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라트 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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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이라트 연맹은 칭기즈 칸 시대에 몽골에 복속된 서북쪽의 산림 부족에서 기원하여, 14세기 후반 북원 혼란을 틈타 부족 연합을 결성했다. 명나라에 조공하며 세력을 키웠고, 15세기 초 토곤 타이시, 에센 타이시 시기에 몽골 고원과 만주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에센의 죽음 이후 분열과 몽골의 반격으로 쇠퇴하여 16세기에는 카라코룸을 잃고 1623년경 할하를 격파하며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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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라트 연맹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 네 오이라트 연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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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표기 | }} }} |
| 존속 기간 시작 | 1399년 |
| 존속 기간 끝 | 1634년 |
| 지위 | 부족 연맹체, 유목 국가 |
| 공용어 | 몽골어 오이라트어 |
| 종교 | 텡그리교 불교 |
| 정부 형태 | 군주제 |
| 입법부 | 전통 관습William Elliott Butler-The Mongolian legal system, p.3(몽골-오이라트) |
| 역사적 사건 | |
| 몽케 테무르 | 오이라트 수장 자칭 (1399년 이전) |
| 오이라트의 칭기스 일족 전복 | 1399년 |
| 에센 타이시의 카안 즉위 | 1455년 |
| 토르구트의 볼가강 이주 | 1617년 ~ 1617년 |
| 준가르와 코슈트 칸국 건국 | 1630년대 |
| 연맹 해체 | 1634년 |
| 계승 | |
| 이전 | 북원 |
| 이후 | 준가르 칼미크 칸국 코슈트 칸국 |
2. 기원과 형성
오이라트는 본래 칭기즈 칸 시대 몽골고원 서북쪽 삼림 지대에 거주하던 부족이었다.[5] 1207년 몽골 제국에 복속된 이후, 케레이트나 나이만 등 다른 부족의 남은 세력을 흡수하며 점차 세력을 확장했다.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하고 북원이 성립된 후, 몽골고원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388년, 오이라트 내 코이드부(輝特部), 케레이트의 후예인 케레누트부(후일의 톨구트부), 나이만의 후예 초로스(후일의 준가르), 그리고 바르그투부 등 4개의 부족이 연합하여 오이라트 4부 연맹을 결성했다.[5] 이 연맹은 이후 북원의 보르지긴 가문과 대립하며 몽골고원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 된다.
2. 1. 몽골 제국 편입
오이라트는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하던 시기 서북쪽 끝자락에 살던 산림 부족이었다. 오이라트는 1207년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에 복종했다. 몽골 제국에 편입된 이후 케레이트, 나이만 등의 잔존 세력을 흡수했다.2. 2. 북원 시기
오이라트는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할 당시 서북쪽 끝자락에 살던 산림 부족이었다. 1207년 몽골 제국에 복속되었으며, 이후 케레이트, 나이만 등 다른 부족의 잔존 세력을 흡수하며 세력을 키웠다.1368년 원나라가 멸망한 후, 원의 고위 관리였던 몽케테무르가 스스로 오이라트의 수장을 자처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는 마흐무드, 타이핑, 바투볼라드 세 족장이 오이라트를 다스렸다.[5] 이들은 명나라에 조공하며 관계를 맺었고, 이에 명나라 영락제는 1409년 이들에게 왕의 작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1388년, 북원 내부의 혼란을 틈타 몽골고원 서쪽의 네 부족, 즉 오이라트 부족 내 코이드부(輝特部), 케레이트의 후예인 케레누트부(후일의 톨구트부), 나이만의 후예 초로스(후일의 준가르), 그리고 바르그투부가 연합하여 오이라트 4부 연맹을 결성했다. 이들은 이수데르 조리그투 칸을 몽골의 칸으로 추대하며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이수데르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391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혹은 동생인 엥케가 칸위를 이었지만 계속되는 혼란 속에서 대칸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실질적인 권력은 고하이 태위나 우게치 카스하와 같은 오이라트 부족 연합의 지도자들에게 넘어갔다.
오이라트는 엘베크 칸 시대부터 북원의 보르지긴 왕조에 대해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 오이라트의 주요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다.
- 울리타이 바단 (1368년 ~ 1390년)
- 태위 고하이 (1399년)
- 우게치 카스하 (1399년 ~ 1415년): 뭉케 테무르라고도 불렸으며, 키르기스와 오이라트 네 부족의 칸을 칭했다.[8]
- 바툴라 타이시 (1399년 ~ 1408년): 뭉케 테무르 사후 오이라트를 이끌었으나, 실권은 바투 볼라드와 마흐무드에게 있었다.
- 타이핑 (? ~ 1424년?)
3. 전성기
15세기 초, 오이라트 연맹은 북원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마흐무드 추장은 울제이 테무르 칸을 제거하고 새로운 칸을 옹립하며 서몽골 지역에서 오이라트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는 동몽골 세력과의 경쟁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명나라는 이러한 분열 상황을 이용하여 이이제이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마흐무드의 뒤를 이은 아들 토곤 타이시는 동몽골의 주요 세력이었던 아르구타이와의 오랜 대결 끝에 1437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토곤은 북원의 보르지긴 황족을 명목상의 존재로 만들고 몽골 고원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장악했다.
