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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업폭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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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속기업폭파사건은 1970년대 일본에서 발생한 일련의 기업 폭파 사건을 의미한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라는 단체가 '늑대', '대지의 엄니', '전갈' 세 그룹으로 나뉘어 미쓰비시 중공업, 미쓰이물산 등 일본 기업들을 공격했다. 주요 관련 인물로는 다이도지 마사시, 가타오카 도시아키, 다이도지 아야코, 사사키 노리오 등이 있으며, 이들은 체포, 자살, 도주, 수감 등의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은 일본 사회와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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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업폭파사건
사건 개요
사건명연속 기업 폭파 사건
일본어 명칭연속 기업 폭파 사건
로마자 표기Renzoku kigyō bakuha jiken
주요 공격 대상일본 제국주의와 관련된 기업
시기1974년 ~ 1975년
장소일본
공격 목표미쓰비시 중공업
쇼와 전공
데이진
가시마 건설
헤이와 상사
한덴 부동산
관련 조직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
결과8명 사망
376명 부상
조직 와해
배경
시대적 배경1970년대 일본의 사회 운동
사상적 배경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사건 전개
시작1974년 8월 30일, 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주요 사건1974년 10월 14일, 쇼와 전공 폭파
1974년 11월 28일, 데이진 중앙 연구소 폭파
1975년 4월 18일, 한국산업경제연구원 폭파
1975년 5월 19일, 가시마 건설 본사 폭파
피해 규모
사망자8명
부상자376명
수사 및 재판
검거조직원 대부분 검거
재판 결과사형, 무기징역 등 중형 선고
관련 인물
주요 인물대지굉(大道寺将司)
편향개(片桐茂男)
좌등동(佐々木規夫)
같이 보기
관련 항목일본 신좌파

2. 사건 발생 배경

(이전 단계에서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사건 발생 배경' 섹션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3. 주요 사건

연속기업폭파사건은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일본에서 발생한 일련의 폭탄 테러 사건이다. 이 사건들은 주로 일본의 주요 기업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늑대', '대지의 엄니', '전갈' 등의 그룹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발생일그룹명공격 대상피해 상황
1974년 8월 30일늑대미쓰비시 중공업 빌딩 (현 마루노우치 2정목 빌딩)사망 8명, 중경상 376명
1974년 10월 14일대지의 엄니미쓰이물산 본사 사옥 (물산관)중경상 16명
1974년 11월 25일늑대테이진 중앙연구소사상자 없음
1974년 12월 10일대지의 엄니타이세이건설 본사중경상 9명
1974년 12월 23일전갈카지마건설 자재저장고사상자 없음
1975년 2월 28일늑대, 대지의 엄니, 전갈하자마구미 본사 빌딩 및 오오미야 공장부상 5명
1975년 4월 19일대지의 엄니오리엔탈메탈사, 한국산업경제연구소사상자 없음
1975년 4월 28일전갈하자마구미 케이세이에도가와 작업소중상 1명
1975년 5월 4일전갈하자마구미 케이세이에도가와 철교 공사현장사상자 없음


3. 1. 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 (1974년 8월 30일)

1974년 8월 30일, '늑대' 그룹이 도쿄 마루노우치미쓰비시 중공업 빌딩(현 마루노우치 2정목 빌딩)을 폭파했다.(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 이 사건으로 8명이 사망하고 37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1] 이 사건은 연속기업폭파사건 중에서도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낳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 사건을 일본 제국주의 잔재 청산 과정에서 발생한 저항으로 평가하며, 일본 우익 세력의 역사 왜곡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3. 2. 미쓰이물산 폭파 사건 (1974년 10월 14일)

1974년 10월 14일, '대지의 엄니' 그룹이 미쓰이물산 본사 사옥(물산관)을 폭파해(미쓰이물산 폭파사건) 1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3. 3. 테이진 중앙연구소 폭파 사건 (1974년 11월 25일)

1974년 11월 25일, '늑대' 그룹이 테이진 중앙연구소를 폭파했으나, 사상자는 없었다.[1]

3. 4. 타이세이건설 폭파 사건 (1974년 12월 10일)

1974년 12월 10일, '대지의 엄니' 그룹이 타이세이건설 본사를 폭파하여 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3. 5. 카지마건설 폭파 사건 (1974년 12월 23일)

1974년 12월 23일, '전갈' 그룹이 카지마건설 자재저장고를 폭파했으나, 사상자는 없었다.

