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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카 도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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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다카 도모오는 대한제국 부산에서 태어난 일본의 법철학자이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형과 함께 도쿄사회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 경성제국대학 및 도쿄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한스 켈젠, 에드문트 후설 등과 교류하며 법철학 연구에 매진했다.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법철학 전공자로 평가받으며, 국민주권과 천황제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저서로는 『국가구조론』, 『실정법질서론』 등이 있으며, 1956년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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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카 도모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6년의 오다카 도모오
1956년
이름오다카 도모오
원어 이름尾高朝雄 (おだかともお)
출생일1899년 1월 28일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남도 부산광역시
사망일1956년 5월 15일
사망지일본 도쿄도 분쿄구
사망 원인페니실린 쇼크
거주지일본 도쿄도 분쿄구
국적일본
부모아버지: 오다카 지로 (은행가)
어머니: 오다카 후미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딸)
배우자알려진 정보 없음
자녀구루쓰 모토코 (도쿄 여학관 단기대학 학장)
학력
출신 학교도쿄 제국대학
교토 제국대학
학위법학박사 (도쿄 제국대학, 1936년)
박사 과정 지도 교원알려진 정보 없음
기타 지도 교원다나베 하지메
니시다 기타로
박사 과정 지도 학생이노우에 시게루
고바야시 나오키
아오미 준이치
경력
연구 기관게이조 제국대학
도쿄 대학
직업학자
연구 분야법철학
시대알려진 정보 없음
활동 지역알려진 정보 없음
학파알려진 정보 없음
주요 업적알려진 정보 없음
주요 저작『국가 구조론』
『실정법 질서론』
『법의 궁극에 있는 것』
『법철학』
『국민 주권과 천황제』
특기할 개념노모스 주권
영향을 받은 인물한스 켈젠
에드문트 후설
영향을 준 인물알려진 정보 없음
학회일본 법철학회
칭호도쿄 대학 명예 교수, 일본 학사원 회원
주요 수상 경력알려진 정보 없음

2. 경력

오다카 도모오는 한학자이자 은행가였던 오다카 지로의 셋째 아들로 대한제국 부산시에서 태어났다.[1] 1916년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중학교(현 쓰쿠바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일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외교관을 지망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에 진학하여 졸업 후 대학원에서 철학을 연구했다. 교토제국대학에서 니시다 기타로, 요네다 쇼타로에게 배웠다.

1927년 형 오다카 호사쿠와 함께 도쿄사회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2] 이후 법철학 연구자로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나 도쿄대학 법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1928년부터 약 3년 반 동안 구미에 유학하여 한스 켈젠에게서 국가학을, 에드문트 후설에게서 현상학을 배웠다. 알프레트 슈츠 등과 교류했다.

오다카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법철학 전공자로 불린다.[3] 한스 켈젠과 친분이 두터웠고, 켈젠은 오다카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4] 켈젠이 나치에 의해 독일에서 쫓겨났을 때, 경성제국대학에 초빙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5]

1947년 노모스 주권론을 제창하고, 미야자와 도시요시와 논쟁했다. 1952년 유네스코 총회에 일본 정부 대표로 참석했다. 1956년 페니실린 주사로 쇼크를 일으켜 사망했다.

오다카 도모오의 학력 및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내용
1919년제일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입학
1923년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교토제국대학 입학
1926년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졸업, 대학원 진학
1928년교토제국대학 대학원 퇴학,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교수
1930년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
1944년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교수
1956년사망


2. 1. 주요 활동

한학자이자 은행가였던 오다카 지로(尾高次郎)의 셋째 아들로 대한제국 부산시에서 태어났다.[1] 1916년에 도쿄고등사범학교 부속중학교(현 쓰쿠바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제일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처음에는 외교관을 지망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에 진학하여, 문학부 졸업 후 대학원에서 철학을 연구했다. 교토제국대학에서는 니시다 기타로, 요네다 쇼타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27년 형 오다카 호사쿠와 함께 도쿄사회과학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으로 오쓰카 긴노스케, 상무이사로 다나베 스케토시, 연구원으로 스기모토 에이이치, 다카시마 젠야를 초빙했다.[2]

이후 법철학 연구자로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도쿄 대학 법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1928년 11월 13일 경성제국대학 조교수 신분으로 정부 장학금을 받아 약 3년 반 동안 구미에 유학하여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에 체류했다. 특히 에서는 한스 켈젠에게서 국가학을, 프라이부르크에서는 에드문트 후설에게서 현상학을 배웠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열었던 세미나(연구회)에도 참가했으며, 알프레트 슈츠 등과 교류했다.

