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오슈총봉행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오슈 총봉행은 오슈 전투 이후 가마쿠라 막부가 무쓰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직책이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가사이 기요시게를 오슈 봉행으로 임명하여 히라이즈미 군의 검비위소 관리를 맡겼으며, 이자와 이에카게를 무쓰 국 유수직에 임명하여 권농, 재판, 국무 전반을 관장하게 했다. 오슈 총봉행은 가마쿠라 막부의 오슈 지배를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무사 정권 확립에 기여했으나, 겐큐 2년 막부 직제에 기재되지 않았고 그 후 큰 직권을 가진 오슈 봉행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으며 그 권한은 점차 축소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봉행 - 군함봉행
    군함봉행은 에도 막부 말기에 해안 방어, 군함 건조 및 관리, 해군 인력 양성 등의 임무를 수행하며 막부 해군력 강화에 기여한 해군 담당 직책으로, 외국과의 문제 처리도 담당했다.
  • 봉행 - 오봉행
    오봉행은 도요토미 정권의 행정 실무를 담당한 5명의 중신으로, 사법, 행정, 토목, 재정, 종교 분야를 분담하여 교토와 그 주변 지역을 통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 가마쿠라 막부의 직제 - 정이대장군
    정이대장군은 에미시 정벌을 위해 임명된 일본 열도 태평양 방면 군 통솔 직책으로, 무사 정권의 시작과 함께 쇼군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일본을 통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가마쿠라 막부의 직제 - 효조슈
    효조슈는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보좌 및 정책 결정을 위한 합의제 정치 기구로, 13인의 합의제에서 시작하여 호조 야스토키에 의해 제도화되었으나, 후기에는 유명무실해졌고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명예직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 도호쿠 지방의 역사 - 아테루이
    아테루이는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에미시 군사 지도자로, 789년 스부세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802년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에게 항복하여 처형되었으며, 대중문화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다.
  • 도호쿠 지방의 역사 - 무쓰국
    무쓰국은 일본 고대에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미치노오쿠"에서 유래하여 설치된 국으로, 데와국과 분리되어 넓은 지역을 관할하며 호족 세력의 번성, 무사 가문의 지배 시대를 거쳐 메이지 유신 이후 5개 국으로 분할되었다.
오슈총봉행
오슈 총봉행
설명오슈 지배를 위해 임명된 직책
임명 시기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주요 인물모가미 요시아키
다테 마사무네
가모 히데유키
우에스기 가게카쓰
나오에 가네쓰구
호리오 요시하루
모리 히데요리
마에다 도시이에
도요토미 히데쓰구
오다 노부카쓰
도쿠가와 이에야스
센고쿠 시대
배경무로마치 막부의 영향력 약화 및 슈고 다이묘의 대두
역할오슈 지역의 통치 및 군사적 지휘
주요 임무지역 다이묘들의 동향 감시
반란 진압
세금 징수
영지 분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역할 변화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오슈 지역 통치 강화
주요 임무영지 재분배 및 검지 (토지 조사) 실시
오슈 캇센 이후 다테 마사무네 감시
중앙 정권에 대한 충성 확보
에도 시대
역할 변화도쿠가와 막부 하에서 오슈 지역 통치 및 감찰
주요 임무지역 다이묘들의 동향 감시 (특히 다테 씨)
막부 직할령 통치
세금 징수 및 관리
치안 유지
오슈 총봉행의 영향
정치적 영향오슈 지역의 안정화 및 중앙 정권의 영향력 강화
경제적 영향세금 징수를 통한 막부 재정 확보
사회적 영향지역 다이묘들의 세력 약화 및 막부 권위 강화
같이 보기
관련 항목오슈
다테 씨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2. 오슈 총봉행의 설치 배경

2. 1. 단노우라 전투와 헤이케 멸망

2. 2.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요시쓰네의 대립

2. 3. 오슈 후지와라 씨 멸망과 오슈 전투

3. 오슈 총봉행의 설치와 초기 활동

요리토모는 오슈 전투 직후인 분지 5년(1189년) 9월 22일,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따르면, "무쓰국(陸奥国)의 고케닌의 일은 가사이 기요시게가 받들어 행할(奉行) 것이며, 참사(参仕)들은 기요시게를 따라 자세한 것을 아뢰라"고 명하였다.[1] 이것이 사료상 「오슈 봉행(奥州奉行)」이 나온 첫 사례이다.

