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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시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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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레시아 전투는 기원전 5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알레시아에서 벌인 전투이다. 젊은 아르베르니족 족장 베르킨게토릭스가 이끄는 갈리아 연합군은 로마에 대항하여 봉기했고, 카이사르는 알레시아를 포위하여 공성전을 벌였다. 카이사르는 이중 포위망을 구축하여 갈리아군과 지원군을 모두 막았고, 결국 베르킨게토릭스는 항복했다. 알레시아 전투는 갈리아 저항의 종말을 알렸고, 카이사르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으며, 로마 공화정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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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시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일부갈리아 전쟁
목재 요새와 참호
알레시아 투자 요새의 재건된 부분
날짜기원전 52년 9월
장소알리즈-생트-렌, 프랑스
영토갈리아의 남은 지역이 로마 공화국의 일부가 됨
결과로마의 갈리아 정복 완료
로마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로마 공화국
교전국 2갈리아 연합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지휘관 2베르킨게토릭스
베르카시벨라우노스
세둘로스
콤미우스
메디오마트리키
전력
병력 110–11개 군단 (30,000–50,000명의 군단병)
10,000명의 보조병
총 60,000–75,000명의 로마군과 동맹군
병력 2고대 자료: 총 328,000–470,000명
80,000–170,000명 포위군
248,000–300,000명 구원군
현대 추정: 총 70,000–180,000명
20,000–80,000명 포위군
50,000–100,000명 구원군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12,800명 사망 및 부상
사상자 2290,000명 (카이사르, 과장됨)
250,000명 사망
40,000명 포로

2. 전투 전의 상황

기원전 58년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의 여러 부족을 로마의 지배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기원전 53년과 기원전 52년] 겨울, 카이사르가 이탈리아 북부에 머무는 동안 카르누테스족오를레앙의 로마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3]

이 사건을 계기로 아르베르니족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 부족들을 규합하여 로마에 대항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철저한 초토 작전과 게릴라전을 펼쳐 로마군의 병참을 파괴하려 했다.[34]

이에 카이사르는 신속하게 군단을 결집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로마군은 케나붐을 탈환하고 아바리쿰을 점령하여 병참 문제를 해결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 전투에서 패배하여 갈리아 나르보넨시스까지 후퇴하기도 했지만, 게르만족 기병을 고용하여 전력을 보강했다.[35]

로마군은 만두비족의 도시 알레시아로 도망친 갈리아군을 포위하였고, 곧 티투스 라비에누스의 군단도 합류하여 포위군은 약 60,000명에 달했다.

2. 1. 로마의 갈리아 정복

기원전 58년 이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수많은 갈리아 부족과의 전투와 두 번에 걸친 브리타니아 원정, 라인강 도하를 치르면서 갈리아의 여러 부족을 로마의 패권 아래 두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53년과 기원전 52년 겨울 동안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북부에 머물면서 속주의 통치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카르누테스족이 카이사르의 부재를 틈타 오를레앙의 로마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터졌다.[33]

아르베니족의 새로운 족장이 된 젊은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에 맞서 갈리아 부족 전체가 총궐기하여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고 호소하며 갈리아 부족의 연합과 총궐기를 부르짖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아르베르니족 외에 세노네스족, 아우렐리족, 픽토네스족 등의 지지를 얻어 갈리아 연합군의 최고 지휘권을 위임받았다. 베르킨게토릭스의 호소는 들불처럼 갈리아의 여러 부족에 퍼졌고, 많은 부족들이 사상 처음으로 단결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카이사르는 즉각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들어가 모든 군단을 집결시킨 다음 베르킨게토릭스에 맞섰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초토화 전략과 농성전을 반복하며 로마군을 괴롭혔는데,[34] 중요 거점을 제외하고 도시와 마을을 불태우고 식량과 가축도 최소한의 것 외에는 남기지 않아 로마군의 병참 파괴를 노렸다.[34] 로마군은 보르주에서 농성하는 갈리아군을 격파했으나(아바리쿰 포위전), 게르고비아 전투에서는 카이사르가 패하여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기회로 갈리아군은 평원에서 로마군과 전면전을 펼쳤으나 패퇴하였고, 베르킨게토릭스는 6만 명을 이끌고 알레시아 요새로 철수하여 농성전을 준비하는 한편 모든 갈리아 부족에게 연락하여 알레시아로 집결하게 하였다.

