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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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는 1482년 독일 바인스베르크에서 태어난 종교개혁가이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 편집을 도왔고, 바젤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다. 츠빙글리와 함께 성만찬에 대한 견해를 밝혔으며, 마리아 숭배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성경의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중시했으며, 교회의 치리를 강조했다. 1531년 바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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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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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 | 신학자 |
| 인물 정보 | |
| 출생 | 1482년 |
| 출생지 | 바인스베르크, 팔츠 선제후국 |
| 사망 | 1531년 11월 24일 |
| 사망지 | 바젤, 스위스 연방 |
| 신학 | |
| 교단 | 칼뱅주의 |
2. 생애
요하네스 호이슈겐(Johannes Heussgen, 때로는 Husschyn, Hussgen, Huszgen 또는 Hausschein으로 표기)은 당시 팔츠 선제후국에 속했던 바인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바인스베르크와 하일브론에서 학교를 다녔고, 볼로냐에서 법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곧 하이델베르크로 돌아와 신학을 공부했다. 새로운 학문에 열정적이었던 그는 그리스어 연구에서 히브리어 연구로 넘어갔고, 1503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 1515년, 복음주의적인 바젤 주교 크리스토프 폰 우텐하임 밑에서 바젤 대성당 설교자가 되었다.[1] 바젤에서 외콜람파디우스는 에라스무스의 첫 번째 그리스어 신약성경 판의 편집 조수이자 히브리어 자문 역할을 했으며, 자신의 스승을 칭찬하는 서문을 작성했다.[2]
2. 1. 초기 생애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라틴어: Johannes Oecolampadius, 1482년 - 1531년 11월 24일)는 독일의 종교 개혁가이다. 본명은 요하네스 호이슈겐(Johannes Heussgen)이며, Husschyn, Hussgen, Huszgen 또는 Hausschein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팔츠 선제후국의 바인스베르크에서 태어나, 바인스베르크와 하일브론에서 교육을 받았다. 볼로냐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돌아와 신학을 공부했으며, 1503년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1] 1515년에는 바젤 주교 크리스토프 폰 우텐하임 아래에서 바젤 대성당 설교자가 되었다. 바젤에서 에라스뮈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 초판 편집을 돕고 히브리어 자문 역할을 맡았으며, 에라스뮈스를 칭찬하는 서문을 작성하기도 했다.[2]2. 2. 초기 경력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는 1515년 바젤 주교인 크리스토프 폰 우텐하임 밑에서 바젤 대성당 설교자가 되었다.[1] 그는 바젤에서 에라스무스의 첫 번째 그리스어 신약성경 판의 편집 조수이자 히브리어 자문 역할을 했다.[1] 1518년에는 ''그리스어 문법''을 출판했고,[1] 같은 해 부활절 설교에 유머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De risu paschali''를 저술했다.[1]1520년, 아우크스부르크의 고위 교회 설교자가 되었다.[1] 마르틴 루터의 95개조에 영향을 받아 수도사가 되었으나,[1] 짧은 경험 후 수도 생활을 떠났다.[1]
2. 3. 바젤에서의 종교개혁
1522년 11월, 외콜람파디우스는 성 마르틴 교구 사제로 바젤로 돌아왔다. 1523년부터 바젤 대학교에서 성경을 강의했다. 그는 ''이사야서''를 강의하면서 당시의 교회 남용을 비난했고, 공개 토론(1523년 8월 20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1] 울리히 츠빙글리와 협력하여 바젤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다.1528년 초, 외콜람파디우스는 루드비히 켈러의 미망인인 비브란디스 로젠블라트와 결혼했다. 그녀는 훌륭한 아내였다. 외콜람파디우스 사후, 그녀는 볼프강 파브리치우스 카피토와 결혼했고, 카피토 사후에는 마르틴 부처와 결혼했다. 그녀는 1564년에 사망했다.[1]
1528년 1월, 외콜람파디우스와 츠빙글리는 베른 토론에 참여하여 스위스 칸톤에서 새로운 신앙을 채택하게 되었고, 이듬해 바젤에서 미사가 중단되었다. 1529년, 그는 바젤 개혁 교회의 ''안티스테스''(Antistes)가 되었다. 재세례파는 외콜람파디우스를 그들의 견해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토론을 통해 그는 그들의 입장 대부분과 자신을 분리했다.[1]
1531년 11월 24일, 외콜람파디우스는 바젤에서 사망했다.