3. 6. 하자마구미 폭파 사건 (1975년 2월 28일)

1975년 2월 28일, 3개 그룹(늑대, 대지의 엄니, 전갈)이 합동으로 하자마구미 본사 빌딩 및 오미야 공장을 폭파하여 5명이 부상을 입었다.[1]

3. 7. 오리엔탈메탈사·한국산업경제연구소 폭파 사건 (1975년 4월 19일)

1975년 4월 19일, '대지의 엄니' 그룹이 오리엔탈메탈사와 한국산업경제연구소를 폭파했으나, 사상자는 없었다. 이 사건은 한국과 관련된 시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1]

3. 8. 하자마구미 작업소 폭파 사건 (1975년 4월 28일, 5월 4일)

'전갈' 그룹은 1975년 4월 28일 하자마구미 케이세이에도가와 작업소를 폭파하여 1명이 중상을 입었다. 5월 4일에는 하자마구미 케이세이에도가와 철교 공사현장을 폭파했다.[1]

4. 수사 및 체포

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 직후 경시청 마루노우치경찰서에 설치된 특별수사본부는 공안부와 형사부 양측에서 경찰관이 투입된 이례적인 수사체제로 되었다. 현장검증에서 시한장치로 보이는 시계와 건전지 등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현장에 흩어져 있던 유리조각 40 톤[13]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또한 폭탄은 페일통[14] 2개에 담긴 염소산염계 혼합폭약 약 55 킬로그램으로 밝혀졌고, 폭약의 재료는 염소산나트륨을 사용한 제초제를 이용한 것이었다. 특수본은 폭탄의 위력이 “다이너마이트 700자루에 상당한다”고 발표했다. 특수본은 당초부터 아나키즘 성향의 “극좌폭력집단”의 범행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범인들이 발표한 범행성명과 1974년 3월 지하출간된 『복복시계』에 사용된 타자기의 글꼴이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고, 같은 기종이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복복시계』 작성자와 미쓰비시중공 범행그룹이 동일할 가능성이 높아졌다.[15] 또한 범행에 사용된 페일통 가운데 1개는 동경도내의 공장에서 제조된 것으로, 불과 70개 밖에 제조되지 않았고 모두 동경도내에서 판매된 것으로 밝혀졌다.[16]

1975년 3월 말엽, 경찰은 “늑대” 그룹 4명 전원을 사찰 하에 두고, 나머지 2개 그룹의 존재까지 인지하게 되었다.[19] 1975년 4월 19일 발생한 오리엔탈메탈사·한국산업경제연구소 폭파사건 때, 멤버 전원이 외출해서 서로 연락을 주고받은 것이 확인되었다. 그들의 아지트에서 나온 쓰레기 가운데, 범행성명문을 잘못 써서 버린 것 등이 발견되어 마침내 정체를 확정했다.[20] 당초 5월 9일 일제검거 예정이었으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방일하고 있던 시점이라 만일의 사태를 우려해 연기되었다. 5월 19일 새벽, 주요 멤버 다이도지 마사시, 다이도지 아야코, 가타오카 도시아키, 사이토 노도카, 에키다 유키코, 구로카와 요시마사, 그리고 협력자 1인이 각자의 거처에서 일제히 체포되었다. 이 때 체포혐의는 한국산업경제연구소 폭파사건이었다.

사이토 노도카는 체포 과정에서 소지하고 있던 청산가리로 자살했다. 다이도지 아야코도 음독자살을 시도했으나 경찰관에게 저지당해 실패했다. 우가진 히사이치기리시마 사토시는 경찰이 구로카와 요시마사의 집에서 그들의 열쇠를 발견하기 전까지 존재가 포착되지 않아 체포를 면하고 도주했다.