요리토모는 큰 공을 세운 가사이 기요시게에게 「히라이즈미 군 내검비위소(平泉郡內檢非違所)」의 간레이(管領)직을 맡기며 "(이와이磐井) 군내의 여러 사람들의 방자한 행동을 그치게 하고 그 죄과를 규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3][4] 그러한 간레이로서의 권한은 히라이즈미 군의 검비위소를 중심으로 오슈에 영지를 하사받은 무사들 전체에 대한 검단권(경찰 및 재판권)으로 간주되며, 슈고가 설치되지 않은 무쓰 국에서는 슈고와 유사한 직권으로 여겨진다.[2]

아즈마카가미 같은 해 10월 26일조에는 기요시게가 '별도의 명령'에 따라 오슈의 여러 조목들을 지시하고 진정하기 위해서 그대로 현지에 머무른다는 기재가 있어,[1][3] 이 검단자에 대한 임명이 즉 오슈총봉행의 임명으로 간주되고 있다.[2]

분지 5년(1189년) 11월 8일조에는, 가사이 기요시게에게 '오슈에서 할 일'에 대한 명이 내려지고 있는데, 오슈의 전국 각지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어 다수의 병력이 체류하고 있고 백성들이 편안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빈민 구제를 위한 대책을 세울 것과 더불어, 히타치국에 사는 죽은 사타케 타로(佐竹太郞)의 아들들이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의 잔당들과 모반을 꾀하고 있으니 잡으러 나설 것, 즉 모반자 추포에 관한 것이었다.[1]

분지 6년(1190년) 3월, 관료형 고케닌이었던 이자와 이에카게가 무쓰 국 유수직에 임명되었다.[3] 미야기현 다가조시에 해당하는 미야기군의 다가노 고쿠후에 부임한 이에카게는 권농, 백성들의 소송 처리, 국무에 따르지 않는 자들에 대한 단속 등을 행하였다.[3] 이는 히라이즈미의 오슈 후지와라 씨가 행사하던 무쓰 고쿠후의 재청 지배권을 요리토모 정권이 이어받은 것을 의미한다.[2]

지난해 12월 데와국 북부(아키타현 지방)에서 일어난 오카와 가네토의 난 진압에 3개월이 소요되었는데, 이 난에 무쓰 국 유수소의 장관들이 가담했기 때문에 유수직 교체가 이루어졌다.[2] 이에카게의 유수직 임명은 오슈 총봉행 임명으로 간주되기도 한다.[2] 사료에 따르면, 요리토모는 "오슈(奧州)와 우슈(羽州) 땅 아래의 간레이(管領)"라고 불릴 권익을 부여받았고, 막부는 지행국주나 고쿠슈와는 별개로 고쿠가 기구를 움직여 양국의 행정권을 짊어질 근거를 획득했다.[5] 이에카게는 "가마쿠라도노(鎌倉殿)"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명에 따라 무쓰 고쿠가를 통제하고 국무 전반을 결정할 권한을 받았다.[6]

겐큐 연간(1190년~1198년)부터 이에카게는 미야기 군 이와기리(지금의 센다이시)에 이와기리 성을 쌓고 유슈 씨(留守氏)를 칭했다. 이자와 씨의 유수직 권한은 13세기 중반까지 인정되었지만, 무쓰의 막부 지행국제가 시작되면서 소멸했다.[2]

오슈총봉행은 오슈캇센의 전후 처리를 계기로 설치되었지만, 겐큐 2년(1191년) 정월 15일의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직제에는 기재되지 않았고, 그 후에도 큰 직권을 가진 '오슈 봉행'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8][9]

