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니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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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안니스 3세는 1192년경 태어나 1254년 사망한 니케아 제국의 황제이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행정 능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맺었다. 1221년 황위에 오른 후 라틴 제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영토를 확보했으며, 불가리아와의 동맹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맺고 결혼을 통해 관계를 강화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뇌전증으로 고생했으며, 사후 50년 뒤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그리스인의 아버지"로 기억되었으며, 그의 유해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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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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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요안니스 3세 두카스 바타치스 |
원어 이름 | (Ioannēs III Dūkas Batatzēs) |
![]() | |
출생 | 1192년경 |
출생지 | 디디모티호, 비잔티움 제국 |
사망 | 1254년 11월 3일 (62세) |
사망지 | 님파이온, 비잔티움 제국 |
매장지 | 마그네시아 지역, 소산드라 수도원 |
종교 | 동방 정교회 |
통치 정보 | |
작위 | 니케아 황제 |
칭호 | 로마인의 황제 겸 전제군주 |
재위 기간 | 1221년 12월 - 1254년 11월 3일 |
선임자 |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 |
후임자 |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이레네 라스카리나 안나 폰 슈타우펜 |
자녀 |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
가문 | 바타치스 가문 |
아버지 | 바실 바타치스 (?) |
어머니 | 알 수 없음 |
2. 생애
니케아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의 사위가 되어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1212년 테오도로스 1세의 장녀 이레네 라스카리나와 결혼했고, 1221년 테오도로스 1세가 사망하자 황제로 즉위했다. 즉위 초기에는 테오도로스 1세의 형제들이 라틴 제국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반란에 직면했으나, 1224년 포이마넨 전투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제위를 공고히 했다.[15]
요안니스 3세는 뛰어난 군사적,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여 니케아 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그는 라틴 제국, 에피루스 공국, 불가리아 제국 등을 상대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1246년에는 테살로니카를 병합하고 1253년에는 에피루스 공국의 항복을 받아내는 등 비잔티움 제국의 옛 영토 회복에 큰 진전을 이루었다. 또한 에게 해의 여러 섬들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고 중요한 섬인 로도스 섬을 병합했으며,[30] 서방의 강대국인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어 국제적 입지를 강화했다. 그의 통치 아래 니케아 제국은 룸 술탄국과 비교적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동부 전선을 안정시켰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을 위한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내치에도 힘써 농업을 장려하고 제국의 번영을 이끌었으며, 필사본 수집에 관심을 보이는 등 학문과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6] 그는 정의롭고 자비로운 통치자로 알려졌으며, 뇌전증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말년까지 군사 활동과 통치에 힘쓰던 요안니스 3세는 1254년 11월 3일 님파이움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외아들 테오도로스 2세가 제위를 계승했다.[10] 사후 약 50년이 지나 동방 정교회에서 '자비로운 성 요안니스 바타체스'라는 이름으로 성인으로 추대되었고,[32][33] 후대에 "그리스인의 아버지"로 칭송받았다.[40]
2. 1. 초기 생애와 즉위
요안니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는 대략 1192년경 디디모테이호에서 태어났다.[10][11] 그의 아버지는 1194년 전투에서 사망한 장군 바실 바타체스였으며, 어머니는 황제 이삭 2세 앙겔로스와 알렉시우스 3세 앙겔로스의 사촌으로 추정된다.[12] 요안니스에게는 두 명의 형이 있었는데, 장남은 이삭 두카스 바타체스(1188-1261)였고 다른 한 명은 어려서 사망했다.[13][14]군인 가문 출신으로 성공적인 군인이었던 요안니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니케아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의 눈에 띄었다. 그는 테오도로스 1세의 장녀 이레네 라스카리나의 남편으로 선택되었고, 두 사람은 1212년 결혼했다. 이레네는 첫 남편 안드로니코스 팔레올로고스와 사별한 상태였다.[1] 테오도로스 1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장녀의 남편인 요안니스는 사실상 유력한 후계자로 여겨졌다.[1]
1221년 11월 테오도로스 1세가 사망하자[4][5] 요안니스는 그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테오도로스 1세의 형제들인 알렉시우스 라스카리스와 이삭 라스카리스는 이에 반발하며 요안니스 3세의 통치에 도전했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라틴 제국 황제 로베르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요안니스 3세는 1224년 포이마넨 전투에서 라틴 제국의 지원을 받은 반란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제위를 공고히 했다.[15]
2. 2. 대외 관계와 영토 확장
1224년 요안니스 3세는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의 형제들이 라틴 제국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벌어진 포이마넨 전투에서 승리했다.[1] 이 승리로 1225년 라틴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할양받았으며, 유럽으로 진격하여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했다.그러나 1227년, 에피루스 공국과 테살로니카의 군주 테오도로스 콤네누스 두카스가 아드리아노플에서 니케아 수비대를 몰아내고 트라키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면서 아드리아노플을 상실했다. 1230년 테오도로스 콤네누스 두카스가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이반 아센 2세에게 패배하자, 요안니스 3세는 이반 아센 2세와 동맹을 맺고 약화된 라틴 제국에 대항했다.