2. 2. 갈리아의 총궐기

기원전 52년, 아르베르니족의 젊은 족장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에 맞서 갈리아 부족 전체가 총궐기하여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의 호소는 들불처럼 갈리아 여러 부족에 퍼져, 많은 부족들이 사상 처음으로 단결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33]

기원전 53년 카이사르에게 패배하고 지도자 아코(Acco)가 처형된 카르누테스족을 중심으로 로마에 대한 적대적인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기원전 52년, 카르누테스족 군대는 케나붐(현 오를레앙)을 공격하여 로마인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했다.[33]

케나붐 사건이 갈리아 전역에 알려지자, 베르킨게토릭스는 종족 내 친로마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로마에 맞설 것을 표명했다. 아르베르니족 외에 세노네스족, 아우렐리족, 픽토네스족 등이 베르킨게토릭스에게 갈리아 연합군의 최고 지휘권을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아직 봉기에 참여하지 않은 갈리아 부족들에게 결속을 호소하며 각 부족에서 인질을 잡았다.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처벌했다. 그는 과거 로마군과의 전투를 연구하여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 철저한 초토 작전과 게릴라전을 펼쳤다. 중요 거점을 제외한 도시와 마을을 불태우고, 식량과 가축도 최소한만 남겼다. 이는 로마군의 병참을 파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34]

2. 3. 카이사르의 대응

기원전 54년 아두아투카 전투에서 암비오릭스에게 패배한 경험이 있는 카이사르는, 기원전 52년 갈리아 총궐기에 맞서 10개 군단을 신속하게 결집시켰다. 초토 작전으로 인해 병참을 적에게 의존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카이사르는 공격을 결심했다.[34] 로마군은 먼저 케나붐을 탈취하고, 아바리쿰을 목표로 삼았다. 아바리쿰은 비투리게스족의 중심 도시이자 갈리아 전체의 중심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고, 초토 작전 대상에서 제외되어 병참 조달에도 유리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아바리쿰을 불태우려 했으나, 비투리게스족의 간청으로 취소되었다. 4월까지 로마군은 아바리쿰을 점령했고, 카이사르는 본보기로 주민과 수비대 40,000명을 몰살했다.[34]

병참 문제가 해결되자 로마군은 적극적으로 작전을 펼쳤다. 카이사르는 티투스 라비에누스에게 4개 군단을 주어 북부 작전을 맡기고, 자신은 6개 군단을 이끌고 아르베르니족의 영지인 남부를 공격했다. 그러나 베르킨게토릭스는 끈질기게 저항했고, 게르고비아 전투에서 카이사르를 격파했다. 이 패배로 카이사르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까지 후퇴하여 전력을 재편성하려 했다. 철수 과정에서 카이사르는 정예 갈리아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게르만족 기병을 고용했다. 당시 카이사르는 게르만 기병을 즉시 전력으로 만들기 위해 로마 기병의 말을 빼앗아 게르만 기병에게 주었다.[35]

로마군은 산악 지대와 아르베르니족 지배 지역을 우회하기 위해 북상 후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을 추격하여 디종 근처에서 공격했으나, 게르만 기병과 로마 중장 보병의 공동 작전으로 갈리아군은 패퇴했다.[36][37] 갈리아군은 만두비족의 도시 알레시아로 도망쳤고, 카이사르는 이를 포위했다. 곧 라비에누스의 군단도 합류하여 포위군은 로마 정규군 12개 군단과 아우크실리아를 합쳐 약 60,000명이 되어 전력적 불안은 해소되었다.

당시 로마군과 갈리아군의 병력은 다음과 같다.

