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의 왕릉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우르의 왕릉은 이라크 남부의 고대 도시 우르 유적에서 발견된 묘역으로, 1922년 레오나드 울리가 이끄는 발굴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묘역은 기원전 3천 년대 후반부터 최소 3세기 동안 사용되었으며, 2,000개 이상의 매장지와 함께 다양한 부장품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16개의 "왕족" 무덤에서는 석조 묘실과 함께 금, 은, 청금석, 홍옥수 등으로 만들어진 장신구, 악기, 조각품 등 풍부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주요 무덤으로는 아-임두구드, 우르-파빌사그, 메스칼람두그, 푸아비, 메사네파다 등의 무덤이 있으며, 순장 의식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2008년 이라크 전쟁으로 훼손되었으나, 현재는 이라크 고대 유물 국가 위원회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22년 발굴 - 모헨조다로
모헨조다로는 기원전 26세기에 건설된 인더스 문명의 주요 도시 유적지로, 정교한 도시 계획과 토목 공학 기술을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현재 보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 1922년 발굴 - 플림톤 322
플림톤 322는 기원전 1800년경 제작된 바빌로니아 점토판으로, 직각삼각형 변 길이에 대한 정보와 피타고라스 수와의 관련성, 숫자 생성 방법, 작성 목적 및 저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담겨있는 4열 15행의 설형 문자 표이다. - 고대 미술 - 에트루리아 미술
에트루리아 미술은 기원전 9세기경 빌라노반 문화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문명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고대 이탈리아의 미술로, 장례 미술,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등에서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했으며 로마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고 시대에 따라 여러 시대로 구분된다. - 고대 미술 - 리오 핀투라스 암각화
리오 핀투라스 암각화는 아르헨티나 핀투라스 강 협곡의 쿠에바 데 라스 마노스 동굴 내외에 있는 선사 시대 유적으로, 손 그림, 동물, 사냥 장면 등을 묘사하며 수렵 채집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르의 왕릉 | |
---|---|
개요 | |
명칭 | 우르 왕릉 |
위치 | 이라크 디카르 주 텔 엘-무카이야르 |
지역 | 메소포타미아 |
종류 | 정착지 |
건설 시기 | 기원전 3800년경 |
폐기 시기 | 기원전 500년 이후 |
시대 | 우바이드 문화 ~ 철기 시대 |
문화 | 수메르 |
발굴 | 1853–1854, 1922–1934 |
고고학자 | 존 조지 테일러, 레너드 울리 |
위치 정보 | |
![]() |
2. 발굴
1922년, 레오나드 울리가 이끄는 고고학자 팀은 우르 유적 발굴을 시작했다. 캐서린 울리는 발굴된 고대 도시의 구조를 도면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맡았다. 초기 발굴 과정에서는 시험 참호를 파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처음에는 큰 성과가 없었으나 울리의 결정으로 더 깊이 파 내려가면서 점토 항아리, 석회암 그릇, 청동 물체, 구슬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특히 금으로 된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발굴은 중요한 국면을 맞이했다.[1]
그러나 발굴 초기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랐다. 고고학 발굴 경험이 부족한 현지 인력 문제와 당시 고고학 기술의 한계로 인해 발굴 작업이 순탄치만은 않았으며, 발견된 유물의 연대 측정에도 오류가 발생하기도 했다.[2]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발굴은 계속되어, 우르의 묘지에서 총 2,000기가 넘는 매장지가 확인되었다. 레오나드 울리는 이 중에서 규모, 구조, 부장품의 풍부함, 그리고 집단 순장과 같은 의례의 흔적을 근거로 16기의 무덤을 왕족의 무덤으로 식별했다.[9]
2. 1. 초기 발굴 과정

1922년, 고고학자들은 캐서린 울리가 도면으로 기록할 고대 도시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시험 참호를 파면서 발굴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으나, 수석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는 한 참호를 더 깊이 파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점토 항아리, 석회암 그릇, 작은 청동 물체, 다양한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울리는 금 구슬이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인부들에게 금 구슬을 발견하면 가져오도록 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인부들은 발견한 금 구슬을 금세공인에게 팔았고, 울리는 이를 다시 사들여야 했다.[1]
발굴 초기에는 현지 인부들의 고고학 지식 부족과 부정직함이 문제였다. 울리는 인부들이 "금 참호"라고 부르던 곳의 발굴을 4년 동안 중단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인부들은 발굴 작업에 더 익숙해질 수 있었다. 또한 당시 고고학은 아직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기술적인 한계도 있었다. 예를 들어, 발굴된 금 유물은 전문가에 의해 기원전 700년경의 "후기 바빌로니아" 시대로 잘못 연대 측정되었으나, 실제로는 기원전 2300년경 사르곤 1세 통치 시대의 유물이었다.[2]
