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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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상은 진나라 말기, 유방을 도와 초한전쟁에서 공을 세운 전한의 개국 공신이다. 진승·오광의 난 당시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었고, 유방에게 귀순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특히 여후가 고조의 공신들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막아내는 데 기여했다. 이후 그의 아들 역기가 주발과 함께 여씨 일족을 제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상의 가문은 대대로 작위를 이어갔으나, 후손 중에는 죄를 지어 작위를 잃거나 처형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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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하는 전한 초기의 정치가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군수 보급, 내정 담당, 한신 천거, 승상으로서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한 인물이다.
역상 | |
---|---|
인물 정보 | |
이름 | 역상 |
본명 | 려상 (酈商) |
생몰년도 | 기원전 240년 ~ 기원전 180년 |
출생지 | 기원전 진나라 진류군 고양현 |
사망지 | 전한 |
직업 | 군인, 정치인 |
시대 | 진나라, 초한쟁패, 전한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려신 (酈信) |
형 | 려이기 (酈食其) |
아들 | 려걸 (酈疥) 려매 (酈買) |
2. 사적
한왕 5년(기원전 202년) 항우가 죽고 한왕이 황제가 된 후, 역상은 연왕 장도의 모반을 진압하여 우승상이 되었고 탁에 식읍 5천 호를 받았다.[6] 우승상으로서 상곡군을 평정하고 대를 공격해 조나라 상국이 되었으며, 주발 등과 함께 대와 안문을 평정하고 대의 고관들을 사로잡았다.[6] 진희의 난과 영포의 난을 진압하는 데도 공을 세워 곡주후에 봉해져 식읍 5천 1백 호를 받았다.[6]
고조 12년(기원전 195년), 고조가 죽자 여후는 심이기와 함께 고조의 공신들을 제거하려 했다.[8] 이를 알게 된 역상은 심이기를 찾아가 공신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여후 정권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경고하여 여후의 계획을 중지시켰다.[8] 전한 혜제와 고황후 통치 기간에는 병으로 정무를 보지 못했다.[6] 고황후 사후, 주발, 진평, 관영 등이 여씨 일족을 제거하려 할 때, 역상의 아들 역기가 여록과의 친분을 이용해 주발이 북군을 장악하도록 도왔다.[6] 역상은 이 무렵에 사망했다.[6]
2. 1. 초기 활동과 유방과의 만남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승 · 오광이 봉기할[5] 당시에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거느리고 있다가, 형 역이기가 유방에게 속해 진류를 함락하자 자신도 유방에게 귀순했다. 장사(長社) 공격에서 가장 먼저 성에 올라 신성군(信成君)의 작호를 받았고, 유방을 따라 관중에 들어가기 전까지 전공을 세웠으며 별군을 거느리고 한중을 평정했다.[6]기원전 206년,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패공 유방을 한왕으로 봉하자 신성군 · 농서도위를 맡았다. 삼진 침공에서는 옹나라의 북지군[7]과 적나라의 상군[7]을 평정했고, 옹나라의 군대를 몇 차례 무찔러 무성에 식읍 6천 호를 받았다. 이후 항우의 군대를 공격해 종리말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양나라 상국이 됐으며 식읍 4천 호를 더 받았다. 한왕 2년(기원전 205년)에는 호릉을 공격했다.[6]
2. 2. 초한전쟁과 전한 건국 공신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이 봉기할[5] 당시에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거느리고 있다가, 형 역이기가 유방에게 속해 진류를 함락하자 자신도 유방에게 귀순했다. 장사(長社) 공격에서 가장 먼저 성에 올라 신성군(信成君)의 작호를 받았고, 유방을 따라 관중에 들어가기 전까지 전공을 세웠으며 별군을 거느리고 한중을 평정했다.[6]기원전 206년,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패공 유방을 한왕으로 봉하자 신성군 · 농서도위를 맡았다. 삼진 침공에서는 옹나라의 북지군[7]과 적나라의 상군[7]을 평정했고, 옹나라의 군대를 몇 차례 무찔러 무성에 식읍 6천 호를 받았다. 이후 항우의 군대를 공격해 종리말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양나라 상국이 됐으며 식읍 4천 호를 더 받았다. 한왕 2년(기원전 205년)에는 호릉을 공격했다.[6]
한왕 5년(기원전 202년) 항우가 죽고 한왕이 황제가 되고서 7월에 연왕 장도가 모반하자 진압군에 종군해 전공을 세우고 우승상이 됐으며 탁에 식읍 5천 호를 받았다. 우승상으로서 상곡군을 평정하고 대를 공격해 조나라 상국이 됐다. 이 권한으로 강후 주발 등과 함께 대와 안문을 평정하고 대의 승상 정종(程縱) · 수상 곽동(郭同) 등 고관 여럿을 사로잡았다. 태상황을 숙위했고 진희의 난 진압에서는 동원을 잔멸했다. 회남왕 영포의 난에서는 고제의 친정군에 속해 회남왕의 진형을 쳐 무너뜨렸다. 조나라 거록군에 있는 곡주 땅을 영토로 하는 곡주후에 봉해져 식읍 5천 1백 호를 받았고 이전의 봉읍은 모두 제했다.[6]
