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요한 에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한 에크는 1486년에 태어난 신학자이자 가톨릭교회의 반종교 개혁가였다. 그는 잉골슈타트 대학교의 신학 교수, 총장 등을 역임하며 가톨릭의 입장을 옹호했다. 마르틴 루터와 종교 개혁에 반대하며 라이프치히 논쟁 등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교황청의 대의를 옹호하며 루터의 이단성을 주장했다. 또한, 츠빙글리와의 논쟁,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반박 등 가톨릭 교리를 수호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1541년에는 반유대주의적인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2. 생애

요한 에크는 뛰어난 학자이자 논쟁가였다. 초기에는 신학습(New Learning)의 영향을 받아 현대적인 신학자로 여겨졌으나, 점차 교황청을 옹호하며 마르틴 루터와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510년부터 잉골슈타트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 활동을 펼쳤다. 신학에서는 예정론을 다룬 ''Chrysopassus''(1514)를 저술했고, 스페인의 페트루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대한 주석을 남겼다.[7] 정치 경제학 분야에서는 이자를 받고 자본을 투자하는 것을 옹호하여 아우크스부르크(1514)와 볼로냐(1515) 등에서 열린 논쟁에서 자신의 견해를 주장했다.[2][7]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마르틴 루터와 논쟁을 벌여, 루터로부터 공의회의 권위조차 부정하는 발언을 이끌어냈다.[10] 1520년에는 로마를 방문하여 루터가 이단임을 알리는 교황 칙서를 가지고 돌아왔다.[11]

에크는 루터의 종교 개혁에 반대했지만, 가톨릭 교회의 폐단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10] 그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1543년 잉골슈타트에서 사망했다.[6]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요한 에크는 1486년 메밍겐 근처 에크(Eck, 후에 Egg로 개명)에서 요한 마이어(Johann Maier)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출생지에서 따온 에크라는 성을 사용했는데, 1523년부터는 에키우스(Eckius) 또는 에키우스(Eccius), 즉 "에크 출신"으로 표기했다.[6] 아버지 미하엘 마이어(Michael Maier)는 농부이자 마을의 집정관(bailiff) 혹은 아름트만(Amtmann)이었다. 에크의 초기 교육은 넥카르 강(Neckar)이 있는 로텐부르크(Rottenburg)의 사제였던 삼촌 마르틴 마이어(Martin Maier)가 맡았다.[6]

12세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튀빙겐 대학교로 옮겼다.[1] 1501년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요한 야코프 렘프(Johann Jakob Lempp) 밑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콘라트 줌멘하르트(Konrad Summenhart)와 함께 히브리어와 정치 경제학의 기초를 공부했다.[7]

1501년 흑사병 때문에 튀빙겐을 떠나 쾰른 대학교에서 1년을 보낸 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 정착하여 처음에는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고, 나중에는 교수로 활동했다. 그는 발트슈트(Waldshut)와 니콜스부르크(Mikulov)의 저명한 재세례파(Anabaptist) 지도자인 발타사르 후브마이어(Balthasar Hubmaier)의 멘토였으며, 잉골슈타트 대학교로 옮긴 후에도 그 관계를 유지했다. 1508년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고, 2년 후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7]

1506년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그의 첫 저서인 ''Ludicra logices exercitamenta''를 출판했다.[7]

요한 에크의 초상화 (1717)

2. 2. 잉골슈타트 대학교 교수

요한 에크는 1510년 11월 잉골슈타트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아이히슈테트의 대성당 참사회원의 명예와 수입을 받았다.[7] 1512년에는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으며,[7] 잉골슈타트 대학교를 가톨릭의 보루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신학, 정치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을 남겼다. 신학 분야에서는 예정설(predestination) 이론을 전개한 ''Chrysopassus''(아우크스부르크, 1514)를 저술했고, 스페인의 페트루스의 ''Summulae''와 아리스토텔레스의 ''De caelo''와 ''De anima''에 대한 주석가로서 명성을 얻었다.[7] 정치 경제학자로서 그는 이자를 받고 자본을 투자하는 것의 정당성을 옹호했으며,[2][7][6] 아우크스부르크(1514)와 볼로냐(1515)에서 열린 논쟁에서 자신의 견해를 성공적으로 주장했다.[7]

1516년부터 1520년까지 그는 페트루스 히스파누스의 ''Summulae''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론'', ''물리학'' 및 소규모 과학 저술에 대한 주석을 출판했는데, 이것들은 대학교의 교과서가 되었다.[6] 초기에는 에크는 현대 신학자로 여겨졌으며, 그의 주석에는 신학습(New Learning)의 과학적 정신이 많이 담겨 있었다.[6]

