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타 쓰구하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후지타 쓰구하루는 1886년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한 화가이다. 도쿄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파리에서 '파리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1920년대에는 자화상, 실내 장면, 누드화를 통해 성공을 거두었으며, 1925년에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후 남미 여행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와 전쟁 화가로 활동하며 전쟁 그림을 제작했으나, 패전 후 전쟁 협력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1949년 프랑스로 돌아가 파리 풍경을 그리며 활동하다가 1968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일본과 프랑스에서 전시되었으며, 예술적 성취와 전쟁 협력에 대한 논쟁이 공존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계 프랑스인 - 재프랑스 일본인
재프랑스 일본인은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로 유입된 일본인, 프랑스와 일본 간의 관계자들을 포괄하며, 유학생 중심의 초기 커뮤니티를 거쳐 언론인, 학자, 기술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직 종사자들이 정착하여 양국 간 문화·경제 교류에 기여하고 일본 문화 콘텐츠를 전파하고 있다. - 일본에서 프랑스로 이민간 사람 - 다카다 겐조
다카다 겐조는 일본 출신으로 겐조 브랜드를 설립하여 독창적인 디자인과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결합한 스타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패션, 향수,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패션 디자이너이다. - 태평양 전쟁 종군 기자 -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는 미국의 모험 소설 작가로, 《화성의 공주》와 《타잔》 시리즈로 유명하며, 그의 작품은 다양한 매체로 각색되어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외계 행성과 잃어버린 세계를 배경으로 인간 본성, 문명과 야만의 대비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우생학적, 인종차별적 시각에 대한 비판과 함께 재평가되고 있다. - 태평양 전쟁 종군 기자 - 유진 스미스
윌리엄 유진 스미스는 미국의 사진가이자 포토저널리스트로, 《라이프》 잡지 종군 기자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기록하고, 《컨트리 닥터》, 《스페인 마을》 등의 사진 에세이, 그리고 대표작 《미나마타》를 통해 환경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후지타 쓰구하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후지타 쓰구하루 |
프랑스어 이름 | 레오나르 쓰구하루 푸지타 |
출생일 | 1886년 11월 27일 |
출생지 | 도쿄, 일본 |
사망일 | 1968년 1월 29일 |
사망지 | 취리히, 스위스 |
국적 | 일본 프랑스 |
활동 | |
분야 | 회화 판화 |
활동 기간 | 1910년 - 1968년 |
소속 | 에콜 드 파리 |
훈련 | 도쿄 미술학교 (구제) |
주요 작품 | '주이 천이 있는 나부' (1922년) '다섯 명의 나부' (1923년) '아키타의 행사' (1937년) '앗투 섬 옥쇄' (1943년) '카페' (1949년) |
영향 및 수상 | |
영향을 준 사람 | 파블로 피카소 모이즈 키슬링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
영향을 받은 사람 | 칸디도 포르티나리 |
수상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아사히 문화상 제1회 트리스트 종교 미술전 금상 훈일등 서보장 |
기타 | |
배우자 | 도키타 도미코 페르낭드 바레 뤼시 바둘 마들렌 르쾨 호리우치 기미요 |
선출 | 살롱 도톤느 근대 일본 미술 종합전 |
2. 생애
후지타 쓰구하루는 1886년 도쿄에서 육군 군의총감을 지낸 군의관 아버지 후지타 쓰구아키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현 쓰쿠바 대학 부속 소학교)와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 중학교(현 쓰쿠바 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도쿄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신주쿠에 아틀리에를 차렸으나, 곧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 몽파르나스에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등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본국에서의 송금이 끊겨 빈곤한 나날을 보냈고, 프랑스인 모델 페르난드 바레이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는 등 화가로서 성공, 1925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몇 번의 이혼을 거듭, 1935년 일본에 돌아와 기미요와 5번째 결혼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일본으로 돌아와 육군 미술 협회 이사장에 취임, 전쟁화 작업을 했다. 이로 인해 종전 후 전쟁 협력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1955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 1959년 아내와 함께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1968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망, 시신은 파리 교외에 묻혔다.
2. 1. 일본에서의 초기 생애 (1886-1913)
1886년 도쿄에서 육군 군의관이었던 아버지 후지타 쓰구아키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구마모토시에서 성장했으며,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현 쓰쿠바 대학 부속 소학교)와 도쿄 고등사범학교 부속 중학교(현 쓰쿠바 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후지타는 모리 오가이의 추천으로 도쿄 미술학교(현 도쿄 예술대학) 서양학과에 입학하여 구로다 세이키에게서 서양화(洋画)를 배웠다.[18] 그러나 당시 일본 화단은 인상파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고, 후지타의 화풍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18] 1910년 졸업 후, 1911년에는 교사였던 토키타 토미코와 결혼하였으나,[20] 1913년 프랑스 유학을 결심하고 아틀리에를 정리한 뒤, 아내와 이혼하였다.