이자와 이에카게는 겐큐 4년(1193년)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헌상된 아와지국산 "아홉 발의 기이한 말"을 쓰가루소토가하마에 풀어놓고, 이듬해 6월 교토에서 가마쿠라로 압송된 죄수 몇 명을 오슈로 유배하는 등의 일 처리를 했는데, 이는 요리토모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겐큐 6년(1195년)에는 히라이즈미 사탑 수리와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 미망인 보호를 가사이 기요시게와 함께 명받았으며, 《아즈마카가미》 겐큐 6년 9월 3일 조 및 9월 29일 조에는 이자와 이에카게와 가사이 기요시게 두 사람이 이 임무를 맡은 것은 "오슈 총봉행으로서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6] 다만, 이는 가사이 씨의 "오슈 총봉행"으로서의 활동을 기록한 유일한 문헌 자료이다.[10]

가사이 기요시게는 오사와 가네토의 난 진압에서 일시적으로 무쓰 국 루스쇼(留守所)를 맡았다고는 하지만, 실제 진압 시에는 아시카가 요시카네나 지바 다네마사의 밑에서 싸웠으며, 일개 고케닌 이상의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다.[12] 또한, 가지와라 가게토키의 실각 이후에는 주로 가마쿠라의 쇼군 주변에서 활동하였고,[12] 가사이 기요시게의 자손은 계속해서 무쓰 국에 소령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역할은 무쓰 국에 소령을 가진 보통의 고케닌 이상의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13]

이에 반해, 오사와 가네토의 난 이후 무쓰 국 루스직에 임명된 이자와 이에카게는 권농권(勸農權)과 검단권(檢斷權)을 행사하고 있어, 이자와 이에카게야말로 명실상부 "오슈 총봉행"에 어울리는 존재였다는 견해도 있다.[14]

어쨌든 가사이 씨는 히라이즈미, 이자와(루스) 씨는 다가 성에 있던 기존 권력과의 관계에서 현지 지배를 진행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히라이즈미와 다가 성 두 곳은 특히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오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3]

3. 1. 가사이 기요시게의 임명과 역할

요리토모는 오슈 전투 직후인 분지 5년(1189년) 9월 22일, 아즈마카가미(吾妻鏡)에 따르면, "무쓰국(陸奥国)의 고케닌의 일은 가사이 기요시게가 받들어 행할(奉行) 것이며, 참사(参仕)들은 기요시게를 따라 자세한 것을 아뢰라"고 명하였다.[1] 이것이 사료상 「오슈 봉행(奥州奉行)」이 나온 첫 사례이다.

요리토모는 큰 공을 세운 가사이 기요시게에게 「히라이즈미 군 내검비위소(平泉郡內檢非違所)」의 간레이(管領)직을 맡기며 "(이와이磐井) 군내의 여러 사람들의 방자한 행동을 그치게 하고 그 죄과를 규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3][4] 그러한 간레이로서의 권한은 히라이즈미 군의 검비위소를 중심으로 오슈에 영지를 하사받은 무사들 전체에 대한 검단권(경찰 및 재판권)으로 간주되며, 슈고가 설치되지 않은 무쓰 국에서는 슈고와 유사한 직권으로 여겨진다.[2]

아즈마카가미 같은 해 10월 26일조에는 기요시게가 '별도의 명령'에 따라 오슈의 여러 조목들을 지시하고 진정하기 위해서 그대로 현지에 머무른다는 기재가 있어,[1][3] 이 검단자에 대한 임명이 즉 오슈총봉행의 임명으로 간주되고 있다.[2]

분지 5년(1189년) 11월 8일조에는, 가사이 기요시게에게 '오슈에서 할 일'에 대한 명이 내려지고 있는데, 오슈의 전국 각지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어 다수의 병력이 체류하고 있고 백성들이 편안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빈민 구제를 위한 대책을 세울 것과 더불어, 히타치국에 사는 죽은 사타케 타로(佐竹太郞)의 아들들이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의 잔당들과 모반을 꾀하고 있으니 잡으러 나설 것, 즉 모반자 추포에 관한 것이었다.[1]

