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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교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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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수성교전서는 1887년 출판된 최초의 신약성경 한글 번역본으로,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서상륜, 백홍준 등 한국인들의 공동 번역으로 이루어졌다. 구한말 기독교 탄압 속에서 만주에서 번역, 출판되었으며, 초기 개신교 선교와 한글 연구, 국문학 발달에 기여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본을 비롯하여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소장본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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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교전서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예수성교전서
예수성교전서
명칭예수성교전서
유형국가등록문화재
지정 번호669
지정일2016년 12월 15일
소유자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수량1권/세로 19.0×가로 13.0(cm)
시대조선시대
소재지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신촌동,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2. 시대적 배경

구한말 한반도에서 기독교는 사교(邪敎)로 여겨져 국법으로 엄금되었다. 천주교가 조선에서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한 이후 신해박해(1791)를 시작으로 많은 탄압이 이루어져 수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다. 다수의 조선인들은 황사영백서사건(1801)을 계기로 기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고, 불효불충(不孝不忠)을 넘어 나라를 팔아먹는 사교 집단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까지 받게 되었다.[2][3][4][5]

이후 국법으로 기독교 선교는 금지되었으나, 큰 문제가 없는 한 묵인하는 상황이었다. 1884년 서구 국가들과 수교를 맺으면서 개신교 선교회 사업 중 교육과 의료 사업이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6]

2. 1. 조선의 종교 정책

조선에서 기독교의 한 일파인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한 이후, 신해박해(1791)를 시작으로 많은 탄압이 자행되어 수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다. 다수의 조선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이는 황사영백서사건(1801)을 일으킨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는 불효불충(不孝不忠)을 넘어 나라를 팔아먹는 사교(邪敎) 집단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까지 받게 되었다.[2][3][4][5]

이후 국법으로 기독교 선교는 금지되었으나, 큰 문제가 없는 한 묵인하는 상황이었다. 서구 국가들과 수교를 맺은 1884년에 이르러서야 개신교 선교회 사업 중 교육과 의료 사업에 대해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6] 개신교 선교사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처음 입국한 것은 1884년 후반이었다. 조선에 입국한 첫 개신교 선교사인 알렌(Allen)은 이러한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선교사 신분을 감추고 의사로만 활동하며 제중원 설립 등 의료 선교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7]

2. 2. 초기 개신교 선교

구한말 조선에서 기독교는 사교(邪敎)로 여겨져 국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다. 천주교가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한 이후, 신해박해(1791)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탄압으로 수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다. 대다수 조선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특히 황사영백서사건(1801)은 이러한 인식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는 불효불충(不孝不忠)을 넘어 나라를 팔아먹는 사교 집단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까지 받게 되었다.[2][3][4][5]

이후에도 기독교 선교는 국법으로 금지되었으나, 큰 문제가 없는 한 묵인되는 상황이었다. 1884년 서구 국가들과 수교를 맺은 후에야 개신교 선교회의 교육 및 의료 사업이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6] 1884년 후반, 알렌(Allen)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조선에 입국한 첫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알렌은 당시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선교사 신분을 숨기고 의사로서 제중원 설립 등 의료 선교에만 집중해야 했다.[7]

3. 번역과 출판

『예수성교전서(예수셩교젼셔)』는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 그리고 한국인 서상륜, 백홍준 등이 번역에 참여하여 1887년에 만주 성경(盛京, 현재의 심양)의 문광서원에서 발행한 한국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이다.[1] 로스역본(Ross Version)이라고도 불린다.

3. 1. 번역 참여자

존 로스(John Ross),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등 스코틀랜드 선교사들과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김진기, 이성하, 이익세 등이 번역에 참여하였다.[1] 1877년부터 신약성서 한글 번역에 착수했다.[8] 백홍준은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한 한국인 조력자 중 한 명으로, 이후 순교하였다.

