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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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은 1977년 9월 28일, 파리에서 도쿄로 향하던 일본항공 472편이 인도 뭄바이에서 이륙 직후 일본 적군 5명에게 납치된 사건이다. 범인들은 일본에 수감 중인 동료 9명의 석방과 600만 달러의 몸값을 요구하며, 당시 미국 대통령 지인의 살해를 언급하는 등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일본 정부는 "한 사람의 생명은 지구보다 무겁다"는 판단하에 초법규적 조치를 통해 수감자 석방을 결정했고, 다카에서 인질 118명이 풀려났다. 사건 이후 일본 정부는 테러 대응을 위해 특수부대를 창설하고, 납치범 및 석방자들의 행적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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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 | |
---|---|
사건 개요 | |
이름 | 일본항공 472편 |
![]() | |
발생일 | 1977년 9월 28일 - 1977년 10월 3일 |
위치 | 방글라데시 다카 지아 국제공항 |
출발지 | 프랑스 파리 샤를 드 골 공항 |
경유지 | 인도 뭄바이 산타크루즈 공항 |
목적지 | 일본 도쿄 도쿄 국제공항 |
항공기 종류 | 더글러스 DC-8-62 |
등록번호 | JA8033 |
운영사 | 일본항공 |
구글 지도 검색어 | 다카 샤잘랄 국제공항 |
승객 및 승무원 | |
승객 | 142명 (납치범 5명 포함) |
승무원 | 14명 |
사망자 | 0명 |
생존자 | 156명 (전원) |
범인 | |
단체 | 일본 적군 |
용의자 | 마루오카 오사무 사사키 노리오 반도 구니오 니시카와 준 와코 하루오 |
범행 동기 | |
동기 | 일본 적군 멤버 및 지지자 석방, 몸값 획득 |
사건 경과 | |
요구 조건 | 몸값 600만 달러 지불 및 수감자 석방을 위한 초법적 조치 시행 |
결과 | 일본 정부의 방글라데시 정부에 대한 특사 파견 |
기타 정보 | |
관련 사건 | 일본항공 472편 봄베이 공항 오버런 사고 (1972년) |
2. 사건 발생
1977년 9월 28일,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도쿄로 향하던 일본항공 472편(더글러스 DC-8-62, 기체 번호 JA8033, 고바야시 시게오 기장 외 승무원 14명, 승객 142명)이 인도 뭄바이를 이륙한 직후 일본 적군 5명에게 납치되었다. 이들은 권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납치된 비행기는 콜카타 방면으로 향하다가 진로를 변경,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의 샤잘랄 국제공항에 강제 착륙했다. 범인들은 인질의 몸값으로 600만 달러와 일본에 복역 및 구류 중인 9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2. 1. 납치범들의 요구
납치범들은 일본에 수감 중인 동료 9명의 석방과 600만 달러의 몸값을 요구했다. 당시 환율(1USD ≒ 약 266엔)을 적용하면 몸값은 약 16억엔에 달했다. 이들은 미국인 인질을 우선 살해하겠다고 위협하며, 당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지인이 탑승하고 있음을 언급하는 등, 미국에 대한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4]기내 온도가 45도 이상으로 올라가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하는 등 열악한 환경이었으나, 우연히 탑승한 일본항공 소속 의사 호카리 마사오미의 도움과 기장의 대처로 인질들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10]
납치범들은 인질들의 여권, 시계, 금전, 귀금속류 등을 빼앗고, 수하물을 쌓아 바리케이드를 구축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3. 일본 정부의 대응과 초법규적 조치
10월 1일, 후쿠다 다케오 총리는 "'''한 사람의 생명은 지구보다 무겁다'''"라는 말과 함께 범인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초법규적 조치를 통해 수감자 석방과 몸값 지불을 결정했다.[6]
석방이 요구된 9명 중 우에가키는 "일본에 남아 연합적군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했고, 지넨은 "오키나와 해방 투쟁은 오키나와인 자신이 싸워야 하며 일본 적군과는 정치적, 사상적 일치점이 없다"고 했으며, 오무라는 "정치혁명을 목표로 하는 적군과는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주장하며 3명은 석방 및 일본 적군 참가를 거부했다. 일본 정부는 석방 요구 대상 중 이즈미미즈와 진페이 2명은 사상범이 아닌 형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을 거부하려 했으나, 납치범들이 응하지 않아 결국 9명 중 6명을 석방했다.[11]
이러한 초법규적 조치는 법무대신이 법무부 교정국장을 직접 지휘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같은 날 아침, 일본 정부는 운수정무차관 이시이 하지메를 단장으로 하는 정부 특사단을 파견했다. 이들은 일본항공 특별기(더글러스 DC-8-62, 기체 번호: JA8031)편으로 6톤의 식량, 몸값, 석방된 6명 등을 다카로 수송했다.