3. 2. 이자와 이에카게의 임명과 역할

분지 6년(1190년) 3월, 관료형 고케닌이었던 이자와 이에카게가 무쓰 국 유수직에 임명되었다.[3] 미야기현 다가조시에 해당하는 미야기군의 다가노 고쿠후에 부임한 이에카게는 권농, 백성들의 소송 처리, 국무에 따르지 않는 자들에 대한 단속 등을 행하였다.[3] 이는 히라이즈미의 오슈 후지와라 씨가 행사하던 무쓰 고쿠후의 재청 지배권을 요리토모 정권이 이어받은 것을 의미한다.[2]

지난해 12월 데와국 북부(아키타현 지방)에서 일어난 오카와 가네토의 난 진압에 3개월이 소요되었는데, 이 난에 무쓰 국 유수소의 장관들이 가담했기 때문에 유수직 교체가 이루어졌다.[2] 이에카게의 유수직 임명은 오슈 총봉행 임명으로 간주되기도 한다.[2] 사료에 따르면, 요리토모는 "오슈(奧州)와 우슈(羽州) 땅 아래의 간레이(管領)"라고 불릴 권익을 부여받았고, 막부는 지행국주나 고쿠슈와는 별개로 고쿠가 기구를 움직여 양국의 행정권을 짊어질 근거를 획득했다.[5] 이에카게는 "가마쿠라도노(鎌倉殿)"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명에 따라 무쓰 고쿠가를 통제하고 국무 전반을 결정할 권한을 받았다.[6]

겐큐 연간(1190년~1198년)부터 이에카게는 미야기 군 이와기리(지금의 센다이시)에 이와기리 성을 쌓고 유슈 씨(留守氏)를 칭했다. 이자와 씨의 유수직 권한은 13세기 중반까지 인정되었지만, 무쓰의 막부 지행국제가 시작되면서 소멸했다.[2]

3. 3. 초기 오슈 총봉행의 권한과 한계

오슈총봉행은 오슈캇센의 전후 처리를 계기로 설치되었지만, 겐큐 2년(1191년) 정월 15일의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직제에는 기재되지 않았고, 그 후에도 큰 직권을 가진 '오슈 봉행'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8][9]

이자와 이에카게는 겐큐 4년(1193년)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헌상된 아와지국산 "아홉 발의 기이한 말"을 쓰가루소토가하마에 풀어놓고, 이듬해 6월 교토에서 가마쿠라로 압송된 죄수 몇 명을 오슈로 유배하는 등의 일 처리를 했는데, 이는 요리토모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겐큐 6년(1195년)에는 히라이즈미 사탑 수리와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 미망인 보호를 가사이 기요시게와 함께 명받았으며, 《아즈마카가미》 겐큐 6년 9월 3일 조 및 9월 29일 조에는 이자와 이에카게와 가사이 기요시게 두 사람이 이 임무를 맡은 것은 "오슈 총봉행으로서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6] 다만, 이는 가사이 씨의 "오슈 총봉행"으로서의 활동을 기록한 유일한 문헌 자료이다.[10]

가사이 기요시게는 오사와 가네토의 난 진압에서 일시적으로 무쓰 국 루스쇼(留守所)를 맡았다고는 하지만, 실제 진압 시에는 아시카가 요시카네나 지바 다네마사의 밑에서 싸웠으며, 일개 고케닌 이상의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다.[12] 또한, 가지와라 가게토키의 실각 이후에는 주로 가마쿠라의 쇼군 주변에서 활동하였고,[12] 가사이 기요시게의 자손은 계속해서 무쓰 국에 소령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역할은 무쓰 국에 소령을 가진 보통의 고케닌 이상의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13]

이에 반해, 오사와 가네토의 난 이후 무쓰 국 루스직에 임명된 이자와 이에카게는 권농권(勸農權)과 검단권(檢斷權)을 행사하고 있어, 이자와 이에카게야말로 명실상부 "오슈 총봉행"에 어울리는 존재였다는 견해도 있다.[14]