우르의 묘지 전체에서는 2,000기 이상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며, 울리는 이 중 16기를 규모, 구조, 부장품의 풍부함, 대량 의례의 흔적 등을 근거로 "왕족" 무덤으로 분류했다.[9]
2. 2. 왕릉의 발견
1922년, 고고학자들은 캐서린 울리가 도면으로 기록할 고대 도시의 배치도를 파악하기 위해 시험 참호를 파면서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다른 유물이 나오지 않던 한 참호에서 수석 고고학자 레오나드 울리는 더 깊이 파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점토 항아리, 석회암 그릇, 작은 청동 물체, 다양한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울리는 금 구슬이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일꾼들이 금 구슬을 발견하면 가져오도록 금전적 보상을 약속했다. 하지만 일부 일꾼들은 발견한 금 구슬을 금세공인에게 팔아넘겼고, 울리는 이를 다시 사들여야 했다.[1]
발굴 초기에는 일꾼들의 부정직함 외에도 다른 문제들이 있었다. 고용된 현지 인력은 고고학 발굴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울리는 이들이 "금 참호"라고 부르던 구역의 발굴을 4년 동안 중단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일꾼들은 발굴 작업에 점차 익숙해졌다. 당시 고고학은 아직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발견된 금 유물의 연대 측정에도 오류가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 유물들을 실제 제작 연대인 사르곤 1세 통치 시기(기원전 2300년경)보다 훨씬 후대인 "후기 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700년경)의 것으로 잘못 판단했다.[2]
4년간의 중단 이후 발굴이 재개되면서 본격적으로 왕릉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우르의 묘지에서는 총 2,000기 이상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울리는 이 중에서 무덤의 규모와 구조, 부장품의 풍부함, 그리고 집단 의례의 흔적 등을 근거로 16기의 무덤을 왕족의 무덤으로 판단했다.[9]
3. 유적
이라크 남부 사막에 위치한 우르 고대 도시 유적은 약 2천 년 전 유프라테스 강의 물길이 바뀌면서 버려진 곳이다. 초기 고고학자들은 지표면 아래에서 무덤들을 발굴했으며, 일부 무덤에서는 왕족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1922년, 고고학자 레오너드 울리는 대영 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고고학 및 인류학 박물관의 의뢰를 받아 이곳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시작했다.
왕릉과 공동묘지는 발굴 시작 4년 만에 실제로 발견되었다. 이 대규모 묘지는 기원전 3천 년대 후반부터 최소 3세기 동안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된 대부분의 무덤은 서로 겹쳐서 만들어진 개별 매장 형태였으며, 함께 발견된 부장품을 통해 매장자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3]
울리는 처음 1850개의 무덤을 발굴하고 나중에 260개를 추가로 확인했는데,[4] 그중 16기는 석조 묘실과 막대한 부장품을 가진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었다. 이 왕릉들에서는 중심 인물 외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묻힌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주인을 사후 세계에서도 섬기기 위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5] 또한 '대규모 죽음 구덩이'(PG 1237)로 불리는 특정 무덤에서는 무장한 남성들과 여성 또는 소녀로 추정되는 다수의 시신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독특한 장례 문화를 보여준다.[6] 이러한 대규모 순장 풍습은 수메르의 왕 메스칼람두그나 메산네파다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3][7]
3. 1. 묘지의 구조
이 대규모 묘지는 기원전 3천 년대 후반 최소 3세기 동안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무덤은 서로 겹쳐서 파인 개별 매장 형태였으며, 매장된 시신들은 함께 발견된 부장품을 통해 신분을 추정할 수 있었는데, 부유층과 빈곤층의 구분이 가능했다.[3]고고학자 울리는 총 2000기가 넘는 무덤을 발굴했는데,[4] 그중 16기는 부의 정도, 매장 구조, 의례 등에서 다른 무덤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여 특별하게 분류되었다. 울리는 이 무덤들이 석조 묘실 구조와 막대한 부장품을 가진 점으로 미루어 왕족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했다. 묘실의 주인으로 보이는 중심 인물은 사후 세계에서의 생활을 위해 풍부한 물품과 함께 매장되었다. 반면, 함께 묻힌 다른 사람들은 별다른 부장품 없이 마치 물건처럼 취급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장례 의식이 오직 중심 인물만을 위한 것이었으며, 주변 인물들은 그를 위해 희생되어 함께 묻힌 순장의 흔적으로 해석된다.[5]
특히 '대규모 죽음 구덩이(Great Death Pit)'로 명명된 PG 1237은 발견 당시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약간의 금, 청금석, 카르네올 구슬 등 일부 유물만 남아 있었다.[6] 이곳은 열린 사각형 공간 형태로, 무장한 남성들과 여성 또는 어린 소녀로 보이는 다수의 시신이 함께 묻혀 있었다.[6] 이러한 대규모 순장 풍습은 수메르 전체의 최고 통치자로 여겨지는 우르의 왕 메스칼람두그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메스칼람두그는 자신을 사후 세계에서도 보좌하도록 병사들과 여성 합창단 전체를 함께 묻는 순장 관행을 시작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3] 일각에서는 이 무덤이 메산네파다의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7]
