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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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경정의는 당나라 때 유교 경전인 오경(《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의 해석을 통일하기 위해 편찬된 책이다. 남북조 시대의 경학 연구와 당 태종의 경학 통일 사업을 배경으로, 공영달을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이 참여하여 편찬되었다. 오경정의는 한대 이래 훈고학의 집대성이라는 긍정적 평가를 받지만, 과거 시험 암기에 치중하게 하여 경학 발전을 저해하고 다른 주와 의소를 잊게 했다는 부정적 영향도 있다. 송대에는 경과 주가 합각되어 《십삼경주소》에 수록되었으며, 한국에는 《오경정의》의 번역본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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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유교 경전을 연구하는 경학(經學)에서는 한나라부터 위·진 시대에는 경전 본문인 "경"에 "주"를 붙이는 형식이 성행했고, 남북조 시대에는 "경"과 "주" 양쪽에 "의소"를 붙이는 형식이 성행했다. 남조와 북조는 각각 주로 사용하는 주가 달랐으며, 경학 경향에도 차이가 있었다.
당 태종은 경학의 성대한 모습을 과시하고 남북의 여러 설을 통일하고자 공영달을 대표로 하는 많은 학자를 동원해 '''오경의찬'''을 편찬하게 했다. 이것이 후에 '''오경정의'''로 개명되었다.
《오경정의》는 5경의 해석을 통일하기 위한 것으로 한나라 이래 훈고학의 총결산이라고 할 만했으나, 과거 응시자들이 이를 암기하는 데에만 매달리고, 《오경정의》 이외의 다른 주와 의소는 잊혀지면서 당대 경학이 정체되고 학문의 고정화를 불러왔다는 문제점이 있다.
《오경정의》 편찬 과정은 두 단계로 나뉜다. 먼저 정관 12년부터 14년에 걸쳐 공영달 등이 편찬하고, 이후 마가운 등의 비판을 받아 정관 16년에 다시 공영달을 중심으로 편찬이 이루어졌다.
2. 1. 남북조 시대의 경학
남북조 시대는 유교 경전을 연구하는 경학(經學)에서 "주"(注)에 대한 "의소"(義疏)의 학문이 성행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남조와 북조에서 각각 지지하는 설이 달라 의견이 분분했다. 태종은 유교의 성대함을 과시하고 남북의 여러 학설을 통일하겠다는 의도를 품고 공영달로 대표되는 많은 유학자들을 동원하여 「오경의훈」(五経義訓, 훗날의 오경정의)를 짓게 했다. 유교의 근본 경서인 역경(易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5경의 해석을 중심으로 한(漢) 이래의 고전 해석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남북조의 여러 학설을 통일한다는 본래 의도에서 그치지 않고 결과적으로는 옛 남조 지역의 남인(南人)들이 받들던 주・소를 많이 채용하였다.한나라부터 위·진 시대에는 경전 본문인 "'''경'''"에 "'''주'''"를 붙이는 형식이 성행했고, 남북조 시대에는 "경"과 "주" 양쪽에 "의소"를 붙이는 형식이 성행했다. 남조와 북조에서는 각각 주로 사용하는 주가 달랐으며, 경학 경향에도 차이가 있었다.
당 태종은 경학의 성대한 모습을 과시하고, 남북의 여러 설을 통일하려는 의도로 공영달을 대표로 하는 많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오경의찬'''』을 편찬하게 했다. 이것이 후에 『'''오경정의'''』로 이름이 바뀌었다.
2. 2. 당 태종의 경학 통일 사업
남북조 시대에는 유교 경전의 해석 방식인 "의소" 학문이 크게 유행했지만, 남조와 북조에서 지지하는 학설이 서로 달라 의견이 분분했다. 당 태종은 유교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고 남북의 다양한 학설을 통합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공영달을 비롯한 많은 유학자들을 모아 "오경의훈"(五経義訓, 훗날의 정의)을 편찬하도록 했다. 이 책은 역경, 시경, 서경, 예기, 춘추 등 다섯 가지 주요 경전(오경)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한나라 이후의 고전 해석학을 모두 모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남북조의 여러 학설을 통일하려는 본래의 목적을 넘어, 결과적으로 옛 남조 지역 학자들이 지지하던 주와 소를 많이 채택하게 되었다.《오경정의》는 다섯 경전의 해석을 통일하기 위해 한나라 이래의 훈고학을 집대성한 것이었지만,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이를 암기하는 데만 집중하고, 《오경정의》 이외의 다른 해석들은 잊혀지면서 당대 경학이 침체되고 학문이 고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다.[1]
《오경정의》의 편찬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정관 12년부터 14년까지 공영달 등이 주도하여 편찬 작업을 진행한 것이고, 두 번째는 마가운 등의 비판을 받아들여 정관 16년에 공영달을 중심으로 다시 편찬이 이루어진 것이다.