3. 신학
외콜람파디우스는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 편집시 히브리어 자문을 도울 정도로 언어에 능통했다. 울리히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아 바젤의 개혁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1525년에는 바젤 대학교의 성경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1528년에는 베른에서 부처, 츠빙글리, 볼프강 카피토를 도와 베른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다.[3]
요하네스 에크, 필리프 멜란히톤과 같은 저명인사들과 교류했으며, 루터, 츠빙글리, 칼빈과 같은 화려함은 부족했지만, 신뢰받는 종교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예수회 성 베드로 카니시우스는 사후 40년이 넘어서도 저서 ''De Maria Virgine''에서 그를 인용할 정도로 당대 가톨릭 학자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3]
외콜람파디우스가 개혁교회에 끼친 가장 큰 신학적 영향은 치리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다. 그는 교회의 치리가 교회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 확신했으며, 1526년 바젤 예배규정에 출교가 중요하게 포함되도록 하였다.[4]
3. 1. 성만찬
외콜람파디우스는 성만찬에 대해 츠빙글리와 비슷한 견해를 가졌다. 그는 "몸"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해석에 반대하고 비유적 해석을 옹호했으며, 신자들이 자신의 유익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 성찬례에 참여한다고 주장했다. 이후에는 기독교인의 삶을 위한 은총의 수단으로 강조했다. 마르부르크 회의에서 스위스를 대표하여 루터와 논쟁했으며, 성찬례에 대한 그의 견해는 루터가 1526년 저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찬 - 광신도 반대''에서 이 주제에 대한 여러 설교를 발표하도록 유도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에 대한 루터의 교리에 대해 교회 내 성령의 임재와 활동을 반대했다.3. 2. 마리아론
외콜람파디우스는 마리아를 모든 은총의 중재자(''Mittlerin'')로 보았으며, 마리아가 그리스도(머리)의 신비로운 몸인 교회에 모든 은총을 중재하는 '목'의 이미지로 설명했다.[3] 이 견해는 가브리엘 로스키니와 교황 비오 12세가 회칙 ''신비체''에서 옹호한 가톨릭 교회의 공식 교리와 유사하다.[3]1521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발표된 ''De laudando in Maria Deo''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피조물 안에서도 마리아를 통해 드리는 것보다 더 높이 찬양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마리아는 자신의 믿음으로 아브라함을, 인내로 이삭을, 정결함으로 요셉을 능가했으며, 모든 천상의 권능의 여왕이라고 칭송했다.[4]
그러나 외콜람파디우스는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가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마리아에게 부여된 수많은 칭호가 그 수와 내용에서 그리스도 숭배를 능가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묵주 기도가 150번의 성모송과 단 10번의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로 이루어진 것을 예시로 들었다.[4] 또한 매주 토요일을 마리아에게 봉헌하며 포도주와 성관계를 금지하는 반면, 다음 주일에는 과음과 오락을 즐기는 대중적인 관습을 비판했다.[4]
외콜람파디우스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주장하며, 마리아의 삶이 엘리사벳을 방문한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봉사와 연민의 삶이었으며, 기독교적 덕행의 모범이라고 강조했다.[4]
3. 3. 기타 신학 사상
외콜람파디우스는 크리소스톰의 성경 주해 방법을 채택하여 성경의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을 중시했다.[3] 그는 교회의 치리(discipline)를 교회의 본질에 속한 것으로 확신하고, 공적인 죄에 대한 "공적인 치리" 혹은 "출교"의 근거와 당위성을 강조했다.[4] 예정론에 대해서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멸망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온다"라는 요약으로 간략하게 언급했다.참조
[1]
서적
Hunted Heretic
1953
[2]
웹인용
외콜람파디우스 Oecolampadius, Johannes 1482- 1531. 11. 23
http://www.cportal.c[...]
2017-08-01
[3]
서적
개혁주의 인명사전
총신대학교출판사
2001
[4]
서적
칼빈과 개혁주의
깔뱅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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