4. 1. 초기 수사

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 직후 경시청 마루노우치경찰서에 설치된 특별수사본부는 공안부와 형사부 양측에서 경찰관이 투입된 이례적인 수사체제로 되었다. 현장검증에서 시한장치로 보이는 시계와 건전지 등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현장에 흩어져 있던 유리조각 40 톤[13]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또한 폭탄은 페일통[14] 2개에 담긴 염소산염계 혼합폭약 약 55 킬로그램으로 밝혀졌고, 폭약의 재료는 염소산나트륨을 사용한 제초제를 이용한 것이었다. 특수본은 폭탄의 위력이 “다이너마이트 700자루에 상당한다”고 발표했다. 특수본은 당초부터 아나키즘 성향의 “극좌폭력집단”의 범행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범인들이 발표한 범행성명과, 1974년 3월 지하출간된 『복복시계』에 사용된 타자기의 글꼴이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고, 같은 기종이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복복시계』 작성자와 미쓰비시중공 범행그룹이 동일할 가능성이 높아졌다.[15] 또한 범행에 사용된 페일통 가운데 1개는 동경도내의 공장에서 제조된 것으로, 불과 70개 밖에 제조되지 않았고 모두 동경도내에서 판매된 것으로 밝혀졌다.[16]

특수본은 처음에 아이누 혁명론을 떠들고 다니던 신좌파 평론가 오오타 류를 피의자로 생각하여 1972년의 샤쿠샤인상 훼손사건 혐의로 구속했다.[17] 그러나 오오타 류의 아지트에서 압수된 『복복시계』에 물음표가 기입되어 있거나, 주변에 “내 이론을 흉내내는 자가 있다”고 욕을 하고 다닌 것이 밝혀져, 일단 오오타의 결백이 증명되었다.[18] 그러나 공안부는 오오타의 사상적 인맥 어딘가에 범행그룹이 있을 것으로 추리했고, 그것이 적중해서 나중에 고구마줄기 캐듯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전모가 파악되었다. 공안경찰은 오오타 류가 관여하던 “현대사조사”, “레볼트사”를 집중적으로 사찰한 결과, 사이토 노도카사사키 노리오를 주요 용의자로 포착하여 그 주변 인맥을 옥죄기 시작했다.

4. 2. 오오타 류 체포와 수사 확대

특별 수사 본부는 당초 아이누 혁명론을 주장하던 신좌파 평론가 오오타 류를 샤쿠샤인상 훼손사건 혐의로 구속했다.[17] 그러나 오오타 류의 아지트에서 압수된 『복복시계』에 물음표가 기입되어 있거나, 주변에 “내 이론을 흉내 내는 자가 있다”고 욕을 하고 다닌 것이 밝혀져, 일단 오오타 류의 결백이 증명되었다.[18] 그러나 공안부는 오오타 류의 사상적 인맥 어딘가에 범행 그룹이 있을 것으로 추리했고, 그것이 적중해서 나중에 고구마줄기 캐듯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전모가 파악되었다. 공안 경찰은 오오타 류가 관여하던 "겐다이 시초샤", "레볼트사"를 집중적으로 사찰한 결과, 사이토 노도카사사키 노리오를 주요 용의자로 포착하여 그 주변 인맥을 옥죄기 시작했다.

4. 3. 주요 용의자 특정 및 체포

경시청 마루노우치경찰서에 설치된 특별수사본부는 공안부와 형사부 양측에서 경찰관을 투입하여 이례적인 수사체제로 전환하였다. 현장검증에서 시한장치로 보이는 시계와 건전지 등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또한 폭탄은 페일통[14] 2개에 담긴 염소산염계 혼합폭약 약 55 킬로그램으로, 폭약 재료는 염소산나트륨을 사용한 제초제를 이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수본은 폭탄의 위력이 “다이너마이트 700자루에 상당한다”고 발표했고, 아나키즘 성향의 “극좌폭력집단”의 범행으로 단정했다.