고조 12년(기원전 195년), 고조가 죽자 황후 여후는 심이기와 상의하고 고조의 공신들을 전부 주멸하고자 고조의 상을 숨겼다. 이를 알게 된 어떤 사람이 역상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고, 역상은 곧 심이기를 찾아가 진평과 관영은 10만의 군대로 형양에 주둔하고 번쾌와 주발이 노관의 난을 평정하러 또 20만 대군을 끌고 나간 점을 상기시켜, 여후가 공신들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들 공신들이 밖(진평, 관영, 번쾌, 주발)과 안(고조의 나머지 공신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또 공신들이 모조리 주멸되면 다음은 자신들의 차례라고 생각해 지방의 유씨 제후왕들도 반란을 일으키게 되어 여후는 순식간에 망하고 말 것이다라고 진언했고, 이를 들은 여후와 심이기는 이 계획을 중지하고 곧 발상했다.[8] 전한 혜제와 고황후의 통치기에는 병이 들어 정무를 보지 못했다. 고황후가 죽자, 주발 · 진평 · 관영 등 대신들이 모의해 여씨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황실에 돌리려 했으나 여씨 일족인 여산과 여록이 각각 남북군을 통솔하고 있어 태위인 주발로서도 군사를 지휘할 수 없었다. 역상의 아들 역기(酈寄)는 여록과 친했는데, 주발은 역상을 협박했고 역상은 역기에게 여록을 속여 주발이 북군을 여록에게서 빼앗아 여씨를 주멸하게 만들었다. 역상은 이 무렵에 죽었다.[6]
2. 3. 여후 집권기의 정치적 역할
진 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진승 · 오광이 봉기할[5] 당시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거느리고 있다가, 형 역이기가 유방에게 속해 진류를 함락하자 자신도 유방에게 귀순했다. 고조 12년(기원전 195년), 고조가 죽자 황후 여후는 심이기와 상의하고 고조의 공신들을 전부 주멸하고자 고조의 상을 숨겼다. 이를 알게 된 어떤 사람이 역상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고, 역상은 곧 심이기를 찾아가 진평과 관영은 10만의 군대로 형양에 주둔하고 번쾌와 주발이 노관의 난을 평정하러 또 20만 대군을 끌고 나간 점을 상기시켜, 여후가 공신들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들 공신들이 밖(진평, 관영, 번쾌, 주발)과 안(고조의 나머지 공신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또 공신들이 모조리 주멸되면 다음은 자신들의 차례라고 생각해 지방의 유씨 제후왕들도 반란을 일으키게 되어 여후는 순식간에 망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여후와 심이기는 이 계획을 중지하고 곧 발상했다.[8] 전한 혜제와 고황후의 통치기에는 병이 들어 정무를 보지 못했다. 고황후가 죽자, 주발 · 진평 · 관영 등 대신들이 모의해 여씨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황실에 돌리려 했으나 여씨 일족인 여산과 여록이 각각 남북군을 통솔하고 있어 태위인 주발로서도 군사를 지휘할 수 없었다. 역상의 아들 역기(酈寄)는 여록과 친했는데, 주발은 역상을 협박했고 역상은 역기에게 여록을 속여 주발이 북군을 여록에게서 빼앗아 여씨를 주멸하게 만들었다. 역상은 이 무렵에 죽었다.[6]3. 가계
역상이 죽은 후, 아들 역이기가 뒤를 이었다. 역이기는 경제 중 2년(기원전 148년)에 왕씨 (무제의 생모)의 숙모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했다는 이유로 작위를 박탈당하고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역상의 다른 아들 역견이 뒤를 이었다.[6]
원광 4년(기원전 131년) 역수성이 뒤를 이었고, 이후 역세종이 이어받았다.[6]
원정 2년(기원전 115년) 역종근이 뒤를 이었으나, 무고의 난에 연루되어 요참형에 처해졌다.[9]
원강 4년(기원전 62년) 역상의 현손의 아들 역공이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9]
원시 2년(2년) 역상의 후손 역맹우·현손 역명우가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9]
3. 1. 가계도
酈商|역상중국어이 죽은 후, 아들 역이기가 뒤를 이었다. 31년 후 법을 어겨 작위를 빼앗겼고, 역상의 다른 아들 역견이 뒤를 이었다.[6]
원광 4년(기원전 131년) 역수성이 뒤를 이었고, 이후 역세종이 이어받았다.[6]
원정 2년(기원전 115년) 역종근이 뒤를 이었으나, 훗날 저주를 퍼부은 일 때문에 요참형에 처해졌다.[9]
원강 4년(기원전 62년) 역상의 현손의 아들 역공이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9]
원시 2년(2년) 역상의 후손 역맹우·현손 역명우가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9]
참조
[1]
웹사이트
Li Shang
http://www.chinaknow[...]
Chinaknowledge
2013-11-19
[2]
웹사이트
http://www.rootinhen[...]
Government of Henan
2013-11-19
[3]
웹사이트
http://www.sylib.com[...]
Shangyu City Library
2013-11-19
[4]
서적
漢書
[5]
서적
사기 (역사서)
[6]
위키문헌
사기 권95 번역등관열전
[7]
위키문헌
사기 권7 항우본기
[8]
위키문헌
한서 권1하 고제본기하
[9]
위키문헌
한서 권16 고혜고후문공신표
[10]
위키문헌
한서 권33 위표전담한왕신전
[1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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