1235년에는 아들 테오도로스 2세와 이반 아센 2세의 딸 헬레나를 결혼시켜 동맹을 강화했고, 불가리아 총대주교의 지위를 복원해주었다. 같은 해 불가리아와 니케아 연합군은 라틴 제국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으나 점령에는 실패했다. 이후 이반 아센 2세는 니케아 제국의 성장이 자국에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사실상 중립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1241년 이반 아센 2세와 라틴 제국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사망하고,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불가리아가 혼란에 빠지자 요안니스 3세는 이 기회를 활용했다. 그는 불가리아 영토 일부를 합병하고, 1242년에는 테살로니카 제국에 니케아 제국의 종주권을 강요했다. 1243년 몽골군이 물러가자 그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1244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서녀 콘스탄체와 재혼하여 서방과의 관계를 다졌다. 1246년 불가리아의 칼리만 아센 1세가 사망하고 다시 혼란이 발생하자, 요안니스 3세는 테살로니카와 불가리아령 트라키아 대부분을 병합했다. 이로써 1247년경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효과적으로 포위하는 형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의 통치 말기에는 니케아 제국의 권위가 서쪽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요안니스 3세는 에피루스 공국의 팽창을 억제하려 했으며, 1252년 에피루스의 군주 미하일 2세 콤네노스 두카스의 동맹이었던 크루야의 골렘과 테오도르 페트랄리파스가 요안니스 3세에게 망명하기도 했다.[8][9] 마침내 1253년 요안니스 3세는 대군을 이끌고 에피루스를 원정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또한 에게 해의 여러 섬들에 대한 니케아 제국의 지배력을 확대하고 중요한 섬인 로도스 섬을 병합했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이 점령한 크레타 섬의 해방과 니케아 제국과의 재통일을 목표로 하는 현지 세력을 지원하기도 했다.[30]
요안니스 3세는 룸 술탄국과 대체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동부 국경을 안정시켰고, 그의 외교 관계는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령까지 확장되었다. 그는 또한 서부 아나톨리아를 튀르크멘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쿠만족 용병들을 대규모로 정착시키기도 했다.[25][26][27][28][29] 이러한 군사적, 외교적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의 기반을 마련했다.
2. 3. 신성 로마 제국과의 동맹
1236년 니케아 제국-불가리아 연합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 공격 이후, 쇠퇴하는 라틴 제국을 구하기 위해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니케아에 대한 십자군을 소집하려 했다. 1237년 교황은 요안니스 3세에게 임박한 십자군에 대해 알리는 서신을 보냈다.[11] 불가리아가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자, 요안니스 3세는 다른 동맹 상대를 찾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접근했다.[12]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청과 적대 관계에 있었으며, 이미 1227년 그레고리우스 9세에게 파문당한 상태였다. 1239년 두 번째 파문 직전, 프리드리히 2세는 요안니스 3세에게 보낸 서신에서 서방에서의 교황 권력을 비판하고, 성직자에 대한 동로마 황제의 권위를 인정한 요안니스 3세를 칭찬했다.[13]두 제국 간의 우호 관계는 프리드리히 2세가 자신의 파문을 해제하기 위해 제6차 십자군 (1228-1229)을 수행한 이후 시작되었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니케아 사절단으로부터 금화, 금으로 수놓은 비단, 말 등의 선물을 받았다.[11] 1238년, 두 황제는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상호 지원을 조건으로 요안니스 3세를 합법적인 동로마 황제로 인정하기로 합의했지만, 칭호는 "그리스인의 황제"(Grecorum imperator / Γραικῶν βασιλεύς|그레코룸 임페라토르 / 그라이콘 바실레우스grc)를 사용했다. 같은 해 요안니스 3세는 브레시아 공방전에 니케아 군대를 파견하여 프리드리히 2세를 지원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프리드리히 2세는 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2세가 이끄는 그레고리우스 9세의 북부 이탈리아 십자군을 저지하여, 십자군이 결국 1239년 육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도록 만들었다.[14]
