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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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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봉궁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건물로, 현재 프랑스 하원인 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가 사용하고 있다. 루이 14세의 서출 딸인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이 1722년부터 1728년까지 건축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재건축과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의회의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주요 시설로는 본회의장, 살롱, 도서관, 오텔 드 라세 등이 있다. 부르봉궁에는 쥘 달루, 외젠 들라크루아, 월터 드 마리아 등 여러 예술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프랑스 정치의 중심지로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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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궁 - [지명]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센 강에서 바라본 부르봉 궁전
부르봉 궁전 북쪽 파사드
기본 정보
명칭부르봉 궁전
로마자 표기Palais Bourbon
건축 시작일1722년
완공일1728년
개조일1765–1788년, 1795년, 1828년
연면적124,000 m²
명칭 유래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
현재 입주 기관프랑스 국민의회
위치파리 7구, 파리, 프랑스
주소뤼 드 뤼니베르시테 126번지
건축가로렌초 지아르디니, 피에르 카이예토, 장 오베르, 자크 가브리엘
웹사이트공식 웹사이트
개조 건축가베르나르 푸아예, 쥘 드 졸리
소유주프랑스 국가
건축 정보
용도프랑스 국민의회 의사당
착공1722년
준공1728년
의사당 개관1795년
상세 위치
소재지프랑스, 파리 7구, 오르세 강변 (또는 생제르맹 대로 서쪽 끝)

2. 역사

루이 14세의 서출인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이 라세이 백작 아르망 드 마다이용 드 레스파르의 제안을 받아 1722년부터 1728년까지 약 6년에 걸쳐 부르봉 궁전을 건설하였다. 인접한 오텔 드 라세도 함께 건설되었는데, 현재 이 건물은 프랑스 국민의회(하원) 의장 공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설 전 이 지역은 파리 외곽의 초원과 목초지였으며, 결투가 벌어지기도 했다.[6] 루이 15세의 섭정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가 궁정을 파리로 옮기면서 귀족들은 르 마레 지역 대신 넓은 정원을 확보할 수 있는 세느강변, 특히 샹젤리제 거리 근처 땅을 찾게 되었고, 이 지역과 포부르 생토노레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했다.[7]

현재 이 일대는 세련된 포부르 생제르맹 지역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1795년 총재정부 수립으로 부르봉 궁전은 500인회에 할당되어 프랑스 국민의회(하원)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제정을 시작하면서 마들렌 성당에 맞춰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 신전을 본뜬 신고전주의 양식의 코린트식 기둥을 정면에 세웠다.

2. 1. 부르봉 공작 가문의 궁전 (1722-1789)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은 루이 14세와 마담 드 몽트스팡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콩데 공 루이 3세와 결혼했다. 1722년부터 1728년까지 부르봉 궁전과 오텔 드 라세(현 국회의장 거처)를 동시에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부르봉 궁전은 그녀가 획득한 토지에, 오텔 드 라세는 그녀의 정부였던 라세 후작에게 양도한 토지에 지어졌다.[6]

건축에는 자르디니, '라쉬랑스'라고 불린 피에르 카이유토, 장 오베르, 자크 5세 가브리엘 등 네 명의 건축가가 참여했다. 자르디니와 카이유토는 일찍 사망했고, 오베르와 가브리엘이 1728년에 작업을 완료했다. 두 건물은 안마당과 정원 사이에 단층(plan-pied) 건축이라는 공통된 '이탈리아풍' 건축 구상을 따랐다. 1728년 완공된 부르봉 궁전은 대트리아농(Grand Trianon)을 연상시키는 건축 양식으로, 당시 '왕실의 저택 다음으로 가장 화려한 도시의 자랑'으로 여겨졌다.[6]

