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1970년대 일본에서 결성된 급진적인 반일 테러 조직이다. 다이도우지 마사시가 주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파괴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을 목표로 삼았다. 1970년 결성된 L반 투쟁위원회를 모체로, 일본 기업과 일반 시민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으며, 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과 같은 테러를 감행했다. 이들은 아나키즘적 성향을 보이며, 일본의 한국 및 아이누 침략 역사를 학습하며 독자적인 반일 사상을 형성했다. 조직은 늑대, 대지의 엄니, 전갈 등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활동했으며, 일부 멤버는 일본 적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2024년, 기리시마 사토시로 추정되는 인물이 체포되면서 다시금 주목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좌익 무장 단체 - 연합적군
연합적군은 마오주의를 이념으로 내세운 일본 신좌익 계열의 무장 조직으로, 내부 숙청과 폭력적인 행위, 그리고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들로 인해 몰락했다. - 일본의 좌익 무장 단체 -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는 일본의 신좌익 정치 단체로 중핵파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공산당 노선 불만에서 시작되어 안보 투쟁 등에 참여하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이후 무장 테러를 감행하다 노동 운동 노선으로 전환하여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 일본의 신좌파 정파 -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일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JRCL)은 1957년 일본공산당에서 분열된 세력들이 통합하여 결성되었으며, 트로츠키주의를 따르며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내부 갈등과 폭력 사태를 겪었다. - 일본의 신좌파 정파 - 공산주의자동맹 (일본)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은 1958년 일본공산당에서 분리된 학생들이 결성한 단체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하며 일본공산당 노선을 비판했고, 미일안보조약 반대 투쟁 이후 분열되어 여러 분파로 나뉘어 활동하다가 1970년대 이후 쇠퇴했다. -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가타오카 도시아키
가타오카 도시아키는 일본 극좌 운동가이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 소속원으로, 미쓰비시중공업 폭파 사건 등 연쇄 기업 폭파 사건의 주요 실행자이며, 현재 사형 확정 후 도쿄 구치소에 수감 중인 인물이다. -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기리시마 사토시
기리시마 사토시는 1970년대 기업 폭파 사건에 연루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전갈"의 일원으로, 한국산업경제연구소 폭파 사건 주요 용의자로 49년간 도피 생활을 하다 체포 후 위암으로 사망하여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과거 극좌파 운동과 한일 관계에 대한 논의를 촉발한 인물이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
---|---|
기본 정보 | |
명칭 |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 |
일본어 명칭 | 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 |
로마자 표기 | Higashi Ajia Hannichi Busō Sensen |
약칭 | EAAJAF |
조직 개요 | |
활동 기간 | 1972년–1975년 |
지도자 | 다이도지 마사시 |
동기 | 일본 국가, 일본 기업, 역사적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일 혁명 |
활동 지역 | 일본 |
이념 | 아나키즘 반제국주의 반일주의 |
공격 목표 | 1974년 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 |
관련 정보 | |
창립 | 다이도지 마사시 |
관련 조직 | 일본 적군 프롤레타리아 군단 |
주요 인물 | 다이도지 마사시 다이도지 아야코 유카타 유키코 사사키 노리오 사이토 카즈 기리시마 사토시 우가진 주이치 |
기타 | 복복시계를 제작한 조직 |
2. 역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1973년부터 본격적인 공격 준비에 착수하여 폭탄을 개발하고 자금을 모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알리기 위해 1974년 3월 소책자 『하라하라 도케이』(Hara Hara Tokei)를 발간했다. 같은 해 8월 14일, 히로히토 천황이 탄 열차가 지날 철교를 폭파하려던 '무지개 작전'을 시도했으나 실행 직전 발각되어 실패했다.[2] 이후 주요 멤버들이 검거되었으나 일부는 장기간 도피 생활을 했다. 그중 한 명인 키리시마 사토시는 약 49년간의 도피 끝에 2024년 1월, 가나가와현의 한 병원에서 자신의 신원을 밝히고 경찰에 신병이 확보되었으나[3][4][5] 직후 사망했다.[6] DNA 검사 결과, 사망자가 키리시마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되었다.[7]
2. 1. 결성 배경
1970년 봄, 호세이 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재학 중이던 다이도우지 마사시가 결성한 "L반 투쟁위원회"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시초이다. "L반"은 다이도우지가 소속된 대학의 반을 의미하며, 정치적으로는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는 논섹트 래디컬로 분류되었다. 다이도우지가 철학과, 국문과 학생들에게도 참여를 호소하여 한때 회원이 1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여기에는 가타오카 도시아키와 이후 협력자가 되는 A, B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공투 운동이 잦아들면서 L반 투쟁위원회도 자연스럽게 해체되었고, 다이도우지, 가타오카, A 등은 대학을 중퇴했다.1970년 8월, 다이도우지와 L반 투쟁위원회의 핵심 멤버들을 중심으로 "연구회"가 결성되었다. 이 연구회에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 각국에서 저지른 침략 행위에 대해 집중적으로 학습하며 급진적인 반일 사상을 키워나갔다. 특히 같은 해 7월 7일 발표된 화교청년투쟁위원회의 신좌익 세력과의 '결별 선언'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학습 자료로는 박경식의 『조선인 강제 연행의 기록』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또한 도시 게릴라 전술에도 관심을 가져 쿠바 혁명 등 관련 자료를 학습했다. 연구회는 결국 반일 운동을 무력 투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이러한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 일부 회원들이 이탈했다. 같은 해 11월, 다이도우지 마사시의 홋카이도 쿠시로코료고등학교 동창이자 당시 호시 약과대학 학생이었던 다이도우지 아야코가 합류했다. 그는 다이도우지가 고교 졸업 후 동창들과 만든 사회주의 연구회에도 참여했었다. 1971년 1월에는 첫 사제 폭탄 실험을 실행했다.