오이라트 연맹의 최전성기는 토곤의 아들 에센 타이시 시대에 도래했다. 에센은 외몽골과 내몽골을 아우르는 통합을 이루고 동쪽으로는 만주의 여진족까지 복속시키는 등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특히 1449년에는 명나라 정통제의 친정을 격파하고 황제를 사로잡는 토목의 변을 일으켜 명나라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후 에센은 기존의 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칸의 자리에 올랐으나, 이는 다른 오이라트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내부 반란으로 인해 살해당했다.[6] 에센의 죽음은 오이라트 연맹 전성기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3. 1. 명나라와의 관계
1409년 명나라 영락제는 북원의 울제이 테무르 칸에게 복종을 요구했지만, 울제이 테무르 칸은 이를 거부하고 다음 해 케를렌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1402년 영락제가 대군을 동원해 쳐들어오자 울제이 테무르 칸은 서쪽으로 도망갔는데, 이때 오이라트 추장 중 한 명인 마흐무드가 울제이 테무르 칸을 붙잡아 죽였다.[6]울제이 테무르 칸 사후, 서몽골에서는 아리크부카의 후손인 델베그가 오이라트의 추대로 칸위에 올랐다. 그러나 동몽골 세력은 오이라트가 내세운 칸을 인정하지 않고 아르구타이를 중심으로 저항했다. 이로 인해 서몽골(오이라트)과 동몽골(몽골)의 대립이 이어졌고, 명나라는 이 상황을 이용해 양측을 이간시키는 정책(이이제이)을 펼쳤고, 몽골과 오이라트 간의 분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1408년, 마흐무드의 아들 토곤이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아 아르구타이와의 싸움을 계속했다. 1437년 토곤은 아르구타이와 우구데이계 아자이 칸을 격파함으로써 북원의 보르지긴 왕가를 완전히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1438년 토곤이 죽자 그의 아들 에센이 군 사령관인 타이시가 되었다. 에센은 오이라트의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외몽골과 내몽골을 통일하고 만주의 여진까지 복속시켰다.
오이라트가 점점 커지자 명나라 황제 정통제는 1449년 친히 원정에 나섰으나 오히려 포로로 잡히게 된다(토목의 변). 에센은 악바르진 칸을 살해하고 스스로 칸을 칭하였다. 그러나 곧 오이라트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에센을 몰아냈고, 에센은 자신이 숙청했던 이의 아들에게 살해당했다.
3. 2. 동몽골과의 갈등
서몽골에서는 울제이 테무르 칸이 오이라트 추장 마흐무드에게 살해된 후[6], 아리크부카의 후손인 델베그를 새로운 칸으로 세웠다. 그러나 동몽골 세력은 오이라트가 내세운 칸을 인정하지 않고 아르구타이를 중심으로 저항하였다. 이로 인해 서몽골(오이라트)과 동몽골(몽골 본토 세력) 간의 분쟁이 지속되었으며, 명나라는 이들 사이에서 이이제이 정책을 펼쳐 양측의 갈등을 더욱 부추겼다.1408년 마흐무드의 아들 토곤이 오이라트의 지도자가 된 후에도 아르구타이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1437년, 토곤은 마침내 아르구타이와 우구데이계의 아자이 칸 세력을 격파하였다. 이 승리로 오이라트는 북원의 보르지긴 황족을 사실상 꼭두각시로 만들며 몽골 고원에서의 주도권을 강화했다. 1438년 토곤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에센이 타이시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3. 3. 에센 타이시의 통치
1437년 토곤은 아르구타이와 우구데이계 아자이 칸을 격파하여 북원의 보르지긴 왕가를 사실상 꼭두각시로 만들었다. 1438년 토곤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에센이 군 사령관인 타이시의 지위를 계승했다.에센은 차가타이 칸국 계열의 모굴리스탄 및 하미 지역에 여러 차례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해당 지역 군주들의 복속을 받아냈다. 또한, 외몽골과 내몽골을 통합하고 동쪽으로는 만주의 여진까지 세력권 아래 두었다. 오이라트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명나라 황제 정통제는 1449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으나, 오히려 토목의 변에서 에센에게 포로로 잡히는 결과를 맞았다.
이후 에센은 악바르진 칸을 살해하고 스스로 칸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찬탈 행위는 다른 오이라트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곧 반란이 일어나 에센은 권좌에서 쫓겨났다. 결국 에센은 과거 자신이 숙청했던 인물의 아들에게 살해당하며 생을 마감했다.[6]
4. 쇠퇴와 멸망
에센 칸 사후 오이라트 연맹은 내부 결속력이 약화되며 분열되었다.[7] 1480년대부터 만투카이 카툰과 다얀 칸이 이끄는 몽골 세력의 압박으로 오이라트는 서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으며, 1510년에는 다얀 칸에게 복속되었다. 비록 일시적으로 카라코룸을 점령하는 등 영향력을 유지하기도 했으나, 16세기 알탄 칸에게 카라코룸을 빼앗겼다. 이후 할하 몽골 등과의 지속적인 충돌 속에서 오이라트 연맹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걸었다.
