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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비올레르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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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외젠 비올레르뒤크(1814-1879)는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이론가로, 중세 건축물 복원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건축 교육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연구하며, 구조 합리주의 이론을 확립하여 고딕 건축의 가치를 재평가했다. 대표 저서로는 『프랑스 건축 사전』, 『건축에 관한 대화』 등이 있으며, 19세기 새로운 건축 재료인 철의 사용을 옹호하며 근대 건축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주요 복원 건축물로는 노트르담 대성당, 카르카손 성벽, 피에르퐁 성 등이 있으며, 그의 이론은 아르누보 건축가 및 근대 건축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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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비올레르뒤크
기본 정보
나다르가 촬영한 외젠 비올레르뒤크 사진
나다르가 촬영
본명외젠 에마뉘엘 비올레르뒤크
국적프랑스
출생1814년 1월 27일
출생지프랑스, 파리 (현재의 파리 2구)
사망1879년 9월 17일
사망지스위스, 로잔
외젠 비올레르뒤크 서명
외젠 비올레르뒤크 서명
직업 및 경력
직업건축가, 건축 이론가
수상왕립 금메달 (1864년)
참고 문헌
저서"Avant-garde et tradition dans les arts du décor en France. Lectures critiques autour de Guillaume Janneau." - Rossella Froissart
"William Burges and the High Victorian Dream" - Joe Mordaunt Crook
논문"An appraisal of Viollet-le-Duc" - Michael Barker (The Journal of the Decorative Arts Society, 1992)

2. 생애와 교육

외젠 비올레르뒤크는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추천으로 고대 건축물 복원에 참여했다. 1840년부터 라 마들렌 교회당 복원을 시작으로, 파리의 생트 샤펠, 노트르담 대성당, 아미앵, 루앙 대성당 등 많은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의 교회당과 성관의 복원 및 부흥에 참여했다.[22] 복원 경험을 바탕으로 『중세 건축 사전』(1854-1868년)을 저술했다. 1863년 보자르 교수가 되었지만 학생 및 교수들과 의견이 달라 사임했다. 이후 『건축 강화』(1862-1872년)에서 자신의 건축 이론을 전개했다. 1879년 스위스 로잔의 자택 "라 베데트"에서 사망했다.

2. 1. 유년 시절과 가족 환경

외젠 비올레르뒤크는 1814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건축가였고, 아버지는 고위 공무원이었으며, 1816년에는 루이 18세의 왕실 거처 감독관이 되었다. 그의 삼촌 에티엔-장 들레클뤼즈는 화가이자 자크 루이 다비드의 제자였으며, 미술 평론가였고, 스탕달과 생트뵈브가 참석하는 문학 살롱을 열었다. 그의 어머니는 남성과 여성 모두 참석할 수 있는 살롱을 열었는데, 1822년 또는 1823년에 외젠은 그곳에서 훗날 그의 경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를 만났다.[17]

1825년 그는 퐁트네오로즈에 있는 펜시옹 모랑에서 교육을 시작했다. 1829년 파리로 돌아와 콜레주 드 부르봉(현재는 리세 콩도르세)의 학생이 되었다. 1830년에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했다. 그의 삼촌은 1806년에 설립된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할 것을 권했지만, 에콜은 고전 모델을 완전히 모방하는 것에 기반을 둔 매우 엄격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외젠은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는 자크-마리 위베와 아킬 레클레르의 건축 사무실에서 실무 경험을 쌓기로 결정하고, 파리 주변의 중세 교회와 기념물을 그리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열여섯 살 때 그는 샤를 10세를 몰아낸 7월 혁명에 참여하여 바리케이드를 건설했다. 루이 필리프가 집권한 혁명 이후, 그의 아버지는 왕실 거처국의 국장이 되었다. 새 정부는 역사 기념물 총감의 자리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외젠의 삼촌 들레클뤼즈는 외젠을 프랑스 여행에 데려가 기념물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1831년 7월부터 10월까지 프랑스 남부를 여행했으며, 교회와 기념물의 상세한 그림과 수채화 컬렉션을 가지고 돌아왔다.[17]

''튀일리 궁전의 여성 연회'' (1835), 비올레르뒤크 작


파리로 돌아온 그는 가족과 함께 튀일리 궁전으로 이사했고,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왕실 거처의 지사가 되었다. 그의 가족은 다시 그에게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여전히 거절했다. 그는 1831년 12월 일기에 "에콜은 건축가들을 위한 단지 틀일 뿐이다. 그들은 모두 거의 똑같이 나온다."라고 썼다.[17] 그는 재능 있고 꼼꼼한 예술가였으며, 프랑스를 여행하며 기념물, 대성당 및 기타 중세 건축물을 방문하고 상세한 그림과 수채화를 그렸다. 1834년, 스무 살의 나이에 그는 엘리자베스 템플리에와 결혼했고, 같은 해에 왕립 장식 미술 학교의 장식 디자인 부교수로 임명되어 더 규칙적인 수입을 얻었다.[4] 그의 첫 번째 제자 중에는 레옹 고셰렐이 있었다.