일본 정부가 과격세력의 옥중 요원 석방 요구에 응한 것은 1975년 쿠알라룸푸르 사건에 이어 두 번째였다. 검찰총장 카미야 나오오와 법무대신 후쿠다 하지메는 법치국가에서 '법의 파수꾼'으로서 이러한 초법규적 조치에 강하게 반발했으며, 후쿠다 법상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4. 방글라데시의 군사 쿠데타
10월 2일 이른 아침, 일본항공 472편 납치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방글라데시군 수뇌부를 포함한 정부 요인들이 공항 관제탑에 모여 있는 틈을 타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11] 쿠데타군은 납치범들이 요구한 몸값 600만달러를 강탈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후 시내와 교외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2시간 만에 반란군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공항 근처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고, 관제탑 안에서도 일본 정부 관계자와 언론인들이 보는 앞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정부군 장교 11명이 사망하고 사건 해결을 지휘하던 정부군 사령관이 부상당하는 등 긴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총성 등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범인 측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묻자, 방글라데시 측은 "사소한 비상사태다. 병사가 접근하면 쏴도 된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켜라"라고 답했다.[4]
5. 사건의 종결
방글라데시 공군 사령관 A. G. 마흐무드의 중재로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쿠데타로 인해 마흐무드가 부상당하면서 협상 주체가 그의 부하로 바뀌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2][3] 일본 측이 범인과 통신을 하면 납치범들은 태도를 경화하는 일이 반복되어 일본 측은 협상 상대로 여겨지지 않았다.
납치범들은 쿠웨이트, 다마스쿠스를 거쳐 알제리에 도착했다. 쿠웨이트에서는 인질 7명,[12] 다마스쿠스에서는 인질 10명을 석방했다.[12] 최종적으로 알제리의 다르 엘 페이다 공항에 착륙하여 알제리 당국의 관리 하에 인질들을 석방하고 투항했다.[6]
일본 적군이 알제리를 최종 목적지로 선택한 것은 알제리가 하이재킹 방지 조약에 가입하지 않았고, 소련 등의 지원을 받는 친소련 성향의 국가였기 때문이다.[12] 또한 미국의 과격단체 블랙 팬서당 회원들의 망명을 받아들였고, 제3세계 혁명 조직의 최대 지원국 중 하나였던 점도 작용했다.[12]
6. 사건의 영향
이 사건에서 일본 정부의 '초법규적 조치'는 국제사회로부터 "테러에 대한 굴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에는 여러 국가에서도 테러리스트의 요구를 수용하여 구속 중인 동료를 석방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지만, 일본은 특히 "테러까지 수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흐름은 같은 해 발생한 루프트한자 181편 납치 사건을 계기로 바뀌었는데, 서독 정부는 뮌헨 올림픽 참사 이후 창설된 특수부대 GSG-9을 투입하여 테러범을 제압하고 인질을 구출했다.
1970년대 세계 각국은 빈번했던 테러에 대응하기 위해 특수부대 창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경시청과 오사카부 경찰에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이들은 '특과중대', '특수검거반' 등으로 불리며 비공개로 운영되었으나, 1979년 미쓰비시 은행 인질 사건과 1995년 전일본공수 857편 납치 사건에서 활약하며 알려졌다. 이후 부대 증설 및 장비 강화를 거쳐 특수급습부대(SAT)로 불리게 되었다. 미국도 GSG-9의 작전을 참고하여 육군에 델타 포스를 창설했다. 또한, 일본 경찰청은 경비국 공안3과 겸 외사과 조사관실을 설치하여 일본 적군 수사를 강화했으며, 이는 현재의 국제테러리즘대책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후쿠오카현의 한 요양소에서는 이 사건 관련 뉴스를 보던 환자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살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사건 해결에 협조한 방글라데시는 군사 쿠데타로 1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음에도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아 칭찬을 받았다.
6. 1. 납치범 및 석방자들의 이후 행적
마루오카 오사무는 1987년 위조 여권을 사용하여 일본에 입국하려다 체포되었다. 2000년 종신형이 확정되었고, 2011년 심장 질환으로 수감 중 사망했다.[15]사사키 노리오와 반도 쿠니오는 현재까지도 도주 중이며 국제 수배 상태이다.