3. 2. 번역 과정

스코틀랜드 장로교 소속의 선교사 존 로스는 1872년부터 만주에서 활동하며 그 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에게도 선교를 하였다.[8] 이때 그는 조선에서의 선교를 계획하며 서상륜, 백홍준, 이응찬, 김진기, 이성하, 이익세로부터 한국어를 배운 후, 이들과 함께 1877년부터 신약성서 한글 번역에 착수했다. 이런 노력으로 1882년 봄에 심양의 문광서원에서 누가복음 낱권이 출판되어[9][10]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 및 인쇄라는 결실을 거두었다.[11] 한글 활자는 목활자 본을 직접 만든 후 일본에 보내어 4만여 자의 아연활자를 만들었고,[12] 인쇄기는 상해에서 한 번에 8장을 찍어낼 수 있는 컬럼비아 데마이(Columbian demy) 활판기를 구입하여 심양에 개신교 활판소인 문광서원을 설립한 후 인쇄했다.[13]

3. 3. 출판 및 배포

1882년심양의 문광서원에서 누가복음 낱권이 출판되어[9][10]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 및 인쇄라는 결실을 거두었다.[11] 한글 활자는 목활자 본을 직접 만든 후 일본에 보내어 4만여 자의 아연활자를 만들었고,[12] 인쇄기는 상해에서 한 번에 8장을 찍어낼 수 있는 컬럼비아 데마이(Columbian demy) 활판기를 구입하여 심양에 개신교 활판소인 문광서원을 설립한 후 인쇄했다.[13]

인쇄된 낱 복음서는 만주의 한국인 교회에 배포되었고, 한국에도 전도를 위해 들여보냈다. 당시 조선은 국법으로 기독교 선교를 금지하는 등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아 한글 성경 반입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신약성서 전권 번역 작업은 계속되었고, 1887년 번역이 완료되어 '예수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11] 인쇄 비용은 영국 성서공회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충당되었다.[12]

4. 구성과 내용

『예수성교전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4복음서와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서, 에베소서 등 신약성경 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각 장 앞에는 세 칸씩 띄어쓰기가 되어 있으며, 각 절은 한자로 표기하여 구분되어 있다.[17]

4. 1. 구성

耶穌聖敎全書중국어의 크기는 21.1㎝×13.0㎝이며, 판식은 4주단변, 무계, 행자수는 14행 30자, 무어미이다. 간기는 1887년이며,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김진기, 이성하, 이익세, 로스, 매킨타이어 등이 공동 번역했다. 본문은 총 288장으로 순한글 구어체로 작성되어 있다.[17]

기존 번역 성서와 달리 중국어 음역 표기가 아니라 서구식에 가까운 용어들이 사용되어 ‘마’(마태), ‘로마’(로마), ‘사로니코’(데살로니가) 등 헬라어의 음을 우리말 음에 맞춰 표기한 용어들이 보인다. 신의 명칭은 '하나님'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예수성교누가복음전서』와 『예수성교요한복음전서』 등에서 보이던 대두법 표기는 사라졌다. 번역자들의 출신 지역이 평안도 의주 지역이기 때문에 평안도 사투리 어형이 많이 등장한다는 특징도 있다.[17]

耶穌聖敎全書중국어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4복음서와 역사서인 사도행전, 서간문인 로마서, 고린도전서, 에베소서 등 신약성경의 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각 장 앞에는 세 칸씩 띄어쓰기가 되어 있으며, 각 절은 한자로 표기하여 구분되어 있다.[17]

4. 2. 내용 및 언어적 특징

『예수성교전서』는 총 288장으로 순한글 구어체로 작성되었다.[17] 기존 번역 성서와 달리 중국어 음역 표기가 아니라 서구식에 가까운 용어를 사용하여 ‘마’(마태), ‘로마’, ‘사로니코’(데살로니가) 등 헬라어의 음을 우리말 음에 맞춰 표기한 용어들이 나타난다.[17]

신의 명칭은 하나님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예수성교누가복음전서』와 『예수성교요한복음전서』 등에서 확인 가능했던 대두법 표기는 사라졌다.[17] 번역자들의 출신 지역이 평안도 의주 지역이기 때문에 평안도 사투리의 어형이 많이 등장한다는 특징도 있다.[17]

『예수성교전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4복음서와 역사서인 사도행전, 서간문인 로마서, 고린도전서, 에베소서 등 신약성경의 내용을 번역하고 있다. 각 장 앞에는 세 칸씩 띄어쓰기가 되어 있으며, 각 절은 한자로 표기하여 구분되어 있다.[17]