3. 2. 왕릉의 특징
레오너드 울리는 처음 1850개의 무덤을 발굴하고 나중에 260개를 추가로 확인했는데,[4] 이 중 16개는 부의 정도, 매장지의 구조, 의식 측면에서 다른 무덤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울리는 이 독특한 무덤들이 석조 묘실과 엄청난 가치의 부장품을 가지고 있어 왕족의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무덤의 주인으로 보이는 시신들은 사후 세계에서도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많은 물품과 함께 매장되었다. 반면, 함께 묻힌 부하들은 이러한 물품 없이 마치 다른 제물처럼 취급되었는데, 이는 장례 의식이 오직 주요 인물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주요 인물의 매장이 끝나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기리기 위해 희생되어 함께 묻힌 것으로 보인다.[5]
울리가 발견한 '대규모 죽음 구덩이'(PG 1237)는 발견 당시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열린 사각형 공간 형태였으며 내부에는 무장한 남성들과 여성 또는 어린 소녀로 추정되는 시신들이 함께 묻혀 있었다. 약간의 금, 청금석, 카르네올 구슬 등과 석재 일부가 남아 있었다.[6] 이러한 대규모 순장 풍습은 수메르 전체의 최고 통치자로 알려진 우르의 왕 메스칼람두그가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사후 세계에서도 자신을 따르게 하기 위해 병사들과 여성 합창단 전체를 희생시켰다고 전해진다.[3] 일각에서는 이 대규모 죽음 구덩이가 메산네파다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7]
3. 3. 대규모 죽음 구덩이 (PG 1237)
울리가 발견한 대규모 죽음 구덩이(PG 1237)는 발견 당시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6] 묘실에는 몇 개의 돌과 약간의 금, 청금석, 그리고 상태가 좋은 카르네올 구슬만이 남아 있었다.[6] 이 구덩이는 열린 사각형 공간 형태로, 무장한 남성들의 시신과 여성 또는 어린 소녀로 추정되는 다른 시신들이 함께 묻힌 묘지로 사용되었다.[6]우르에서 이러한 대규모 죽음 구덩이가 나타난 것은 수메르 전체의 최고 통치자로 알려진 우르의 왕 메스칼람두그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3] 그는 병사들과 여성 합창단 전체를 희생시켜 사후 세계에서도 자신을 따르도록 하는 대규모 매장 관행을 시작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3] 한편, 이 대규모 죽음 구덩이가 메산네파다 왕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7]
3. 4. 푸아비 (PG 800)

대형 묘혈들과는 달리, 우르의 왕릉 중 하나인 푸아비 여왕의 무덤(PG 800)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었다. 이는 왕족의 시신과 함께 금, 은, 청금석, 홍옥수, 마노 등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장신구들이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겨졌기 때문이다.
푸아비가 여왕이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단서는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원통형 인장과 복잡한 꽃무늬 금 장식으로 여러 겹 만들어진 왕관이다.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는 잘 보존된 이 무덤의 묘혈로 이어지는 흙으로 된 경사로를 발견했다. 묘혈의 크기는 대략 12m x 4m 정도였다. 묘혈 안에서는 무장한 남성부터 정교한 머리 장식을 한 여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구의 시신이 함께 발견되었다. 경사로에서는 갈대 매트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유물과 시신을 덮어 흙과의 접촉을 막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묘혈 바닥에서 2m 아래에는 돌로 지어진 묘실이 있었다. 이 묘실은 벽에 출입구가 없고 지붕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였다. 묘실 내부에는 4구의 시신이 있었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분명 여왕의 시신이었다.[8]
4. 장례 의식
우르 왕릉의 시신들은 특정한 매장 관행을 거쳐 안치되었다. 주된 인물로 여겨지는 시신은 묘실 안에 안치되었으며, 이들을 섬기던 시중들이 함께 묻히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더 많은 시신이나 희생자들은 별도의 묘실이나, 더 흔하게는 '죽음의 구덩이'라고 불리는 움푹 파인 공간에 묻혔다.[5]
주된 시신이 누구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왕족으로 추정된다.[4] 왕족의 매장은 여러 날에 걸쳐 진행되는 복잡한 의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5] 이 과정에서 시신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시신에서는 열을 가하거나 연기를 쐰 흔적이 발견되었고,[4] 일부 두개골에서는 방부 처리를 위해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수은이 검출되기도 했다.[4] 장례 의식에는 매장 절차 외에도 음악 연주, 통곡, 잔치 등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함께 묻힌 시중들도 이러한 행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4]
의식의 첫 단계는 주 시신과 제물을 묘실에 안치한 뒤 벽돌과 돌로 입구를 봉인하는 것이었다.[5] 이후 죽음의 구덩이에 경비병, 시중, 음악가 등과 함께 황소나 당나귀 같은 동물들을 채워 넣는 절차가 이어졌다.[5] 시중들이 어떻게 왕족과 함께 묻히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여러 가설은 하위 섹션에서 다루어진다.
