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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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호우는 조위의 인물로, 화융호군을 지내다 전예를 처벌한 일로 조비의 미움을 받아 이름을 '우'로 개명당했다. 정시 연간에는 조상의 장수가 되었고, 외숙 왕릉과 함께 조방을 폐하고 초왕 조표를 옹립하려다 실패하여 처형당했다. 그는 생전에 영호씨를 빛낼 인물로 기대를 받았으나, 족부 영호소는 그의 호탕한 성격과 야심을 경계했고, 이는 결국 영호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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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필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이자 현학 연구가로, 『노자』와 『주역』에 대한 주석을 통해 중국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하안의 사상을 비판하며 자신만의 철학적 견해를 드러냈고, 젊은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 249년 사망 - 하안
하안은 삼국 시대 위나라의 학자이자 현학의 창시자이며 조조의 양자로 조비, 조예와 함께 자랐고, 조조의 딸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으나 사마의의 고평릉의 변으로 처형되었으며, 유교와 도교를 융합하려는 시도를 했다. - 조위 사람 - 반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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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우 | |
---|---|
기본 정보 | |
이름 | 영호우 |
본명 | 영호준 |
자 | 공치 |
출생 | 생년 미상 |
출신지 | 병주태원군 |
사망 | 가평 원년 (249년) |
사망지 | 연주 |
시대 | 삼국 시대 |
국가 | 위 |
주요 활동 | 연주자사 |
주군 | 조비 → 조예 → 조방 |
2. 생애
황초 연간(220년~226년)에 화융호군을 지냈고, 정시 연간(240년~249년)에는 조상에 의해 장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외숙 왕릉이 승진하면서 연주자사로 부임하여 동아에 주둔하였고, 선고(單固)와 양강(楊康)이 그의 심복이 되었다.[8]
당시 사마의가 고평릉의 변으로 권력을 잡자, 왕릉과 영호우는 황제 조방이 어려 제위에 부적합하다고 판단, 조표를 옹립하고 허창을 수도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수춘삼반 중 제1반인 왕릉의 난)[8] 가평 원년(249년) 9월, 장군 장식(張式)을 조표에게 보냈으나, 11월에 다시 장식을 보내기 전 병으로 사망했다.[8]
사후 왕릉과의 모의가 발각되어 왕릉, 영호우, 조표 등 연루된 이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조정은 춘추 시대 고사에 따라 왕릉과 영호우의 묘를 파헤치고 시신을 3일간 시장에 전시한 후 불태워 흙에 묻었다.[8]
2. 1. 초기 생애 및 개명
황초 연간(220년~226년)에 화융호군(和戎護軍)이 되었다.[8] 오환교위 전예가 호(胡)를 정벌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작은 법규를 어겨 영호준(영호우의 원래 이름)이 법으로 이를 다스렸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화를 내어 영호준을 잡아 가두고 해임하여 죄를 다스렸다. 그 조서에 “준(浚)은 어찌하여 이리도 어리석단 말이냐(浚何愚)!”라는 말이 있어, 영호준은 이름을 똑똑할 준(浚)에서 어리석을 우(愚)로 바꾸었다.[8]영호우는 벼슬에 나아가기 전부터 높은 뜻을 품어, 사람들은 모두 영호우가 영호씨를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영호우의 일족인 영호소는 '''“영호우는 성질이 호탕하여 덕을 닦지는 않고 크게 바라는 것을 품었으니, 반드시 우리 종중을 멸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영호우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불편했다. 훗날 영호우가 관직에 나가 명성을 얻자 영호소에게 '''“앞서 대인께서는 제가 영호씨의 대를 잇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관직을 얻고 명성까지 얻었으니 이제는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영호소는 그런 영호우를 바라보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중에 자신의 처자에게 '''“공치(영호우)의 성격과 태도는 오히려 여전하다. 내가 보기에는 종내에는 패멸할 것이다. 그저 내가 오래 살아 연좌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너희에게는 반드시 화가 미치겠구나!”'''라고 말했다.[9]
