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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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숭은은 일제강점기 법조인으로, 평안북도 철산 출신이다. 일본 유학 후 판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하여 검사,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평양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1935년 사기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변호사 면허가 취소되었다. 광복 후 월남하여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친일파 김태석의 변호를 맡아 논란이 되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사법 부문으로 선정되었다.

오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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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제 강점기 활동

평안북도 철산군 출신이다.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전부터 일찍 일본어를 익혔고, 경성부 배재학당을 거친 뒤 1907년일본 도쿄에 유학했다.
1909년 3월 메이지 학원을 졸업하고 1916년 7월 판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해 법조인이 되었다.

1916년 10월 황해지방법원 서흥지청 검사로 임명되었고, 1920년 1월 판검사 임용시험에 합격한 후 6월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 검사에 임명되었고, 1921년 4월 평양지방법원 검사로 전임하였다. 1922년 7월부터 해주지방법원 검사를 지내다가 10월 정7위 서위되었고, 같은 달에 퇴직했다. 검사 생활은 약 2년 만에 그만두고 평양에 자리잡고 1922년 10월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평양 지역 유지로서 평양부회 의원을 두 차례 지냈고, 평남도회 민선의원으로도 당선되었다. 변호사로 근무하던 중인 1935년, 광산과 관련된 사기 독직 사건으로 장남과 함께 재판을 받았고,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결국 1937년 5월 변호사 면허는 취소되었다.

2.1. 초기 생애와 교육

오숭은은 평안북도 철산군의 부유한 상인 가정 출신이다. 어릴 적부터 일본어를 익혔으며, 경성부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7년 일본 도쿄로 유학했다. 1909년 3월, 메이지 학원을 졸업했다. 1916년 7월에는 판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하여 법조인이 되었다.

2.2. 법조인 활동

오숭은은 평안북도 철산군의 부유한 상인 가정 출신으로,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전부터 일본어를 익혔다. 경성부 배재학당을 거쳐 1907년 일본 도쿄에 유학, 1909년 3월 메이지 학원을 졸업했다. 1916년 7월 판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하여 법조인이 되었다.

1916년 10월 황해지방법원 서흥지청 검사로 임명되었고, 1920년 1월 판검사 임용시험에 합격한 후 6월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 검사에 임명되었다. 1921년 4월 평양지방법원 검사로 전임하였다. 1922년 7월부터 해주지방법원 검사를 지내다가 10월 정7위 서위되었고, 같은 달에 퇴직했다. 검사 생활은 약 2년 만에 그만두고 평양에 자리잡고 1922년 10월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평양 지역 유지로서 평양부회 의원을 두 차례 지냈고, 평남도회 민선의원으로도 당선되었다.

변호사로 근무하던 중인 1935년, 광산과 관련된 사기 독직 사건으로 장남과 함께 재판을 받았고,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결국 1937년 5월 변호사 면허는 취소되었다.

광복 후 월남하여 서울에서 변호사로 일하였으나, 서울대학교 교수로 대한민국 전자공학계의 선구자인 차남 오현위와 장녀 외에 대부분의 가족들은 평양에 남았다. 독립운동가 강우규를 체포한 일로 유명한 친일파 관료 김태석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를 맡았다. 변론 과정에서 오숭은은 김태석과 그의 반민행위를 지나치게 옹호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2.3. 친일 행적 논란

오숭은은 평안북도 철산군 출신의 법조인으로, 일제 강점기 동안 친일 행적 논란이 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전부터 일본어를 익혔고, 일본 도쿄에서 유학 후 판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하여 법조인이 되었다. 1922년 10월 평양에서 변호사로 개업한 후, 평양부회 의원을 두 차례 역임하고 평남도회 민선의원에 당선되는 등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1935년에는 광산 관련 사기 독직 사건으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았고, 1937년 5월에는 변호사 면허가 취소되었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된 친일파 관료 김태석의 변호를 맡아 그의 반민 행위를 옹호하여 물의를 빚었다. 오숭은 자신도 반민법 제5조 위반으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지인들의 진정서 제출과 반민특위의 입지 약화로 불기소 처분되었다. 지인들은 진정서를 통해 오숭은이 과거 친일파 선우순을 체포하려 했던 점과 북조선인민위원회 치하에서도 문제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석방을 촉구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오숭은이 일제 검사 출신으로 평남도회 의원 등에 자진 입후보하고, 변호사 자격 정지 후 군수품 공장을 운영하며 일제에 협조했으면서도 반성하지 않았다며 "악질적 친일분자"로 규정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사법 부문에 선정되었다.

3. 광복 후 활동

1945년 광복 후 월남하여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대한민국 전자공학계의 선구자인 차남 오현위와 장녀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족들은 평양에 남았다. 독립운동가 강우규를 체포한 일로 유명한 친일파 관료 김태석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를 맡았다. 변론 과정에서 오숭은은 김태석과 그의 반민행위를 지나치게 옹호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이후 오숭은도 반민법 제5조 위반으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다. 지인들은 연명으로 진정서를 제출하여, 오숭은이 평양지법 검사 시절 거물급 친일파 선우순을 체포하려다 해주로 좌천되었고, 친일 문제에 엄격했던 북조선인민위원회 치하에서도 1948년 월남할 때까지 문제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석방을 촉구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오숭은이 일제 검사 출신으로 평남도회 의원 등에 자진 입후보하고 변호사 자격 정지 후에는 군수품 공장을 운영하며 일제에 협조했으면서도 반성하는 태도가 없다는 점을 들어 "악질적 친일분자"로 규정지었다. 이후 반민특위의 입지가 흔들리면서 불기소 처분되어 처벌받지 않았다. 그 후 단국대학교 교수로 지냈으며 1967년메이지대학 동창회 고문을 지냈다.

3.1. 월남과 변호사 활동

오숭은은 1945년 광복 후 월남하여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대한민국 전자공학계의 선구자인 차남 오현위와 장녀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족들은 평양에 남았다. 독립운동가 강우규를 체포한 일로 유명한 친일파 관료 김태석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를 맡았다. 변론 과정에서 오숭은은 김태석과 그의 반민행위를 지나치게 옹호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3.2. 반민특위 관련 활동

오숭은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에 체포된 친일파 관료 김태석의 변호를 맡았다. 그는 변론 과정에서 김태석과 그의 반민행위를 지나치게 옹호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이후 오숭은도 반민법 제5조 위반으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다. 지인들은 연명으로 진정서를 제출하여, 오숭은이 평양지법 검사 시절 거물급 친일파 선우순을 체포하려다 해주로 좌천되었고, 친일 문제에 엄격했던 북조선인민위원회 치하에서도 1948년 월남할 때까지 문제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석방을 촉구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오숭은이 일제 검사 출신으로 평남도회 의원 등에 자진 입후보하고 변호사 자격 정지 후에는 군수품 공장을 운영하며 일제에 협조했으면서도 반성하는 태도가 없다는 점을 들어 "악질적 친일분자"로 규정지었다. 이후 반민특위의 입지가 흔들리면서 불기소 처분되어 처벌받지 않았다.

3.3. 교육 활동 및 기타

1967년메이지대학 동창회 고문을 지냈다. 단국대학교 교수로도 재직하였다.

4. 평가

5.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