2. 2. 초기 활동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초기 활동으로 대중에게 호소하는 캄파니아 투쟁의 일환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대상들을 폭파했다.이 세 건의 기물 파괴 사건 이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본격적인 무장 투쟁으로 이행하게 된다.
2. 3. 무장 투쟁
1972년 12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다만 이 명칭은 모든 반일주의자들이 사용할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들의 그룹을 나타내는 명칭으로는 고독한 존재라는 이미지에서 '늑대'를 사용했다.1973년에는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준비하며 폭탄 개발과 군자금(전쟁 자금) 마련에 힘썼다. 회원들은 기본적인 도구와 필수품으로 폭탄을 제작했으며, 일부는 아파트 바닥을 파서 지하 제조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자신들의 주의 주장을 알리고 투쟁의 이념을 공유하여 후속 무장 투쟁 세력의 합류를 기대하며 소책자 『하라하라 시계』(하라하라 도케이)를 집필하여 1974년 2월[22](다른 자료에서는 3월[2])에 간행했다.
1974년 8월 14일, 쇼와 천황이 탑승한 어가 열차(お召し列車)를 철교째 폭파하여 암살하려는 '무지개 작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실행 직전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2] 당시 천황이 이용한 열차는 이들이 폭탄을 설치하려던 여객선로가 아닌 화물선로를 통과했기 때문에, 작전이 실행되었더라도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있다.
작전 실패 다음 날인 8월 15일 대한민국에서는 조총련계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문세광 사건이 발생했다. '늑대' 그룹은 문세광에게 호응하고 연대하기 위해 새로운 작전에 착수했다. 후일 리더 다이도지 마사시는 '무지개 작전' 실패로 인한 소진과 무력감, 그리고 한국 감옥에 수감된 문세광에게 "사실 행위"로 연대해야 한다는 초조함 때문에 작전 계획이 허술해졌다고 술회했다.[47]
1974년 8월 30일, 도쿄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빌딩 1층 입구에서 폭탄을 터뜨려 8명이 사망하고 376명이 부상하는 큰 피해가 발생했다(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22] 이는 '늑대' 그룹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결과였다. 사건 후 발표한 성명에서 이들은 희생자들이 "무고한 시민이 아니라 식민지 인민의 피로 살찐 식민자"라고 주장하며 폭파를 정당화했다.[22] 다이도지 마사시는 당시 '무지개 작전'에 사용하려던 강력한 철교 폭파용 폭탄을 유용했으며, 폭탄을 건물 내부가 아닌 보도에 설치하는 등[47] 허술한 작전 계획과 더불어, 베트남 전쟁 등 아시아 민중의 고통에 무관심한 일본 사회에 대한 절망감과 불신으로 인해 일본인 생명에 대한 경시 풍조가 작용했음을 인정했다.[48]
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을 계기로 '대지의 엄니(大地の牙)', '전갈(さそり)' 등 새로운 그룹들이 합류하여 1975년 5월까지 연속기업폭파사건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미쓰비시 중공업, 미쓰이 물산, 데이진, 다이세이 건설, 가시마 건설, 하자마구미 등 아시아 등 해외에 진출하여 "침략에 가담"한다고 간주된 일본 기업 12곳이 표적이 되었다.[18]
2. 4. 검거 및 재판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멤버로 처음 의심받은 인물은 당시 아이누 혁명론을 주장하던 오오타 류였다. 오오타의 결백은 곧 증명되었으나, 일본 공안은 오오타의 사상적 인맥 중에 멤버가 있을 것으로 보고 관련 단체인 현대사조사(겐다이시초샤)와 리볼트사를 수사했다. 이 과정에서 사이토 노도카(사이토 하지메)와 사사키 노리오가 포착되었고, 이들을 미행하면서 다른 멤버들까지 파악되었다. 사사키는 창가학회에 위장으로 가입해 법화경을 외우는 등 열성 신자인 척 활동하기도 했으나 공안의 감시를 피하지는 못했다.1975년 5월 19일, 다이도우지 마사시, 다이도우지 아야코, 사사키 노리오, 가타오카 도시아키(마스나가 도시아키), 사이토 노도카, 에키다 유키코(요쿠타 유키코), 구로카와 요시마사 등 주요 멤버 7명과 협력자인 간호 학생 1명이 체포되었다. 사이토 노도카는 체포 직후 자살했으며, 협력자인 간호 학생의 언니[60][23]와 다른 협력자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체포를 피한 우가진 히사이치(우가진 주이치)와 기리시마 사토시는 지명 수배되었고, 우가진은 1982년 7월에 체포되었다.