그는 교황청(papacy)의 대의를 옹호했으며, 그의 주요 저서로는 ''De primatu Petri''(1519)와 ''Enchiridion locorum communium adversus Lutherum''이 있는데, 후자는 1525년부터 1576년 사이에 46판을 거쳤다.[6] 1530년부터 1535년까지 그는 마르틴 루터에 반대하는 자신의 저술 모음인 ''Opera contra Ludderum''을 4권으로 출판했다.[6]

3. 종교 개혁 논쟁

1519년 1월, 에크는 마르틴 루터에 반론하는 다수의 논쟁집을 발표했다.[10] 같은 해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작센 공의 중재로 라이프치히에서 파리 대학교, 에르푸르트 대학교 신학자들을 심판으로 하여 라이프치히 논쟁이 개최되었다. 에크는 교황청으로부터 루터의 동지인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와의 논쟁을 위해 파견되어, 일주일간 카를슈타트와 논쟁한 후 이어서 참가한 루터와도 일주일간 논쟁을 벌였다. 에크는 유도 심문을 통해 루터로부터 공의회의 권위조차 부정하는 발언을 이끌어냈다.[10] 이 논쟁에서 에크는 루터가 후스파의 견해에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교황에 반대한다고 선언하게 만들었으며, 루터가 콘스탄스 공의회가 얀 후스를 단죄한 것처럼 전례 회의가 때때로 잘못될 수 있다고 선언하도록 강요했다.[6][7] 1520년에는 로마를 방문하여 루터가 이단임을 알리는 교황령을 가지고 돌아왔다.[11]

3. 1. 루터와의 초기 관계와 결별

1517년 봄 초, 에크는 자신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여겼던 마르틴 루터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이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에크는 자신의 저서 『오벨리스키(Obelisci)』에서 크리스토프 폰 셰를(Christoph von Scheurl)이 보낸 루터의 논제들을 공격하며 그를 "보헤미아 형제단의 이단"을 선전하고 교회 내 무정부 상태를 조장하는 자, 후스파로 낙인찍었다.[7] 루터는 『에크의 오벨리스키에 대한 아스테리스키(Asterisci adversus obeliscos Eccii)』로 답했고,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Andreas Karlstadt)는 루터의 면죄부에 대한 견해를 옹호하며 에크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7]

공개적인 논쟁에 대한 상호 희망은 에크와 루터 사이의 합의로 이어졌다. 에크는 루터가 논쟁에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에르푸르트(Erfurt) 또는 라이프치히에서 카를슈타트와 토론할 것을 약속했다. 1518년 12월, 에크는 카를슈타트에 맞서 옹호할 12개의 논제를 발표했지만, 이 논제들은 명목상의 상대인 카를슈타트가 아닌 루터를 겨냥한 것이었기에, 루터는 카를슈타트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에크와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7]

1860년대에 그려진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루터와 에크를 묘사한 그림


에크와 카를슈타트 간의 논쟁은 1519년 6월 27일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네 차례의 세션에서 에크는 자유 의지가 선행 창조의 능동적 주체라고 주장했지만, 상대방에 의해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여 하나님의 은총과 자유 의지가 공통의 목표를 향해 조화롭게 작용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카를슈타트는 선행은 오직 하나님의 행위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에크는 회심의 시작에서는 자유 의지가 수동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유 의지가 그 권리를 행사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모든 선행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지만, 그 성취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7]

에크는 사실상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카를슈타트를 혼란에 빠뜨리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는 에크에 따르면 기억력, 통찰력, 학식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났던 루터를 상대로는 덜 성공적이었다.[7] 23일간(7월 4일~7월 27일) 진행된 교황권, 연옥, 속죄 등에 대한 논쟁 후, 중재자들은 판결을 내리기를 거부했다. 에크는 루터가 후스파의 견해에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교황에 반대한다고 선언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이 성공은 그의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만 더욱 악화시켰다.[6] 에크는 또한 루터가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8)가 후스(1415)를 단죄한 것처럼 전례 회의가 때때로 잘못될 수 있다고 선언하도록 강요했다. 루터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 모두를 효과적으로 부인했다. 에크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신학자들로부터 승자로 환영받았다.[7]

3. 2. 라이프치히 논쟁 (1519)

마르틴 루터는 1517년 봄 초 에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이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에크는 자신의 저서 『오벨리스키(Obelisci)』에서 루터의 논제들을 공격하며 그를 "보헤미아 형제단의 이단"을 선전하고 교회 내 무정부 상태를 조장하는 자, 후스파로 낙인찍었다.[7] 루터는 『에크의 오벨리스키에 대한 아스테리스키(Asterisci adversus obeliscos Eccii)』로 답했고,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Andreas Karlstadt)는 루터의 면죄부에 대한 견해를 옹호하며 에크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7]