그의 그림과 그림 판매 수익으로 비올레르뒤크는 이탈리아의 기념물을 순회하며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및 기타 지역을 방문하고 그림을 그렸다. 1838년, 그는 여러 그림을 파리 살롱에 출품했고, 1838년과 1844년 사이에 약 300개의 판화를 제작한 여행 서적, ''옛 프랑스의 그림 같고 낭만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2. 2. 건축 교육 거부와 독자적인 학습

외젠 비올레르뒤크는 1814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건축가였고, 아버지는 고위 공무원이었으며, 삼촌 에티엔-장 들레클뤼즈는 화가이자 미술 평론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남녀 모두 참석 가능한 살롱을 열었고, 1822년 또는 1823년에 외젠은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를 만났다.[17]

1825년 퐁트네오로즈에 있는 펜시옹 모랑에서 교육을 시작했고, 1829년 파리로 돌아와 리세 콩도르세의 학생이 되었다. 1830년에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했다. 삼촌은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할 것을 권했지만, 외젠은 고전 모델만을 모방하는 엄격한 시스템에 관심이 없었다. 대신 자크-마리 위베와 아킬 레클레르의 건축 사무실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 중세 교회와 기념물을 그리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16세 때 1830년 혁명에 참여하여 바리케이드를 건설했다. 혁명 이후 아버지는 왕실 거처국의 국장이 되었다. 삼촌 들레클뤼즈는 외젠을 프랑스 여행에 데려가 기념물을 보게 하였다. 1831년 7월부터 10월까지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고, 교회와 기념물의 상세한 그림과 수채화 컬렉션을 가지고 돌아왔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가족과 함께 튀일리 궁전으로 이사했고, 아버지는 그곳에서 왕실 거처의 지사가 되었다. 가족은 다시 그에게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여전히 거절했다. 그는 1831년 12월 일기에 "에콜은 건축가들을 위한 단지 틀일 뿐이다. 그들은 모두 거의 똑같이 나온다."라고 썼다. 그는 프랑스를 여행하며 기념물, 대성당 및 기타 중세 건축물을 방문하고 상세한 그림과 수채화를 그렸다. 1834년, 20세에 엘리자베스 템플리에와 결혼했고, 같은 해에 왕립 장식 미술 학교의 장식 디자인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첫 번째 제자 중에는 레옹 고셰렐이 있었다.[4]

그림과 그림 판매 수익으로 이탈리아의 기념물을 순회하며 로마, 베니스, 피렌체 및 기타 지역을 방문하고 그림을 그렸다. 1838년, 파리 살롱에 여러 그림을 출품했고, 1838년과 1844년 사이에 약 300개의 판화를 제작한 여행 서적, ''옛 프랑스의 그림 같고 낭만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2. 3. 이탈리아 여행과 고딕 건축에 대한 경외심

1836년 데생 학교의 제자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고전 건축의 걸작을 찬양했지만, 고전 양식을 프랑스의 풍토나 관습을 고려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재현하려는 보자르의 태도에는 다시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모국에서 무시당하고 있던 중세 고딕 건축에 대한 경외심을 깊이 하였다.[22]

3. 초기 건축 복원 활동

1838년 10월, 비올레르뒤크는 건축가 아킬 레클레르의 추천으로 수비즈 호텔 증축 부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삼촌 들레클루즈의 추천으로 프로스페르 메리메가 이끄는 프랑스 역사 기념물 위원회에 합류했다. 비올레르뒤크는 나르본 대성당 완공 계획을 제안했으나, 야심차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1]

베즐레 수도원 복원에 성공한 후, 비올레르뒤크는 여러 대규모 프로젝트를 맡았다. 생트 샤펠과 앙부아즈 성 복원, 그리고 1843년 메리메와 함께 부르고뉴와 프랑스 남부를 여행하며 기념물을 조사하고 건축 저널에 기고했다. 이를 통해 프랑스 중세 건축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중세 건축 사전은 오늘날까지 방대한 도상을 담고 있다.[1]

1844년, 비올레르뒤크는 장바티스트 라쉬와 함께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 공모전에서 우승했다. 이들은 혁명 기간 동안 손상된 정면 조각상 복원에 집중하고, 내부 구조 변경을 제안했다. 메리메는 신중한 복원을 당부했고, 역사 기념물 위원회는 대부분의 계획을 승인했지만 루이 14세 시대 합창단 제거는 거부했다. 비올레르뒤크는 새로운 첨탑 추가를 거절하고, 1786년에 제거된 중세 첨탑과 종탑 재건을 제안했다.[5]

노트르담 대성당(파리)


프로젝트 승인 후, 비올레르뒤크는 기존 장식을 그림과 사진으로 제작하고, 조각가들과 새로운 건축 요소를 만들었다. 1831년 폭동으로 파괴된 대주교 저택을 대체할 고딕 양식 보물관도 설계했다. 1791년 대포 제작을 위해 녹여진 종을 새로 주조하고, 북쪽 탑 내부 구조를 건설했다. 7월 혁명으로 불탄 사제관도 재건했다. 새로운 첨탑은 더 높고 튼튼하게 완성되었으며, 사도 조각상으로 장식되었고, 성 토마스의 얼굴은 비올레르뒤크와 닮았다. 이 첨탑은 2019년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로 파괴되었다.[5]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는 대성당 복원 결정에 크게 기여했다. 비올레르뒤크와 라쉬는 공동으로 설계 공모전에 참가하여 신중한 복원 계획안을 제출했지만, 공사 진행 중 내용이 확대되었고, 라쉬스 사망 후 더욱 두드러졌다. 가톨릭 교회는 대성당을 아름답게 장식하여 교회 부흥을 보여주려 했고, 비올레르뒤크는 잃어버린 첨탑을 복원하며 이전보다 높게 만들고 조각상을 추가했다. 이는 큰 현상 변경이었고, 조각상 모델이 비올레르뒤크 자신과 스태프들이었다는 점이 비판받았다. 이는 정확한 복원보다 건축 기능과 19세기 시대상을 반영하려 한 그의 기능주의적 측면을 보여준다.[1]

비올레르뒤크는 툴루즈 생 세르냉 대성당, 생드니 대성당, 아미앵 대성당 등 다양한 건축물 복원을 진행했다. 생드니 대성당 복원 중 문제점을 해결하고 프랑스 왕들의 매장실을 복원했으며, 아미앵 대성당 복원에서는 각 부분의 고유 특징을 살리면서도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했다.[1]

3. 1. 베즐레 수도원 복원 (1840년)