당시 호즈미 시게토오, 마키노 에이이치, 다나카 고타로법철학(법리학)에 정통한 연구자가 있었으나, 모두 실정법 연구자이자 법학부 출신으로 법철학을 전공한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오다카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법철학 전공자로 불린다.[3]

많은 일본인을 지도한 한스 켈젠과 특히 친분이 두터웠고, 켈젠은 오다카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4] 오다카는 켈젠이 나치에 의해 독일에서 쫓겨났을 때, 동료이자 켈젠에게서 배운 헌법학자 기요미야 시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에 초빙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5]

1947년 『국민주권과 천황제』에 게재된 논문 「국민주권과 천황제」에서 노모스 주권론을 제창하고, 미야자와 도시요시와 논쟁했으나(오다카·미야자와 논쟁), 노모스 주권론은 헌법해석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52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7차 유네스코 총회에 일본 정부 대표로 참석했다.

1956년 치아 치료 중 페니실린 주사로 쇼크 증상을 일으켜 도립 고마고메 병원에 입원 후 사망했다. 오다카의 죽음으로 페니실린에 의한 약해가 페니실린 쇼크로 사회 문제화되었고, 약의 쇼크사가 인식되게 되었다. 일본의 약해 문제 초기 사례로도 유명하다.

3. 가계

오다카 지로의 삼남으로 대한제국 부산시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한학자이자 은행가였으며, 할아버지는 오다카 신고로 준추로 민영 도미오카 제사 공장 소장을 역임한 식산가(殖産家)였다. 외할아버지는 실업가이자 자작시부사와 에이이치이다.

의붓 백부는 법학자 호즈미 노부시게(아내 호즈미 우타코가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딸)이며, 호즈미 시게토는 사촌 형으로 법철학의 선구자이다. 고모 오다카 유는 도미오카 제사 공장 전습 공녀 제1호로 유명하다.

형제로는 향토 교육가 오다카 호사쿠, 오카와 헤이잔부로의 양자가 된 제지 실업가 오카와 테쓰오, 요절한 미술 연구자 오다카 센노스케, 사회학자 오다카 구니오, 지휘자 오다카 나오타다가 있다.

아내 사키코는 국문학자 하가 야이치의 넷째 딸이다.[6] 사키코의 언니 남편은 호즈미 신로쿠로로, 호즈미 노부시게·우타코 부부의 넷째 아들이자 아사오의 사촌 형이다. 딸은 구루토 시게코(전 도쿄 여학관 단기대학 학장)이다.

4. 사상

오다카 도모오는 한학자이자 은행가였던 오다카 지로의 삼남으로, 대한제국 부산에서 태어났다.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중학교, 제일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에서 철학을 연구했으며, 니시다 기타로, 요네다 쇼타로에게 지도를 받았다.

1927년 형 오다카 호사쿠와 함께 도쿄사회과학연구소를 설립하여, 오쓰카 긴노스케, 다나베 스케토시, 스기모토 에이이치, 다카시마 젠야 등을 초빙했다.

1952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7차 유네스코 총회에 일본 정부 대표로 참석했다.

1956년 치아 치료 중 페니실린 주사로 인한 쇼크로 사망했다. 오다카의 죽음은 페니실린 쇼크를 사회 문제화하여, 약물로 인한 쇼크사의 위험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일본에서 약물 피해 문제의 초기 사례로도 유명하다.

