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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즈미 시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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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즈미 시게토는 1883년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교수로 재직하며 가족법의 권위자로 활동했다. 1944년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1945년에는 궁내청 동궁대부 겸 동궁시종장을 역임하며 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1949년 최고 재판관이 되었으나 1951년 사망했다. 그는 사회 개혁 활동과 교육에도 힘썼으며, 저서로 『전쟁과 계약』, 『친족법 대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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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즈미 시게토
기본 정보
사람 이름호즈미 시게토
원어 이름穂積重遠 (ほづみ しげとお)
국적일본
출생일1883년 4월 11일
출생지도쿄부 (현 도쿄도)
사망지도쿄도 분쿄구
출신 학교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현 도쿄 대학 법학부)
배우자호즈미 나카
경력
전 직업제국학사원 회원
현 직업최고재판소 재판관
작위 및 훈장훈1등 욱일대수장
직책귀족원 의원
임명일1944년 7월 22일
퇴임일1945년 8월 28일
가계
조부시부사와 에이이치 (귀족원 의원)
숙부사카타니 요시로 (대장대신)
숙부호즈미 야쓰카 (귀족원 의원)
부친호즈미 노부시게 (추밀원 의장)
장인고다마 겐타로 (문부대신)
동생호즈미 신로쿠로 (참의원 의원)
처남고다마 히데오 (문부대신)
처남고다마 규이치 (히로시마현 지사)
처남기토 고이치 (내무대신)
인척이시구로 다다쓰구 (농상대신)
종제사카타니 기이치 (귀족원 의원)
종제시부사와 게이조 (대장대신)
작위
작위호즈미 남작가 당주
기간1926년 ~ 1947년
대수2대

2. 생애

1908년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동시에 강사로 채용되었다. 1910년에는 조교수로 승진했고, 1912년부터 1916년까지 유럽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1916년에 교수가 되었으며, 가족법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1917년에는 도쿄 제국대학 총장의 추천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5]

1926년 아버지 호즈미 노부시게가 사망하자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1937년 제국학사원 회원이 되었고, 1944년에는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45년 사임했다.[14]

1945년 동궁대부 겸 동궁시종장에 임명되어 황태자 교육을 담당했다. 1949년에는 최고재판소 재판관으로 임명되어 1951년까지 재임했다. 재임 중 형법 200조에 대해 위헌이라는 소수 의견을 냈는데, 이는 훗날 1973년 대법정 판결에서 위헌으로 판결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12]

1951년 1월 1일, 병으로 쓰러졌고, 같은 해 7월 29일 도쿄대학 부속 병원에서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묘소는 야나카 영원에 있다.

2. 1. 가계와 유년 시절

아버지 호즈미 노부시게.


1883년 4월 11일, 호즈미 노부시게의 장남으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딸 우타코였다. 시부사와 에이이치에게는 첫 손자였다.

아내는 고다마 겐타로의 셋째 딸 나카였다. 서양사학자이자 다이토 문화 대학 총장을 역임한 호즈미 시게유키는 장남, 국문학자인 이와사 미요코는 딸이다. 딸 와카코의 남편은 야소시마 요시노스케이다.

조부 시부사와 에이이치


어린 시절, 조부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영향으로 논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후에 그와 관련된 저서도 있다. 대학 시절 우노 테츠토가 가정교사였는데, 가정적인 논어 강좌를 했다고 한다.[3] 도쿄고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현・쓰쿠바대학 부속 소학교), 동 부속 중학교(현・쓰쿠바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 시절에는 하토야마 히데오나 스기무라 요타로와 친했다. 성적도 우수했지만, 유도에 열심이었으며, 한겨울 훈련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음악에도 관심이 있었다. 제1고등학교 시절에는 교가를 작사했으며, 그 "미야코의 하늘에"는 후에 학도 출진 때 불리게 된다. 1902년, 모교인 도쿄 고사 부속 중학교의 교가 "등음회 회가"의 제정을 제창했다.