도쿄지방검찰청은 1975년 6월 28일 이들을 기소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일본 적군이 쿠알라룸푸르 사건을 일으켜 사사키 노리오의 석방을 요구했고, 결국 사사키는 석방되어 국외로 도피, 일본 적군에 합류했다. 남은 멤버들의 격렬한 옥중 투쟁과 지원자들의 방해 공작으로 재판 시작은 예정보다 크게 늦어졌다.[61][62][26][27] 1975년 12월 25일에야 첫 공판이 열렸지만, 이후에도 재판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던 중 일본 적군이 다시 다카 사건을 일으켜 다이도우지 아야코와 에키다 유키코의 석방을 요구했고, 이들 역시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되어 일본 적군에 합류했다.
1979년에는 옥중 멤버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 KF 부대(준)' 명의의 '복복시계 특별 1호'라는 지하 출판물이 발행되어, 반일 무장 투쟁을 계속 주장하기도 했다.
긴 재판 끝에 다이도우지 마사시와 마스나가 도시아키에게는 사형이, 구로카와 요시마사에게는 무기 징역이 확정되었다. 협력자로 지목된 여성에게도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 방조 혐의로 징역 8년이 확정되어 1987년에 출소했다.[63][28] 1982년 7월 체포된 우가진 히사이치는 징역 18년형을 선고받고 2003년에 출소했다. 1995년 3월 24일에는 루마니아에 잠복 중이던 에키다 유키코가 신병이 구속되어 위조 유인 사문서 행사 혐의로 국외 추방 처분을 받고 일본으로 향하던 여객기 내에서 체포, 재판에서 징역 20년의 확정 판결을 받고 2017년에 출소했다.
2024년 현재, 사사키 노리오와 다이도우지 아야코는 국제 지명 수배 중이다. 기리시마 사토시는 49년간 도피 생활을 이어오다 2024년 1월 25일, 가나가와현의 한 병원에서 가명으로 입원[24] 중 자신이 기리시마임을 밝혔고,[25] 경찰에 신병이 확보되었다.[3] 그는 말기 암 상태였으며, 신병 확보 나흘 뒤인 1월 29일 사망했다. 이후 DNA 검사 결과, 사망한 남성이 기리시마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7]
옥중에 있는 멤버들은 재심 청구, 옥중 처우 개선을 위한 민사 소송 제기,[64][29] 저서 및 논문 발표 등을 통해 옥중 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2017년 다이도우지 마사시가 옥중에서 사망했고, 마스나가 도시아키는 2010년 발병한 뇌경색의 후유증으로 인해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태이다. 2018년부터는 다이도우지 마사시의 유족과 마스나가 도시아키의 친족이 법정 투쟁을 이어받아 재심 청구를 하고 있다.[65][30]
3. 조직 구성 및 특징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EAAJAF)은 "늑대", "대지의 어금니", "전갈"이라는 세 개의 하위 그룹으로 구성되었다.[31] 이 조직은 당시 다른 일본 신좌파 그룹들과는 달리, 이념적 순수성을 명분으로 한 폭력적인 내부 투쟁(内ゲバ, 우치게바)이나 숙청을 거부하는 특징을 보였다.[8] 예를 들어 적군파와 같은 조직 내부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 없이, 개인 사정으로 활동이 어려운 구성원은 불이익 없이 이탈할 수 있었다.[8] 아라이 나오코나 후지사와 요시미 같은 초기 멤버들이 개인적인 문제를 이유로 별다른 문제 없이 조직을 떠난 사례가 있다.[8]
또한, 멤버들은 당국에 알려진 공개 활동가가 아니라, 겉으로는 평범한 학생이나 사회인으로 생활하며 비밀리에 활동하는 비공개 활동가였다는 점이 특징이다.[32][17] 이러한 방식은 조직의 활동을 외부에 드러내지 않고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3. 1. 3개의 하위 그룹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내에는 "늑대", "대지의 어금니", "전갈"의 3개 그룹이 있었다.[31] 멤버들은 당국에 알려진 공개적인 과격파 활동가와 달리, 비공개 활동가로서 겉으로는 학생이나 사회인으로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사건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32][17]1975년 일본 적군은 쿠알라룸푸르 사건을 일으켰고, 1977년에는 다카 일본항공기 납치 사건을 일으켰다. 두 사건 모두 인질 석방 조건으로 당시 체포되어 있던 유명 신좌익 인사 11명(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멤버 4명 포함)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에 일본 정부(후쿠다 다케오 내각)는 1977년 10월 1일, 초법규적 조치를 통해 적군의 석방 요구를 거부한 다이도우지 마사시를 제외한 3명의 멤버를 석방했다. 석방된 다이도우지 아야코, 사사키 노리오, 요쿠타 유키코 등은 출국하여 일본 적군에 합류했다.[34][35] 다이도우지 아야코와 사사키 노리오는 석방 후 도주하여 국제 지명 수배 중이며[33], 요쿠타 유키코는 1995년에 페루에서 발견되어 재체포되었다.
;늑대
:그룹 이름은 "자본가에게 고통받는 피억압 민중"을 멸종된 일본늑대에 비유한 데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코이케 카즈오 원작의 시대극 만화 『아들을 동반한 검객』의 영향을 받았다는 지적도 있다.