공작부인 사후, 부르봉 궁전은 루이 15세에게 주어졌다가 1764년 루이 5세 조제프 드 부르봉콩데에게 양도되었다. 루이 5세는 카르팡티에와 벨리사르에게 궁전 확장 작업을 맡겼다. 쿠르도뇌르(cour d'honneur)는 서쪽부터 1768년 후작의 후손들에게서 매입한 오텔 드 라세까지 이어지는 건물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2. 2. 프랑스 혁명과 의회 (1789-현재)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첫걸음으로, 첫 번째 국민의회는 왕실의 허가 없이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 코트에서 소집되었다. 1793년 5월에는 파리 튈르리 궁전의 빈 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귀족들은 망명했고, 부르봉궁은 국유화되어 정부 기능에 사용되었다. 1794년에는 공공 사업 중앙학교가 되었으며, 이후 에콜 폴리테크니크가 되었다.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가 이끌던 국민공회 아래 혁명은 격렬해졌으나, 1794년 7월 두 지도자가 처형되고 디렉토리가 권력을 잡았다. 1795년 9월, 500인 평의회와 장로원의 두 의회를 가진 의회를 요구하는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었다. 500인 평의회는 부르봉궁을 미래 회의 장소로 지정받았고, 1798년 1월 21일에 첫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새로운 회의실은 음향이 좋지 않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9년 11월 쿠데타를 일으켜 500인 평의회의 권력을 장악하고, '코르 르지슬라티프'라는 새로운 입법부를 구성했다. 나폴레옹은 1806년 베르나르 푸아예에게 센 강을 향한 새로운 정면 건설을 지시했는데, 이는 마들렌 교회와 일직선이 되도록 설계되었다. 정면에는 코린트식 기둥 12개가 있었고, 앙투안-드니 쇼데가 제작한 부조가 있었다. 1810년에는 장-바티스트 콜베르 등 유명 왕실 장관들의 동상이 추가되었다.

1814년 나폴레옹 몰락 후 부르봉 왕가가 복고되었지만, 일부 민주적 제도는 유지되었다. 부르봉궁은 소유주에게 반환되었으나, 하원에 임대되었다. 1827년 하원은 건물을 매입했고, 쥘 드 졸리가 대대적인 개보수를 맡았다. 1830년 혁명에도 불구하고 공사는 계속되었고, 1832년 11월에 새로운 의회가 개관했다.

하원 회의장은 반원형 형태를 유지했지만, 바닥이 낮아지고 연단과 의장석의 높이가 높아졌다. 프라데(Pradet)의 "자유"와 "공공 질서" 조각상이 연단 양쪽에 설치되었고, 힘, 정의, 신중함, 웅변을 나타내는 조각상이 아치의 기둥을 장식했다. 졸리는 명예 중정에 신고전주의적 현관을 건설하고, 내부 공간을 확장했다.

외젠 들라크루아는 국왕의 응접실과 도서관 벽화를 그렸다. 도서관은 고대 로마 목욕탕과 유사한 스타일로, 5개의 돔과 채광창이 특징이다. 들라크루아는 1838년부터 1846년까지 철학, 자연사, 입법, 웅변, 문학, 시, 신학을 주제로 한 우화적 그림을 그렸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51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되었고, 의회는 부르봉궁에서 계속 회합했지만 영향력은 미미했다. 1860년 이후 의회의 권한이 확대되었고, 1870년 프랑스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제3공화국 의회는 53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규모가 더 컸다. 의회는 프랑스 대통령을 선출하고 재정과 외교 정책을 통제했다. 1940년 독일군 점령 하에서 부르봉궁은 독일 공군의 군사 법원으로 사용되었다. 1944년 파리 해방 당시 궁전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샤를 드골의 아들 필립 드골이 독일군의 항복을 협상했다.

1946년 프랑스 제4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56년 알제리 전쟁 이후 프랑스 제5공화국이 수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주요 시설

부르봉궁의 주요 시설로는 본회의장, 여러 살롱, 도서관, 오텔 드 라세, 명예의 정원 등이 있다.


  • 명예의 정원 (Cour d'honneur)


부르봉궁 남쪽에 위치하며, 궁전 건설 초기부터 주요 출입구 역할을 해왔다. 1830년대 현관 위에 의례적 현관이 추가되면서 크게 개조되었지만, 원래 윤곽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입구 양쪽에는 보편적 참정권과 법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있는데, 1860년에 추가되었다.[6] 안뜰 중앙에는 월터 드 마리아의 작품인 '인권의 구체'가 있는데,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설치되었다.[6]

1720년대, 루이 14세의 서출 딸인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이 연인 관계였던 라세이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여 1722년부터 1728년까지 건설했다. 인접한 곳에는 라세이 공관(오텔 드 라세)도 함께 건설되었는데, 현재는 프랑스 국민의회 의장 공관으로 사용되고 있다.[6]

건설 당시 이 지역은 파리 외곽의 초원과 목초지였으며, 결투 장소로도 이용되었다.[6] 루이 14세 사후, 루이 15세의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로 궁정을 옮기면서 귀족들의 주거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인구 밀도가 높았던 르 마레 지역 대신 넓은 정원을 조성할 수 있는 센 강변, 특히 샹젤리제 거리 근처의 땅을 선호했고, 이 지역은 포부르 생토노레 지역과 함께[7] 개발되었다.

