세 가지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1815년 6월 22일,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후 공식적으로 퇴위 각서에 서명했다. 1851년 12월 2일, 나폴레옹 3세는 1851년 프랑스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1899년 펠릭스 포르 대통령은 그의 정부인 마르그리트 슈타인하일을 만났다.[7]
살르 아 망제 폴랭(폴랭 식당)은 건축가 피에르 폴랭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궁의 다른 방들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과 그의 부인 클로드 퐁피두를 위한 개인 식당으로 설계되었으며, 내부와 가구는 1970년대 양식이다. 벽은 22개의 폴리에스터 패널로 만들어졌고, 의자는 둥근 받침대에 하나의 다리가 연결되어 있으며, 둥근 테이블은 유리로 만들어졌다. 방은 유리 공과 막대로 장식된 천장 패널로 밝혀진다.[7]
살롱 데 포르트레(초상화 방)는 나폴레옹 3세가 당시 가장 중요한 군주들의 초상 메달을 전시하는 데 사용했으며, 요아킴 뮈라가 설치한 이전의 보나파르트 가문의 초상화를 대체했다. 초상화는 교황 비오 9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프란츠 요제프 1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차르 니콜라이 1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스페인의 이사벨 2세,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1세이다. 이전에는 식당으로 사용되었으며,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 방을 두 번째 사무실로 사용했다.
살르 데 페트(축제 홀)는 궁의 서쪽 별관을 지배한다. 1889년 당시 대통령인 마리 프랑수아 사디 카르노가 그 해 만국 박람회에 맞춰 1889년 5월 10일에 문을 열었다. 이 방에는 1894년 기욤 드뷔페가 그린 "''라 레퓌블리크 소브가르 라 퍠''"(공화국은 평화를 보호한다)라는 천장화가 있다. 또한 방에는 6개의 고블랭 공방 태피스트리가 있으며, 주로 빨간색과 금색으로 장식되어 있다. 1984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더 많은 빛을 들이기 위해 방에 10개의 창문을 추가했다. 모든 프랑스 대통령이 취임하고 공식 회의와 연회를 주최하는 곳이 바로 이 방이다.[7]
자르댕 디베르(겨울 정원)는 1883년에 식물을 재배하기 위한 온실로 지어졌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이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대신 살르 데 페트의 연장선으로 공식 연회에 사용된다. 벽에는 고블랭 공방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으며, 천장에는 세 개의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다.[7]
살롱 뮈라(뮈라 방)는 매주 수요일 프랑스 대통령이 프랑스 총리 및 나머지 프랑스 정부와 회의를 할 때 사용되며, "엘리제의 사무총장"으로 알려진 대통령 비서와 함께 사용된다. 또한 이 방에서 1963년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총리가 엘리제 조약에 서명했다.
살롱 클레오파트르(클레오파트라 방)는 마리 프랑수아 사디 카르노 대통령 재임 기간에 설치된 벽에 걸린 고블랭 공방 태피스트리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마르크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타르수스에서 만나는 모습을 묘사한다. 또한 이 방에는 알렉상드르 로슬랭이 그린 파르마 공작부인 마리아 아말리아의 초상화가 있다.[7]
살롱 데 잠바사되르(대사관 방)는 프랑스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해외 대사들을 접견하는 곳이다.
살롱 블루(블루 룸)는 프랑스 영부인의 사무실로 사용된다.
에스칼리에 뮈라(뮈라 계단)는 궁의 주요 계단으로, 1층과 2층을 연결한다.
3. 2. 2층

살롱 도레(황금 방)는 벽, 문, 테이블, 의자의 금색 가장자리에서 이름을 따왔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과 에마뉘엘 마크롱을 제외한 모든 프랑스 대통령은 이 방을 주요 집무실로 사용했다.[8]
살롱 베르(녹색 방)는 녹색 커튼과 의자 덮개에서 이름을 따왔다(문, 의자, 테이블, 벽 특징에는 금색 가장자리가 있음). 이 방은 재회에 사용되며, 니콜라 사르코지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의 두 번째 부인 카를라 브루니와 결혼한 곳이기도 하다.
살롱 앙글(각도 방)은 2007년부터 엘리제 궁의 사무총장 집무실이었던 이전의 식당이다.
살롱 드 푸제르(꽃 방)는 꽃무늬 벽지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방에는 샤를-앙드레 반 로가 그린 루이 15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7]
앙시엔 샹브르 드 라 렌(구 여왕의 침실)과 앙시엔 샹브르 뒤 루아(구 왕의 침실)는 프랑스 전 왕과 왕비의 침실이었다. 후자의 방은 사무총장이 살롱 앙글로 옮기기 전에는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동쪽 별관의 1층에 있는 다른 6개의 방은 대통령의 개인 거주 구역이다.
참조
[1]
문서
Armand-Claude Mollet (1660–1742), from the [[Claude Mollet|Mollet dynasty of royal gardeners]], was the house architect for Henri-Louis, comte de Dreux. Sharing responsibilities for the [[Tuileries Garden]] with [[André Le Nôtre]]'s nephew [[Jean Le Nôtre]], he was accepted into the [[Académie royale d'architecture]] in 1699.
[2]
서적
Madame de Pompadour
Farrar, Straus & Giroux
[3]
뉴스
La Pompadour a-t-elle mené Louis XV à sa perte ?
France 2
2007-11-25
[4]
간행물
Le palais de l'Élysée, chronique d'un palais national
[5]
서적
Paris: Past & Present
https://books.google[...]
New York
[6]
서적
Les dames de l'Élysée
Perrin
[7]
웹사이트
Le Palais de l'Élysée, histoire et décorum
http://www.olivierbe[...]
olivierberni-interieurs.com
2013-02-07
[8]
웹사이트
Macron's appeal to French from behind gold desk leaves gilets jaunes unimpressed
https://www.theguard[...]
2018-12-11
[9]
문서
大統領府の公式サイトのドメインはelysee.frである。
https://www.elysee.f[...]
[10]
웹사이트
仏大統領の「ファーストドッグ」、会議中にエリゼ宮の暖炉でおしっこ
https://www.afpbb.co[...]
AFP
2018-03-21
[11]
문서
엘리제궁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부인에게 얼굴 맞은 마크롱···러시아 외교부 “라이트훅 맞았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