4. 1. 순장
우르 왕릉에서 발견된 시신들은 독특한 매장 관행을 보여준다. 묘실에는 주된 인물로 보이는 시신이 안치되었고, 그 주위나 별도의 '죽음의 구덩이'라고 불리는 공간에 함께 순장된 사람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5] 한 무덤에서 발견된 순장자의 수는 적게는 6명에서 많게는 70~80명에 이르렀다.[5] 이들은 죽음의 구덩이나 묘실 안에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누워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9] 이들이 사망할 당시의 자세 그대로인지, 아니면 사망 후에 배치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9] 주된 시신은 항상 갈대로 만든 매트 위에 놓였으며, 순장자들이 묻힌 구덩이의 바닥과 벽에도 같은 매트가 깔려 있었다.[5] 일부 묘실에서는 투구와 창을 든 남성 해골이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처럼 배치되었고, 그 안쪽에는 여성 시중들의 시신이 놓인 경우도 있었다.[9]
주된 시신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왕족으로 추정된다. 함께 묻힌 사람들은 혈연이나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4] 당시의 매장 의식에 대한 문자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왕족의 장례는 여러 날에 걸쳐 진행되는 복잡한 의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5] 일부 시신에서는 열을 가하거나 훈증 처리를 한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장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시신을 보존하기 위한 시도였을 수 있다.[4] 또한 몇몇 두개골에서 수은 성분이 검출된 것도 시신 보존 시도의 증거로 제시된다.[4] 매장 의식에는 음악 연주, 통곡, 잔치 등이 포함되었으며, 순장된 시중들도 이 의식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4] 의식의 첫 단계에서는 주된 시신을 제물과 함께 묘실에 안치한 뒤 벽돌과 돌로 입구를 봉인했다.[5] 다음 단계에서는 죽음의 구덩이에 경비병, 시중, 음악가, 그리고 황소나 당나귀 같은 동물들을 채워 넣었다.[5]

순장된 시중들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시신들은 대부분 정돈된 자세로 평온하게 누워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으며,[9] 특히 여성들의 정교한 머리 장식이 흐트러지지 않은 채 발견된 점은 이들이 죽기 직전 누워 있거나 앉아 있었음을 시사한다.[5] 발굴을 주도한 레너드 울리는 처음에는 이들이 왕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인신 제사의 희생자라고 생각했다.[4] 그러나 나중에는 시중들이 죽어서도 주인을 계속 섬기기 위해 자발적으로 독약을 마셨을 것이라고 추측을 바꾸었다.[4] 실제로 각 시신 근처에서는 작은 잔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독약을 마시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다.[5] 독약이 진정제였고, 실제 사인은 묘실이 봉인되면서 질식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9] 하지만 일부 두개골에서 둔기 외상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이들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살해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4]
4. 2. 장례 절차
우르 왕릉에서 발견된 시신들은 특정한 매장 절차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주된 인물(주로 왕족으로 추정됨)의 시신은 묘실 안에 안치되었으며, 이들을 섬기던 시중들이 함께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시중들의 시신은 별도의 묘실이나 '죽음의 구덩이'라고 불리는 움푹 파인 넓은 공간에 묻혔다.[5] 한 무덤에서 발견된 시중의 수는 적게는 6명에서 많게는 70~80명에 달했다.[5]
주 시신은 갈대로 엮은 매트 위에 놓였으며, 시중들이 묻힌 구덩이의 바닥과 벽에도 같은 매트가 깔려 있었다.[5] 시중들은 보통 죽음의 구덩이나 묘실 안에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누워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9] 이들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자리를 잡고 죽음을 맞이했는지, 아니면 사망 후에 시신이 배치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9] 일부 무덤에서는 입구에 투구와 창을 든 남성 해골이 경비병처럼 배치되고, 그 안쪽에 여성 시중들이 묻혀 있는 등 매우 구체적인 배치를 보이기도 했다.[9]
왕족의 장례는 여러 날에 걸쳐 진행되는 복잡한 의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5] 이 과정에서 시신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부 시신에서는 열을 가하거나 연기를 쐰 흔적이 발견되었고,[4] 일부 두개골에서는 방부 처리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수은이 검출되기도 했다.[4] 장례 의식에는 매장 절차 외에도 음악 연주, 곡소리, 그리고 잔치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시중들도 이러한 행사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4]
의식은 먼저 주 시신과 각종 제물을 묘실에 안치한 뒤, 벽돌과 돌을 쌓아 묘실 입구를 봉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5] 이후 단계에서는 죽음의 구덩이에 경비병, 시중, 음악가 등의 사람들과 함께 황소나 당나귀 같은 동물들도 함께 묻혔다.[5]