- 다이도우지 마사시 - 호세이 대학 재학 중 사회주의 연구회를 결성하고, 이후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신좌익 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공투 운동과 70년 안보 투쟁에서의 패배를 겪으며 대학을 중퇴했다.[36] 이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결성하고 리더가 되었다. 1975년 5월 19일, 다이도지 아야코, 사사키 노리오, 가타오카 도시아키 등과 함께 일제히 체포되었다. 1977년 일본 적군이 요구한 초법규적 조치에 의한 석방을 유일하게 거부했다. 최고재판소에서 1987년 3월 24일 사형이 확정되었고, 2017년 5월 24일 다발성 골수종으로 도쿄 구치소에서 수감 중 사망했다.
- 다이도우지 아야코 - 호시 약과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다이도지 마사시로부터 "연구회" 가입 권유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다이도지 마사시와 교제 및 동거를 시작했다. 사건 당시에는 약사였다. 1975년 체포되었으나, 1977년 10월 1일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된 후 도주하여 현재 국제 지명 수배 중이다.[33]
- 가타오카 도시아키 - 호세이 대학 문학부 사학과 입학 후,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 연합(베평련) 활동과 침례교 개혁 운동에 참여했다. 전공투 운동을 거쳐 다이도지 마사시를 만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가담했다. 대학 중퇴 후 첫 번째 사건을 일으켰다. 1975년 체포되었고, 1987년 3월 24일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현재 수감 중이다.
- 사사키 노리오 -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멤버 중 유일하게 대학 진학 경험이 없는 고등학교 졸업자이다. 대학 입시 실패 후 가업을 돕다가 상경하여 사이토 카즈에게 아이누 관련 "역사를 배우고" 반일 사상을 심화시켰다.[37][38] 1975년 체포되었으나, 1977년 10월 1일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된 후 도주하여 현재 국제 지명 수배 중이다.[33]
;대지의 어금니
:그룹 이름은 "국가도 자본가도 없는 이상 세계를 목표로, 국가와 자본가에 맞서는 대지의 어금니"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코이케 카즈오 원작의 시대극 만화 『고독한 송곳니』의 영향을 받았다는 지적도 있다.
- 사이토 카즈 - 도쿄 도립 대학 인문학부 중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대지의 어금니” 그룹 리더였다. 1975년 요쿠타 유키코 등과 함께 체포될 당시 약물 자살했다.
- 요쿠타 유키코 - 기타사토 대학 위생학부 졸업 후, "대지의 어금니" 그룹 리더 사이토 카즈의 사실혼 배우자로서 거주지를 제공하고 범인을 은닉했다. 1975년 2월, 아사히 생명 성인병 연구소로 직장을 옮겼다. 같은 해 5월 19일 체포되었다. 1977년 일본 적군의 요구에 따른 초법규적 조치로 석방된 후 일본 적군에 가입하여 국제 수배되었다. 1995년 3월 20일, 페루에서 루마니아로 위장 입국하여 잠복 활동 중 신병이 구속되었고, 위조 유인 사문서 행사 혐의로 국외 추방되어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체포되었다. 2002년 7월 4일,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0년 판결을 받았다. 도치기 형무소에서 복역 후, 2017년 3월 23일 형기 만료로 석방되었다.
;전갈
:그룹 이름은 "스스로 작은 조직의 맹독으로 거대 건설 자본을 쓰러뜨리는 전갈"에 비유한 데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시노하라 토오루의 만화 『사소리』의 영향을 받았다는 지적도 있다.
- 구로카와 요시마사 - 도쿄 도립 대학 졸업 후 사사키 노리오를 통해 다이도지 마사시를 만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참가했다. 1975년 체포되었고, 1979년 11월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무기 징역 판결을 받고 복역 중이다.
- 우가진 히사이치 - 사건 당시 메이지가쿠인 대학 사회학부 4학년이었다. 1975년 멤버 동시 체포 당시에는 검거를 피했고, 1982년 3월까지 가명으로 신문 판매점에서 일했다. 같은 해 7월 도쿄도 이타바시구에서 체포되어, 1990년 2월 최고재판소에서 징역 18년 판결이 확정되었다. 기후 형무소에서 13년간 복역하고 2003년 6월 11일 출소했다. 미결 구금 기간을 포함하여 총 21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 기리시마 사토시 - 첫 사건 당시 메이지가쿠인 대학 4학년이었다.[31] 도주 직전까지 도쿄도 신주쿠구 가부키초의 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1975년 5월 20일 시부야구의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한 후, 31일 히로시마현의 자택에 "오카야마에 여자와 함께 있다"고 아버지에게 전화한 것을 마지막으로 행방이 묘연해졌다.[39] 발견 직전까지 "우치다 히로시"라는 가명으로 후지사와시의 한 건설 회사에서 수십 년간 근무했다. 2024년 1월, 건강 악화로 길에서 쓰러져 스스로 구급차를 불러 가마쿠라시의 병원에 위암 말기 암 환자로 가명 입원했다.[40][41] 25일, 병원 관계자에게 "나는 기리시마 사토시다", "마지막이니 체포해 달라"고 고백했고[42][43], 수사관과의 접촉에서 본인임을 인정했다.[44][31] 그는 "마지막은 본명으로 맞이하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병세가 위중하여 경시청 공안부는 체포하지 않고 임의 조사를 진행하며 DNA 대조 등 신원 확인 수사를 벌였으나, 27일 상태가 악화되어 위독 상태에 빠졌고[41], 발견 4일 후인 1월 29일 입원 중인 병원에서 사망했다. 2월 27일, DNA 대조 결과 친족 관계에 모순이 없어 해당 남성을 기리시마 사토시로 특정했으며[45], 5건의 폭파 사건에 대해 폭발물단속벌칙 위반 및 살인죄 미수 혐의로 검찰에 서류 송치했다.[46]
3. 2. 특징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EAAJAF)은 여러 면에서 기존 일본 신좌파 그룹들과 다른 특징을 보였다.- 조직 구조 및 운영:
- 강령이나 명확한 지도 체계를 갖추지 않았으며, "중앙위원회"와 같은 중앙집권적 조직이 없었다.[49] 각 그룹("늑대", "대지의 엄니", "전갈")은 독립적으로 활동했으며, 리더 간에만 연락을 주고받는 느슨한 형태였다. 멤버 간 교류는 거의 없었고 사상적 입장도 조금씩 달랐다.