1838년 10월, 외젠 비올레르뒤크는 건축가 아킬 레클레르의 추천으로 수비즈 호텔 증축의 부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삼촌 들레클루즈의 추천으로 프로스페르 메리메가 이끄는 프랑스 역사 기념물 위원회에 합류했다. 비올레르뒤크는 1840년, 베즐레 수도원 복원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이 교회는 1569년 위그노에 의해 약탈당하고 프랑스 혁명 동안 파괴되어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1]

베즐레 수도원, 비올레르뒤크의 첫 번째 복원 프로젝트


메리메는 비올레르뒤크에게 교회가 붕괴되지 않도록 복원하고 재건하는 임무를 부여하며, "복원 프로젝트에서 교회의 모든 고대 배치를 정확히 존중"하도록 지시했다.[1] 당시 중세 건축 기술에 대한 과학적 연구나 복원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비올레르뒤크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건물이 붕괴되기 시작한 근본적인 건설상의 결함을 발견하고 더 견고하고 안정적인 구조를 구축해야 했다. 그는 지붕을 가볍게 하고 구조를 안정시키기 위해 새로운 아치를 건설했으며, 아치 천장과 아치의 모양을 약간 변경했다. 이러한 수정은 1960년대에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옹호자들은 수정이 없었다면 지붕이 자체 무게로 무너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 메리메의 부관 레노르망은 "젊은 르뒤크는 당신의 신뢰를 받을 자격이 충분해 보입니다. 그는 그렇게 절망적인 사업을 맡을 만한 훌륭한 대담함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제때 도착했고, 우리가 10년만 더 기다렸다면 교회는 돌무더기가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보고했다.[1]

라 마들렌 교회당


비올레르뒤크는 실측 조사를 통해 교회당의 구조적 결함을 파악하고, 본당의 천장과 플라잉 버트레스를 가설 구조물로 지지한 후 위기 상태에 있던 부분을 복원해 나갔다. 1859년에 복원이 완료되었다. 이 첫 번째 복원 작업을 통해 그는 구조 분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고딕 건축에서 모든 부위가 상호 구조적으로 대응하여 전체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는 구조 합리주의 이론의 확립으로 이어졌다.[1]

3. 2. 생트 샤펠과 앙부아즈 성 복원

1840년, 외젠 비올레르뒤크는 친구이자 건축가인 장-밥티스트 라쉬와 함께 혁명 이후 창고로 사용되던 파리의 생트 샤펠 복원을 시작했다.[1] 1843년 2월, 루이 필리프 국왕은 그를 앙부아즈 성으로 보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무덤이 있는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복원하도록 했다.[1] 안타깝게도 이 창문들은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파괴되었다.[1]

4.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 (1844-1864)

1844년, 외젠 비올레르뒤크는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지원을 받아 장바티스트 라쉬스와 함께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 공모전에서 우승했다. 이 공사는 25년 동안 이어졌다.[5] 이들의 프로젝트는 주로 정면에 집중되었는데,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문 위의 많은 조각상들이 목이 잘리거나 부서졌었다.

비올레르뒤크와 라쉬스는 내부적으로 두 가지 주요 변경을 제안했다. 두 개의 만(bay)을 원래 중세 시대의 4층 높이로 재건하고, 루이 14세 통치 시대에 합창단에 추가된 대리석 신고전주의 구조물과 장식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메리메는 복원이 수세기의 피해보다 기념물에 더 재앙적일 수 있다며 신중을 기할 것을 당부했다. 역사 기념물 위원회는 비올레르뒤크의 계획 대부분을 승인했지만, 루이 14세 시대에 지어진 합창단을 제거하려는 제안은 거부했다. 비올레르뒤크는 탑 위에 두 개의 새로운 첨탑을 추가하자는 제안을 스스로 거절하며, 그러한 기념물은 "눈에 띄겠지만 노트르담 드 파리는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그는 1786년 바람에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제거된 트랜셉트 위의 원래의 중세 첨탑과 종탑을 재건하는 것을 제안했다.[5]

프로젝트가 승인되자 비올레르뒤크는 기존 장식 요소의 그림과 사진을 제작했다. 그런 다음 그것들을 제거하고 조각가들이 그의 그림과 같은 시대의 다른 대성당의 유사한 작품 사진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인, 가고일, 키메라 및 기타 건축 요소를 만들었다.[5] 그는 또한 1831년 폭동으로 파괴된 대주교의 저택을 대체하기 위해 고딕 양식의 새로운 보물관을 설계했다.

두 탑의 종은 1791년에 꺼내져 대포를 만들기 위해 녹여졌다. 비올레르뒤크는 북쪽 탑에 새로운 종을 주조하고 그것들을 지지하기 위해 내부 구조를 새로 건설했다. 비올레르뒤크와 라수스는 또한 1756년에 지어졌지만 1830년 7월 혁명 동안 폭도들에 의해 불탄 교회 남쪽에 있는 사제관을 재건했다. 새로운 첨탑은 날씨를 견딜 수 있도록 더 높고 더 튼튼하게 완성되었으며, 사도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었고, 건축가들의 수호 성인인 성 토마스의 얼굴은 비올레르뒤크와 눈에 띄게 닮았다.[5] 이 첨탑은 2019년 4월 15일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로 파괴되었다.

빅토르 위고는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대성당 부흥 운동의 의의를 국민들에게 호소하여, 국가의 수복 결정에 크게 기여했다. 비올레르뒤크는 생트 샤펠 복원에서 만난 라쉬스와 공동으로 설계 공모전에 복원 계획안을 제출했다. 라 마들렌 교회당 복원 진척을 기뻐했던 메리메가 역사적 기념물 위원회의 유력 멤버였던 점도 있어, 두 사람의 안은 1등이 되었고 1845년에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1857년 라쉬스가 사망한 후, 비올레르뒤크는 잃어버린 첨탑 복원을 결정한다. 그는 남아있던 첨탑의 데생을 발전시켜, 이전보다 10미터 정도 첨탑을 높였고, 첨탑 기부 주변에 복음사가와 12사도 조각상을 추가했다. 이는 대폭적인 현상 변경이었으며, 조각상 모델이 비올레르뒤크 자신이나 공사 종사자들이었다는 점이 그 후 대대적으로 비판받았다.