구분총사령관부관병력
로마군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티투스 라비에누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 가이우스 파비우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외로마 군단 12개 군단, 보병 30,000 - 60,000명 및 기병 (여러 설이 있음)
갈리아군베르킨게토릭스, 코미우스(아르트레바테스족), 빌리도마루스, 에포레드릭스 (하에두이족), 베르카시벨라우누스(아르베르니족)해당사항 없음보병: 약 250,000명, 기병: 약 8,000명 (여러 설이 있음)



위의 병력 수치는 『갈리아 전기』에 근거하지만, 갈리아군의 병력에는 과장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현대 역사가들은 알레시아의 갈리아군이 20,000명에서 30,000명, 포위 해제군은 50,000명에서 70,000명으로 로마군과 거의 동등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3. 공방전의 전개

카이사르는 반란 소식을 듣고 로마에서 북쪽으로 급히 이동하여 프로방스에서 방어 태세를 갖춘 후, 갈리아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아게디눔으로 향했다. 카이사르는 보급품 확보를 위해 우회로를 택하여 여러 ''오피둠''(oppidum, 요새 도시)을 점령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군을 굶주리게 하는 전략을 세웠고, 로마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식량 조달 부대와 보급 행렬을 습격했다. 그는 많은 ''오피둠''을 포기하고 가장 강력한 곳만 방어하여 보급품이 로마군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카이사르는 보급품 부족으로 아바리쿰의 ''오피둠''을 포위했다.[11]

베르킨게토릭스는 아바리쿰 방어에 반대했지만, 비투리게스 큐비족의 설득으로 방어에 나섰다. 카이사르는 방어 요새를 건설하고 공성 무기를 제작하여 폭풍우를 틈타 공격했다. 공성 탑과 포병 공격으로 성벽에 구멍을 냈고, 로마군은 정착지를 약탈하고 4만 명을 죽였다고 한다. 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이두이족이 반란에 합류하여 카이사르의 보급선에 차질이 생겼다.[11]

베르킨게토릭스 금화, 기원전 53–52년.


베르킨게토릭스는 게르고비아로 물러났고, 카이사르는 그곳을 공격했지만 게르고비아 전투에서 패배했다. 카이사르는 70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포위를 풀었고, 베르킨게토릭스의 승리는 많은 부족을 끌어들였다.[11] 이후 베르킨게토릭스는 기병대를 이끌고 뱅겐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패배했다.[11]

기병대 패배 후, 베르킨게토릭스는 만두비족의 알레시아 요새로 물러났다. 카이사르는 알레시아를 포위하고 수비군을 굶겨 죽이는 방식을 선택했고, 베르킨게토릭스는 구원군을 요청했다. 카이사르는 한 달에 걸쳐 약 25마일(40km)의 요새를 건설했는데, 여기에는 참호, 대기병 해자, 탑, 부비트랩 등이 포함되었다. 요새는 수비군과 구원군 모두를 방어하기 위해 두 줄로 건설되었다. 베르킨게토릭스의 구원군이 도착했지만, 합동 공격은 실패했다.[11]

알레시아는 두 강 사이에 있는 높은 언덕 위 요새였다. 카이사르는 기아로 항복을 강요하기 위해 약 8만 명의 병력과 민간인이 있는 알레시아를 포위하고 대요새를 건설했다. 길이는 16km였고 23개의 요새 (탑)가 있었다.[12] 갈리아인들은 기병 공격으로 건설을 방해했지만, 카이사르는 게르만 동맹군을 시켜 격퇴했다.[13]

베르킨게토릭스는 밤을 틈타 기병대를 파견하여 지원군을 요청했다.[14] 카이사르는 6미터 깊이의 참호를 파고, 그곳에서 592m 떨어진 곳에 추가 작업을 했다. 두 참호 사이에 4.45m 깊이의 참호 두 개를 더 팠고, 안쪽 참호에는 강물을 채웠다. 세 참호 뒤에는 3.57m 높이의 둑을 쌓고 성가퀴와 보루를 설치했으며, 24m 간격으로 포탑을 설치했다.[15]

로마군이 목재와 식량을 구하러 멀리 이동하면서 병력이 감소하자, 갈리아인들이 작업장을 공격했다. 카이사르는 방어를 위해 말뚝, 구덩이, 철 갈고리 등 추가 구조물을 설치했다.[16] 또한, 갈리아 구원군에 대비하여 반대 방향으로 20.7km 길이의 외부 요새(환요새)를 건설했다.[17]

알레시아 주민과 병사들의 식량이 부족해지자, 베르킨게토릭스는 곡물을 배급했다.[18] 갈리아인들은 노인과 병자를 내보내기로 했지만, 카이사르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19] 베르킨게토릭스는 이들을 요새 사이에 버려두어 굶어 죽게 했다.