- 이념적 순수성을 명분으로 폭력적인 자기 비판과 숙청을 벌였던 다른 신좌익 그룹들의 내부투쟁(内ゲバ, 우치게바)을 거부했다.[8] 예를 들어 적군파는 1년도 안 되어 29명 중 14명을 내부 숙청으로 살해했지만, EAAJAF 내에서는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없었다.[8] 가정 문제나 정신적 어려움으로 활동을 지속하기 힘든 구성원은 불이익 없이 조직을 떠날 수 있었다. 실제로 『하라하라 시계』 집필에 참여했던 아라이 나오코나 초기 폭탄 제조 훈련에 참여했던 후지사와 요시미는 개인 사정을 이유로 별다른 문제 없이 이탈했다.[8]
- 기존 신좌익 정파(5류 22파)와 연계가 없는 논섹트 흑헬 그룹 중 하나였다.[49][20]
- 이념:
- 일본의 한국 및 아이누에 대한 침략 역사를 연구하며 독자적인 "반일(反日) 사상"을 구축했다.
-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내세우며, 권력자뿐만 아니라 일본 기업과 노동자, 심지어 일반 시민들까지 "제국주의 침략의 가해자" 또는 日帝本国人|닛테이 혼고쿠진일본어(일제 본국인)으로 규정하고 공격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책자 『하라하라 시계』를 통해 이러한 사상을 전파했다.
- 『하라하라 시계』에서는 "반일 제국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것만이 일제 본국인의 긴급 임무"라고 선언하며, 투쟁에 동참하지 않는 모든 일본인(노동자, 해외 기술자, 해외 여행객 포함)을 "제1급 일제 침략자"로 단죄했다.
- 1974년 미쓰비시 중공업 폭탄 테러 이후 발표한 성명에서 "폭사하거나 부상당한 자들은 무관계한 일반 시민이 아니다. 그들은 식민주의자들이다"라고 주장하며 민간인 피해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극단적이고 위험한 사상 때문에 당시 신좌익 내에서도 지지 기반이 매우 약했다.
- 신식민주의 하에서 일본인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생활이 현지인에 대한 착취와 희생 위에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따라서 일본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이나 처우 개선 요구 같은 노동 쟁의는 제국주의 침략에 무자각적으로 가담하는 반혁명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또한, 이를 지지하는 기성 좌익이나 신좌익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폭력 혁명 구호 역시 기만이라고 평가했다. 합법적인 좌익 활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 활동 방식:
- 공격 대상을 국가 권력 자체보다는 일본 기업, 특히 해외 진출 기업에 집중했다. 이들을 '침략 자본'으로 간주했다.[49]
- 모든 구성원이 비공개 활동가로서,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이나 점원 등으로 일하며 일반인처럼 생활하고 밤에 활동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활동가임을 드러내지 않고 주변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의도였다. 따라서 직장 내 노동 운동이나 지역 시민 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 폭탄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도구나 일용품으로 제작했으며, 때로는 자택 아파트 바닥을 파서 지하 제조실을 만들기도 했다. 조직의 아지트 없이 멤버의 생활 공간을 거점으로 삼았다.