5. 제2 제정 시기의 주요 프로젝트

외젠 비올레르뒤크는 파리 외에도 프랑스 전역의 20개가 넘는 복원 사업을 진행했다. 툴루즈 생 세르냉 대성당과 생드니 대성당이 새로운 프로젝트에 포함되었다. 특히 생드니 대성당은 석조 구조물 문제로 탑을 해체해야 했는데, 비올레르뒤크는 이를 감독하고 프랑스 왕들의 원래 매장실을 복원하는 데 집중했다.[6]

1849년, 그는 아미앵 대성당 복원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각 부분의 고유한 특징을 살리면서도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했다.[6]

1851년 프랑스 쿠데타 이후 나폴레옹 3세의 후원을 받으며 그의 프로젝트는 가속화되었다. 랭스 대성당과 아미앵 대성당 복원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특히 아미앵 대성당에서는 루이 14세 시대의 장식을 제거하고 고딕 양식으로 복원하는 데 황제의 지원을 받았다.

그는 뱅센 성과 생트 샤펠 복원에도 참여했는데, 생트 샤펠을 "쇠퇴하는 고딕 양식의 가장 훌륭한 표본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6]

나폴레옹 3세는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에 추가 자금을 지원했고, 비올레르뒤크는 18세기에 사라졌던 조각상들을 복원했다. 클레르몽페랑 대성당 복원에도 참여했으며, 나폴레옹 3세를 위해 네오 고딕 양식의 철도 객차를 설계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3세의 요청으로 알레시아 전투 기념비 건립을 위한 장소를 찾고, 갈리아족 족장 베르생제토릭스 조각상의 금속 프레임을 설계했다. 그는 훗날 자유의 여신상의 프레임도 설계했지만, 완성 전에 사망했다.[6]

비올레르뒤크는 파리 오페라 설계 경쟁에 참여했으나, 샤를 가르니에에게 밀려 탈락했다.

5. 1. 카르카손 성벽 복원 (1853-1879)

1853년, 비올레르뒤크는 1849년에 처음 계획했던 카르카손의 중세 성벽 복원 비용과 계획을 제시했다.[6] 최초의 요새는 서고트족이 건설했고, 그 위에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와 용담공 필리프가 1355년까지 모든 포위를 견뎌낸 강력한 방어 시설을 추가했다. 성벽은 대체로 온전했지만, 탑 꼭대기가 없고 많은 구조물이 낡은 벽에 세워져 있었다. 비올레르뒤크는 수세기에 걸쳐 성벽에 추가된 구조물을 철거하고 문, 벽, 탑을 원래 형태로 복원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무기 장착부를 발견했다. 그는 도시와 요새에 대한 상세한 역사를 자신의 그림과 함께 출판하여, 카르카손은 프랑스 중세 군사 건축물의 가장 좋은 예시이자 중요한 관광 명소가 되었다.[6]

5. 2. 뱅센 성과 피에르퐁 성 복원

1851년 프랑스 쿠데타나폴레옹 3세가 권력을 잡으면서 비올레르뒤크의 경력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황제의 후원자였던 프로스페르 메리메 덕분에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고, 랭스 대성당아미앵 대성당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아미앵 대성당에서는 루이 14세 시대에 추가된 프랑스 고전 장식을 제거하고 고딕 양식으로 복원할 것을 제안하여 황제의 승인을 받았다.[6]

1853년, 비올레르뒤크는 뱅센 성과 그 예배당 복원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예배당을 "쇠퇴하는 고딕 양식의 가장 훌륭한 표본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같은 해, 그는 카르카손의 중세 성벽 복원 계획을 수립했다. 서고트족이 건설하고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와 용담공 필리프가 증축한 이 요새는 19세기까지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지만, 탑의 꼭대기가 사라지고 성벽 주변에 많은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비올레르뒤크는 성벽에 추가된 구조물을 철거하고 문, 벽, 탑을 원래 형태로 복원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중세 시대의 무기 장착부를 발견하기도 했다. 카르카손 복원은 중세 군사 건축물의 훌륭한 예시로 평가받으며 주요 관광 명소가 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비올레르뒤크에게 피에르퐁 성 복원을 의뢰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에 의해 파괴된 이 성은 1812년 나폴레옹이 유적을 구입했고, 1848년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857년, 비올레르뒤크는 유적 위에 완전히 새로운 성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이 성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호화로운 네오 고딕 장식과 19세기 편의 시설을 갖춘, 고딕 양식의 정신을 되살린 건축물이었다.

피에르퐁 성


발루아 지방의 거의 중앙에 위치한 피에르퐁 성은 옛날부터 군사 거점으로 중요시되었으며, 오를레앙 공 루이에 의해 본격적인 방비 요새가 세워졌다. 1411년에는 부르고뉴인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그 후 방화 등의 파괴가 이어져 루이 13세는 반란 귀족의 거점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성의 파괴를 명했다. 다행히 이 해체 공사는 중단되었지만, 대대적인 파괴로 인해 성은 폐허가 되었다. 18세기에 폐허가 된 그 모습이 낭만주의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고, 별장으로 사용할 것을 표명한 나폴레옹 3세에 의해 1857년에 비올레르뒤크에게 수리가 명해졌다.