시중들이 어떻게 왕족과 함께 순장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발굴자인 울리(Woolley)는 처음에는 이들이 왕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살해된 인신 제사의 희생자들이라고 생각했다.[4] 그러나 시신들이 정돈된 모습으로 발견되고, 특히 여성 시중들이 착용한 정교한 머리 장식이 흐트러지지 않은 점[5] 등을 근거로, 나중에는 시중들이 죽어서도 주인을 계속 섬기기 위해 자발적으로 독약을 마셨을 것이라고 추측했다.[4] 실제로 각 시중의 시신 근처에서는 작은 잔이 발견되기도 했다.[5] 이 독약은 진정제였을 수 있으며, 실제 사인은 묘실이 봉인되면서 겪게 된 질식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9] 하지만 일부 연구에서는 몇몇 두개골에서 둔기 외상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시중들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4]
5. 부장품
우르의 공동묘지에는 2,000개가 넘는 매장이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풍부한 물품들이 부장되었다. 많은 유물들은 소수의 왕족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이러한 부장품 중 상당수는 아프가니스탄, 이집트, 인더스 문명을 포함한 주변 지역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주요 유물은 원통형 인장, 보석 및 금속 공예품에서부터 도기, 악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5. 1. 원통형 인장
우르의 묘지에서 부장품과 함께 발견된 원통형 인장에는 종종 사망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9] 발굴자들은 푸아비 여왕의 유해 근처에서 세 개의 원통형 인장을 회수했는데, 그 중 하나에는 설형 문자로 그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10]5. 2. 보석 및 금속 세공품
묘지에서 매장된 다양한 여성 인물들과 시종들은 금, 은, 청금석, 그리고 홍옥수로 만들어진 다양한 목걸이, 귀걸이, 머리 장식, 그리고 머리 장식 고리를 포함한 보석으로 장식되었다. 묘지 부장품에서 홍옥수 구슬이 발견된 것은 인더스 문명과의 교역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머리 장식으로는 금, 청금석, 조개, 그리고 분홍색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꽃무늬 장식의 머리빗이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머리 리본과 장미꽃 무늬가 상감 세공된 빗도 우르의 유골에서 발견되었다.[9] 많은 보석에는 식물을 모티브로 한 디자인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금 잎으로 만든 식물 화환이 그 예이다. 특히, 푸아비 여왕의 머리 장식은 장미꽃이나 별, 잎을 포함한 네 개의 식물 화환으로 구성되어 있다.[11]
다른 귀금속으로는 구리, 은, 금으로 만들어진 헬멧, 단검, 그리고 다양한 용기들이 발견되었다. 메스칼람두그의 소유로 추정되는 금 헬멧은 울리가 왕족의 무덤은 아니지만 엘리트 계층의 무덤으로 판단한 곳에서 발견되었다.[13] 이 헬멧은 금 한 조각으로 만들어졌으며, 머리카락 모양을 정교하게 새겨 넣어 마치 가발처럼 보이도록 제작되었다.[14]
엘렉트럼(금과 은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무기가 발견된 것은 당시 주조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우르의 단검"으로 알려진 또 다른 무기는 울리에 따르면 우르에서 발견된 최초의 주요 부장품 중 하나였다. 이 단검은 칼집과 칼날 모두 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손잡이는 청금석 바탕에 금 장식이 되어 있었다. 다른 금속 공예품으로는 꼬인 철사 손잡이가 달린 다양한 금 술잔과 용기들이 있다. 이 용기 중 일부에는 부조 장식이나 패턴이 새겨져 있었다. 다양한 금속으로 망치질하여 만든 공예품도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사자와 짓밟히는 사람들을 묘사한 아시리아 양식의 방패 장식이 포함되었다. 이 외에도 조각이 새겨진 은제 홈 그릇과 항해하는 배 모양의 은제 모형 등이 출토되었다.[3]
5. 3. 도기
우르의 왕릉에서 발견된 도기는 주로 항아리 형태와 그릇이며, 스타일의 다양성은 제한적이었다. 발굴자들이 기록한 원뿔형 그릇은 입구 지름에 따라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 울리는 238개의 무덤 발굴을 바탕으로 왕릉에서 24가지의 다양한 도기 유형을 확인했다. 우르의 도기와 매장의 연대를 측정하기 위해 일부 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유적지에서 발견된 유사한 유형의 도기와 비교하고, 원통형 인장을 사용하여 검증했다.[15]5. 4. 악기
우르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된 악기들의 잔해도 있었다. 네 명의 여성과 관련된 주요 구덩이에서는 여러 개의 리라가 발견되었다.[9] 이 악기들의 대부분은 은으로 덮인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다양한 세부 장식이 더해졌다.한 리라의 공명통은 파란색과 흰색 모자이크 장식과 함께, 니엘로와 유사한 기술로 그림이 새겨진 조개껍질로 만들어졌다. 이 리라에는 은으로 주조된 소 머리와 은으로 된 조율봉도 달려 있었다. 또 다른 리라는 수사슴 조각상을 받치고 있는 항해하는 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어떤 리라는 나무, 조개껍질, 청금석, 붉은 돌, 은, 금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되었다.
우르에서 발견된 리라에는 소, 수사슴, 턱수염을 가진 황소, 송아지 등 동물의 모습이 자주 표현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왕의 무덤"이라고도 불리는 PG 789 구덩이에서 나온 황소 머리 리라이다. 고고학자 울리는 각 동물이 악기 자체의 음색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5. 5. 수풀 속의 숫양 (PG 1237)

PG 1237 구역에서는 두 개의 염소 조각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우르에서 발견된 다색 조각의 중요한 예시 중 하나이다. 발굴자인 울리(Woolley)는 이 조각상들을 '수풀 속의 숫양'이라고 불렀다. 이 조각상들은 나무를 기본 틀로 하여 금, 은, 조개껍질, 청금석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9] 조각상의 나무 부분, 다리, 염소의 얼굴에는 금이 사용되었고, 배 부분과 분홍색 및 흰색 모자이크로 장식된 받침대 일부에는 은이 사용되었다. 동물의 등은 역청으로 접착한 조개껍질로 덮여 있으며, 눈, 뿔, 수염과 같은 세부적인 부분은 청금석으로 만들어졌다.