범인들이 발표한 범행성명과, 1974년 3월 지하출간된 『복복시계』에 사용된 타자기의 글꼴이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복복시계』 작성자와 미쓰비시중공업 폭파사건 범행그룹이 동일할 가능성이 높아졌다.[15] 또한 범행에 사용된 페일통은 동경도내 공장에서 제조된 것으로, 70개 밖에 제조되지 않았고 모두 동경도내에서 판매된 것으로 밝혀졌다.[16]

특수본은 처음에 아이누 혁명론을 주장하던 신좌파 평론가 오오타 류를 피의자로 생각하여 1972년 샤쿠샤인상 훼손사건 혐의로 구속했다.[17] 그러나 오오타 류의 결백이 증명되었고[18], 공안경찰은 오오타 류의 사상적 인맥을 추적하여 사이토 노도카사사키 노리오를 주요 용의자로 포착, 그 주변 인맥을 옥죄기 시작했다.

1975년 3월 말엽, 경찰은 “늑대” 그룹 4명 전원을 사찰 하에 두고, 나머지 2개 그룹의 존재까지 인지하게 되었다.[19] 1975년 4월 19일 발생한 오리엔탈메탈사·한국산업경제연구소 폭파사건 때, 멤버 전원이 외출해서 서로 연락을 주고받은 것이 확인되었고, 그들의 아지트에서 나온 쓰레기 가운데, 범행성명문을 잘못 써서 버린 것 등이 발견되어 마침내 정체를 확정했다.[20]

당초 5월 9일 일제검거 예정이었으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방일하고 있던 시점이라 연기되었다. 5월 19일 새벽, 주요 멤버 다이도지 마사시, 다이도지 아야코, 가타오카 도시아키, 사이토 노도카, 에키다 유키코, 구로카와 요시마사, 그리고 협력자 1인이 각자의 거처에서 일제히 체포되었다. 이 때 체포혐의는 한국산업경제연구소 폭파사건이었다.

사이토 노도카는 체포 과정에서 소지하고 있던 청산가리로 자살했다. 다이도지 아야코도 음독자살을 시도했으나 경찰관에게 저지당해 실패했다. 우가진 히사이치기리시마 사토시는 경찰이 구로카와 요시마사의 집에서 그들의 열쇠를 발견하기 전까지 존재가 포착되지 않아 체포를 면하고 도주했다.

5. 사건 이후

1975년 5월 23일, 우가진 스이치와 기리시마 사토시는 전국에 지명수배되었다. 이후 카토 사부로 등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잔당을 자처하며 신사본청 폭파사건 등 8건의 모방 범행을 1977년 11월 무렵까지 저질렀다.

1975년 8월, 일본적군이 일으킨 쿠알라룸푸르 사건으로 사사키 노리오가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되었다. 1977년 일본적군이 일으킨 다카 일항기 납치사건으로 다이도지 아야코에키다 유키코가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되었다. 이들 3인은 일본적군에 합류했다.

1982년 7월, 잠행 중이던 우가진 스이치가 체포되었다. 일본에 잔류한 피고인단은 이후 재판에서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 및 살인 또는 살인미수 혐의로, 1987년 3월 4일 다이도지 마사시가타오카 도시아키에게 사형, 구로카와 요시마사에게 무기징역, 협력자에게 징역 8년(1987년 11월 만기 출소)이 확정되었다. 1990년 우가진의 징역 18년이 확정되었다(2003년 6월 만기 출소). 1995년 에키다 유키코루마니아에서 구속되어 일본으로 이송, 2004년 5월 징역 20년이 확정되었다(2017년 3월 만기 출소).

다이도지 아야코와 사사키 노리오가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체포될 경우 주요 증인이 될 다이도지 마사시와 가타오카 도시아키의 사형은 집행될 수 없었고, 사실상의 무기수로 수감되어 있었다. 다이도지 마사시는 2017년 5월 다발성 골수종으로 도쿄구치소에서 옥사했다. 현재 가타오카 도시아키는 도쿄구치소에, 구로카와 요시마사는 미야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