2. 2. 왕릉과의 역모
황초 연간(220년 ~ 226년)에 화융호군이 되었다.[8]오환교위 전예가 호(胡)를 정벌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사소한 잘못으로 영호우가 법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화를 내어 영호우를 사로잡고 해임하여 죄를 다스렸다. 그 조서에 “준(浚)은 어찌하여 이리도 어리석단 말이냐(浚何愚)!”라는 말이 있었다. 영호우는 이에 따라 이름이 똑똑할 준(浚)에서 어리석을 우(愚)로 개명당했다.[8]
정시 중(240년 ~ 249년), 조상이 장사로 삼았다. 외숙 왕릉이 승진하여 남향후·거기장군·의동삼사가 되었을 무렵, 지방으로 나가 연주자사가 되었고, 동아에 주둔했다. 이 시절에 선고(單固)와 치중종사 양강(楊康)은 영호우의 복심이 되었다.[8]
당시 사마의는 고평릉의 변을 통해 조상을 제거하고 위나라의 정권을 잡았다. 왕릉과 영호우는 당시 황제 조방은 어려서 제위에 있을 수 없다고 여겼다.[8] 영호우는 초왕 조표가 지용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또 당초 동군에는 요언이 돌고 있었는데,[8] 왕릉과 영호우는 이 요언이 초왕을 가리킨다고 여겨 마침내 초왕을 세우고 허창으로 서울을 삼을 음모를 세웠다(수춘삼반 중 제1반인 왕릉의 난).[8]
가평 원년(249년) 9월, 영호우는 장군 장식(張式)을 파견하여 초왕과 서로 묻고 왕래했다.[8] 11월, 영호우는 다시 장식을 초왕에게 파견했는데, 장식이 돌아오기도 전에 영호우는 병이 들어 죽었다.[8] 훗날 왕릉과 영호우가 세운 모의가 모두 적발되어, 왕릉과 영호우와 조표와 연좌된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춘추 시대, 제나라에서는 최저가 죽은 후 그 죄상이 밝혀지자 형벌을 내려 시신을 꺼내 사람들에게 보이고 관을 부수었으며, 정나라에서도 공자 귀생이 죽은 후 그 죄상이 밝혀지자 이와 마찬가지로 형벌을 내렸다. 조정은 이 고사에 따라, 왕릉과 영호우의 묘를 파서 관을 자르고, 시신을 부근 시장에서 3일간 말리고, 인수와 조복을 불태우고, 시신을 그대로 흙에 묻었다.[8]
영호우가 아직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을 때, 높은 뜻을 품어 사람들이 모두 영호우가 영호씨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했다. 그러나 영호우의 일족인 영호소는 '''“영호우는 성질이 호탕하여, 덕을 닦지는 않고 크게 바라는 것을 품었으니, 반드시 우리 종중을 멸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영호우는 이 말을 듣고 심기가 화평하지 않았다. 나중에 영호우가 관직을 나가 명성을 얻은 후, 영호소에게 '''“앞서 대인께서는 제가 영호씨의 대를 잇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관직을 얻고 명성까지 얻었으니 이제는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영호소는 그런 영호우를 바라보기만 하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자신의 처자에게 개인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공치의 성격과 태도는 오히려 여전하다. 내가 보기에는 종내에는 패멸할 것이다. 그저 내가 오래 살아 연좌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너희에게는 반드시 화가 미치겠구나!”''' 영호우는 연주자사가 되고, 과연 왕릉과 폐립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고 그의 가족들도 주멸되었다.[9]
정시 연간에 조상에 의해 장사로 임명되었다. 정시 6년[3]에는 지방으로 나가 연주자사가 되었다.
당시 영호우의 숙부 왕릉은 도독양주 제군사 등의 관직에 있었고, 숙부와 조카가 모두 회남 지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어린 황제 조방이 신하에게 권력을 억제당하여 군주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나이가 많고 재능이 있는 조표를 옹립하여 조씨를 부흥시키고자 했다. 가평 원년(249년) 9월, 영호우는 장군 장식을 사자로 삼아 백마에 있는 조표에게 파견했다. 11월에는 다시 장식이 조표에게 파견되었으나, 그가 귀환하기 전에 영호우는 병사했다.