도쿄 대학 시대에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민법과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의 훈계는 "공부 진도에 너무 앞서지 말 것, 불규칙한 공부를 하지 말 것, 공부하며 밤을 새지 말 것, 매일 게으름 피우지 말고 공부할 것"[3]이라고 한다. 하토야마 히데오는 최우등생으로 소개되었고, 시게토는 대학의 쌍벽으로 언급되었다. 이 두 사람은 대학에 남게 된다. 졸업 당시 전자는 92점, 시게토는 90점이었다. 또한, 대학 시절 취미는 "관극", "유도", "수영", "도보"였다. 도보는 등산을 의미했다[4]

2. 2. 학창 시절



어린 시절, 조부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영향으로 논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훗날 논어와 관련된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대학 시절에는 우노 테츠토가 가정교사였는데,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논어 강좌를 했다고 한다. 도쿄고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현 쓰쿠바대학 부속 소학교), 도쿄고등사범학교 부속 중학교(현 쓰쿠바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 시절에는 하토야마 히데오, 스기무라 요타로와 친하게 지냈다. 성적이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유도에도 열심이어서, 한겨울 훈련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음악에도 관심이 있어, 제1고등학교 시절 교가를 작사했으며, 그가 작사한 "미야코의 하늘에"는 훗날 학도 출진 때 불리게 된다. 1902년에는 모교인 도쿄 고사 부속 중학교의 교가 "등음회 회가" 제정을 제창했다.

도쿄 대학 시대에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민법과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버지의 훈계로는 "공부 진도에 너무 앞서지 말 것, 불규칙한 공부를 하지 말 것, 공부하며 밤을 새우지 말 것, 매일 게으름 피우지 말고 공부할 것"[3]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하토야마 히데오는 최우등생으로, 호즈미 시게토는 대학의 쌍벽으로 언급되었으며, 이 둘은 함께 대학에 남게 된다. 졸업 당시 하토야마 히데오는 92점, 호즈미 시게토는 90점을 받았다. 대학 시절 취미는 "관극", "유도", "수영", "도보"(등산을 의미)[4]였다고 한다.

연도내용
1894년고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현 쓰쿠바대학 부속 소학교) 졸업
1901년고등사범학교 부속 중학교(현 쓰쿠바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 졸업
1904년구제 제1고등학교 졸업
1908년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2. 3. 학자 및 교육자로서의 활동

1908년 도쿄 제국대학 졸업과 동시에 같은 대학 강사로 채용되었다. 독일법 원서 강독을 담당했는데, 학생 중에는 훗날 동료가 되는 젊은 날의 다나카 고타로가 포함되어 있었다. 1910년 3월에는 조교수로 승진했으며, 1912년 7월에는 구미 유학 명령이 내려졌다.[5]

1912년 10월 24일 도쿄를 출발하여 1916년 2월 22일 귀국할 때까지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을 방문하여 법학과 사회 사업을 관찰하였다. 특히 독일과 미국에서 학생 생활을 경험하고 사회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다.[5] 유학 시절 연구로는 『전쟁과 계약』이 있다. 민법 이외의 연구는 적지만, 장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미일 개전 시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에 대한 실제적인 이익도 언급하고 있다.

일본에 머물던 아내가 보낸 신문 기사를 바탕으로 『혼인 예약 판결의 진정한 의미』라는 연구를 발표했다. 「페미니즘」 등을 집필했지만, 「부인 문제 강화」는 여성 권리 확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 외에 법리학 대강과 친족법 대의라는 교과서를 썼다. 그는 그 후 「법리학」 연구에서 벗어났다. 『이혼 제도 연구』는 9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이다. 잡지 『개조』에 쓴 「삼가리반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쓴 연구이다. 이 책은 이혼법 연구의 고전이 되었다.

도쿄 대학 세틀먼트는 사회 사업 중 하나였지만, 그는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강연과 하계 대학에 힘썼다. 여행지에서도 강연을 하여, 우와지마, 가고시마, 조선, 만주, 사할린, 마쓰에 등에서 강연했다. 또한 여성 법률가 육성에 힘썼고, 메이지 대학 여자부 창설에 기여했다. 1929년부터 메이지 대학 전문부에 여자부가 개설되었다. 입학자는 150명이었지만, 1932년에 졸업한 것은 54명이었다. 1936년부터 고등문관 시험 사법과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지만, 1938년에 처음으로 여성 3명이 합격했다.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이전부터 라디오 강연을 했다. 현재 레코드를 들어봐도, 절묘한 간격이며, 미성은 듣기 좋게 울려 퍼진다고 한다.