5. 6. 우르의 스탠다드 (PG 779)

PG 779 구역에서 발견된 이 유물은 아직 정확한 용도가 밝혀지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우르의 스탠다드"라고 불린다.[9] 이것은 사다리꼴 모양의 나무 상자로, 표면에는 청금석, 조개 껍질, 붉은 사암을 이용해 상감 기법으로 다양한 인물과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유물의 기능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발굴을 주도한 레너드 울리 경은 이것이 군대의 깃발과 같은 군기(軍旗)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했으며, 이러한 해석이 "스탠다드(Standard)"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9]
스탠다드의 양쪽 면에는 각각 다른 주제의 그림이 세 개의 단으로 나뉘어 그려져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공통된 땅(지평선) 위에 배치되어 있으며, 각 단은 일련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중요한 인물은 다른 인물들보다 더 크게 그려 신분이나 중요도를 나타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한쪽 면(일명 '평화' 면)은 아래 단부터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아래 단에는 사람들이 다양한 물건을 운반하거나 동물과 물고기를 끌고 위쪽을 향해 나아간다. 중간 단과 위 단에서는 더 크게 묘사된 인물들이 자리에 앉아 음악가와 시종들과 함께 잔치를 즐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다른 면(일명 '전쟁' 면)에는 군사적인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아래 단에는 네 대의 전차가 쓰러진 적들의 시신을 밟고 지나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중간 단에는 투구를 쓴 병사들이 포로들을 끌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가장 위 단 중앙에는 다른 인물들보다 훨씬 크게 그려진 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서 있으며, 그의 앞에 병사들이 포로들을 데리고 와 보고하는 듯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이 중앙 인물의 크기는 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림 전체 구성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한다.[10]
6. 현대의 우르 왕릉
우르 왕릉의 발굴 이후에도 고고학적 연구는 계속되었으며, 기존의 해석에 대한 새로운 이론들이 제시되고 있다.
6. 1. 새로운 이론
시 레너드 울리의 발굴 결과 분석은 왕릉에 관한 새로운 이론으로 이어졌다.1998년, 폴 짐머만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우르 왕릉에 관한 석사 논문을 통해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기존에 울리는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PG789와 PG800이 시종들과 현세의 소유물들을 갖춘 완전한 매장 형태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짐머만은 무덤 배치를 분석하여 이 두 무덤이 실제로는 세 개의 분리된 무덤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는 PG800 구덩이 내 두 개의 방이 서로 다른 높이에 위치하며, 이는 PG789 무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두 방은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울리는 푸아비 여왕의 무덤(PG800의 일부)이 왕의 무덤(PG789) 곁에 묻히기 위해 왕릉 이후에 조성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짐머만은 푸아비의 무덤이 왕의 무덤보다 40cm 낮은 곳에 위치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푸아비의 무덤이 실제로는 먼저 지어졌다고 반박했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짐머만은 푸아비 여왕에게 할당된 것으로 여겨졌던 죽음의 구덩이가 실제로는 알려지지 않은 다른 무덤에 속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7. 주요 무덤
우르 왕릉에서는 수많은 개인 묘와 함께 여러 왕족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왕족 무덤들의 주인은 명확하지 않아 잠정적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수메르 왕 목록과 같은 기록이나 무덤에서 발견된 비문 등을 통해 알려진 왕족 인물과 연결하려는 연구가 진행되었다.[27] 고고학자 줄리안 리드는 주요 무덤들의 주인을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다.[27][19]
우르 왕릉의 주요 묘 | ||
---|---|---|
무덤 번호 | 추정 주인 및 설명 | 이미지 |
PG 1236[20] | 아-임두구드, 왕. 묘지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기념비적인 묘.[27] | ![]() |
PG 779 | 우르-파빌사그, 왕, 아-임두구드의 아들.[27] | |
PG 777[21] | 여왕의 묘, 우르-파빌사그의 아내.[27] | |
PG 755 | 메스칼람두그 왕의 묘.[22] 메스칼람두그와 니반다 여왕의 아들처럼 같은 이름을 가진 왕자일 가능성이 있다.[27][23][24] | |
PG 1054[25] | 니반다, 메스칼람두그의 여왕의 묘.[27] | |
PG 1130 | PG 755 묘에 있는 왕자의 미망인.[27] | |
PG 789 | 메스칼람두그 왕의 묘, 우르-파빌사그의 아들.[27] | |
PG 800 | 푸아비, 메스칼람두그의 두 번째 아내, 여왕으로 확인; 이후 그녀 스스로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다.[27] | |
PG 1050 | 아수시키르딘기르, 메스칼람두그의 아내의 묘.[27] | |
PG 1332 | 아칼람두그, 왕, 메스칼람두그의 아들의 묘.[27] | |
PG 337 | 여왕의 묘, 아칼람두그의 두 번째 아내.[27] | |
PG 1232/1237 | 메사네파다, 메스칼람두그의 아들의 묘.[27] | |
PG 55 | 여왕의 묘, 아아네파다의 아내.[27] | |
PG 580 | 아아네파다, 왕, 메사네파다의 아들의 묘.[27] | |
PG 1157[26] | 메스키아그누마, 왕, 메사네파다의 아들의 묘.[27] |
7. 1. 아-임두구드 (PG 1236)