3. 1. 알레시아 포위망 구축

카이사르는 알레시아 요새를 포위하기 위해, 약 한 달 동안 7개의 다양한 형태의 포위망을 구축하여 적을 압박했다. 이 포위망은 갈리아 군뿐만 아니라 바깥쪽에서 올 증원군에도 대비한 것이었다.[38]

종류설명
토루총 연장 18킬로미터, 높이 4미터로 알레시아 전체를 포위. 목재와 석재로 강화되었으며, 적병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엄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2열 토루 앞에 폭 4.5미터, 깊이 1.5미터의 호를 2열로 팠고, 알레시아 측의 호에는 강에서 물을 끌어왔다.
5열 호 ("묘표")2열의 호 앞에 깊이 1.5미터의 호가 5열로 파여져, 바닥에는 뽑을 수 없도록 뿌리를 묶은 엄나무를 늘어놓았다. 이것을 "묘표"(Cippi)라고 불렀다.
구멍 ("백합")묘표 앞에 깊이 1미터의 구멍을 1미터 간격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8열 팠고, 바닥에는 뾰족한 말뚝을 박아 넣었으며, 구멍 위는 잔가지와 풀로 위장했다. 이것을 "백합"(Lilium)이라고 불렀다.
말뚝 ("자극")백합 앞에 양쪽에 철제 갈고리가 달린 말뚝이 대량으로 박혀 있었다. 이것을 "자극"(Stimulos)이라고 불렀다.
공백 지대 및 호자극의 끝에서 알레시아까지는 어느 정도의 공백 지대를 두고, 그 앞에는 폭 6미터의 호를 팠다.
감시소 및 야영지토루 내 각 곳에는 방어 거점이 되는 감시소를 23곳, 출격 거점이 되는 야영지를 7곳 설치하여, 포위망의 어느 곳에 공격이 가해지더라도 지원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카이사르가 알레시아에 건설한 요새 지도
카이사르가 알레시아에 건설한 요새 지도. 삽입: 십자 표시는 갈리아(현재 프랑스)의 알레시아 위치를 나타낸다. 원은 요새 북서쪽 구역의 약점을 보여준다.


알레시아에 있는 카이사르 군대의 요새 재건 (MuséoParc Alésia: )


로마군은 약 3주 만에 이 대규모 토목 공사를 해냈다. 전문 공병 장교를 둘 정도로 진지 구축을 중시했던 로마군이기에 가능했다.[38]

베르킨게토릭스는 공사를 방해하기 위해 몇 차례 기병을 내보냈지만, 게르만 기병의 분전으로 번번이 격퇴되었다. 안쪽에서의 포위망 돌파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베르킨게토릭스는 동맹 부족에게 구원군을 요청하는 사자를 파견했다.

제1 포위망이 완성되자, 로마군은 구원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외곽에 유사한 토루, 호, 묘표, 백합, 자극을 설치했다. 외곽 토루의 총 연장은 21킬로미터에 달했다. 이것 역시 내측과 마찬가지로 약 3주 만에 완성되었다. 이로 인해 알레시아는 이중 포위망으로 완전히 둘러싸이게 되었다.[38] 공사가 완성되자, 카이사르는 로마군 60,000명의 30일분 식량을 옮겨오게 하여,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져도 저항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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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갈리아 증원군 도착과 초기 전투

9월 말, 보병 25만, 기병 8,000명으로 구성된 갈리아 구원군이 알레시아 남서쪽에 진지를 구축했다. 다음 날, 구원군은 로마군의 포위선을 공격했고, 이에 맞춰 베르킨게토릭스도 성 안에서 출격했다. 그러나 로마군의 방어는 견고했고, 갈리아군은 해가 질 때까지 공격했지만 포위선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19]