1916년 구미 유학 후, 교수가 되었다. 가족법의 권위자였다. 1917년 도쿄 제국대학 총장의 추천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5]

2. 4. 유럽 유학

1912년 7월, 구미 유학 명령이 내려졌다.[5] 같은 해 10월 24일 도쿄를 출발하여 12월 16일 독일 본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먼저 유학 와 있던 하토야마 히데오가 마중 나왔다. 호즈미 시게토는 강의를 듣는 것 외에도 독일 부인에게 독일어와 댄스를 배웠다. 이듬해 4월에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형사 박물관", "동방 문화 연구소", "유년 재판소", "유년자 구호회", "소아 식당", 페스탈로치·프뢰벨관 등을 시찰했다. 1914년 5월 31일까지 베를린에 체류했으며, 6월에는 파리로 거처를 옮겨 사회 견학에 힘썼다.[5]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1914년 8월 16일에 파리에서 런던으로 이주했다. 런던에서는 재판소, 배심원이 있는 "아마추어 재판소"를 견학했다. 1915년 11월 3일 증기선으로 런던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주로 하버드 대학교가 있는 케임브리지에서 보냈다. 그는 판례를 소재로 한 문답식 수업 방식에 흥미를 가졌다. 1916년 1월 11일, 케임브리지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2월 22일에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유학의 성과로는 첫째, 저서 "전쟁과 계약"이 꼽히지만, 독일과 미국에서 학생 생활을 경험한 것, 사회 사업을 관찰한 것, 사회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 부인 문제 등도 언급했다.[5]

2. 5. 사회 개혁 활동

호즈미 시게토는 민법 개정 요강 작성을 위해 친족, 상속편에 대한 다양한 조사를 제안했다. 히라츠카 라이초, 다카무레 이츠에 등 여성 운동가들을 지원했다. 또한 변호사법 개정(1933년)에 힘써 성별 조건을 없앴으며, "아동학대방지법"(1933년)을 제정했으나 전후 아동복지법에 흡수되었다. 관동 대지진 당시 도쿄에 있었던 그는 무사히 대피 후, 친척과 친족의 안전을 확인하고 대학으로 향했다. 학생 증언에 따르면, 호즈미 시게토는 정보국을 설치하고 지도했다. 구호 활동 중 "제도(帝都) 지진 화재 계통 지도"가 만들어졌다. 지진 이후 차지(借地), 차가(借家) 조정 문제로 인해 차지차가 조정법이 생겨, 니혼바시구의 조정을 담당했다. 가와가 토요히코 등은 우에노에 세틀먼트를 만들어 법률 상담을 적극적으로 맡았다. 호즈미 시게토는 인정과 법학적으로 부드럽게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며, 상식적인 அணுக방식을 취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틀먼트 내 창가 지도에 대해 "이러한 평화롭고 한가로운 기분 좋은 일은 호즈미 선생의 인품의 영향일 것이다"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세틀먼트는 좌익화되어 1938년 관계 학생들이 경시청특고부에 출두를 명받았고, 당사자 승인을 얻어 해산되었다.

2. 6. 관동 대지진 이후의 활동

관동 대지진 당시 도쿄에 있었으며 무사했지만, 친척과 친족의 무사를 확인하고 대학으로 향했다. 학생의 증언에 따르면, 시게토도 와서 정보국이 생겨 지도했다고 한다. 구호 활동 중에서 "제도(帝都) 지진 화재 계통 지도"가 만들어졌다. 지진 이후의 차지(借地), 차가(借家) 조정 문제로 인해 차지차가 조정법이 생겨, 니혼바시구의 조정을 담당했다.[1] 가와가 토요히코 등은 우에노에 세틀먼트를 만들어 법률 상담을 적극적으로 맡았다. 그는 인정과 법학적으로 부드럽게 감싸는 쪽으로, 상식적으로 했던 것 같다는 기록이 있다.[1] 세틀먼트 안에 창가 지도라는 것이 있어, "이러한 평화롭고 한가로운 기분 좋은 일은 호즈미 선생의 인품의 영향일 것이다"라는 말도 있다.[1] 그러나 세틀먼트는 좌익화되어, 1938년에는 관계 학생이 경시청특고부에 출두를 명받아, 당사자의 승인을 얻어 해산했다.[1]

2. 7. 사회 교육 협회 설립

1925년 고마쓰 겐스케 등이 사회교육협회를 설립했고, 호즈미 시게토가 이사장을 맡았다. 이 협회는 출판과 강연을 주로 담당했다. 또한 도쿄 가정학원이라는 특수학교를 세웠는데, 이는 하쿠바이 보모학원을 거쳐 현재의 학교법인 하쿠바이 학원(하쿠바이 학원 대학 참조)으로 발전했다. 하쿠바이 학원은 대학원, 대학교, 단기대학, 고등학교, 중학교(고등학교 일관제), 유치원을 갖추고 있다. 시게토는 1945년 8월까지 이사장으로 있었고, 사망할 때까지 회장직을 수행했다.[8]