니시카와 준은 1997년 볼리비아에서 체포되어 일본으로 이송되었고, 2011년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와코 하루오는 이 사건으로 기소되지 않았으나, 다른 사건으로 기소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23년 사망했다.
오쿠다이라 준조, 다이도지 아야코, 니헤이 아키라는 2024년 현재까지 국외 도주 중이며, 국제 수배 중이다.
석방이 요구되었던 9명의 명단과 그들의 이후 행적은 다음과 같다.
죄수 | 소속 | 구류(수형) | 죄 | 석방 요구 | 그 후 |
---|---|---|---|---|---|
오쿠다이라 준조 | 일본 적군 | 도쿄 구치소 | 헤이그 사건 쿠알라룸푸르 사건 | 동의 | 국외 도주 (국제 수배) 중 |
시로사키 벤 | 적군파 | 후추 형무소 (징역 10년) | 요코하마 은행 M 작전 | 동의 | 1996년 9월, 네팔에서 구속 미국에서 징역 30년 2015년 2월, 일본으로 강제 송환 도착한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체포 2016년 12월, 징역 12년 판결 |
다이도지 아야코 |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 | 도쿄 구치소 | 연속 기업 폭파 사건 | 동의 | 국외 도주 (국제 수배) 중 |
요쿠타 유키코 |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 | 도쿄 구치소 | 연속 기업 폭파 사건 | 동의 | 1995년 3월, 루마니아에서 구속 1995년 3월, 일본에 신병 인도 2004년 8월, 징역 20년 확정 2017년 3월, 출소 |
이즈미 히로시 | 옥중자 조합 | 아사히카와 형무소 (무기 징역) | 강도 살인 사건 | 동의 | 1986년 6월, 필리핀에서 구속 일본에 신병 인도 1995년 3월, 징역 2년 추가 확정 2020년 3월 27일, 기후 형무소에서 83세로 옥사 |
니헤이 에이 | 옥중자 조합 | 도쿄 구치소 (1심 징역 10년) | 살인 사건 | 동의 | 국외 도주 (국제 수배) 중 |
우에가키 야스히로 | 연합 적군 (적군파) | 도쿄 구치소 | M 작전 산악 베이스 사건 | 거부 | 1993년 2월, 징역 20년 확정 1998년 10월, 출소 |
치넨 이사오 | 오키나와 해방 동맹 | 오키나와 형무소 | 히메유리의 탑 사건 | 거부 | 불명 |
오무라 히사오 | 교토 형무소 | 교토 지방 공안국 폭파 사건 | 거부 | 2021년 1월 10일, 와카야마현의 의료 시설에서 병사. 향년 77세. 사인은 폐렴이다.[16] |
7. 같이 보기
- 일본 적군
- 루프트한자 181편 납치 사건 (다카 사건과 유사한 시기에 발생한 독일 적군의 항공기 납치 사건)
-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 (한국에서 발생한 항공기 납치 사건)
- 테러
- 인질
참조
[1]
웹사이트
JA8033 ダッカ ハイジャック政府派遣特別機 添乗整備記録
http://www.amy.hi-ho[...]
[2]
뉴스
Former Bangladesh Air Force chief AG Mahmud to receive Japan Imperial Decoration
https://bdnews24.com[...]
2022-12-13
[3]
뉴스
Japan still remembers his heroics
https://www.thedaily[...]
2017-05-08
[4]
뉴스
Japan agrees to terrorists' demand to free nine prisoners
https://www.newspape[...]
2022-10-20
[5]
뉴스
Japan agrees to pay hijackers ransom
https://www.newspape[...]
2022-10-20
[6]
서적
Schreiber
[7]
서적
Schreiber
[8]
뉴스
Ex-Red Army member Maruoka dies
http://www.japantime[...]
Japan Times
2011-05-30
[9]
뉴스
Japanese Red Army member's life sentence to stand
http://search.japant[...]
Kyodo News, The Japan Times
2011-09-15
[10]
서적
DC-8 Forever
日本航空刊
1987
[11]
서적
DC-8 Forever
日本航空刊
1987
[12]
서적
航空テロ
イカロス出版
1997
[13]
서적
戦慄
1999
[14]
서적
戦慄
[15]
웹사이트
「長年の謎」が解けた!
http://kunyon.com/sh[...]
鈴木邦男をぶっとばせ!
2009-06-08
[16]
블로그
せと弘幸BLOG『日本よ何処へ』2021年01月12日 極左活動活動家の死
http://blog.lived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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