3. 1. 본회의장 (Hémicycle)

자크 루이 다비드가 디자인하고 프랑수아-프레드릭 르모가 제작한 역사와 명예의 부조가 있는 의회 연단은 1797~98년에 만들어졌다.[1] 의장 책상과 안락의자는 다비드가 고전 로마 양식으로 디자인했으며, 연단 뒤 부조는 어두운 다색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흰색 대리석 조각이다.[1] 법을 선포하는 명예, 역사를 판에 새기는 두 여성 인물, 마리안느 흉상(로마 신 야누스 메달 착용, 과거 경험으로 미래 예측 모토)이 있다.[1]

1795년 9월, 500인 평의회와 장로원으로 구성된 의회 헌법이 채택되었고, 500인 평의회는 부르봉궁을 회의 장소로 지정받았다.[1] 지소르와 르콩트 건축가는 궁전 아파트를 반원형 회의실로 개조했다.[1] 1798년 1월 첫 회의가 열렸으나, 음향 문제가 있었다.[1]

1832년 개보수로 바닥이 낮아지고 천장, 연단, 의장석이 높아졌다.[1] 개선문 형태 주랑과 발코니가 연단 뒤에 건설되어 극장 무대처럼 보였다.[1] 연단 위/뒤 중앙 패널에는 의회 선서 루이 필리프 1세 그림, 양옆에 프라데(Pradet)의 "자유", "공공 질서" 조각상 벽감, 아치 기둥에는 힘, 정의, 신중함, 웅변 조각상이 있었다.[1]

부르봉궁 회의장(''살 드 세앙스'')은 1832년과 기본 외관, 배치가 같다.[1] 헌법상 국회는 10월 초~6월 말 9개월 회기, 대통령은 특별 회기 소집 가능하다.[1] 5년 임기 의원 577명은 사회당 등 좌파는 의장석 왼쪽, 보수는 오른쪽에 앉는다.[1] 국회의장은 ''퍼슈아르''(횃대) 의장석에 앉는다(다비드 디자인).[1]

의원들은 전자 투표, 결과는 회의장 앞에 표시된다.[1] 회의는 공개, 의원실 통해 접근, 국회 사이트 생중계.[1]

3. 2. 살롱 (Salons)

부르봉궁의 살롱들은 루이 필리프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외젠 들라크루아를 비롯한 저명한 예술가들이 장식을 맡았다.

  • '''카지미르 페리에 회의장(Salle Casimir-Périer)'''은 아치형 천장이 있는 넓은 복도로, 의회 회의장과 살롱, 명예의 중정을 연결한다. 건축 양식은 고대 로마 바실리카에서 영감을 받았다. 주요 장식은 조각가 쥘 달루(Jules Dalou)가 제작한 청동 부조로, 프랑스 혁명 당시 의회의 첫 회의를 묘사하고 있다. 원래는 건설되지 않은 혁명 기념비를 위해 디자인되었고, 이후 의회 의장 레옹 감베타(Leon Gambetta)의 요청으로 부르봉궁을 위해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길이 m, 높이 m, 무게는 4톤이다. 이 회의장에는 또한 여러 주제를 가진 저명한 의회 의원 6명의 조각상이 있다. 절대 정부에 저항한 미라보와 막시밀리앵 세바스티앵 포이(Maximilien Sébastien Foy)의 조각상, 인민 폭동에 저항한 장 실뱅 바이이(Jean Sylvain Bailly)와 카지미르 페리에(Casimir Périer)의 조각상, 그리고 프랑스 민법의 저자인 장 에티엔 마리 포르탈리스(Jean-Étienne-Marie Portalis)와 프랑수아 드니 트롱셰(François Denis Tronchet)를 기념하는 조각상이 있다. 장식에는 천장 아래 양쪽 끝에 법을 보호하는 자와 불의를 응징하는 법을 나타내는 부조도 있다. 회의장을 비추는 루넷에는 명상, 정의, 평화, 노동, 산업, 상업, 힘, 전쟁, 해상 무역, 농업을 나타내는 조각 장식도 있다. 이 회의장은 정부 구성원들이 화요일과 수요일,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의회로 들어가기 전에 모이는 곳이다.[3]