2. 8.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장 시절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호즈미 시게토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장을 세 차례(1930년-1933년, 1936년-1937년, 1939년-1942년) 역임했다. 오다무라 사건 처리 외에 경제학부 내분에서 비롯된 히라가 숙학에도 직면했으며, 교토 제국대학의 타키가와 사건, 기원 2600년 사업, 신체제 운동, 학도 출진 등 난제가 있었다.

2. 9. 궁내청 동궁대부 겸 동궁시종장

1945년 8월, 동궁 대부 겸 동궁 시종장에 취임했다. 이는 차녀 미요코가 4세 때부터 테루노미야의 학우였던 인연 때문이었다고 한다. 1933년 무렵부터 황후, 황태후에게 진강했으며, 1936년에는 강서시에서 "기르케 저 독일 단체법론"에 대해 진강하기도 했다. 동궁 시종장 인사와 관련하여 1945년 8월 7일 키도 코이치 내대신쇼와 천황에게 내주했을 때, 천황은 "호즈미라면 시게토인가, 그라면 괜찮다"라고 말했다. 닛코에 소개(疎開)했던 황태자를 방문하여 종전을 맞이했는데, 당시의 일기가 남아 있다. 황태자의 귀경에는 3개월이 걸렸다. 황태자의 교육 기관인 어학문소 총재이자 동궁 어교육 참여관이기도 했다. 황태자의 가정교사로 엘리자베스 바이닝을 기용한 것은 호즈미를 거치지 않고 결정되었기 때문에, 바이닝과는 약간 어색한 관계였다. 종전 후, 영국 유학 시절을 떠올리며 "아와 킹"(Our King)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황태자에게 항상 "아와 킹"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압력이 있었고, 1949년 2월 최고재판관으로 전출되었다. 재판관 임명 자문 위원회가 폐지된 후 첫 최고재판관 탄생이었다. 대신 동궁 어교육 참여관이 된 것은 고이즈미 신조였다[11]

2. 10. 최고재판소 재판관

1949년 재판관 임명 자문 위원회가 폐지된 후 처음으로 최고재판소 재판관이 되었다. 데이진 사건 당시 친구의 특별 변호인이 된 적은 있었지만, 재판관은 처음이었다. 임기는 4년 정도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2년 정도 재임하였다. 재임 중, 요청에 의해 미국을 시찰하기도 했다. 최고재판소 재판관 시절 형법 200조에 대해 위헌이라는 소수 의견을 주장했다. (1950년 10월 11일(존속 상해 치사) 및 같은 해 10월 25일(존속살) 판결).

호즈미 시게토는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는 것은 새 헌법 하에서도 변하지 않지만, 나폴레옹 법전의 "자식은 나이에 관계없이 부모를 존경해야 한다"는 조항과 살친죄 중벌 규정을 통해 효도를 강제하려는 것은 법률의 한계를 넘어서는 법률 만능 사상이며, 오히려 효도의 미덕을 해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2] 그의 사후, 형법 200조는 1973년 4월 4일 대법정 판결에 의해 위헌으로 판결되었고, 1995년에 정식으로 삭제되었다.

1951년까지 재판관으로 재임했으며, 취임 후 중의원 의원 총선거 공시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최고재판소 재판관 국민심사는 받지 않았다.

2. 11. 사망

1951년 7월 29일, 만 68세(향년 69세)로 사망했다.

3. 평가

호즈미 시게토는 여권 신장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여자를 좋아한다는 비꼼을 받기도 했다. 유학 시절에 작성한 『영독 관극 일기』에는 미우라 타마키의 마담 버터플라이에 점점 이끌렸다고 적혀 있다. 이는 미우라 타마키가 독일에서 전화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하여 성공을 거두고, 미국 보스턴에서 오페라 『나비 부인』을 공연하여 일세를 풍미한 발자취를 따라 호즈미도 영국을 경유하여 보스턴에 이른 것을 말한다. 1942년 비상시에 이 책을 간행한 것에 대해 도호의 시부사와 사장으로부터 요구가 있었다고 하는데, 오무라 아쓰시는 비상시이기 때문에 여유를 가지려 한 것이라고 보았다. 전후에 출판한 『가부키 추억담』에는 2대 이치카와 사단지를 편애했던 내용 등이 적혀 있다.