5. 평가와 영향

백홍준은 불온서적 간행 혐의로 구속되어 옥사할 정도로, 구한말 기독교 선교와 신앙의 자유가 없었던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성서의 번역, 출판, 배포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14] 그럼에도 이 한글 성경은 외래 선교사들의 한글 공부와 선교, 그리고 훗날 좀 더 체계적인 번역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한글 연구의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으며, 새로운 어휘 보급 등 국문학 발달에도 기여했다.[12]

천주교가 외래 선교사가 아닌 문서 선교로 먼저 전래된 것처럼,[15] 개신교 역시 선교사가 정식으로 파견되기 전부터 경전이 번역, 출판되어 선교 사업에 사용되었다. 이는 세계 선교 역사에서 매우 드문 사례이다.[16]

5. 1. 종교적 의의

예수성교전서중국어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 그리고 한국인 백홍준 등이 번역에 참여하여 1887년 만주 성경(盛京, 현재의 심양)에서 발행한 한글 신약전서이다.[1]

이 성경은 한국 교회 성립과 한국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1] 구한말 당시 기독교는 사교(邪敎)로 여겨져 국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고, 천주교 전래 이후 신해박해(1791) 등 많은 탄압이 있었다. 특히 황사영백서사건(1801) 이후에는 불효불충(不孝不忠)을 넘어 나라를 팔아먹는 사교 집단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까지 받았다.[2][3][4][5]

이후 기독교 선교는 국법으로 금지되었으나, 1884년 서구 국가들과 수교 후 개신교 선교회 사업 중 교육과 의료 사업만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6] 알렌은 이러한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선교사라는 신분을 감추고 의사로만 활동하며 의료 선교에 집중해야 했다.[7]

이처럼 기독교 선교와 신앙의 자유가 없었던 상황에서 성서 번역과 출판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 사업에 참여했던 백홍준은 불온서적 간행 혐의로 체포되어 옥사하기도 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글 성경은 외래 선교사들의 한글 공부와 선교, 그리고 훗날 진행된 좀 더 체계적인 번역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한글 연구의 역사적 자료이자 새로운 어휘 보급 등 국문학 발달에도 기여했다.[12]

천주교가 선교사 없이 문서 선교로 먼저 전래된 것처럼,[15] 개신교 역시 선교사가 정식으로 파견되기 전부터 경전이 번역, 출판되어 선교 사업에 사용되었다. 이는 세계 선교 역사에서 매우 드문 사례이다.[16]

5. 2. 언어학적 의의

예수성교전서는 외래 선교사들의 한글 공부와 선교, 그리고 훗날 진행된 좀 더 체계적인 번역 사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한글 연구의 역사적 자료로도 가치가 있으며 새로운 어휘들의 보급 등 국문학 발달에도 기여하게 되었다.[12]

5. 3. 문화재 지정

2016년 12월 15일,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소장본이 문화재청에 의해 국가등록문화재 제669호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은 예수성교전서의 가치를 인정하여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연세대학교 소장본을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19세기 말 서북지역의 방언이나 언어 사용 양상을 살필 수 있고, 번역 과정에서 등장한 새로운 용어들이 이후 널리 사용되어 언어학적 측면에서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연구 자료로서도 가치가 있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17]

참조

[1] 간행물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등 4건' 문화재 등록" http://gwanbo.mois.g[...] 대한민국 관보 2016-12-15
[2]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3]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04-10
[4] 서적 한국사 이야기 16 한길사 2009-04-10
[5] 문서
[6]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7]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1998
[8]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1998
[9] 웹사이트 『예수성교성서누가복음전서』 [-聖敎聖書-福音全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s://terms.naver.[...]
[10]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11]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1998
[12] 웹사이트 예수성교전서 [―聖敎全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terms.naver.[...]
[13] 웹사이트 『예수성교성서누가복음전서』 [-聖敎聖書-福音全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s://terms.naver.[...]
[14] 웹사이트 백홍준 [白鴻俊]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https://terms.naver.[...]
[15] 서적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
[16]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1998
[17] 웹사이트 『예수성교전서』 [耶蘇聖敎全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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