나폴레옹 3세의 당초 이상은 폐허를 바라보면서 별장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수리였다. 그 때문에 천수각과 망루 몇 개를 수리하고 나머지는 폐허인 채로 남겨둘 예정이었다. 그러나 수리 공사가 시작되자 1860년에는 외관을 모두 복원하고, 1862년에는 내부 장식까지 포함하여 완전한 별장으로 장식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공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로 인한 제2 제정의 종언으로 인해 일시 중단되지만 재개되었고, 비올레르뒤크 사후인 188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피에르퐁 성은 남아있는 것이 적은 중세의 성곽 건축으로서 귀중한 존재였다. 황제 부부의 주택 건축이 아니라 역사적 기념물로서 신중한 복원이 이루어졌다면 중요한 유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비올레르뒤크에 의한 수리는 오랫동안 비판받았고, 고고학자들의 최대 공격 대상이 되었다. 한편, 주택 건축으로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북서쪽 날개 부분에 황후 외제니를 위한 무도회장으로 만들어진 "여성 용사의 방"은 그가 힘을 쏟았던 부분으로, 황후를 중심으로 그녀의 친구들을 모델로 한 아홉 개의 여성 용사상이나 내부 장식이 아름답다. 그것들은 중세 건축 복원의 영역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듯한 창조성에 풍부하다. 벽면의 양식화된 꽃무늬나 가구 디자인은 윌리엄 모리스아르누보의 선구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피에르퐁 성의 수리는 과거의 귀중한 유구를 파괴했다고 크게 비판받았지만, 중세 건축 복원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건축의 모습을 모색했던 비올레르뒤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올레르뒤크의 피에르퐁 성 복원은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의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과 호엔쾨니히스부르 성은 물론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6. 건축 이론과 저술 활동

외젠 비올레르뒤크는 건축, 장식, 역사, 고고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100편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 그중 일부는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대표적인 저서로는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프랑스 건축 사전』(1854–1868), 『건축에 관한 대화』(1863–1872), 『어떤 집의 이야기』(1873),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지: 한 디자이너의 이야기』(1879) 등이 있다.

특히 『건축에 관한 대화』[17]에서 그는 철과 같은 새로운 재료의 사용과, 특정 양식이 아닌 기능에 적합한 건물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책은 1881년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서 큰 영향을 주었으며, 마천루 발명가 중 한 명인 시카고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구절을 자주 인용했다.

로잔 대성당은 그의 마지막 주요 복원 프로젝트로, 1873년부터 1876년까지 그의 계획에 따라 재건되었다. 비올레르뒤크 사후에도 작업은 계속되었는데, 종탑 재건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원래 팔각형 기단을 제거하고 새로운 첨탑을 추가한 점, 새로운 장식을 추가하여 첨탑 중간 높이에 박공을 얹고 원래 타일을 제거한 점, 가고일을 포함한 재료와 장식을 사용한 점 등이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25년에 그의 가고일과 원래 장식은 제거되었고, 첨탑은 타일로 덮였다.[17]

그의 명성은 프랑스 밖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의 첨탑과 지붕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 독일 포병에 의해 손상되자, 독일 정부는 비올레르뒤크에게 복원 계획에 대한 의견을 요청했다. 그는 독일 건축가에게 계획된 새 탑이 성당의 원래 정면 및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조언했고, 그의 조언은 받아들여져 교회는 원래 형태로 복원되었다.[17]

1872년, 비올레르뒤크는 전 국왕 루이 필리프의 후손이 소유한 앙부아즈 성 재건에 참여했다. 이 성은 1848년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몰수되었지만, 1872년 가족에게 반환되었다. 비올레르뒤크는 바닥 타일, 살롱의 가스등, 주방의 오븐, 하인을 부르는 전기 벨 등 모든 세부 사항을 설계했다.

1874년, 비올레르뒤크는 파리 교구 건축가직에서 사임했고, 폴 아바디가 그 뒤를 이었다.[7] 그는 말년에도 역사 기념물 위원회를 위해 진행 중인 복원 프로젝트를 감독했으며, 언론에서 건축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고 파리 시의회에 선출되기도 했다.

비올레르뒤크는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의 학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학생 시절 학교에 다니기를 거부했고, 교수로 잠시 가르쳤지만 압력으로 떠나야 했다. 1846년, 프랑스 아카데미의 종신 서기인 앙투안 크와트르메르 드 갱시와 "19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교회를 짓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드 갱시는 고딕 양식을 무질서하고, 무능하며, 퇴폐적이고, 품격이 없다고 비난했지만, 비올레르뒤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신사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예술의 귀환입니다... 로마에게 로마의 것을, 아테네에게 아테네의 것을 맡기세요."라고 답하며 고딕 양식을 옹호했다.[17]

그는 "13세기의 교회를 잠시만 연구해 보면 모든 구조가 변함없는 시스템에 따라 수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고딕 건축의 구조적 합리성을 강조했다.

6. 1. 구조 합리주의 이론

비올레르뒤크는 1858년 저서인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프랑스 건축 사전』 8권에서 복원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건물을 복원하는 것은 유지하거나, 수리하거나, 재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점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완전한 상태로 재건하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복원이 다음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설명했다.[17]

# "재건"은 정확성을 보장하는 계획, 사진, 고고학적 기록으로 과학적으로 문서화되어야 한다.

# 복원은 기념물의 외관뿐만 아니라 구조도 포함해야 하며, 더 견고한 재료를 더 현명하게 사용하여 건물의 수명을 연장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 복원은 명백한 증거에 반하는 수정 사항은 제외해야 하지만, 구조는 더 현대적이거나 합리적인 사용 및 관행에 맞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 복원은 건물에 가해진 이전의 수정 사항을 보존해야 하며, 이는 안정성이나 보존을 손상시키거나, 역사적 가치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경우를 제외한다.