  • '''들라크루아 살롱(Salon Delacroix)'''은 들라크루아가 25세 때부터 장식을 시작했다. 원래는 살롱 드 루아(Salon de Roi)라고 불렸으며, 루이 필립이 의회에 왔을 때 의원들을 만날 수 있는 장소로 의도되었다. 이 작업은 1836년에 완료되었다. 장식의 주요 요소는 네 개의 우화적 인물로, 들라크루아에 따르면 "국가의 살아있는 힘; 정의, 농업, 산업, 전쟁"을 상징한다. 서쪽 벽에는 바다와 지중해를 묘사한 두 개의 그리자이유 우화 그림이 있다. 이 그림 사이의 벽감에는 원래 루이 필립이 부르봉궁을 방문했을 때 사용하던 왕좌가 있었다. 이 살롱은 현재 좌파 의원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며, 그들의 자리는 바로 안쪽에 있으며, 비공식적인 의회 협상이 자주 이곳에서 이루어진다.[3]

  • '''실 드 파 퍼뒤(Salle des Pas-Perdus)'''에는 원래 공작 부인의 거주지에 침실과 욕실이 있었다. 루이 필립 치세 동안 공식적인 홀로 바뀌었고, 오라스 베르네(Horace Vernet)와 샤를 세샹(Charles Séchan)의 그림으로 장식되었으며, 1839년에 완성되었다. 베르네가 장식한 중앙에는 '평화가 그 혜택을 나누어주다'라는 그림이 있고, 프랑스에 새로 소개된 증기 기관차를 나타내는 '증기의 천재'와 증기선을 특징으로 하는 '증기의 천재가 바다의 신들을 쫓아내다' 그림이 양쪽에 있다. 루이 필립 시대부터 시작된 전통에 따라 의회 의장은 라세이 호텔(Hotel de Lassay)에서 오후 회의가 열리는 헤미사이클(Hemicycle)로 가는 길에 이 방을 지나간다. 그가 방에 도착하면 북소리가 나고, 그는 검을 든 공화국 근위병 두 줄을 지나간다. 근위병들은 그의 통행에 경례한다.

  • '''아벨 드 푸졸 살롱(Salon Abel de Pujol)'''은 루이 필립 시대인 1838년에서 1840년 사이에 만들어지고 장식되었다. 천장에 그리자이유를 그린 신고전주의 화가 아벨 드 푸졸(Abel de Pujol)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그림은 프랑스 군주가 법을 세우는 역할을 보여준다. 최초의 프랑스 법의 저자인 클로비스 1세(Clovis I), 샤를마뉴(Charlemagne), 루이 9세(성 루이), 그리고 그의 정부를 세운 1830년 헌장에 의한 루이 필립 자신이 그려져 있다. 오늘날 이 살롱은 특히 의회 회기 중 우파 의원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며, 마지막 순간의 변화와 전술을 협상한다.

  • '''네 개의 기둥이 있는 살롱(Salon des quatre colonnes)'''은 1798년 500인 의회의 회의실에 있던 여러 조각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다. 1832년 재건축 당시 이곳으로 옮겨졌다. 고대 입법자들의 조각상: 브루투스(Brutus), 리쿠르구스, 솔로몬(Solomon), 카토가 있다. 의회 회의장 문 양쪽에는 우파와 좌파를 상징하는 두 명의 유명한 의원의 흉상이 있다. 기독교 민주당의 알베르 드 뮌(Albert de Mun)과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Jean Jaurès)이다. 대리석 기념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한 의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공화국의 조각상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한 의원들과 의회 관계자들을 기념한다. 이 방은 오늘날 의회 회기 중 의원들과의 스탠딩 TV 인터뷰에 사용된다.[4]


'''회의장(Salle des Conférences)'''은 반원형 회의장(Hémicycle) 동쪽에 위치한 탁자와 램프가 놓인 큰 방으로, 의원들이 서류를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원래는 콩데 공(Prince de Condé)의 식당이었으나 1830년에 현재의 용도로 개조되었다. 천장에는 하임(Heim)이 그린 군주제와 의회의 역사를 묘사한 그림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벽난로 옆에는 의회 관련 역사적 그림들이 걸려 있다. 그중에는 오귀스트 뱅숑(Auguste Vinchon)의 ''필리프 4세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삼부회를 소집하다''와 아리 셰퍼(Ary Scheffer)의 ''칼레 시민의 애국적 헌신''이 있다.