- 활동 자금은 은행 강도 등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했던 적군파 등과 달리, 구성원들이 직접 일해서 번 급여의 일부를 활동 자금으로 사용하는 합법적인 방식을 원칙으로 삼았다. 다만, 방법과 대상을 신중히 검토한 후의 은행 강도까지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4. 사상 및 이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일본의 한반도 및 아이누에 대한 침략 역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독자적인 "반일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켰다. 이들은 일본의 지배 계층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과 노동자까지도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동조하거나 책임이 있는 존재로 간주하여 공격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2] 자체 발간물인 ''하라하라 도케이'' 등을 통해 이러한 사상을 전파하려 했으나, 그 극단성과 독선적인 면모로 인해 당시 신좌익 내에서도 지지 기반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결국 지도자였던 다이도지 마사시조차 훗날 자신들의 과격한 방식에 대해 사과했다.[2]
4. 1. 반일 사상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아이누 및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침략사"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독자적인 "반일 사상"을 형성했다. 1970년 8월, 다이도지 마사시와 L반 투쟁위원회 주축 멤버들이 결성한 "연구회"는 일본 제국주의(일제)가 아시아에서 저지른 침략 행위를 집중적으로 학습하며 과격한 반일 사상을 키워나갔는데, 당시 학습 자료로는 박경식의 『조선인강제연행기록』 등이 사용되었다.1960년대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건 일본 신좌익 정파 대다수가 스스로를 전위당으로 규정하고 최종적으로 노동자 계급을 통한 혁명 실현을 목표로 삼았던 것과 달리,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아나키즘적 영향이 강한 아이누 혁명론 등에 기반하여 전후 "현재의 일본 제국주의" 파괴 자체를 주장했으며, 혁명 이후의 신사회 구상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 권력층뿐만 아니라 일반 일본 기업과 노동자들까지 "제국주의 침략의 가해자"로 간주하고 공격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보았다. 1974년 3월에 출판한 자체 팸플릿인 ''하라하라 도케이''에서는 일본인을 日帝本国人|닛테이 혼고쿠진일본어(일본 제국주의 본토인)이라 칭하며, "반일 투쟁"을 지지하지 않는 모든 일반 시민을 제국주의의 적극적인 구성원으로 비난했다. 1974년 미쓰비시 중공업 폭탄 테러 이후 발표한 성명에서는 "폭탄 테러로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사람들은 무관한 일반 시민이 아니다. 그들은 식민주의자들이다"라고 주장하며 무차별 테러 공격을 정당화했다.
이러한 극단적이고 독선적인 사상 때문에 당시 신좌익의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지지하는 세력은 소수에 불과했다. 지도자였던 다이도지 마사시조차 훗날 자신들의 전술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4. 2. 아나키즘적 경향
1960년대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세운 일본 신좌익 정파들은 무장 투쟁 등 급진주의적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스스로를 전위당으로 규정하며, 공개 조직을 통한 선전 활동, 당원 확보, 노동조합 활동 등을 병행했다. 최종적으로는 노동자를 혁명 실현의 주체로 삼는 당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반면,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아이누 및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침략사"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독자적인 "반일 사상"을 형성했다. 이들의 사상은 아나키즘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아이누 혁명론에 기반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지속되는 "현재의 일본 제국주의"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파괴 이후 일본 사회를 어떻게 새롭게 구성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부족한 편이다.
5. 대한민국과의 관계
(내용 없음)
5. 1. 문세광 사건과의 연관성
1974년 8월 14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쇼와 천황이 탄 오메시열차가 지나는 철교를 폭파하려던 계획(무지개 작전)을 세웠으나, 실행 직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2] 바로 다음 날인 8월 15일, 대한민국에서는 조총련 회원인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는 사건(문세광 사건)이 일어났다. 문세광은 과거 흑헬과 다소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프로레타리아 군단 산하 고등학생 조직 '폭력혁명고교생전선' 출신의 조총련 활동가였다.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핵심 그룹 "늑대"는 무지개 작전 실패 이후, 문세광의 행동에 호응하여 새로운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2] 그들은 8월 20일, 미쓰비시 중공업 도쿄 본사 빌딩에 폭탄을 설치해 폭파시켰다(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 이 폭발로 인해 8명이 사망하고 376명이 부상을 입는 등 예상보다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이후 "대지의 엄니", "전갈" 등 다른 그룹들이 합류하여 다음 해 5월까지 연속기업폭파사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6. 평가 및 영향
(내용 없음)
6. 1. 비판
1974년 8월 30일,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미쓰비시 중공업 도쿄 본사 빌딩에서 폭탄을 터뜨려 8명이 숨지고 376명이 다치는 참사를 일으켰다(미쓰비시 중공업 폭파 사건). 이는 조직 내 "늑대" 그룹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결과였다. 사건 이후 이들은 성명을 통해 미쓰비시 폭파 결과를 정당화하며, 사망자들이 "무관계한 일반 시민"이 아니라 "식민지 인민의 피로 살찌는 식민자"라고 주장했다[22]. 이러한 무고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인 테러 행위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이 사건을 계기로 "대지의 어금니", "전갈" 그룹이 새롭게 가담하여 1975년 5월까지 연속 기업 폭파 사건을 이어갔다. 이들은 총 12건의 기업 폭파 사건을 일으켰으며, 미쓰비시 중공업, 미쓰이물산, 테이진, 다이세이 건설, 가시마 건설, 하사마구미 등 해외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을 "아시아 침략에 가담하는 기업"으로 규정하고 표적으로 삼았다[18]. 그러나 이들의 극단적인 사상과 폭력적인 수단은 일본 사회 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 어려웠다.
7. 관련 작품
- 스즈키 쿠니오 『복부시계와 <늑대> - <늑대>공포를 이용하는 권력』 산이서방 (1975년)
- 기리야마 오습 『파르티잔 전설』 가와이데쇼보신샤 (1984년) -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을 모티브로 한 소설. 이후 작가 본인이 『무지개 크로니클』이라는 제목으로 희곡화하였다.