PG 1236호 무덤은 우르 왕릉의 쌍둥이 무덤 중 하나로, 기원전 2600년경으로 추정되는 묘지에서 가장 크고 가장 초기에 만들어진 무덤 구조물로 여겨진다.[27] 이 무덤은 우르 제1왕조의 초기 왕인 아-임두구드(𒀀𒀭𒅎ងឺ|아-임두구드akk (ADIM.DUGUDMUŠEN), 신 임두구드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아자-안주(Aja-Anzu)라고도 읽힘)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무덤 안에서 그의 이름이 새겨진 인장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30]PG 1236호 무덤에서는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다.[28][29] 명문이 새겨진 인장 두 개가 나왔는데, 하나는 '간-에키가(크)'(Gan-Ekiga(k))라는 이름과 함께 연회 장면이 그려져 있고, 다른 하나는 사자와 싸우는 나체의 영웅 모습과 우르의 스탠다드를 떠올리게 하는 전쟁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아자-안주'(Aja-Anzu)라는 이름(아-임두구드라고도 읽힘)이 새겨져 있다.[30] 이 인장은 메사네파다의 인장과 매우 유사하다.[30] 또한, 무덤에서는 양각 디자인이 새겨진 금박과 재구성된 금 지팡이, 왕실 지팡이도 발견되었다.[31]
7. 2. 우르-파빌사그 (PG 779)
PG 779는 기원전 26세기의 우르 제1왕조 초기 통치자 우르-파빌사그 (𒌨𒀭𒉺𒉋𒊕, ur-dpa-bil2-sag) 왕과 관련된 초기 기념비적인 무덤이다.[27] 그는 ''수메르 왕 목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우르에서 발견된 "우르-파빌사그, 우르의 왕"이라는 칭호가 새겨진 비문 조각을 통해 알려져 있다.[32][33] 그의 무덤이 PG 779 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34][35] 그는 기원전 2550년경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6] 우르-파빌사그는 아-임두구드(PG 1236 무덤의 주인)의 아들이다.[27]우르-파빌사그의 무덤(PG 779)은 일반적으로 해당 지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무덤으로 여겨지며, 그의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PG 777 무덤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다.[27] 메스칼람두그 (PG 755, 또는 PG 789)는 그의 아들이었다.[37]
우르 왕릉 PG 779 무덤에서 여러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그 중에는 유명한 우르의 스탠다드와 장식된 조개 껍질 판도 포함된다.[38][39]
7. 3. 메스칼람두그 (PG 755)
PG 755는 부속 인물이 없는 작은 개인 무덤으로,[27] 일반적으로 메스칼람두그 왕(MES-KALAM-DUG[40] "좋은 땅의 영웅")[41]의 무덤으로 여겨진다.[22] 그러나 이 무덤이 왕릉의 특징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메스칼람두그와 니반다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즉 같은 이름을 가진 왕자의 무덤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27][23][24]무덤 안에서는 왕의 이름이 새겨진 황금 투구를 비롯하여 수많은 금으로 만든 유물이 발견되었다.[42] 이러한 유물들은 고대 수메르 문명이 상당한 부를 축적했음을 보여준다. 메스칼람두그는 수메르 왕 목록과 다른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 우르의 왕 메사네파다의 아버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42]
7. 4. 니반다 (PG 1054)
PG 1054 묘는 메스칼람두그 왕의 왕비인 니반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27] 이 무덤은 왕족 매장의 특징을 많이 보여준다.[43]7. 5. 메스칼람두그 왕 (PG 789)

줄리안 리드에 따르면, 인장 U 11751에서 알려진 메스칼람두그 왕의 실제 무덤은 왕실 무덤 PG 789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PG 755를 "메스칼람두그 왕자"의 무덤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견해다.[27] 이 무덤 PG 789는 "왕의 무덤"이라고도 불리며, 내부에서는 많은 왕실 수행원의 유골과 함께 수많은 아름다운 유물이 발견되었다. 또한, 메스칼람두그 왕의 두 번째 부인으로 추정되는 푸아비 여왕의 무덤(PG 800)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27][44]

7. 6. 푸아비 여왕 (PG 800)
PG 789 묘지 옆에 위치한 묘지이다.[27] 이 묘의 주인은 푸아비 여왕으로, 메스칼람두그 왕의 두 번째 아내로 추정되며[27] 여왕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스스로 통치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27]묘지에서는 푸아비의 이름('𒅤𒀀𒉿 𒊩𒌆|푸아비 닌sux', 즉 "푸아비 여왕")이 새겨진 원통형 인장이 발견되었다.[45][46][47] 또한 화려한 수메르식 머리 장식과 목걸이, 우르의 리라 중 하나인 '여왕의 리라', 두 마리의 서 있는 염소가 새겨진 상감 세공품 등이 출토되었다.

7. 7. 메사네파다 (PG 1237)
줄리안 리드에 따르면, "죽음의 구덩이"라는 별명이 붙은 무덤 PG 1237은 메사네파다 왕의 것으로 추정된다.[48] 우르 왕릉의 주요 묘 목록에서도 PG 1232/1237은 메스칼람두그의 아들인 메사네파다의 묘로 기록되어 있다.[27]PG 1237 무덤에서 발굴된 주요 유물 및 관련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7. 8. 아아네파다 (PG 580)

PG 580 묘는 메사네파다의 아들인 아아네파다 왕의 묘로 추정된다.[27]
아래는 PG 580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참조
[1]
서적
Excavations at Ur
Ernest Benn Limited
1954
[2]
서적
Excavations at Ur
Ernest Benn Limited
1954
[3]
간행물
The Royal Tombs of Ur
http://cdm16028.cont[...]
Metropolitan Museum of New York and Yale University Press
2003
[4]
논문
Human Sacrifice and Intentional Corpse Preservation in the Royal Cemetery of Ur
2011
[5]
서적
Ur Excavations
Publications of the Joint Expedition of the British Museum and of the Museum of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to Mesopotamia
1934
[6]
간행물
The Great Death Pit at Ur
http://cdm16028.cont[...]