3. 구성
유교의 경전을 연구하는 경학(經學)에서 한(漢), 위(魏) 시대가 본문인 「경」(經)에 대한 「주」(注)의 시대였다면,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는 그 「주」에 대한 「의소」(義疏)의 학문이 성행했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조와 북조에서 각각 지지하는 설이 달라 의견이 분분했다. 태종은 유교의 성대함을 과시하고 나아가 남북의 여러 학설을 통일하겠다는 의도를 품고 공영달로 대표되는 많은 유학자들을 동원하여 「오경의훈」(五経義訓, 훗날의 정의正義)을 짓게 했다. 유교의 근본 경서인 역경(易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5경의 해석을 중심으로 한(漢) 이래의 고전 해석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남북조의 여러 학설을 통일한다는 본래 의도에서 그치지 않고 결과적으로는 옛 남조(南朝) 지역의 남인(南人)들이 받들던 주·소를 많이 채용하였다.
《오경정의》는 5경의 해석을 통일하기 위한 것으로 한대 이래 훈고학(訓誥學)의 총결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으나, 과거(科擧)에 응시하는 여러 학생들이 이를 암기하는 데에 매달리게 되고, 《오경정의》 이외의 다른 주와 의소는 잊혀지면서 결과적으로는 당대 경학이 정체되고 학문의 고정화를 불러왔다는 문제점이 있다.
《오경정의》에서 대상으로 하는 주와 저본은 다음과 같다.
4. 편찬자
공영달(孔穎達)이 중심이 되어 『오경정의(五経正義)』 편찬을 맡았으나, 각 정의의 서문에는 편집에 협력한 사람들의 목록이 첨부되어 있다[3]。
그 외에 안사고(顔師古)도 편찬에 관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관정요(貞観政要)』와 『구당서(旧唐書)』 공영달전에는 안사고가 『정의』 편찬에 참여했다고 나와 있지만, 『정의』 서문에는 안사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3]。
5. 영향 및 평가
유교 경전을 연구하는 경학(經學)에서 한(漢), 위(魏) 시대가 본문인 「경」(經)에 대한 「주」(注)의 시대였다면,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는 그 「주」에 대한 「의소」(義疏)의 학문이 성행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남조와 북조에서 각각 지지하는 설이 달라 의견이 분분했다. 태종은 유교의 성대함을 과시하고 남북의 여러 학설을 통일하고자 공영달 등 많은 유학자들을 동원하여 「오경의훈」(五経義訓, 훗날의 정의正義)를 짓게 했다. 이는 역경(易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5경의 해석을 중심으로 한(漢) 이래의 고전 해석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남북조의 여러 학설을 통일한다는 본래 의도에서 그치지 않고 옛 남조(南朝) 지역의 남인(南人)들이 받들던 주・소를 많이 채용하였다.
남송 시대에 들어서면서 경(經)과 주(注)가 합각(合刻)되어, 『십삼경주소』에 수록되었다.
5. 1. 부정적 영향
《오경정의》는 5경의 해석을 통일하기 위한 것으로 한나라 이래 훈고학의 총결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거에 응시하는 여러 학생들이 이를 암기하는 데에만 매달리게 되고, 《오경정의》 이외의 다른 주와 의소는 잊혀지면서 결과적으로는 당대 경학이 정체되고 학문의 고정화를 불러왔다는 문제점이 있다.[3] 국가적인 사업에 의해 주소(注疏)가 제정됨으로써 전대(前代)까지의 학문이 집대성되어 하나의 성과가 제시된 것은 큰 의의가 있지만, 국가에 의한 해석 통일로 인해 과거 응시생들은 오로지 이것을 암기하는 데에만 몰두하게 되어 오히려 경학(經學)의 발전이 정체되었다는 측면도 있다.[4] 또한, 당대(唐代) 이전에 만들어진 다른 주(注)와 의소(義疏)의 대부분이 모습을 감추는 결과를 초래했다.[4]6. 한국으로의 전래 및 번역
송대(宋代)에는 경주(経注)와 합각하여 《십삼경주소》(十三経注疏)에 수록되었다. 한국에는 이 십삼경주소의 하나로써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각 정의의 번역본이 있으며, 2014년까지 《상서정의》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주역정의》는 1987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이정호가 번역 소개).
참조
[1]
서적
大抵南北所為章句,好尚互有不同。江左,周易則王輔嗣,尚書則孔安國,左傳則杜元凱。河洛,左傳則服子慎,尚書、周易則鄭康成。詩則並主於毛公,禮則同遵於鄭氏。南人約簡,得其英華;北學深蕪,窮其枝葉。考其終始,要其會歸,其立身成名,殊方同致矣。
北史
[2]
서적
"太宗又以經籍去聖久遠,文字多訛謬,詔前中書侍郎顏師古考定五經,頒於天下,命學者習焉。又以儒學多門,章句繁雜,詔國子祭酒孔穎達與諸儒撰定五經義疏,凡一百七十卷,名曰五經正義,令天下傳習。初,穎達與顏師古、司馬才章、王恭、王琰受詔撰五經義訓凡百餘篇,號義贊,詔改為正義云。"
『舊唐書』儒學傳上, 『新唐書』孔穎達傳
[3]
논문
唐五經正義撰定考―毛詩正義硏究之一―
[4]
서적
Gokyō seigi no kenkyū : sono seiritsu to tenkai
https://www.worldcat[...]
Kenbun Shuppan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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