회의장 옆에는 의원용 부페(Deputies Buffet)가 있다. 1994년에 벨 에포크 양식으로 조성되었고 1997년에 같은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현직 및 전직 의원만 이용할 수 있다.

3. 3. 도서관 (Bibliothèque)

'''도서관'''은 1830년부터 원래 궁전 옆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건축가 쥘 드 졸리(Jules de Joly)가 고대 로마 목욕탕 양식으로 설계했으며, 다섯 개의 돔을 지탱하는 기둥들이 빛을 제공한다. 양쪽 끝은 곡선형 베이로 막혀 있다.[5]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와 그의 조수들이 1838년부터 1847년 사이에 장식을 완성했다. 각 돔 주변 천장의 그림들은 인류 지식의 여러 분야(시, 신학, 법률, 철학, 과학)를 나타낸다. 주제를 묘사하는 이야기들은 프랑스 역사가 아닌 고대에서 가져왔다. 오비디우스(Ovid),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헤로도토스(Herodotus),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등 위대한 사상가들을 묘사했으며, 세례자 요한(Saint John the Baptist)의 죽음, 세네카(Seneca the Younger)의 죽음, 로마 병사에 의한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의 살해 등 민주주의와 문명에 대한 위험을 나타내는 장면들도 포함되어 있다. 방의 양쪽 끝 베이에 있는 큰 그림들은 '예술과 문명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오르페우스(Orpheus)'와 '이탈리아와 예술의 발치에 있는 아틸라(Attila)와 그의 야만인 무리들'을 나타낸다.[5]

도서관의 원래 소장품은 혁명 기간 동안 파리를 떠난 성직자와 귀족들의 도서관에서 압수한 책들로 구성되었다. 잔 다르크(Joan of Arc) 재판 기록, 1794년 그의 미망인이 기증한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원고, 아즈텍 사제들이 아즈텍 제국의 스페인 정복(Spanish conquest of the Aztec Empire) 직전이나 직후에 작성한 아즈텍 코덱스(Aztec codex)인 코덱스 보르보니쿠스(Codex Borbonicus) 등 의회에 기증된 많은 희귀 자료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 도서관은 의회 의원과 직원들의 사용을 위해 예약되어 있으며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3. 4. 오텔 드 라세 (Hôtel de Lassay)

오텔 드 라세(Hôtel de Lassay)는 부르봉궁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국민의회 의장의 공식 관저이다. 1722년부터 1728년까지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의 명령으로 부르봉 궁전과 동시에 건설되었다. 부르봉 공작부인이 획득한 토지 중 일부를 그녀의 정부였던 라세 후작에게 양도한 토지에 지어졌다.[1]

1846년부터 1848년까지 층수가 추가되는 등 대대적인 재건축을 거쳤지만,[1] 18세기 스타일의 외관과 내부 구조는 보존되었다.

  • '''의장 집무실(Cabinet du Départ)'''은 국회 회의 시작 시 의장이 출발하는 방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루이 14세 시대의 카펫과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재현한 태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있다. 이 방은 혁명 이전에는 저택의 서재였으며, 책상은 1794년 혁명 기간 동안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져와 공안위원회에서 사용되었다.[1]

  • '''게임 룸(Salon des Jeux)'''은 관저 1층에 있는 회의실로, 국회 의장이 다른 국회 지도자들과 만나 회의 의제를 설정하는 곳이다. 18세기 화가 하임(Heim)이 그린 잔디밭 볼링 게임 그림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

  • '''축제장(Salle des fêtes)'''과 '''타피스트리 갤러리(Galerie des tapisseries)'''는 라세이 호텔과 부르봉궁을 연결하는 건물에 있다. 축제장은 1809년에 지어진 초기 목조 통로를 대체하여 1846년에서 1849년 사이에 지어졌다. 오늘날에는 전시회, 귀빈 방문 행사, 그리고 국회 의장의 연례 신년 인사에 사용된다. 타피스트리 갤러리는 프랑스 제2제정 시대인 1860년에 그림 컬렉션을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1865년에 그림들이 제거되고 1900년에 9점의 보베(Beauvais) 태피스트리로 대체되었다.