다이도지 아야코와 사사키 노리오는 국제지명수배 중이다. 기리시마 사토시는 다이도지 아야코와 공범이 아닌 사건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성립한다. 2024년 1월 25일, 기리시마 사토시로 추정되는 남성이 병원에 입원하여 자신이 기리시마임을 인정하고 마노 건설 폭파 사건에 관여했음을 시사하는 진술을 하였으나, 같은 달 29일 말기 암으로 사망했다. 2월 27일, 공안부는 남자를 기리시마로 단정하고 피의자 사망으로 서류 송치했다.[10]

5. 1. 잔당들의 모방 범죄

우가진과 기리시마는 1975년 5월 23일 전국에 지명수배되었다. 이후 카토 사부로 등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잔당을 자처하며 신사본청 폭파사건 등 8건의 모방 범행이 1977년 11월 무렵까지 계속되었다.[9]

5. 2. 일본 적군과의 연계

1975년 8월, 일본적군이 일으킨 쿠알라룸푸르 사건으로 사사키 노리오가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되었다.[9] 1977년 일본적군이 일으킨 다카 일항기 납치사건으로 다이도지 아야코와 에키다 유키코가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되었다.[9] 이들 3인은 일본적군에 합류했다.[9]

5. 3. 재판 및 처벌

일본에 잔류한 피고인들은 재판을 통해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 및 살인 또는 살인미수 혐의로 처벌받았다. 1987년 3월 24일, 다이도지 마사시가타오카 도시아키(마스나가 토시아키)에게는 사형이, 구로카와 요시마사에게는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협력자에게는 징역 8년이 선고되었으며, 그는 1987년 11월 만기 출소했다.[9]

우가진 스이치는 1982년 체포되어 1990년 징역 18년이 확정되었고, 2003년 6월 만기 출소했다. 에키다 유키코는 1995년 루마니아에서 체포되어 일본으로 이송, 2004년 5월 징역 20년이 확정되었으며 2017년 3월 만기 출소했다.[9]

일본적군의 쿠알라룸푸르 사건으로 사사키 노리오가, 다카 일항기 납치사건으로 다이도지 아야코와 에키다 유키코가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되어 일본적군에 합류했다.[9]

다이도지 마사시와 가타오카 도시아키는 다이도지 아야코와 사사키 노리오가 체포될 경우 주요 증인이 될 수 있어 사형 집행이 미뤄지고 사실상 무기수로 수감되었다. 다이도지 마사시는 2017년 5월 24일 다발성 골수종으로 도쿄구치소에서 옥사했다. 가타오카 도시아키는 도쿄구치소에, 구로카와 요시마사는 미야기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9]

기리시마 사토시는 2024년 1월 25일 병원에 입원 중 자신이 기리시마임을 밝혔고, 마노 건설 폭파 사건 관여를 시사하는 진술을 했으나, 같은 달 29일 말기 암으로 사망했다. 2월 27일, 공안부는 남자를 기리시마로 단정하고 피의자 사망으로 서류 송치했다.[10]

5. 4. 도주자와 공소시효

다이도지 아야코와 사사키 노리오는 국제지명수배 중이며, 기리시마 사토시는 전국지명수배 중이었다.[9] 기리시마는 다이도지 아야코와 공범이 아닌 사건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성립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

1975년 8월 일본 적군이 일으킨 쿠알라룸푸르 사건으로 사사키 노리오가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되어 도주했다. 1977년에는 일본 적군이 일으킨 다카 여객기 납치 사건으로 다이도지 아야코와 에키다 유키코가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되어 국외로 도주했다. 이들 3명은 일본 적군에 합류했다.

기리시마 사토시의 경우, 국외로 도주한 다이도지 아야코와 사사키 노리오는 공소가 계속 진행 중이므로 형사소송법 254조 2항에 따라 공소시효가 정지되었고, 2010년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시효가 철폐되었다. 다이도지, 사사키와 공범이 아닌 한산연 폭파 사건은 에키다의 공소가 정지되었던 시기가 있어, 2004년 8월 에키다의 판결이 확정된 후 공소시효가 다시 진행되었다. 한산연 폭파 사건에서는 구로카와와 에키다 등에게 최고형이 사형인 폭발물단속벌칙 1조가 적용되었지만, 사망자가 없었기 때문에 2010년 개정 후 형사소송법 제250조 2항 제1호에 따라 기리시마의 공소시효는 25년으로 여겨진다.