- 마츠시타 류이치 『봉화를 보라』 가와이데쇼보신샤 (1987년)
- 스즈키 쿠니오 『테러 -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과 적보대』 사이류샤 (1988년)
- 히라마츠 신지 『머더 라이센스 키바』 제14화 "죄의 청산" (1989년) - 『슈퍼 점프』 (슈에이샤)에 연재된 만화.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과 그 지원자들을 모티브로 삼았으나, 사형 존폐 문제에 대해 존속을 옹호하는 입장을 강하게 드러내 항의를 받고 단행본에는 실리지 못했다. (후에 단편집 『지상 최강의 남자』 및 편의점 코믹스 『머더 라이센스 키바 스페셜 사신의 그림자 편』에 "사형제도"라는 제목으로 수록됨).
- 신보 유이치 『화이트 아웃』 신초샤 (1995년) - 작중에 등장하는 과격파 조직의 모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2000년에 영화화되었다.
- 후쿠이 아츠시 『늑대·전갈·대지의 어금니 연속 기업 폭파 35년째의 진실』 분게이슌주 (2010년)
- 몬다 타카마사 『늑대의 어금니를 꺾어라 사상 최대의 폭파 테러에 도전한 경시청 공안부』 쇼가쿠칸 (2013년)
- 도바 슌이치 『메비우스 1974』 가와데쇼보신샤 (2016년) - 미쓰이물산 폭파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
- 쿠리하라 야스시 감수 『일본의 테러 폭탄의 시대 60s - 70s』 가와이데쇼보신샤 (2017년)
- 『늑대를 찾아서』 (2017년, 대한민국) - 한국인 영화감독 김미래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의 사상적 배경을 탐구하고, 출소한 멤버 요코타 유키코 등을 직접 취재하여 그들의 현재 모습을 담았다.[54][55]
참조
[1]
뉴스
Asahi Shimbun
1974-09-04
[2]
서적
Dissenting Japan: A History of Japanese Radicalism and Counterculture from 1945 to Fukushima
Oxford University Press
2016
[3]
뉴스
Sources: Man suspected to be extremist wanted for 1970s bombings under custody
https://www3.nhk.or.[...]
2024-01-26
[4]
뉴스
Police question man claiming to be bomber on the run for 49 years
https://www.asahi.co[...]
2024-01-28
[5]
뉴스
Man believed to be long-time fugitive Satoshi Kirishima detained in Japan: reports
https://www.japantim[...]
2024-01-26
[6]
뉴스
Suspected fugitive from 1975 bombing attack dies at hospital near Tokyo
https://www3.nhk.or.[...]
2024-01-29
[7]
뉴스
DNA tests show dead man likely 1970s bombing fugitive in Japan
https://english.kyod[...]
2024-02-02
[8]
서적
Noroshi o miyo : higashiajia hannichi busō sensen ōkami butai
Kawadeshobōshinsha
2017-08
[9]
웹사이트
Death row inmate apologizes to victims of 1974 bombing. - Free Online Library
https://www.thefreel[...]
2019-06-09
[10]
웹사이트
京都府警察/京都を壊す極左暴力集団のテロ、ゲリラ
https://www.pref.kyo[...]
2024-01-27
[11]
웹사이트
捜査関係者「最期は本名で」と…70年代連続企業爆破で指名手配・桐島聡容疑者か {{!}} khb東日本放送
https://www.khb-tv.c[...]
2024-01-27
[12]
웹사이트
https://news.tv-asah[...]
[13]
뉴스
朝日新聞
1974-09-04
[14]
웹사이트
【解説】桐島容疑者所属の「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とは?爆弾製造指南「腹腹時計」出版…50年前の警察白書を紐解く(FNNプライムオンライン)
https://news.yahoo.c[...]
2024-01-27
[15]
웹사이트
【身柄確保か】桐島聡容疑者とは?連続企業爆破事件とは?警視庁
https://www.huffingt[...]
2024-01-27
[16]
웹사이트
相次ぐ企業爆破事件 8人を逮捕
https://www2.nhk.or.[...]
日本放送局
2024-01-07
[17]
웹사이트
【解説】50年間何をしていたのか?桐島聡容疑者を名乗る男が死亡 真面目で目立たず…非公然活動家の実態
https://bunshun.jp/a[...]
2024-01-30
[18]
웹사이트
「本当に桐島か?」「逮捕できるのか?」“秘密の暴露”に矛盾はないけど顔が違う…? 迫るタイムリミットと49年の壁。連続企業爆破事件を振り返る〈「さそり」指名手配犯確保?〉(集英社オンライン)
https://news.yahoo.c[...]
2024-01-27
[19]
웹사이트
「非公然活動家」って何? - 群馬県警 - 群馬県ホームページ(県警本部)
https://www.police.p[...]
2024-01-30
[20]
웹사이트
昭和63年 警察白書
https://www.npa.go.j[...]
2024-01-30
[21]
웹사이트
1977年「人の命は地球より重い」日航機ハイジャック事件 石井一団長 緊迫の交渉
https://news.tv-asah[...]
2024-01-27
[22]
웹사이트
「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の初心と過ち
https://archive.md/J[...]
[23]
뉴스
「xxxxx」の姉が自殺
1975-05-29
[24]
뉴스
桐島容疑者とみられる人物 「ウチダヒロシ」名乗り生活か
https://www3.nhk.or.[...]
NHK
2024-01-28
[25]
뉴스
末期がんで入院の男「自分は桐島聡」「最期は本名で迎えたい」…公安部に本人しか知り得ない話
https://www.yomiuri.[...]