1240년 초, 요안니스 3세의 아내 이레네 라스카리나가 사망하자, 그해 말 요안니스 3세는 동맹 강화를 위해 프리드리히 2세의 10살 된 사생아 딸 콘스탄체와 결혼했다. 콘스탄체는 그리스식 이름 안나(Anna)를 받았다.[15] 이 결혼에서 자녀는 없었으며, 요안니스 3세가 아내의 시녀와 불륜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두 황제 간의 동맹은 프리드리히 2세가 1250년에 사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1241년 그레고리우스 9세가 사망하고 새로운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즉위했지만, 그는 전임자의 정책을 이어받아 두 황제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1245년 리옹 공의회에서 인노첸시오 4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황제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다시 파문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로 "하나님과 교회의 적"으로 지목된 요안니스 3세와 딸을 결혼시킨 점을 들었다.[16] 교황은 동방에서 요안니스 3세에 대한 또 다른 십자군을 소집하고 몽골과 협상하여 니케아를 침공하게 하려 했으나, 두 시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17] 서방에서는 인노첸시오 4세가 프리드리히 2세를 상대로 더 큰 성공을 거두어, 1248년 파르마 전투에서 황제 군대를 격파했다.[18] 그럼에도 요안니스 3세는 1247년부터 1250년까지 에피루스를 통해 이탈리아로 궁수와 보병을 포함한 군대와 자금을 계속 보내 장인인 프리드리히 2세를 지원했다. 이 지원은 1250년 8월 친골리 전투에서 교황청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는 데 기여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그해 12월 이질로 사망했다.[19]
프리드리히 2세 사후에도 두 제국 간의 외교 관계는 잠시 이어졌다. 요안니스 3세의 아들 테오도로스 2세는 프리드리히 2세가 서방 귀족과 성직자의 적대감에 맞서 싸운 것을 칭찬하는 기념 연설을 하기도 했다.[20]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콘라트 4세는 1253년, 콘스탄체-안나의 망명한 가족을 이탈리아로 돌려보내기 위해 니케아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1254년 콘라트 4세와 요안니스 3세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제국 간 동맹의 지속 가능성은 사라졌다. 콘라트 4세 사후 신성 로마 제국과 시칠리아 왕국은 분열되었다.[21] 프리드리히 2세의 다른 아들인 만프레드는 시칠리아의 마지막 호엔슈타우펜 왕이 되었으나, 니케아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1257년 니케아의 알바니아 해안을 침공했고, 1259년 에피루스 공국의 미하일 2세 콤네노스 두카스와 동맹하여 펠라고니아 전투에 군대를 파견했다.[22] 니케아가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는 만프레드와 동맹을 맺기 위해, 당시 니케아 궁정에 남아 있던 미망인 콘스탄체-안나와 결혼하려 했다. 그러나 콘스탄체-안나는 이를 거절하고 1261년 오빠 만프레드의 시칠리아 궁정으로 돌아가면서 비잔티움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고, 이로써 요안니스 3세와 프리드리히 2세가 시작했던 동맹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23]
2. 4. 말년과 죽음
요안니스 3세는 뇌전증을 앓고 있었으며, 말년에는 병세가 꾸준히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사적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246년에는 불가리아의 혼란을 틈타 테살로니카를 병합했고, 1253년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서 에피루스 공국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 회복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그러나 깊어진 병세로 인해 1254년 11월 3일 님파이움에서 사망하였다. 제위는 그의 외아들 테오도루스 2세가 계승했다. 요안니스 3세는 사후 50년이 지나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3. 내치
즉위 후의 요안니스 3세는 동로마 제국의 조직의 잔재를 재편하고, 뛰어난 통치 능력으로 농업의 진흥과 복지 시설의 건설 등에 힘을 쏟는 선정을 펼쳤다. 그는 라틴 제국으로 건너간 토지 귀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동로마 제국의 전통적인 자작 농지를 지급했다. 또한 몽골족에 쫓겨난 쿠만족을 받아들여 정착시켰는데,[25][26][27][28][29] 이는 서부 아나톨리아를 오구즈-투르크멘족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고[25][26][27][28][29] 국방력을 강화하며 국가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요안니스 3세는 스스로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였으며 자선도 많이 베풀었다. 간질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31] 정의와 자비를 장려하며 평화와 전쟁 모두에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했다.[31] 그는 자신의 왕국의 내부 번영과 상업을 신중하게 발전시켰고,[31] 이러한 노력 덕분에 니케아 제국은 레반트 지역에서 가장 강력하고 풍요로운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요안니스 3세는 필사본 수집과 복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윌리엄 오브 루브루크는 그가 오비디우스의 ''Fasti''에서 누락된 책의 사본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6]