2024년 1월 25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했던 남성이 자신이 기리시마라고 밝혔고, 경시청 공안부 조사에서 마노 건설 폭파 사건에 관여했음을 시사하는 진술을 했으나, 같은 달 29일 말기 암으로 사망했다.[9] 2월 27일 공안부는 이 남성을 기리시마로 단정하고 피의자 사망으로 서류 송치했다.[10]

6. 주요 관련 인물

연속기업폭파사건에는 '늑대', '대지의 엄니', '전갈' 등 여러 그룹에 속한 인물들이 관련되어 있다.

'''연속기업폭파사건 관련 인물'''
인물미쓰비시중공 폭파사건미츠이물산 폭파사건테이진 중앙연구소 폭파사건타이세이건설 폭파사건카지마건설 폭파사건하자마구미 본사 ・ 공장 동시폭파사건한산연 폭파사건하자마구미 작업현장 폭파사건신병 구속일판결
늑대다이도지 마사시     1975년 5월 19일사형
가타오카 도시아키     1975년 5월 19일사형
다이도지 아야코     국제지명수배-
사사키 노리오     국제지명수배-
대지의 엄니사이토 노도카    체포된 직후 자살-
에키다 유키코    1995년 3월 20일20년형
전갈구로카와 요시마사     1975년 5월 19일무기징역
우가진 히사이치     1982년 7월 13일18년형
기리시마 사토시    전국지명수배 중-
협력자아라이 마리코        1975년 5월 19일10년형


6. 1.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멤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멤버
인물역할미쓰비시중공 폭파사건미츠이물산 폭파사건테이진 중앙연구소 폭파사건타이세이건설 폭파사건카지마건설 폭파사건하자마구미 본사 ・ 공장 동시폭파사건한산연 폭파사건하자마구미 작업현장 폭파사건신병 구속일판결
다이도지 마사시늑대1975년 5월 19일사형
가타오카 도시아키늑대1975년 5월 19일사형
다이도지 아야코늑대국제지명수배-
사사키 노리오늑대국제지명수배-
사이토 노도카대지의 엄니체포된 직후 자살-
에키다 유키코대지의 엄니1995년 3월 20일20년형
구로카와 요시마사전갈1975년 5월 19일무기징역
우가진 히사이치전갈1982년 7월 13일18년형
기리시마 사토시전갈전국지명수배 중-
아라이 마리코협력자1975년 5월 19일10년형


7. 평가 및 영향

(요약 및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참조

[1] 웹사이트 昭和51年警察白書第7章公安の維持 https://www.npa.go.j[...] 1976-01-01
[2] 뉴스 朝日新聞 1974-09-04
[3] 문서 容積18〜20リットルのドラム缶に取っ手のついた容器 http://www.jsda.gr.j[...]
[4] 뉴스 朝日新聞 1974-10-06
[5] 뉴스 朝日新聞 1975-01-25
[6] 뉴스 朝日新聞 1974-10-22
[7] 뉴스 朝日新聞 1974-10-24
[8] 뉴스 朝日新聞 1975-01-25
[9] 뉴스 「桐島聡」名乗った男性、本人と特定 殺人未遂容疑などで書類送検へ https://mainichi.jp/[...] 2024-02-27
[10] 뉴스 桐島容疑者と断定、書類送検 DNA型鑑定、供述に矛盾なし―逃亡半世紀、連続企業爆破・警視庁 https://www.jiji.com[...] 2024-02-27
[11] 문서 日本赤軍事件
[12] 문서
[13] 뉴스 朝日新聞 1974-09-04
[14] 문서 용적 18-20 리터 [[드럼통]]을 채울 때 사용하는 용기 http://www.jsda.gr.j[...]
[15] 뉴스 朝日新聞 1974-10-06
[16] 뉴스 朝日新聞 1975-01-25
[17] 뉴스 朝日新聞 1974-10-22
[18] 뉴스 朝日新聞 1974-10-24
[19] 웹인용 更新意見陳述 http://kiyoumohannic[...]
[20] 뉴스 朝日新聞 197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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