3. 5. 명예의 정원 (Cour d'honneur)

부르봉궁 남쪽에 있는 명예의 정원(Cour d'honneur)은 궁전이 처음 건설된 이후 주요 출입구였다. 1830년대에 현관 위에 의례적 현관이 추가되면서 상당히 개조되었지만, 여전히 원래 윤곽을 유지하고 있다. 입구 양쪽의 조각상은 보편적 참정권과 법을 나타내는데, 제2제정 시대인 1860년에 추가되었다.[6] 안뜰 중앙에 있는 받침대 위의 화강암 구체는 미국 조각가 월터 드 마리아의 작품으로, 인권의 구체(Sphere of Human Rights)라고 불린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1989년에 추가되었다.[6]

1720년대, 루이 14세(Louis XIV)의 서출인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이 가까운 사이였던 라세이 백작 아르망 드 마다이용 드 레스파르(Armand de Madaillan de Lesparre)의 제안을 받아 1722년부터 1728년까지 약 6년에 걸쳐 건설하였다. 또한, 인접하여 라세이 공관(오텔 드 라세)도 건설되었는데, 현재 이 건물은 프랑스 국민의회(하원) 의장 공관으로 사용되고 있다.[6]

건설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 지역 일대는 파리 외곽에 펼쳐진 초원과 목초지에 불과했으며, 결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6] 루이 14세 사후, 어린 루이 15세(Louis XV)의 섭정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Philippe II d'Orléans)가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궁정을 옮기면서 귀족들의 주거지로서, 전통적으로 귀족들의 저택이 즐비하고 인구가 밀집한 르 마레(Le Marais) 지역이 아닌, 정원을 위한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파리 센 강변, 특히 개발이 진행 중이던 샹젤리제 거리(Champs-Élysées) 근처의 땅을 찾던 중, 포부르 생토노레(Faubourg Saint-Honoré) 지역(현재의 파리 8구)과 함께[7] 이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했다고 여겨진다.

4. 현대 미술

부르봉궁에는 여러 점의 현대 미술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미국의 조각가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가 제작한 대형 화강암 구체 조각 작품으로, 대리석 받침대 위에 놓여 있으며,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명예의 중정에 설치되었다. 화강암 구체 안에는 작은 금으로 만든 심장이 들어 있다.[1]

벨기에 화가 피에르 알레친스키(Pierre Alechinsky)의 작품은 1992년에 제작되었으며, 라세이 호텔(Hotel de Lassay)과 부르봉궁 사이 통로의 작은 로툰다에 자리 잡고 있다. "깨지기 쉬운 정원(The Fragile Garden)"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시인 장 타르디외(Jean Tardieu)의 시구, "사람들은 색깔이 떨리는 깨지기 쉬운 정원에서 빛을 찾는다"를 표현하고 있다.[1]

2004년에 만들어진 마리안느 살롱(Salon of Marianne)에는 공화국의 상징인 마리안느의 흉상이 시대와 스타일별로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2015년부터는 미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존원(JonOne)의 작품 ''자유, 평등, 박애(Liberté, Egalité, Fraternité)''가 전시되고 있다. 들라크루아의 유명한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청년, 미래, 희망을 상징한다.[1]

에르베 디 로사(Hervé Di Rosa), 자멜 타타(Djamel Tatah), 뱅상 바레(Vincent Barré), 파비엔 베르디에(Fabienne Verdier) 등의 주목할 만한 현대 작품들도 부르봉궁에 전시되어 있다.[1]

참조

[1] 웹사이트 Assemblée nationale — Les députés, le vote de la loi, le Parlement français http://www.assemblee[...] Assemblee-nat.fr 2012-09-07
[2] 서적 Jacques Offenbach Éditions Gallimard 2000
[3] 간행물 article on decoration of the Palais Bourbon Assemblée Nationale 1999
[4] 간행물 article in 'L'Assemblee Nationale' Beaux Arts Editions 2012
[5] 간행물 article in ''Assembleé Nationale'' special edition Beaux Arts 1999
[6] 문서 界隈はかつてプレ・オ・クレー(ル)(Pré-aux-Clercs)と呼ばれた、パリの有名な決闘地として知られた草地あるいは牧草地であった。現在も通り名に遺る(Rue du Pré-aux-Clercs)。
[7] 서적 L'Élysée, la vie et les métiers de la première maison de France Le Cherche Midi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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