공개적인 논쟁에 대한 상호 희망은 에크와 루터 사이의 합의로 이어졌다. 에크는 루터가 논쟁에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에르푸르트(Erfurt) 또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카를슈타트와 토론할 것을 약속했다. 1518년 12월, 에크는 카를슈타트에 맞서 옹호할 12개의 논제를 발표했지만, 이 논제들은 명목상의 상대인 카를슈타트가 아닌 루터를 겨냥한 것이었기에, 루터는 카를슈타트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 에크와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7]

에크와 카를슈타트 간의 논쟁은 1519년 6월 27일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네 차례의 세션에서 에크는 자유 의지가 선행 창조의 능동적 주체라고 주장했지만, 상대방에 의해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여 하나님의 은총과 자유 의지가 공통의 목표를 향해 조화롭게 작용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카를슈타트는 선행은 오직 하나님의 행위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에크는 회심의 시작에서는 자유 의지가 수동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유 의지가 그 권리를 행사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모든 선행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지만, 그 성취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7]

에크는 사실상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카를슈타트를 혼란에 빠뜨리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는 에크에 따르면 기억력, 통찰력, 학식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났던 루터를 상대로는 덜 성공적이었다.[7] 23일간(7월 4일~7월 27일) 진행된 교황권, 연옥, 속죄 등에 대한 논쟁 후, 중재자들은 판결을 내리기를 거부했다. 에크는 루터가 후스파의 견해에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교황에 반대한다고 선언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이 성공은 그의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만 더욱 악화시켰다.[6] 에크는 또한 루터가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8)가 후스(1415)를 단죄한 것처럼 전례 회의가 때때로 잘못될 수 있다고 선언하도록 강요했다. 루터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 모두를 효과적으로 부인했다. 에크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신학자들로부터 승자로 환영받았다.[7]

3. 3. 루터와 멜란히톤 공격

잉골슈타트로 돌아온 직후, 에크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설득하여 마르틴 루터의 저서를 공개적으로 소각하려 시도했으며, 1519년 한 해 동안 새로운 움직임에 반대하는 8편 이상의 글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라이프치히 논쟁의 결과에 대해 판단을 내리도록 임명된 대학들로부터 유죄 판결을 얻는 데 실패했다. 에르푸르트 대학교는 승인을 표명하지 않고 회의록을 작센 공작에게 돌려보냈고, 파리 대학교는 거듭된 촉구 끝에 "조사된 루터의 교리에 한정된" 모호한 결정을 내렸다.[7]

에크의 추종자는 노령의 이단 사냥꾼 야코프 반 호흐스트라텐과 라이프치히의 히에로니무스 엠저, 그리고 쾰른 대학교루뱅 가톨릭 대학교의 연합 당국뿐이었다. 루터는 에크의 공격에 훨씬 더 강력하게 맞섰고, 이 무렵 필리프 멜란히톤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라이프치히에서 그가 참된 기독교 신학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의사들의 스콜라 철학의 차이를 처음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에크는 자신의 "변명(Excusatio)"에서, 그해 초에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에게 주의를 주도록 설득했기 때문에 더욱 격분하여 멜랑히톤이 신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반박했고, 멜랑히톤은 자신의 답변에서 이 주장에 응수했다.[7]

같은 해 10월, 에크는 루터에 대한 강경한 비난으로 히에로니무스 엠저를 돕고자 했을 때 더욱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했다.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와 빌리발트 피르크하이머가 각각 쓴 두 편의 풍자시는 에크를 화나게 했고, 그는 잉골슈타트 대학교 시장에서 모든 관련 문헌을 공개적으로 소각하려 했지만, 동료인 요한 로이힐린에 의해 제지되었다.[7]

4. 교황 특사 및 종교 재판관

요한 에크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에 철저히 반대하는 한편, 가톨릭 교회의 폐해도 비판했다.[10] 그는 귄츠부르크 교구의 수입을 착복하고, 그 의무를 부교구장에게 맡기기도 했다.[7]

에크는 바이에른 법정의 외교 대표로 두 번 로마를 방문하여 잉골슈타트에서 루터파 가르침에 대한 종교 재판소 설립을 승인받았다. 첫 번째 방문은 1521년 가을이었으나 교황 레오 10세의 죽음으로 무산되었고, 1523년 두 번째 방문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루터가 이단으로 규정한 레오나르트 카서의 재판을 포함하여 많은 이단 재판을 주도했다.[7]