Metropolitan Museum of New York and Yale University Press
2003
[7]
서적
Art of the First Cities: The Third Millennium B.C. from the Mediterranean to the Indus
https://books.googl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3
[8]
간행물
The Tomb of Puabi
http://cdm16028.cont[...]
Metropolitan Museum of New York and Yale University Press
2003
[9]
논문
Hidden Treasure from the Royal Cemetery at Ur: Technology Sheds New Light on the Ancient Near East
2002-09
[10]
문서
Gardner's Art Through the Ages, 14th Edition
[11]
논문
Plant Forms in Jewelry from the Royal Cemetery at Ur
2000
[12]
Photograph
Gold and carnelians beads
British Museum
[13]
논문
Interpreting the Royal Cemetery of Ur Metalwork: A Contemporary Perspective from the Archives of James R. Ogden
2008
[14]
논문
Excavations at Ur
1933-11-24
[15]
논문
Chronology of the Royal Cemetery of Ur
1985
[16]
웹사이트
Challenging Theories
http://www.penn.muse[...]
University of Pennsylvania Museum of Archeology and Anthropology
2014-12-07
[17]
웹사이트
The Current Story
http://www.penn.muse[...]
Penn Museum
2014-11-17
[18]
웹사이트
Neglect, Not Looting, Threatens Iraq Sites, Study Says
http://news.national[...]
National Geographic News
2014-11-14
[19]
학술지
Assyrian King-Lists, the Royal Tombs of Ur, and Indus Origins
2001
[20]
서적
Ur excavations
https://archive.org/[...]
Trustees of the Two Museums by the aid of a grant from the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1900
[21]
서적
Ur excavations
https://archive.org/[...]
Trustees of the Two Museums by the aid of a grant from the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1900
[22]
서적
Ur
https://books.google[...]
Iraqi Cultural Centre
1981
[23]
서적
Treasures from the Royal Tombs of Ur
https://books.google[...]
UPenn Museum of Archaeology
1998
[24]
서적
Journey to the City: A Companion to the Middle East Galleries at the Penn Museum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19
[25]
서적
Ur excavations
https://archive.org/[...]
Trustees of the Two Museums by the aid of a grant from the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1900
[26]
서적
Ur excavations
https://archive.org/[...]
Trustees of the Two Museums by the aid of a grant from the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1900
[27]
서적
Art of the First Cities: The Third Millennium B.C. from the Mediterranean to the Indus
https://books.googl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3
[28]
서적
Ur excavations
https://archive.org/[...]
Trustees of the Two Museums by the aid of a grant from the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1934
[29]
서적
Warfare in the ancient Near East to 1600 BC: holy warriors at the dawn of history
Taylor & Francis
2006
[30]
서적
Orientalia: Vol. 73
https://books.google[...]
Gregorian Biblical BookShop
[31]
서적
Ur excavations
https://archive.org/[...]
"[n.p.] Pub. for the Trustees of the Two Museums by the aid of a grant from the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1900
[32]
웹사이트
CDLI-Found Texts
https://cdli.ucla.ed[...]
[33]
학술지
The "Archaic I" Phase of the Ziqqurat Terrace at Ur: A Contextual Re-assessment
https://www.academia[...]
[34]
서적
Art of the First Cities: The Third Millennium B.C. from the Mediterranean to the Indus
https://archive.org/[...]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3
[35]
서적
Reallexikon der Assyriologie und Vorderasiatischen Archäologie
https://www.academia[...]
De Gryuter
2015
[36]
서적
Warfare in the ancient Near East to 1600 BC: holy warriors at the dawn of history
Taylor & Francis
2006
[37]
서적
Art of the First Cities: The Third Millennium B.C. from the Mediterranean to the Indus
https://books.googl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3
[38]
서적
Ur excavations
https://archive.org/[...]
Trustees of the Two Museums by the aid of a grant from the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1934
[39]
서적
Warfare in the ancient Near East to 1600 BC: holy warriors at the dawn of history
Taylor & Francis
2006
[40]
서적
Ur excavations
https://archive.org/[...]
Trustees of the Two Museums by the aid of a grant from the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1934
[41]
서적
Excavations At Ur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
[42]
서적
Treasures from the Royal Tombs of Ur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Pennsylvania Museum of Archaeology
1998
[43]
서적
Ur excavations
https://archive.org/[...]
Trustees of the Two Museums by the aid of a grant from the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1900
[44]
서적
Ur excavations
https://archive.org/[...]
Trustees of the Two Museums by the aid of a grant from the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1900
[45]
웹사이트
British Museum notice WA 121544
https://www.flickr.c[...]
[46]
서적
The Sumerian World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
[47]
서적
Treasures from the Royal Tombs of Ur
https://books.google[...]
UPenn Museum of Archaeology
1998
[48]
서적
Art of the First Cities: The Third Millennium B.C. from the Mediterranean to the Indus
https://books.googl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3
[49]
서적
Art of the First Cities: The Third Millennium B.C. from the Mediterranean to the Indus
https://archive.org/[...]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3
[50]
서적
Ur excavations
https://archive.org/[...]
Trustees of the Two Museums by the aid of a grant from the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
190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