다음 날, 갈리아군은 남서쪽에서 야간 기습을 시도했다. 이 공격은 어느 정도 성공하여 갈리아군은 토루(土壘, 흙으로 쌓은 방어 시설)까지 접근했다. 이 소란을 알아챈 베르킨게토릭스도 즉시 출격하여 포위선 돌파를 시도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에게 기병대를 맡겨 요격하게 했다. 안토니우스와 트레보니우스는 먼저 포위선 밖으로 출격한 후, 토루에 접근해 있는 구원군의 후방으로 돌아갔다. 협공의 위험을 감지한 구원군은 새벽을 기다리지 않고 철수했다. 베르킨게토릭스의 군대 역시 포위선을 뚫지 못하고 알레시아로 돌아갔다.[19]

3. 3. 갈리아의 총공세와 카이사르의 지휘

갈리아군은 베르킨게토릭스의 사촌 베르카시벨라우누스에게 6만 명을 주어 로마군 포위망의 가장 약한 북쪽 진지를 공격하게 했고, 정오에 세 군데에서 동시 다발적인 총공세를 펼쳤다. 카이사르는 높은 망루에서 전투 상황을 지휘하며, 부장 라비에누스를 북쪽으로 보내 공격을 막게 했다.

안팎의 갈리아군의 총공세에 포위망 몇 군데는 뚫렸지만, 카이사르가 적재적소에 지원군을 보내어 막을 수 있었다. 가장 전투가 치열한 북쪽 전선에서 카이사르는 직접 증원군을 이끌고 전선에 투입되었다. 로마 기병대의 배후 기습으로 갈리아군은 쫓겨 괴멸되었고 베르카시벨라우누스는 생포되었다. 요새 안에서 공격하던 갈리아군도 북쪽 전선이 무너지자 요새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포위하던 갈리아 대군도 퇴각했다.[20][21][22][23]

카이사르는 4개 코호트를 소집하고 기병 일부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다른 기병대에게는 외곽 요새를 떠나 갈리아 구원군을 후방에서 공격하라고 지시하며 라비에누스를 지원하기 위해 행군했다. 라비에누스는 붕괴 직전에 있었고, 카이사르에게 지시받은 대로 돌격하겠다는 결정을 알렸다. 카이사르는 서둘렀다. 그의 도착은 로마 군대를 자극하여 "투창을 버리고 칼로 교전을 벌였다."[22] 로마 기병대가 갑자기 갈리아군 후방에서 목격되었고, 로마군은 빠르게 진격했다. 갈리아군은 도망쳤고, 기병대에 의해 요격되어 학살되었다. 포위된 갈리아군은 요새에서 후퇴했다. 그들은 캠프에서 도망쳤고, 카이사르는 "병사들이 잦은 증원과 하루 종일의 노동으로 지치지 않았다면, 모든 적의 군대가 파괴되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23] 자정에 로마 기병대가 그들을 추격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온 땅으로 도망쳤다.

3. 4. 전투의 결과

다음날 적장 베르킨게토릭스는 무기를 버리고 카이사르에게 투항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 따르면 베르킨게토릭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투항했다고 한다.[40]

카이사르에게 투항하는 베르킨게토릭스, Lionel-Noël Royer. 1899년작.


알레시아 전투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침공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사실상 갈리아 전쟁의 종말을 알렸다. 다음 해(기원전 50년)에는 잔당 소탕 작전이 벌어졌다. 갈리아는 로마의 패권 아래에 복속되었고, 약 400년 후 3세기의 위기 때 갈리아 제국이 세워질 때까지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갈리아는 로마의 충실한 속주로 계속 남아있었다.

아르베르니만이 게르고비아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승리한 덕분에 독립을 유지했다.