그는 중세 건축에서 얻은 결론을 현대 건축에 적용했다. 그는 새로운 구조가 원래 구조보다 무겁지 않고, 중세 구조에서 발견되는 원래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한, 화재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복원에 철제 프레임을 사용하는 것이 때때로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중세 시대의 기념물은 신중하게 계산되었으며, 그 유기체는 섬세하다. 그들의 작품에는 과도한 것이 없고, 쓸모없는 것도 없다. 이 유기체의 조건 중 하나를 변경하면 다른 모든 것도 변경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결함으로 여기지만, 우리에게는 너무 자주 현대 건축에서 무시하는 품질이다. ... 왜 [보강 지지대가 있는] 두께 50센티미터의 벽이 충분한 안정성을 제공한다면, 두께 2미터의 값비싼 벽을 지어야 하는가? 중세 구조에서 작업의 모든 부분은 기능을 수행하고 작용을 소유했다."[17]

비올레르뒤크는 자신의 시대와 그 이후에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엄격한 역사적 정확성 대신 고딕 양식의 정신을 복원 작업에 추구했다는 비난을 자주 받았다.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또한 영국의 건축 작가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가 비올레르뒤크의 복원 작업의 강력한 반대자였다고 여긴다. 그러나 러스킨은 비올레르뒤크의 복원 작업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복원이라는 원칙 자체를 비판했다. 실제로 러스킨은 경력 초기에 복원에 대해 "건물은 관리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라는 매우 급진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비올레르뒤크의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은 "건물이 관리되지 않았다면 복원해야 한다"였다.[17]

러스킨의 저술에 기반한 새로운 연구[11]에 따르면, 러스킨과 비올레르뒤크 사이에 복원에 대한 반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오늘날 의문시되고 있다. "비올레르뒤크의 사전 외에는 모든 것이 정확한 건축에 관한 책은 없다".[12] 그리고 러스킨은 말년에 "영국에서는 비올레르뒤크가 프랑스에서 했던 일을 한 사람이 없다"는 유감을 표명했다.[13]

외젠 비올레르뒤크가 처음으로 복원 작업을 수행한 건축물은 라 마들렌 교회당이다. 오랫동안의 파괴 행위와 방치로 인한 열화 외에도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고딕 건축으로의 과도기적 건축물이며, 본당의 측벽을 지탱해야 할 측랑의 2층 부분(트리뷴)이 없는 등 구조적 결함을 가지고 있어 측벽이 바깥쪽으로 벌어지는 위기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역사 기념물 총감이었던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의뢰로 복원이 시작되었다.[17]

외젠 비올레르뒤크는 교회당의 구조적 결함을 실측 조사를 통해 파악하고, 본당의 천장과 플라잉 버트레스를 가설 구조물로 지지한 후 위기 상태에 있던 부분을 복원해 나갔다. 1859년에 복원이 완료되었다. 정식 건축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복원 현장에 투입된 그에게 이 첫 번째 복원 작업은 구조 분석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했으며, 동시에 고딕 건축에서는 모든 부위가 상호 구조적으로 대응하여 전체를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했다. 이는 구조 합리주의 이론의 확립으로 이어졌다.[17]

외젠 비올레르뒤크는 고딕 건축을 모두 역학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하여 고딕 종교 건축의 최대 특징인 교차 리브의 구조적 중요성을 제시했다. 그의 이론적 설명은 구석구석에 미쳐 첨탑이나 부벽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의 존재에 이론적 합리성을 부여했다. 이것이 그가 확립한 구조 합리주의 이론이다. 이로 인해 고딕 건축은, 그 전까지 중요시되던 고전 건축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의 확산과 과학의 발전을 배경으로, 당시의 신고전주의 건축은 두 방향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한쪽은 고고학적으로 과거의 건축 양식을 정확하게 재현하려 하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고전 건축의 합리적 해석에 기초하여 건축의 마땅한 모습을 추구하려 하는 것이다. 외젠 비올레르뒤크는 구조적 합리주의 이론을 통해 양자의 분열을 통합하고 건축에서의 이상적인 모습과 이상으로 삼아야 할 과거의 유구를 일치시키려 했다. 그 구체화가 바로 중세 고딕 건축이었다.[17]

6. 2. 『중세 건축 사전』(1854-1868)과 『건축 강화』(1862-1872)

비올레르뒤크는 건축, 장식, 역사, 고고학 등에 관해 100편이 넘는 저술을 남겼으며, 그중 일부는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프랑스 건축 사전』(1854–1868)과 『건축에 관한 대화』(1863–1872)가 있다.[22]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프랑스 건축 사전』(Dictionnaire raisonné de l’architecture française du XIe au XVIe siècle)은 비올레르뒤크가 중세 건축 복원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책이다.

『건축에 관한 대화』(Entretiens sur l’architecture)에서 그는 철 및 기타 신소재의 사용과, 특정 양식이 아닌 기능에 적합한 건물을 설계하는 것의 중요성에 집중했다. 이 책은 1881년에 영어로 번역되었고 미국에서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마천루의 발명가 중 한 명인 시카고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구절을 자주 인용했다.