4. 1. 법철학 연구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 및 도쿄 대학법학부교수를 역임했다. 1928년 11월 13일부터 약 3년 반 동안, 정부의 장학금으로 구미에 유학하여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에 체류했다.[2] 특히 에서는 한스 켈젠 아래에서 국가학을, 프라이부르크에서는 에드문트 후설 아래에서 현상학을 배웠다. 또한,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열었던 세미나(연구회)에도 참여했으며, 알프레드 슈츠 등과 교류했다.[2]

당시 호즈미 시게토, 마키노 에이이치, 다나카 고타로법철학 (법리학)에 정통한 연구자가 있었으나, 모두 실정법 연구자로 법학부 출신이었고 법철학 전공자는 극히 드물었다. 오다카는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법철학 전공자로 불린다.[3]

한스 켈젠과의 친교는 특히 두터웠고, 켈젠은 오다카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4] 오다카는 켈젠이 나치에 의해 독일에서 쫓겨났을 때, 동료이자 켈젠에게 배운 헌법학자 키요미야 시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에 초빙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5]

1947년 『국민주권과 천황제』에 게재된 논문 "국민주권과 천황제"에서 노모스 주권론을 제창하여, 미야자와 토시요시와 논쟁(오다카·미야자와 논쟁)했으나, 노모스 주권론은 헌법 해석 영역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

5. 저작

오다카 도모오의 대표적인 저서는 『국가구조론』과 『실정법질서론』이다. 특히 『국가구조론』은 세미야 시로에게 "세계적 업적"이라고 평가받았다[7]. 『국가구조론』은 법의 입체 구조, 법의 효력 및 그 근거 등 법의 본질적인 분석에 중점을 두었으며, 『실정법질서론』은 이러한 문제들을 종합하고 체계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4].


  • 『국가구조론』(이와나미 서점, 1936년)
  • 『실정법질서론』(이와나미 서점, 1942년)
  • 『사회 단체론의 기초』(비엔나 체류 중에 독일어로 출판, 1932년)
  • 『법의 궁극에 있는 것 신판』(유히카쿠, 1956년, 초판 1947년), 온디맨드판 2012년
  • 『법의 궁극에 있는 것에 대한 재론』(게이소 서방, 1949년)
  • 법철학개론』(일본 평론사, 1949년/가쿠세이샤, 1953년)
  • 『수의 정치와 이의 정치』(도카이 서방, 1949년)
  • 『법학개론』(유히카쿠 전서, 1950년), 온디맨드판 2013년
  • 『자유론』(게이소 서방, 1952년). 신판·로고스사, 2006년
  • 『법철학』(게이소 서방, 1956년, 신판 1971년)
  • 『천황제의 국 민주권과 노모스 주권론 정치의 궁극은 힘인가 이념인가』(쇼시 신스이, 2014년)
  • 『노모스 주권으로의 법철학 법의 궁극에 있는 것 법의 궁극에 있는 것에 대한 재론 수의 정치와 이의 정치』(쇼시 신스이, 2017년)
  • 『자유·상대주의·자연법 현대 법철학에서의 인권 사상과 국제 민주주의』(쇼시 신스이, 2018년)
  • 『실정법질서론』(쇼시 신스이, 2019년)
  • 『법과 세상의 사실과의 어긋남』(쇼시 신스이, 2019년)
  • 『법 사상이란 무엇인가 법 사상을 법이나 법학이나 법철학과 구별하는 의미』(쇼시 신스이, 2021년)
  • 『국 민주권과 천황제』(고단샤 학술 문고, 2019년). 해설 이시카와 겐지 ISBN 4065162718

6. 문하생

오다카 도모오의 문하에는 다음과 같은 학자들이 있다.

이름소속
이노우에 시게루오차노미즈 여자 대학교 교수
고바야시 나오키도쿄 대학교 교수
헤키카이 준이치도쿄 대학교 교수
아난 세이이치오사카 시립 대학교 교수
야자키 미츠쿠니오사카 대학교 교수
마츠오 케이이치고베 대학교 교수
마츠시타 테루오고베 대학교 교수
히라노 치카오나고야 대학교 교수


참조

[1] 논문 尾高朝雄と植民地朝鮮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2013-03-29
[2] 웹사이트 「東京社会科学研究所の社会実験」 https://oisr-org.ws.[...]
[3] 서적 尾高朝雄先生と若き学徒たち
[4] 뉴스 尾高朝潮教授の死を悼む
[5] 서적 ハンス・ケルゼン
[6] 간행물 昭和十一年度版 帝国人事大鑑 帝国日日通信社 1935
[7] 서적 統治のヒストリー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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