카이사르에게 알레시아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엄청난 개인적인 성공이었다. 원로는 이 승리에 대해 20일간의 감사제를 선포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개선 행진을 거행하는 영예를 카이사르에게 부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고, 2년 후인 기원전 49년에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 내전(기원전 49~45년)을 촉발했고, 그 전쟁에서 승리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포로로 잡혀 5년 동안 로마에서 억류되었다. 포로 적 지도자에게 전통적으로 행해졌던 것처럼, 그는 개선식에서 거행된 후 툴리아눔으로 끌려가 기원전 46년에 의례적으로 교살되었다.[27]

갈리아군과 살아남은 알레시아의 시민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아에두이족은 로마의 관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해방되었고, 일부는 카이사르의 군단에 흡수되었다. 그 외의 갈리아인들은 병사 1명당 1명씩 노예로 주어졌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한 영웅으로 로마 민중의 우상으로 떠올랐고, 로마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그 이후 결국 원로원파와 대립하여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알레시아 전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침공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의 종말이자, 사실상 갈리아 전쟁의 종결을 의미했다. 이듬해(기원전 50년)에는 잔당 소탕 작전이 벌어졌고, 로마 내전 기간 동안 갈리아는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야 했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기원전 39~38년에 갈리아의 첫 총독이 되어, 기원전 39년에는 우비족을 라인강 서쪽에 정착시켰고, 기원전 38년에는 아키텐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갈리아의 수도인 루그두눔을 중심으로 방사형 도로망을 건설했다. 게르고비아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승리한 아르베르니족만이 독립을 유지했다.

갈리아는 로마의 패권에 복속된 후 약 400년 동안 3세기의 위기 때 갈리아 제국이 세워질 때까지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고 충실한 속주로 남았다. 폴 K. 데이비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연합군 격파는 이후 500년간 로마의 갈리아 지배 기반을 다졌고, 로마 정부와의 경쟁을 초래하여 이탈리아 반도 침공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28]

카이사르의 부하들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갈리아 전쟁 후 원로원파에 합류하여 로마 내전에서 카이사르의 적으로 싸우다 기원전 45년 문다 전투에서 전사했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는 기원전 45년 카이사르의 보좌 집정관이 되었으나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하여 기원전 43년 스미르나에서 살해되었다.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는 갈리아 전쟁 후에도 카이사르의 부하로 로마 내전에 참전했지만, 카이사르를 공화정 파괴자로 여겨 암살에 가담했다. 이후 공화정을 지지하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패배하여 기원전 43년에 살해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 주모자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론기누스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필리피 전투에서 격파하고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자처했으나, 또 다른 후계자 후보 옥타비아누스와의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고 기원전 30년 자살했다.

4. 1. 갈리아의 로마 속주 편입

알레시아 전투에서 베르킨게토릭스가 항복하면서, 사실상 갈리아 전체의 조직적인 저항은 끝났다. 이후 일부 부족이 저항을 계속하기도 했지만, 기원전 51년에는 모든 부족이 로마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갈리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갈리아 벨기카, 갈리아 아퀴타니아의 3개 관구로 분할되었다.[26]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의 성공으로 갈리아의 파트로네(보호자)가 되었고, 여기서 얻은 막대한 자금, 인재, 자원을 바탕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원로원은 특별히 20일간의 개선식을 허가했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거절했다.[26]

갈리아 총독으로서 카이사르는 자유롭게 재량을 발휘하며 실력을 쌓아갔고, 이에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원로원파는 초조함을 느꼈다. 기원전 49년, 군대 해산과 본국 소환을 명하는 원로원 최종 권고가 발동되고,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로마 내전이 발발했다. 카이사르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정적들을 몰아냈고, 복속된 갈리아인 병사들이 그의 군단을 지탱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에 종신 독재관으로 선출되었지만, 기원전 44년암살되었다.[26]

베르킨게토릭스는 마멜티누스 감옥에서 6년간 포로 생활을 한 후,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거행한 개선식 후에 처형되었다.[42] 19세기, 자유주의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프랑스)의 자유와 독립을 추구한 영웅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4. 2. 카이사르의 정치적 입지 강화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하여 로마 민중의 우상으로 떠올랐고, 로마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었다. 원로는 이 승리에 대해 20일간의 감사제를 선포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카이사르에게 장군 경력의 정점인 개선 행진을 거행하는 영예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갈리아 총독으로서 카이사르는 자유롭게 재량을 발휘하며 더욱 실력을 축적해 갔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원로원파는 초조함을 느꼈다. 결국 카이사르는 원로원파와 대립하여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고, 2년 후인 기원전 49년에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 내전(기원전 49~45년)을 촉발했고, 그 전쟁에서 승리했다.