호즈미 시게토는 고금의 백인일수를 수집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또한 오래된 센류나 웃긴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강연에 응용하기도 했다. 와카를 읊기도 했으며, 자유화, 통속 문학, 조선 문화, 성경, 프랑스어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10]

4. 가족 관계

구분내용
아버지호즈미 노부시게
어머니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딸 우타코
아내고다마 겐타로의 셋째 딸 나카
장남서양사학자, 다이토 문화 대학 총장 역임 호즈미 시게유키
국문학자 이와사 미요코
사위야소시마 요시노스케 (와카코의 남편)
둘째 동생사다미 (요절)
셋째 동생해군 기술 장교, 조선 소장 율지
막내 동생조선총독부 식민지 관료, 신의주 세무국장, 식산국장 역임 신로쿠로


5. 저서


  • 戦争と契約일본어 (유비각 서방, 1916년)
  • 親族法일본어 대의 (이와나미 서점, 1917년)
  • 법학 대강 (이와나미 서점, 1917년)
  • 국제 정신의 발현 그로티우스의 국제법학과 안데르센의 국제시 계량 (시모데 서점, 1921년)
  • 민법 총론 (유비각, 1921년)
  • 상속법 대의 (이와나미 서점, 1922년)
  • 離婚制度の研究일본어 (개조사, 1924년)
  • 민법 독본 (일본 평론사, 1927년)
  • 남자 정조의 새로운 의무 (확청회 부인 교풍회 연합 사무소, 1928년) 요코타 히데오 공저
  • 채권 각론 및 담보 물권법 (유비각, 1928년)
  • 아버지를 말하다 해변에서의 추억 (호즈미 시게토, 1929년)
  • 부인 문제 강화 (사회 교육 협회, 1930년)
  • 판례 백화 (일본 평론사, 1932년)
  • 親族法일본어 (이와나미 서점, 1933년)
  • 유한 법학 (일본 평론사, 1934년)
  • 심학 도화에 관하여 (교토 경제회, 1935년)
  • 일본의 과거·현재 및 미래 (교와 서원, 1935년)
  • 결혼훈 (주오코론샤, 1941년)
  • 이혼장과 연절사 (일본 평론사, 1942년)
  • 독일·영국 관극 일기 (도호 서점, 1942년)
  • 오인조와 대동아 공영권 (계명회, 1943년)
  • 법학 통론 (일본 평론사, 1944년)
  • 전후 여성훈 (연구사, 1945년)
  • 신역 논어 (사회 교육 협회, 1947년). 고단샤 학술 문고, 1981년
  • 우리들의 민법 (사회 교육 협회, 1948년)
  • 신역 맹자 (사회 교육 협회, 1948년). 고단샤, 학술 문고, 1980년
  • 가부키 추억 이야기 (오코치 서점, 1948년)
  • 신민법 독본 (일본 평론사, 1948년)
  • 우리들의 헌법 (사회 교육 협회, 1949년)
  • 우리들의 친족법·상속법 (법률의 광장사, 1950년)
  • 백만인의 법률학 (사색사, 1950년)
  • 결혼 독본 (주오코론샤, 1950년)
  • 법률 입문 (보문관, 1952년). 방송 독본: NHK 교양 대학
  • 속 유한 법학 (한알사, 1961년)
  • 구미 유학 일기 (이와나미 서점, 1997년). 호즈미 시게요키 편
  • 終戦前後日記 (1945~1950년) 다이쇼 시대의 법학자의 만년일본어 (유비각, 2012년). 오무라 아쓰시 교정 나고야 대학
  • 近代日本判例批評集 - 신편 판례 백화 / 유한 법학 / 속 유한 법학일본어 (서사 심수, 2024년)

참조

[1] 서적 貴族院要覧(丙) 貴族院事務局 1947-12
[2] 웹사이트 日本評論社編『日本の法学』62頁(日本評論社、1968) https://dl.ndl.go.jp[...] 2023-07-31
[3] 서적 優等学生勉強法 1911
[4] 인용 2013
[5] 인용 2013
[6] 인용 2013
[7] 인용 2013
[8] 인용 2013
[9] 인용 2013
[10] 인용 2013
[11] 인용 2013
[12] 인용 2013
[13] 인용 2013
[14] 간행물 官報 1945-09-05
[15] 간행물 官報 19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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