6. 3. 새로운 건축 재료 '철'의 사용 옹호

외젠 비올레르뒤크의 건축론은 19세기 당시 새로운 건축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한 의 이용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보인다. 그는 고딕 건축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건축이야말로 좋은 건축이며, 19세기의 건축도 합리적인 건축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올레르뒤크는 중세 고딕 건축을 연구했지만 결코 회고주의자는 아니었으며, 과거와 현재 건축이 지향해야 할 것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그 차이를 재료의 차이에서 찾았으며, 새로운 재료인 철을 새로운 건축의 중요한 재료로 보았다. 『건축 강론』 제2권에는 철을 사용한 이상적인 건축의 예가 제시되어 있다.[7]

『건축 강좌』에서 제시된 주철을 이용한 콘서트 홀

7. 말년과 죽음

1878년 파리 만국 박람회 계획 및 건설에 참여했다. 그는 교육부 장관 쥘 페리에게 박람회의 주요 건물인 트로카데로 궁전을 박람회 이후 프랑스 전역의 건축물과 조각 모델을 전시하는 프랑스 기념물 박물관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는 받아들여졌고, 프랑스 기념물 국립 박물관은 그가 사망한 후인 1882년에 개관했다. 궁전은 1937년에 샤이요 궁전으로 재건되었지만 프랑스 기념물 박물관은 보존되어 오늘날에도 그곳에서 볼 수 있다.[22]

그의 말년에는 아들 외젠 루이(Eugène-Louis)가 역사 기념물 위원회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툴루즈의 어거스틴 수도원 회랑 복원이라는 단 하나의 새로운 프로젝트만 맡았다. 그는 일반 대중을 위해 설계된 건축 시대별 사전 시리즈를 완성했다. 또한 몽블랑 주변 알프스의 지리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여름에는 산에서 하이킹하며 여행에 대한 기사를 썼고, 1876년에는 알프스 재조림을 위한 대중 캠페인을 시작하며 이 지역의 상세 지도를 발행했다. 그는 사보이 풍 샬레를 본뜬 집이지만 장식을 최소화하여 형태가 기능을 따른다는 그의 새로운 원칙을 보여주는 로잔에 건설한 빌라인 ''라 베데트''에서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아들의 지휘 아래 있던 카르카손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여 검사했다. 1879년 알프스에서 고된 여름 하이킹을 한 후 병에 걸려 1879년 9월 17일 로잔에서 사망했다. 그는 로잔의 라 살라즈 묘지에 묻혔으며, 1946년에 그의 무덤과 기념비는 로잔의 부아르-르-보 묘지(제XVIII구역)로 옮겨졌다.[22]

8. 비판과 영향

외젠 비올레르뒤크의 건축 이론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받았다. 첫째, 고딕 건축의 교차 리브(rib)가 그가 주장한 만큼 구조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전쟁 피해를 통해 입증되었는데, 교차 리브가 파괴되어도 볼트 천장이 붕괴되지 않는 경우가 발견되었다. 둘째, 고딕 건축을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해도, 중세 장인들이 실제로 그러한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건축했는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장인들은 비합리적인 비례론을 사용하는 등 나름의 방식으로 건축을 진행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비올레르뒤크의 이론에 수정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비올레르뒤크가 근대 건축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는 고딕 건축의 합리적 해석을 통해 건축 자체의 합리성을 추구했으며,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건축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그의 이론은 아르누보 건축가뿐만 아니라 20세기 건축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17] 혁신적인 재료를 사용하고, 고전주의 건축 양식에서 벗어나 기능미를 추구하려 했던 근대 건축가들에게 비올레르뒤크의 건축 이론은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았다.

8. 1. 복원 방식에 대한 비판

비올레르뒤크는 복원에서 엄격한 역사적 정확성보다는 고딕 양식의 정신을 추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는 비올레르뒤크의 복원 작업에 반대했다고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11]에서는 러스킨이 비올레르뒤크의 복원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복원 원칙 자체를 비판했으며, "비올레르뒤크의 사전 외에는 모든 것이 정확한 건축에 관한 책은 없다"[12]고 평가했고, 말년에는 "영국에서는 비올레르뒤크가 프랑스에서 했던 일을 한 사람이 없다"라고 말했다는 사실[13]이 밝혀지면서 그 반대가 사실인지 의문시되고 있다.

비올레르뒤크의 복원 작업은 때때로 건물의 안정성을 보장하거나 디자인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비역사적인 추가를 포함했다. 예를 들어 노트르담 대성당의 플뢰쉬(첨탑)는 1786년에 제거되었으나, 비올레르뒤크는 원래보다 높고 날씨에 견딜 수 있도록 수정된 새로운 첨탑을 설계하여 조각상으로 장식했다. 이는 19세기와 20세기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합창단 수정 또한 비판받았다. 비올레르뒤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즉위했던 제단을 포함한 옛 합창단을 제거하고 고딕 양식의 제단과 장식으로 대체했으며, 샤르트르 대성당의 장미 창을 본뜬 작은 장미 창이 있는 새로운 만을 건설했다.[5]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비역사적인 발명이라고 비난했지만, 옹호자들은 비올레르뒤크가 모든 계획을 역사 기념물 검사관 프로스페르 메리메와 역사 기념물 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노트르담 대성당에 고딕 양식의 가고일, 키메라, 플뢰론, 첨탑을 추가한 것도 비판받았다. 이 장식들은 중세 시대에 존재했지만 루이 14세 시대에 대부분 제거되었고, 마지막 원래 가고일은 1813년에 철거되었다. 비올레르뒤크는 당대 다른 대성당의 예시를 모델로 새로운 가고일과 괴물을 제작했다.[5]

노트르담 대성당 성당 지면 주변 예배당을 위해 설계하고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도 비판받았다. 이 창문들은 그리자유로 정교한 고딕 디자인을 특징으로 하여 교회에 더 많은 빛을 들였다.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라수스 사망 이후 비올레르뒤크가 완성한 대대적인 복원은, 어떤 유보가 있을지라도, 성당에 새로운 빛을 선사했다. 19세기의 작업은 이제 이전 세기에 수행된 작업만큼이나 노트르담의 건축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라고 평가한다.[14]

카르카손 성벽 복원도 20세기에 비판받았다. 비평가들은 그가 건설한 탑의 뾰족한 덮개가 카르카손 지역이 아닌 프랑스 북부에서 더 일반적이며, 남부의 점토 타일 대신 북부의 슬레이트 타일을 사용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최근 복원 작업에서 번복되었다. 또한 비올레르뒤크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한 상태"를 추구했다는 비판도 있었다.[15] 옹호자들은 비올레르뒤크의 신속한 복원이 없었다면 많은 건물들이 손실되었을 것이며, 당시 지식으로 최선을 다했다고 반박한다.