카이사르는 내전 기간 동안 매년 집정관으로 선출되고, 여러 임시 독재관에 임명된 후, 기원전 44년에 로마 원로원에 의해 "종신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26] 그러나 그의 끊임없이 증가하는 개인적 권력과 명예는 로마의 전통적인 공화주의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결국 카이사르는 암살되었고, 이후 더 많은 내전이 뒤따랐다. 마지막 내전은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투스로 알려짐)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사이의 로마 단독 통치권을 둘러싼 분쟁이었으며,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했다. 이로 인해 로마 공화국은 사실상 종말을 맞이하고 황제에 의한 통치가 시작되었다.

4. 3. 베르킨게토릭스의 최후와 역사적 평가

베르킨게토릭스는 다음날 무기를 버리고 카이사르에게 투항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 따르면, 베르킨게토릭스는 "이 전쟁은 나의 필요에서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위해 행했다. 운명은 양보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내가 죽어 로마군에 보상하든지, 산 채로 로마군에 인도되든지 어찌 되었든 이 한 몸을 모두에게 바치겠다"라고 말하며 투항했다고 한다.[27]

알레시아 전투에서 베르킨게토릭스가 항복하면서 사실상 갈리아 전체의 저항은 종말을 맞이했다. 이후 일부 부족이 저항을 계속하기도 했지만, 카이사르에게 평정되어 기원전 51년에는 모든 부족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갈리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어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갈리아 벨기카, 갈리아 아퀴타니아의 3개 속주로 분할되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에 성공하여 갈리아의 파트로네(보호자)가 되었고, 이를 통해 얻은 막대한 자원, 인재, 자금을 바탕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막대한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지중해 연안에 비해 미개지가 많았기 때문에 후일 폼페이우스 등과의 내전에서는 재력 등에서 밀렸다. 원로원은 특별 배려로, 통상 5일로 정해져 있던 개선식을 20일간 열도록 허가했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거절했다.

갈리아 총독으로서 카이사르는 자유롭게 재량을 발휘하며 더욱 실력을 쌓아갔기 때문에, 폼페이우스 등 원로원파는 초조함을 느꼈다. 기원전 49년, 군대 해산과 본국 소환을 명하는 원로원 최종 권고 발동, 카이사르의 루비콘 강 도하로 인해 로마 내전이 발발했다. 카이사르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모든 정적을 몰아냈다. 이 내전에서 카이사르의 군단을 지탱한 것은 복속된 갈리아인 병사였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에 종신 독재관으로 선출되었지만, 기원전 44년암살되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마멜티누스 감옥에서 6년간 포로 생활을 한 후,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거행한 개선식 후에 처형되었다.[42] 19세기 자유주의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프랑스)의 자유와 독립을 추구한 영웅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암비오릭스벨기에의 영웅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5. 알레시아 유적지 논쟁

오랫동안 알레시아 전투의 실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초기에는 프랑슈콩테의 알레즈와 코트도르의 알리즈-생트-렌 두 마을이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후자를 지지하여 1860년대에 이 지역의 로마 야영지 존재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발굴하기 위한 고고학 연구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 후 그는 최근 발견된 유적지에 베르킨게토릭스 동상을 헌정했다.[29]

그러나 알리즈-생트-렌이 실제 알레시아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은 계속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그 장소는 기병대 및 추가 인원과 함께 갈리아 보병 80,000명이라는 수정된 추정치조차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한 이 지역의 지형이 카이사르의 묘사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었다. 1960년대, 프랑스 고고학자 앙드레 베르티에는 언덕 꼭대기가 포위 공격을 필요로 할 만큼 너무 낮았고, "강"은 실제로는 작은 개울이라고 주장했다.[29]