어쨌든 가사이 씨는 히라이즈미, 이자와(루스) 씨는 다가 성에 있던 기존 권력과의 관계에서 현지 지배를 진행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히라이즈미와 다가 성 두 곳은 특히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오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3]

4. 오슈 총봉행의 변천과 소멸

오슈 총봉행은 오슈 합전의 전후 처리를 계기로 설치되었지만, 겐큐 2년 정월 15일의 가마쿠라 막부의 직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그 후에도 특히 큰 직권을 가진 오슈 봉행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8][9]

이자와 이에카게는 겐큐 4년, 쇼군 요리토모에게 헌상된 아와지국산 "아홉 발의 기이한 말"을 쓰가루소토가하마의 땅에 풀어놓고, 이듬해 6월 교토에서 가마쿠라로 송검된 옥죄수 몇 명을 오슈로 유배하는 등의 사태를 일으켰는데, 이는 요리토모의 명령을 받은 것이었다. 겐큐 6년, 이에카게는 헤이세이 탑의 수리와 후지와라 히데히라미망인 보호를 카사이 키요시게와 함께 명받았으며, 『아즈마카가미겐큐 6년 9월 3일 조 및 9월 29일 조에는, 이에카게・키요시게 두 사람이 그 임무를 맡은 것은 "오슈 소봉행으로서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6] 다만, 이것이 카사이씨의 "오슈 총(소) 봉행"으로서의 활동에 대해 기록하는 유일한 문헌 자료이다.[10] 겸임의 난 이전의 카사이씨의 지위를 명확하게 "오슈 소봉행"이라고 기록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가능성으로는, 이자와・카사이 양씨가 나란히 서는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양자의 통칭으로서 "오슈 소봉행"이라는 개념이 발생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며,[11] 또한, 카사이씨의 자손이 선조의 명예를 자랑하여 주장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된다.[8]

카사이 키요시게는 오카와 카네토의 난 진압에서는 일시적으로 무쓰국의 루스쇼를 맡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 진압 시에는 아시카가 요시카네나 치바 타네마사의 밑에서 싸웠으며, 일개 고케닌 이상의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다.[12] 또한, 카지와라 카게토키의 실각 이후에는 주로 가마쿠라의 쇼군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12] 키요시게의 자손은 계속해서 무쓰 국내에 소령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역할은 무쓰국에 소령을 가진 보통의 고케닌 이상의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13] 이에 반해, 오카와 카네토의 난 이후, 무쓰국 루스직에 임명된 이자와 이에카게는 권농권・검단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이자와 이에카게야말로 명실상부 "오슈 소봉행"에 어울리는 존재였다는 견해도 있다.[14]

쇼카의 기근 때 집권 호조 나가토키・렌쇼 호조 마사무라로부터 기민의 구제를 명령하는 명령 문서가 무쓰 루스전(이에카게의 손자 루스 이에히로)에게 보내지고 있고(『가마쿠라 유문』 8347호), 이와 같은 문서가 여러 나라의 슈고에게 보내지고 있는 것이 확인되며(『가마쿠라 유문』 8346호), 호지 합전 후에 오슈로 도망친 사하라 히데츠라가 토벌된 보고도 "루스스케"가 행하고 있으며, 이에카게의 자손이 루스직으로서 이에카게의 권농권・검단권을 계승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15]

카사이씨는 헤이세이의, 이자와(루스)씨는 타가성에 있던 기존 권력과의 관계에서 현지 지배를 진행해 갔다고 생각된다. 헤이세이와 타가성의 양쪽은 특히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오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3]

4. 1. 가사이 기요시게와 이자와 이에카게 후임자들의 활동

4. 2. 오슈 총봉행 권한의 축소와 소멸

오슈 총봉행은 오슈캇센의 전후 처리를 계기로 설치되었지만, 겐큐 2년(1191년) 정월 15일의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직제에는 기재되지 않았고, 그 후에도 큰 직권을 가진 '오슈 봉행'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8][9]