4. 1. 내부 분열
에센의 죽음은 오이라트를 구성하는 각 씨족들 사이의 결속을 파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씨족들은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에센의 아들 아마산지는 모굴리스탄을 거쳐 서쪽의 우즈베크까지 도망갔다.[7]1480년부터 만투카이 카툰과 다얀 칸이 이끄는 몽골은 오이라트를 서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1510년, 다얀 칸은 몽골을 재통일하고 오이라트 또한 복속시켰다. 그러나 할하를 비롯한 내몽골의 일부 부족들은 계속해서 오이라트를 공격했다. 오이라트는 세력이 약화된 뒤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여 한동안 카라코룸을 계속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16세기에 몽골의 알탄 칸이 카라코룸을 오이라트에게서 탈환했다.
이후 할하의 알탄 칸(카라코룸을 빼앗은 몽골의 알탄 칸과는 다른 인물)의 약탈을 견디지 못한 오이라트 연맹은 1623년경 할하의 우바시 콩타이지를 격파하며 반격하기도 했다.
4. 2. 몽골의 반격
1480년부터 만투카이 카툰과 다얀 칸의 영도 아래 몽골은 오이라트를 서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1510년 다얀 칸은 몽골을 재통일하고 오이라트도 복속시켰다. 그러나 할하를 비롯한 내몽골의 일부 부족들은 계속해서 오이라트를 공격했다. 오이라트는 세력이 약해진 뒤에도 한동안 카라코룸을 계속 점령하고 있었다. 16세기에 알탄 칸이 오이라트로부터 카라코룸을 탈환했다.4. 3. 할하와의 전쟁
1480년부터 만투카이 카툰과 다얀 칸의 주도 아래 몽골은 오이라트를 서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1510년 다얀 칸은 몽골을 다시 통일하고 오이라트를 복속시켰다. 그러나 할하를 비롯한 내몽골의 일부 부족들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오이라트를 공격했다. 오이라트는 세력이 약해진 뒤에도 한동안 카라코룸을 점유하며 영향력을 유지했으나, 16세기에 몽골의 알탄 칸에게 카라코룸을 빼앗겼다.이후 할하의 알탄 칸(카라코룸을 빼앗은 몽골의 알탄 칸과는 다른 인물)이 오이라트를 계속 약탈하자, 오이라트 연맹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1623년경 할하의 우바시 콩타이지를 격파하며 반격에 성공했다.
5. 오이라트 연맹의 지도자
- 울리타이 바단 (1368년 ~ 1390년)
- 태위 고하이 (1399년)
- 우게치 카스하 (1399년 ~ 1415년): 뭉케 테무르라고도 알려짐. 키르기스와 오이라트 네 부족의 칸을 칭함.[8]
- 바툴라 타이시 (1399년 ~ 1408년): 뭉케 테무르 사후 오이라트를 이끌었으나, 실권은 바투 볼라드와 마흐무드에게 있었음.
- 타이핑 (1424년?)
- 토곤 타이시 (1408년 ~ 1438년): 이 시기부터 몽골 초원에서 오이라트가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함.
- 에센 타이시 (1438년 ~ 1454년): 오이라트의 전성기를 이끎. 막북(漠北)의 몽골 고원 전역을 장악하고 강력한 패권을 형성함.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로 침입하여 정통제를 사로잡는 토목의 변을 일으키기도 함. 그러나 스스로 칸을 칭하는 등 권력 강화 과정에서 내부 반발을 사 암살당했고, 그의 죽음과 함께 오이라트의 패권도 급격히 약화됨.
- Amasanj (1454년 ~ 1455년)
- 이스퇴모르 (1455년 ~ 1469년): 우쉬 테무르, 이스 테무르라고도 알려짐.
- 키시그
- 아르한
- 뷔베이
- 콩고르: 스스로 '누욘 콩고르 칸'을 칭함.
- 아바이 하탄
참조
[1]
서적
William Elliott Butler
[2]
서적
Empire of Steppes
[3]
서적
Enc
[4]
서적
Geschichte der Ost-Mongolen und ihres Fürstenhauses: Aus dem Mongolischen übersetzt, und mit dem Originaltexte
https://books.google[...]
Europe Printing
1829
[5]
서적
Mediaeval Researches from Eastern Asiatic Sources
[6]
서적
Altan tobchi
[7]
서적
History of the Eastern Mongols During the Ming Dynasty from 1368 to 1634
[8]
서적
History of Civilizations of Central Asia: Development in contrast : from the sixteenth to the mid-nine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UNESCO
2003-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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