베르티에는 전투 위치가 쥐라 산맥 입구에 있는 쇼데크로트네라고 제안했는데, 이곳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 묘사된 내용에 더 잘 부합한다고 보았다. 이 장소에서 로마 요새가 발견되기도 했다. 소르본 대학교 교수 다니엘 포르테는 알리즈-생트-렌을 전투 장소로 보는 것에 계속 이의를 제기했지만, 알레시아 박물관 관장 로랑 드 프로베르빌은 과학적 증거가 이러한 식별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 고전 역사가이자 고고학자 콜린 웰스는 1990년대 알리즈-생트-렌에서 진행된 발굴 조사가 그 장소에 대한 모든 의문을 해소해야 했으며, 대체 위치에 대한 일부 주장을 "...열정적인 허튼 소리"로 간주해야 한다고 보았다.[30]

참조

[1] 서적 Caesar 1989-1997
[2] 서적 The making of the roman army https://archive.org/[...] 1998
[3] 문서 Julius Caesar, Commentarii de Bello Gallico 7.71
[4] 문서 Julius Caesar, Commentarii de Bello Gallico 7.76
[5] 문서 Plutarch, Parallel Lives, Life of Caesar, 27, 3.
[6] 문서 Strabo, Geographica, IV, 2, 3
[7] 웹사이트 Caesar’s Grand Siege at Alesia https://warfarehisto[...] 2023-09-19
[8] 웹사이트 Gallic Wars: Battle of Alesia https://www.thoughtc[...] 2019-01-13
[9] 웹사이트 Alésia Mandubiorum l'Hypothèse jurassienne http://alesia.jura.f[...] 2011-05-09
[10] 문서 Julius Caesar, Commentarii de Bello Gallico 7.90
[11] 문서 Caesar, De Bello Gallico, VII, 67.
[12] 문서 Julius Caesar, Commentarii de Bella Gallico 7.69
[13] 문서 Julius Caesar, Commentaries on the Gallic Wars, 7.70
[14] 문서 Caesar, Commentaries on the Gallic War, Book 7, Chapters 63-90
[15] 문서 Julius Caesar, Commentaries on the Gallic Wars, 7.72
[16] 문서 Julius Caesar, Commentaries on the Gallic Wars, 7.73
[17] 문서 Julius Caesar, Commentaries on the Gallic Wars, 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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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문서 Julius Caesar, Commentaries on the Gallic Wars, 7.78
[20] 문서 Julius Caesar, Commentaries of the Gallic Wars, Book VII.86
[21] 문서 Julius Caesar, Commentaries of the Gallic Wars, Book VII.87
[22] 문서 Julius Caesar, Commentaries of the Gallic Wars, Book VII.88.
[23] 문서 Julius Caesar, Commentaries on the Gallic Wars, Book VII.88
[24] 서적 Alesia 52 BC: The final struggle for Gaul (Campaign) Osprey Publishing 2014-06-20
[25] 문서 Julius Caesar, Commentaries of the Gallic Wars, Book VI.88
[26] 서적 Caesar: Life of a Colossus Yale University Press
[27] 서적 Alesia 52 BC: The final struggle for Gaul (Campaign) Osprey Publishing 2014-06-20
[28] 서적 100 Decisive Battles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The World’s Major Battles and How They Shaped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29] 뉴스 France's ancient Alesia dispute rumbles on https://www.bbc.co.u[...] BBC 2012-08-27
[30] 간행물 Alesia and Kalkriese compared and contrasted: local chauvinism, nationalistic fervor, and sober archaeology http://www.journalof[...] 2012-08-27
[31] 서적 Delbrück 1990, p. 504 https://books.google[...]
[32] 서적 History of the art of war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Bison Book
[33] 문서 カエサル「ガリア戦記」7.3
[34] 문서 カエサル「ガリア戦記」7.14
[35] 문서 カエサル「ガリア戦記」7.65
[36] 서적 Le Dossier Vercingétorix Actes Sud/Errance 2001
[37] 서적 ガリア戦記
[38] 서적 ガリア戦記
[39] 서적 ガリア戦記
[40] 서적 ガリア戦記
[41] 서적 英雄伝
[42] 서적 Storia rom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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