4. 1. 로마 방문과 교황 교서 발표

요한 에크는 독일보다는 로마에서 "진정한 신앙의 불굴의 챔피언"으로 더 높이 평가받았다.[7] 그는 쾰른루뱅 대학교에 루터의 저술을 비난하도록 설득했지만, 독일 제후들을 끌어들이는 데는 실패했다.[6] 1520년 1월, 교황 레오 10세의 초청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그의 최신 저서인 ''De primate Petri adversus Ludderum''(잉골슈타트, 1520)을 헌정했고, 그 대가로 교황청 서기관 직책에 임명되었지만, 루터에 대한 결정적인 조치를 촉구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한동안 성공적이지 못했다.[7]

1520년 7월, 에크는 루터의 저술을 겨냥한 교황령 ''만군의 주여(Exsurge Domine)''을 가지고 독일로 돌아왔다. 이 교황령에서는 루터의 41개 명제가 이단적이거나 잘못된 것으로 규탄되었다. 그는 이제 "루터파 이단자"뿐만 아니라 그의 인문주의 비평가들도 짓눌러 버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교황령 발표의 효과는 이를 어렵게 만들었다.[7] 대학과 인문주의자들은 그 폭거를 규탄하는 데 한마음이었고, 백성들의 태도 때문에 에크는 작센에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6]

마이센, 브란덴부르크, 메르제부르크에서 그는 교황의 조치에 대한 공식적인 공표에 성공했지만, 라이프치히에서는 학생들의 조롱을 받았고, 프라이베르크로 도망쳐야 했다. 거기서도 그는 다시 교황령을 선포하는 것을 막았다. 에르푸르트에서는 학생들이 교황령을 찢어서 물에 던져 버렸고, 다른 곳에서는 교황령이 더 심한 모욕을 받았다.[7]

분노한 그는 무력에 호소했고, 그의 ''카를 5세에게 보내는 서한(Epistola ad Carolum V)''(1521년 2월 18일)에서 황제에게 루터에 대한 조치를 취하도록 촉구했는데, 이 호소는 곧 보름스 칙령(1521년 5월)에 의해 응답되었다. 1521년과 1522년에 에크는 다시 로마에 가서 그의 대사]의 결과를 보고했다. 두 번째 방문에서 돌아온 그는 1522년 바이에른 종교 칙령의 공포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 칙령은 사실상

4. 2. 바이에른 종교 칙령과 종교 재판

요한 에크는 독일보다 로마에서 "진정한 신앙의 불굴의 챔피언"으로 더 높이 평가받았다.[7] 그는 쾰른루뱅 대학교에 루터의 저술을 비난하도록 설득했지만, 독일 제후들을 끌어들이는 데는 실패했다.[6] 1520년 1월, 교황 레오 10세의 초청으로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De primate Petri adversus Ludderum''을 헌정했고, 교황청 서기관에 임명되었다.[7]

1522년 에크는 바이에른 종교 칙령 공포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 칙령은 잉골슈타트 대학교 상원을 종교 재판소로 설립했다.[6] 에크는 잉골슈타트에서 루터파 가르침에 대한 종교 재판소 설립을 승인받기 위해 바이에른 법정의 외교 대표로 두 번 로마를 방문했다. 그는 레오나르트 카서의 재판을 포함하여 많은 이단 재판의 주동자였다.[7]

5. 츠빙글리와의 논쟁,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반박

아우크스부르크 국회(1530년)에서 에크는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7]

5. 1. 츠빙글리와의 논쟁

에크는 종교 재판관으로서의 직무 외에도 매년 성상 파괴 운동에 반대하고 미사, 연옥, 고해성사 교리를 옹호하는 글들을 하나 이상 발표했다. 그의 저서 ''Enchiridion locorum communium adversus Lutherum et alios hostes ecclesiae'' (1525년, 란츠후트)는 1576년 이전에 46판을 거쳤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주로 멜랑히톤의 ''Loci Communes''에 대항하여 쓰여졌지만, 어느 정도 울리히 츠빙글리의 가르침에도 관심을 기울였다.[7]

1526년 5월 21일부터 6월 18일까지 바덴-인-아르가우에서 화체설 교리에 대한 공개 논쟁이 열렸는데, 에크와 토마스 무르너가 요한 외콜람파디우스와 맞섰다.[6] 이 논쟁은 에크의 승리로 끝났고, 그는 당국이 츠빙글리와 그의 추종자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하도록 유도했다(바덴 회의).[7]