영호우 사후에도 왕릉은 쿠데타의 야망을 품고 있었다. 가평 3년, 왕릉은 장군 양홍을 영호우 후임 연주자사 황화에게 파견하여 그 계획을 알렸다. 황화와 양홍은 연명으로 이를 사마의에게 밀고했다. 사마의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왕릉은 항복하고, 손을 뒤로 묶고 그를 맞이했다. 사마의에게서 묶인 것을 풀고 위로를 받은 후, 수도로 송환될 예정이었으나, 항(項)이라는 지역에 이르러 왕릉은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그 후, 장식도 자수하여 그들의 계획은 모두 밝혀졌다. 조표는 죽음을 선고받았고, 왕릉과 영호우는 죄인으로 무덤이 파헤쳐져 시체가 사흘 동안 시장에 전시되었다. 또한 그들의 삼족은 모두 몰살되었다. 연주의 무관 마륭은 영호우의 식객이었던 것을 핑계 삼아 사재를 털어 그의 유해를 빈장하고 3년상을 치렀다. 그 행실은 주에서 미담으로 칭송받았다.[4]
영호우는 벼슬이 없던 시절부터 고매한 뜻을 품었고, 당시 사람들은 영호씨를 번성시킬 인물로 평가했다. 그러나 족부 영호소(令狐邵)만은 "우는 재능이 넘치지만 덕을 닦지 않고 야심이 팽창하여 반드시 우리 일족을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평했다. 영호우는 이 말을 듣고 내심 불만을 품었다. 영호우는 벼슬을 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그 때마다 명성을 얻었다. 이 때 영호우는 영호소에게 물었다. "예전에 어른[5]께서 제가 일족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저는 어떻게 될까요?". 영호소는 영호우에게 대답하지 않고, 후에 처자에게 말했다. "공치(영호우)의 성질과 도량은 지금까지와 같으니 결국 파멸할 것이다. 내가 (오래 살아) 연좌될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들에게는 (죄가) 미칠 것이다"라고. 영호소의 죽음으로부터 십여 년이 지나 영호우의 삼족은 모두 몰살되었다. 영호소의 아들 영호화는 홍농군승의 관직에 있었으나, 영호우와는 먼 친척이므로 연좌를 면했다.[6]
2. 3. 죽음과 멸족
황초 연간(220년 ~ 226년), 영호우는 화융호군이 되었다.[8] 전예가 호(胡)를 정벌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작은 절도를 어겨 영호우가 법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문제는 화를 내어 영호우를 사로잡고 해임하여 죄를 다스렸다. 그 조서에 “준(당시 영호우의 이름)은 어찌하여 이리도 어리석단 말이냐(浚何愚)!”라는 말이 있어, 영호우는 이름이 똑똑할 준(浚)에서 어리석을 우(愚)로 개명당했다.[8]정시 중(240년 ~ 249년), 조상이 장사로 삼았다. 가평 원년(249년) 9월, 영호우는 장군 장식(張式)을 파견하여 조표와 서로 묻고 왕래했다.[8] 11월, 다시 장식을 조표에게 파견했으나, 장식이 돌아오기도 전에 병이 들어 죽었다.[8]
훗날 왕릉과 영호우가 세운 모의가 모두 적발되어, 왕릉·영호우·조표와 연좌된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조정은 춘추 시대의 고사에 따라 왕릉과 영호우의 묘를 파서 관을 자르고, 시신을 부근 시장에서 3일간 말리고, 인수와 조복을 불태우고, 시신을 그대로 흙에 묻었다.[8]
영호우는 벼슬에 나아가기 전부터 높은 뜻을 품어 사람들이 모두 영호우가 영호씨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했다. 그러나 영호우의 일족인 영호소는 “영호우는 성질이 호탕하여, 덕을 닦지는 않고 크게 바라는 것을 품었으니, 반드시 우리 종중을 멸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영호우는 이 말을 듣고 심기가 불편했다. 나중에 영호우가 관직을 나가 명성을 얻은 후, 영호소에게 “앞서 대인께서는 제가 영호씨의 대를 잇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관직을 얻고 명성까지 얻었으니 이제는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영호소는 그런 영호우를 바라보기만 하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자신의 처자에게 “공치의 성격과 태도는 여전하다. 내가 보기에는 결국 패멸할 것이다. 그저 내가 오래 살아 연좌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너희에게는 반드시 화가 미치겠구나!”라고 말했다. 영호우는 연주자사가 되고, 과연 왕릉과 폐립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고 그의 가족들도 주멸되었다.[9]
3. 친족 관계
- 왕릉 (외숙)[8]
- 영호소 (영호우는 영호소의 족자가 된다.)[8]
참조
[1]
서적
三国志 魏書 倉慈伝
[2]
문서
令狐愚の母が王淩の姉妹
[3]
서적
魏方鎮年表
[4]
서적
晋書 馬隆伝
[5]
웹사이트
大人(おとな)とは? 意味・読み方・使い方をわかりやすく解説 - goo国語辞書
https://dictionary.g[...]
goo国語辞書
2024-04-05
[6]
서적
三国志 倉慈伝注
[7]
서적
위략
[8]
서적
삼국지 권28 왕관구제갈등종전
[9]
서적
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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