이자와 이에카게는 겐큐 4년(1193년)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헌상된 아와지국산 "아홉 발의 기이한 말"을 쓰가루소토가하마 땅에 풀어놓고, 이듬해 6월 교토에서 가마쿠라로 압송된 죄수 몇 명을 오슈로 유배하는 등의 일을 처리했는데, 이는 요리토모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겐큐 6년(1195년) 이에카게는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의 미망인 보호를 가사이 기요시게와 함께 명받았으며, 《아즈마카가미》 겐큐 6년 9월 3일조 및 9월 29일조에는 이에카게와 기요시게 두 사람이 이 임무를 맡은 것은 "오슈 총봉행으로서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6] 다만, 이는 가사이 씨의 "오슈 총봉행"으로서의 활동을 기록한 유일한 문헌 자료이다.[10] 가네토의 난 이전 가사이 씨의 지위를 명확하게 "오슈 총봉행"이라 기록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자와, 가사이 두 집안이 어떤 단계에서 그들의 역할에 대한 약칭으로서 처음 "오슈 총봉행"이라 불리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1] 또한, 가사이 씨의 자손이 조상의 명예를 띄워주기 위해 주장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8]

가사이 기요시게는 오카와 가네토의 난 진압에서 일시적으로 무쓰 국 루스쇼를 맡았다고는 하지만, 실제 진압 시에는 아시카가 요시카네나 지바 다네마사 밑에서 싸웠으며, 일개 고케닌 이상의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다.[12] 가지와라 가게토키 실각 이후에는 주로 가마쿠라의 쇼군 주변에서 활동했으며,[12] 기요시게의 자손은 계속 무쓰 국내에 소령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역할은 무쓰 국에 소령을 가진 보통의 고케닌 이상의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는 확인되지 않는다.[13] 오카와 가네토의 난 이후, 무쓰 국 루스직에 임명된 이자와 이에카게는 권농권, 검단권을 행사하고 있어, 이자와 이에카게야말로 명실상부 "오슈 총봉행"에 어울리는 존재였다는 견해도 있다.[14]

쇼카의 기근 때 집권 호조 나가토키, 렌쇼 호조 마사무라로부터 기민 구제를 명하는 명령 문서가 무쓰 루스전(이에카게의 손자 루스 이에히로)에게 보내지고 있는데,[15] 이와 같은 문서가 여러 나라의 슈고에게 보내지고 있는 것이 확인되며, 호지 합전 후 오슈로 도망친 사하라 히데쓰라가 토벌된 보고도 "루스스케"가 행하고 있어, 이에카게의 자손이 루스직으로서 이에카게의 권농권, 검단권을 계승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15]

가사이 씨는 히라이즈미, 이자와(루스) 씨는 다가 성에 있던 기존 권력과의 관계에서 현지 지배를 진행해 갔다고 생각된다. 히라이즈미와 다가 성 두 곳은 특히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오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3]

5. 오슈 총봉행의 역사적 의의

5. 1. 가마쿠라 막부의 오슈 지배 강화

5. 2. 중앙집권적 무사 정권 확립에의 기여

6. 한국 역사와의 비교 (별도 주제)

6. 1. 고려 시대의 지방 통치 제도와의 비교

6. 2. 조선 시대의 지방 통치 제도와의 비교

참조

[1] 서적 五味(2011)p.26
[2] 서적 高橋(2011)p.455
[3] 서적 入間田(2004)
[4] 서적 入間田(1978)p.52
[5] 서적 入間田(1978)p.55
[6] 서적 入間田(1978)p.56
[7] 서적 佐藤(2019)p.207-211
[8] 서적 五味(2011)p.27
[9] 서적 五味(2011)p.27
[10] 서적 入間田(1978)p.59
[11] 서적 入間田(1978)p.60
[12] 서적 佐藤(2019)p.196
[13] 서적 佐藤(2019)p.198-201
[14] 서적 佐藤(2019)p.196-198
[15] 서적 佐藤(2019)p.202-2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