그러나 그의 바덴에서의 승리 효과는 베른 종교 논쟁(1528년 1월)에서 사라졌다. 에크가 없는 상황에서 개혁가들이 제기한 주장들이 논의되었고, 베른, 바젤 등 여러 지역이 개혁파에게 확실히 넘어갔다.[7]

5. 2.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반박

요한 에크는 종교 재판관 직무 외에도 매년 성상 파괴 운동에 반대하고 미사, 연옥, 고해성사 교리를 옹호하는 글들을 하나 이상 발표했다. 그의 저서 ''Enchiridion locorum communium adversus Lutherum et alios hostes ecclesiae'' (1525년, 란츠후트)는 1576년 이전에 46판을 거쳤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주로 멜랑히톤의 ''Loci Communes''에 대항하여 쓰여졌지만, 어느 정도 울리히 츠빙글리의 가르침에도 관심을 기울였다.[7]

1526년 5월 21일부터 6월 18일까지 바덴-인-아르가우에서 화체설 교리에 대한 공개 논쟁이 열렸는데, 에크와 토마스 무르너가 요한 외콜람파디우스와 맞섰다.[6] 이 논쟁은 에크의 승리로 끝났고, 그는 당국이 츠빙글리와 그의 추종자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하도록 유도했다(바덴 회의).[7]

그러나 바덴에서의 승리 효과는 베른 종교 논쟁(1528년 1월)에서 사라졌다. 에크가 없는 상황에서 개혁가들이 제기한 주장들이 논의되었고, 베른, 바젤 등 여러 지역이 개혁파에게 확실히 넘어갔다. 아우크스부르크 국회(1530년)에서 에크는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7]

6. 평화 협상 시도와 실패, 그리고 죽음

에크는 아우크스부르크 회의를 위해 잉골슈타트에 있는 동안 개혁가들의 저술에서 이단적인 주장 404가지를 뽑아 카를 5세 황제를 돕는 자료로 삼았다.[4]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그는 황제로부터 다른 20명의 신학자들과 함께 6월 25일 황제에게 제출된 루터의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에 대한 반박문을 작성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황제의 마음에 들도록 다섯 번이나 고쳐 써야 했다.[6] 이는 개혁가들에 대한 가톨릭의 반응을 담은 ''Confutatio pontificia''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필립 멜랑히톤을 포함한 개신교 신학자들과의 결실 없는 협상에도 참여했는데, 에크는 빔피나와 코클라우스와 함께 8월에 루터파 신학자들을 만났다.[5]

그는 1540년 웜스 종교 회의에 참석하여 타협할 의향을 보이는 모습을 보였다.[6] 1541년 1월 그는 이러한 노력을 재개하여 멜랑히톤에게 개혁가들의 주요 원칙, 예를 들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1541년 봄과 여름에 열린 레겐스부르크 회의에서는 다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7] 그 후 에크는 후자의 회의 보고서를 발표한 마르틴 부처와 충돌했다.

7. 반유대주의적 태도

1541년 에크는 《유대인들을 옹호하는 것에 반대하여》(''Ains Juden-büechlins Verlegung''de)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뉘른베르크 종교 개혁가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의 견해에 반박했다. 오시안더는 《유대인들이 비밀리에 기독교 어린이들을 교살하고 그들의 피를 사용하는 것이 사실이고 신빙성 있는가?》라는 소책자에서 중세 시대부터 유대인들이 기독교 어린이들을 살해하고,

8. 저작

에크의 많은 저술 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1537년 잉골슈타트에서 처음 출판된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신약 성경, 히에로니무스 엠저의 번역 개정판)이다.[7]

참조

[1]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Johann Eck https://www.newadven[...] 2021-01-15
[2] 서적 Masters of the Reform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3] 서적 Luther's Works Muhlenberg Press 1962
[4] 간행물 Papers of the American Society of Church History https://books.google[...] G. P. Putnam's Sons 1910
[5] 백과사전 Johann Eck
[6] 백과사전 Eck, Johann Maier
[7] 백과사전 Eck, Johann http://www.ccel.org/[...]
[8]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EDIA: St. Anne http://www.newadvent[...] 2020-09-11
[9] 서적 The Roots of Antisemitism in the Age of Renaissance and Reformation Fortress Press 1984
[10] 웹사이트 世界史をもう一度 宗教改革 ルターの宗教改革 http://history.zashi[...]
[11] 웹사이트 ヨハン・マイヤー・フォン・エック http://www.kobemanto[...]
[12] 서적 마르틴 루터 예영커뮤니케이션 2003
[13] 서적 The theology of the Westminster standards : historical context and theological insights https://www.worldcat[...]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