4. 가족 관계
요안니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는 대략 1192년경 디디모테이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는 1194년 전투에서 사망한 장군 바실 바타체스이며, 어머니는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와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의 사촌으로 여겨진다. 요안니스에게는 두 명의 형이 있었다. 장남은 이사키오스 두카스 바타체스(1188-1261)였고, 그의 딸 테오도라 두카이나 바타차이나는 나중에 미카일 8세 팔레올로고스와 결혼했다. 차남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어릴 때 사망했으며, 그의 딸은 ''protovestiarios'' 알렉시오스 라울과 결혼했다.
요안니스 3세는 1212년 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의 딸 이레네 라스카리나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10] 테오도로스 1세는 아들이 없었기에, 장녀 이레네의 남편인 요안니스를 후계자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1] 두 사람 사이에서는 1221년 아들 테오도로스 2세가 태어났으며,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이레네는 아들을 낳은 후 낙마 사고로 중상을 입어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수녀원으로 들어가 에우게니아(Eugenia)라는 수도명을 받았고, 1239년 사망했다.[24]
요안니스 3세는 124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사생아 딸인 콘스탄체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10] 콘스탄체는 프리드리히 2세의 애인 비앙카 란치아에게서 태어났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5. 평가와 유산
요안니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는 니케아 제국을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시키고 동로마 제국 부활의 기틀을 마련한 성공적인 통치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전임 황제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로부터 물려받은 제국의 영토를 두 배로 확장하여 소아시아를 넘어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에게 해 대부분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고 로도스섬을 합병했다.[30] 또한 테살로니키를 합병하고(1246년) 불가리아와 에피루스를 희생시키며 영토를 넓혔으며, 크레타 섬의 베네치아로부터의 해방 시도를 지원했다.[30] 그의 통치 말기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효과적으로 포위했다.[30]
내정 면에서는 라틴 제국으로 넘어간 귀족의 땅을 몰수하여 동로마 전통 방식의 자작농에게 분배하고, 몽골에 쫓겨난 쿠만족을 서부 아나톨리아에 정착시켜 국경 방어를 강화하며 제국의 기반을 다졌다.[25][26][27][28][29] 그는 농업 진흥과 복지 시설 건설에 힘쓰고 스스로 근면 검소한 생활을 하며 자선을 베푸는 등 선정을 펼쳐 니케아 제국을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 만들었다. 간질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전쟁 시기 모두 적극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며 정의와 자비를 강조했고, 왕국의 번영과 경제 발전에 신중을 기했다.[31]
외교적으로는 불가리아, 룸 술탄국과 대체로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맺고 교황령과도 관계를 맺었다.
사후 약 50년 뒤, 요안니스 3세는 정교회에서 '자비로운 요안니스 바타체스'라는 이름으로 성인으로 추대되었으며, 매년 11월 4일이 그의 축일로 기념된다.[32][33] 그의 숭배는 소아시아 서부 지역에 빠르게 퍼져나갔고,[34] 후대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인의 아버지"로 기억했다.[40] 그의 업적은 니케아 제국이 최종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5. 1. 사후 전설
일부에 따르면, 그의 부패하지 않은 유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으로 프랑크족으로부터 해방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잠자는 왕'의 전설이 그와 연관되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그의 유해는 지하 묘지에 숨겨졌고, 대대로 비밀을 지키는 비밀 기독교 가족에 의해 보호되었다고 전해진다. 예언에 따르면, 그는 그때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해방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42]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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