読売オンライン
2024-01-26
[26]
서적
『でもわたしには戦が待っている 斎藤和の軌跡』より、浴田由紀子の証言
風塵社
2004
[27]
웹사이트
「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闘いの軌跡
http://kiyoumohannic[...]
[28]
서적
子ねこチビンケと地しばりの花 - 未決囚十一年の青春
径書房
1986
[29]
웹사이트
死刑確定囚処遇を巡る訴訟 原告益永利明さん本人尋問
http://www.jca.apc.o[...]
[30]
웹사이트
2018/06/30 連続集会 虹の彼方へ epilogue? prologue?(東京・文京区民センター)
http://www.labornetj[...]
レイバーネット
[31]
웹사이트
指名手配の桐島聡容疑者?神奈川で入院 本人と認め、病院側が通報
https://mainichi.jp/[...]
2024-01-27
[32]
웹사이트
「あの桐島聡なのか」元公安幹部衝撃 逃亡半世紀、本人打ち明け
https://mainichi.jp/[...]
2024-01-27
[33]
트위터
公安調査庁
https://twitter.com/[...]
[34]
웹사이트
連続企業爆破事件、一部メンバーは国際手配続く
https://www.sankei.c[...]
2024-01-27
[35]
웹사이트
三菱重工ビルを口火に昭和の日本が震撼 桐島聡容疑者が関与したとされる連続企業爆破事件
https://www.sankei.c[...]
2024-01-27
[36]
서적
大道寺将司獄中書簡集 明けの星を見上げて
[37]
서적
でもわたしには戦が待っている 斎藤和[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 大地の牙]の軌跡
[38]
서적
狼の牙を折れ
小学館
2013
[39]
웹사이트
桐島聡容疑者「岡山に女と一緒にいる」の電話から49年不明…鎌倉の病院に名乗る男
https://www.yomiuri.[...]
2024-01-26
[40]
웹사이트
路上で倒れ、自ら通報…桐島聡容疑者を名乗る男“極めて重篤な状態” 神奈川県内の工務店に勤務(FNNプライムオンライン(フジテレビ系))
https://news.yahoo.c[...]
2024-01-27
[41]
웹사이트
【速報】連続企業爆破事件の「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メンバー 桐島聡容疑者(70)とみられる男 神奈川県内の工務店で勤務か 警視庁公安部 {{!}} TBS NEWS DIG (1ページ)
https://newsdig.tbs.[...]
2024-01-27
[42]
웹사이트
「あの桐島聡なのか」元公安幹部衝撃 逃亡半世紀、本人打ち明け(毎日新聞)
https://news.yahoo.c[...]
2024-01-27
[43]
웹사이트
【速報】末期がん患者が突然「本名を名乗る」桐島聡容疑者50年ぶりに現れる 連続企業爆破事件メンバー(FNNプライムオンライン(フジテレビ系))
https://news.yahoo.c[...]
2024-01-27
[44]
웹사이트
桐島聡容疑者が逮捕される:なんで他人の保険証で入院できたの?
https://agora-web.jp[...]
2024-01-27
[45]
뉴스
桐島聡容疑者、警視庁が本人と特定…爆発物取締罰則違反容疑で27日にも書類送検
https://www.yomiuri.[...]
読売新聞
2024-02-27
[46]
뉴스
死亡した桐島聡容疑者を書類送検、5か所の爆破事件に関与疑い…首都圏に潜み逃亡半世紀
https://www.yomiuri.[...]
2024-02-28
[47]
서적
大道寺将司書簡集 明けの星を見上げて
れんが書房新社刊
[48]
서적
大道寺将司書簡集 明けの星を見上げて
れんが書房新社刊
[49]
서적
わかりやすい極左・右翼・日本共産党用語集 三訂
立花書房
2008
[50]
뉴스
東京本社朝刊
朝日新聞
1975-03-08
[51]
뉴스
朝刊
朝日新聞
1982-10-30
[52]
서적
狼煙を見よ-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狼”部隊
読売新聞社
1997
[53]
뉴스
東京本社朝刊
朝日新聞
1985-03-31
[54]
웹사이트
Wolf Letter Kim Mi-re
http://dmzdocs.com/e[...]
[55]
웹사이트
『狼をさがして』公式ホームページ
http://eaajaf.com/
[56]
웹사이트
詩・旅に出でよ
http://kiyoumohannic[...]
[57]
서적
地表に蠢く音楽ども
月曜社
2013
[58]
웹사이트
反日ラップ
http://am.jungle-jp.[...]
[59]
뉴스
夕刊
朝日新聞
1974-09-04
[60]
뉴스
「xxxxx」の姉が自殺
1975-05-29
[61]
서적
『でもわたしには戦が待っている 斎藤和の軌跡』
風塵社
2004
[62]
웹사이트
「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闘いの軌跡
http://kiyoumohannic[...]
[63]
서적
子ねこチビンケと地しばりの花 - 未決囚十一年の青春
径書房
1986
[64]
웹사이트
死刑確定囚処遇を巡る訴訟 原告益永利明さん本人尋問
http://www.jca.apc.o[...]
[65]
웹사이트
2018/06/30 連続集会 虹の彼方へ epilogue? prologue?(東京・文京区民センター)
http://www.labornetj[...]
2018-06-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