모티머 휠러는 찰스 R. 피어스에 대한 항목에서 "그 [피어스]는 영국에서 건축 보존을 지배하고 세계 다른 지역에서 모델 역할을 해온 원칙을 세웠다. 그의 주요 원칙은 고대 구조물의 생존 유물을 보존하되 복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는 과도한 복원이 그것에 기반한 증거를 종종 흐리게 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비올레르뒤크와 그의 후계자들의 전통에서 벗어났다..."[16]라고 평가했다.

8. 2. 근대 건축에 미친 영향

비올레르뒤크는 근대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딕 건축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건축 자체의 합리성을 추구했으며,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건축의 유용성을 중시했다. 그의 이론은 아르누보 건축가뿐만 아니라 20세기 건축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17] 혁신적인 재료를 사용해 새로운 건축의 모습을 모색하고, 고전주의 건축가들이 숭배해 온 역사 양식에서 벗어나 건축의 기능미를 추구하려 했던 근대 건축가들에게 비올레르뒤크의 건축 이론은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저작물을 통해 자신의 건축 이론을 펼쳤는데, 특히 『건축에 관한 대화』(1863–1872)에서 철과 같은 신소재 사용과 기능에 적합한 건물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책은 1881년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서 많은 추종자를 얻었으며, 마천루 발명가 중 한 명인 시카고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구절을 자주 인용했다.

발루아 지방에 있는 피에르퐁은 군사 거점으로 중요시되었으며, 오를레앙 공 루이에 의해 요새가 세워졌다. 루이 13세는 반란 귀족의 거점이 될 것을 우려해 성을 파괴하려 했으나 중단되었고, 성은 폐허가 되었다. 18세기에 낭만주의자들 사이에서 폐허가 인기를 얻었고, 나폴레옹 3세는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1857년 비올레르뒤크에게 수리를 명했다.

나폴레옹 3세는 폐허를 보면서 별장 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수리를 원했다. 그러나 수리가 시작되면서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 장식까지 포함하여 완전한 별장으로 만드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공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었고, 비올레르뒤크 사후인 1885년에 완성되었다.

피에르퐁은 남아있는 것이 적은 중세 성곽 건축으로서 귀중한 존재였다. 황제 부부의 주택이 아닌 역사적 기념물로서 신중하게 복원되었다면 중요한 유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비올레르뒤크의 수리는 오랫동안 비판받았고, 고고학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한편, 주택 건축으로서는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황후 외제니를 위한 무도회장인 "여성 용사의 방"은 그가 힘을 쏟았던 부분으로, 황후와 친구들을 모델로 한 아홉 개의 여성 용사상과 내부 장식이 아름답다. 이는 중세 건축 복원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창조성을 보여준다. 벽면의 양식화된 꽃무늬와 가구 디자인은 윌리엄 모리스아르누보의 선구로 평가받는다. 피에르퐁 성 수리는 유구 파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중세 건축 복원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건축을 모색했던 비올레르뒤크의 모습을 보여준다.

9. 주요 복원 건축물

비올레르뒤크가 복원한 주요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 교회



; 시청

  • 생 앙토냉 노블 발 시청
  • 나르본 시청


; 성

  • 보르도의 로크타야드 성
  • 피에르퐁 성
  • 카르카손의 요새 도시
  • 쿠시 성
  • 벨기에 앙투앵 성
  • 파리의 뱅센 성
  • 앙부아즈의 앙부아즈 성


뱅센 성(1860년대 복원)의 요새


카르카손 성벽 (1853–1879 복원)


로잔 대성당, 스위스 (1874–1910 복원)

참조

[1] 서적 " Avant-garde et tradition dans les arts du décor en France. Lectures critiques autour de Guillaume Janneau. " Université de Provence - Aix-Marseille
[2] 서적 William Burges and the High Victorian Dream Frances Lincoln
[3] 간행물 An appraisal of Viollet-le-Duc 1992
[4] 웹사이트 Léon Gaucherel https://www.britishm[...] 2021-10-31
[5] 서적 Decouvrir Notre-Dame de Paris Les Editions du Cerf
[6] 서적 La Cité de Carcassonne Librarie des Imprimeries Réunies
[7] 웹사이트 Paul Abadie, architecte http://histoire-vesi[...] Histoire-vesinet.org 2014-01-27
[8] 기타 Statue of Liberty: Building a Colossus
[9] 문서 Dictionnaire raisonné de l'architecture française du XI au XVI siecle
[10] 서적 Du style Gothique au Dix-neuvième Siécle 1846-06
[11] 학위논문 The great flaw in the man https://academiccomm[...] 2018
[12] 서적 letter to his pupil Percy Morley Holder Royal Institute of British Architects
[13] 서적 Praeterita (memories of youth) George Allen éditions
[14] 기타 Descriptive plaque near altar of Notre-Dame 2018-05-22
[15] 서적 A Social History of Knowledge II: From the Encyclopaedia to Wikipedia https://archive.org/[...] Wiley
[16] 간행물 The gatehouse of Pevensey Castle
[17] 서적 Heavenly Mansions and Other essays on Architecture Cresset Press
[18] 웹사이트 Designing Building Failures http://www.ochshornd[...] Cornell University
[19] 서적 The Architectural Theory of Viollet-le-Duc – Readings and Commentary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20] 웹사이트 Survey of London: volume 37: Northern Kensington http://www.british-h[...] British History Online 2012-06-28
[21] 뉴스 Eugène Viollet-le-Duc's 200th birthday: Architect celebrated in Google doodle https://www.independ[...] 2014-01-27
[22]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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