2. 2. 파리에서의 활동과 성공 (1913-1930)
1913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몽파르나스에 정착했다. 당시 몽파르나스는 저렴한 집세 때문에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후지타는 이웃에 살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샤임 수틴 등과 친분을 쌓았다. 이들을 통해 에콜 드 파리의 쥘 파스킨, 파블로 피카소, 오시프 자킨, 모이즈 키슬링, 장 코크토 등과도 교류했다. 프랑스에서는 "쓰구하루"를 발음하기 쉽도록 "쓰구지(Tsukuji)"라고 불렀다.[17][18][19][20][21]가와시마 리이치로, 시마자키 도손, 사쓰마 지로하치, 가네코 미쓰하루, 오카다 겐조 등 파리에 있던 일본인들과도 교류했다. 특히 프랑스 사교계에서 "동양의 귀공자"로 불리던 부호 사쓰마 지로하치는 후지타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이미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20세기 회화가 등장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구로다 세이키식 인상파 그림을 서양화로 배워온 후지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회화의 자유로움에 매료되어 기존 화풍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구로다 세이키 선생님이 지정하신 그림 물감 상자를 내던졌다"고 회고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일본으로부터의 송금이 끊기면서 생활이 어려워졌다. 전시 상황에서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식량조차 구하기 어려워 그린 그림을 태워 추위를 견디기도 했다. 1917년 3월, 카페에서 만난 프랑스인 모델 페르낭드 바레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 무렵 후지타의 그림이 처음으로 팔리기 시작했다. 첫 수입은 7프랑에 불과했지만, 이후 그림이 조금씩 팔리면서 3개월 후에는 첫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셰롱 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은 미술 평론가 앙드레 살몽의 호평을 받으며 그림이 고가에 팔리기 시작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호황으로 많은 후원자들이 파리에 모여들었고, 이는 후지타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면상필을 이용한 선묘 기법의 독특하고 투명한 화풍을 확립했다. 살롱 출품작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살롱 도톤느 심사위원으로 추천되면서 명성이 급상승했다.
당시 몽파르나스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몇 안 되는 화가 중 한 명이었던 후지타는 드물게 뜨거운 물이 나오는 욕조를 설치했다. 맨 레이의 애인이었던 키키를 포함한 많은 모델들이 이 방에서 사치를 즐겼다. 특히 키키를 모델로 한 『침실의 누드 키키 (Nu couché à la toile de Jouy)』는 1922년 살롱 도톤느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8000프랑 이상에 팔렸다.
"'''Fou'''jita"의 "FouFou(장난꾸러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프랑스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1925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과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을 받았다.
2. 3. 남미 여행 (1930-1933)
1931년 후지타는 새로운 애인 마들렌 르크(Madeleine Lequeux, 1910 - 1936)와 함께 개인전을 열기 위해 남미로 떠났다.[23] 마들렌은 마디 도르망(Mady Dormans)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전직 무용수로 파리 카지노(Casino de Paris)에서 일했다.[22] 당시 후지타는 미납 세금 문제와 파산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22] 유럽과 문화, 역사, 지리적으로 가까우며 후지타의 명성도 높았던 남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열린 개인전은 큰 찬사를 받았다.후지타와 마들렌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4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이스마엘 네리를 만났고, 네리는 후지타의 초상화를 그렸다.[22]
브라질 이후 그들은 아르헨티나로 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그는 5개월 동안 머물렀다.[22] 그 후 볼리비아, 페루, 쿠바를 여행했다.[22]
이후 후지타는 멕시코로 가서 1932년 11월에 도착하여 7개월 동안 머물렀다.[22] 후지타는 디에고 리베라가 이끄는 멕시코 벽화 운동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그는 파리에서 리베라와 친구였다. 정부와 지역 예술가들이 공동으로 노력한 것에 감명을 받은 후지타는 미술사가 이케다 아사토(Asato Ikeda)의 설명처럼 "예술은 부유한 개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대중과 일반 대중을 위해서도 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그의 남미 여행은 그에게 대규모 공공 예술이 수행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역할을 깨닫게 해주었다."[2]
2. 4. 일본 귀국과 전쟁화 (1933-1949)
1933년 말, 후지타는 마들렌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마들렌은 일본 문화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4] 1935년 2월, 그녀는 파리로 돌아갔지만 1년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고,[4] 1936년 6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4]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후지타는 호리우치 기미요와 다섯 번째 결혼을 했다.[4]이 기간 동안 후지타의 그림은 게이샤, 스모 선수, 어부 등 고전적인 일본 소재가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1934년 제21회 니카 살롱에 전시되었을 때 그의 수채화와 유화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비평가들은 그의 일본에 대한 시각이 구식이며 외국인의 그것과 닮았다고 느꼈고, 한 비평가는 "이 화가가 그린 사람들과 풍경은 살아있는 현재의 일본이 아니라 과거의 낡은 유물"이라고 지적했다.[4] 1937년 전통적인 일본식 가옥을 지은 것을 통해 후지타의 과거 일본에 대한 취향이 더욱 확고해졌다.[4]
1937년 중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후지타는 전선에서의 전쟁을 통해 전쟁 노력에 기여하고자 했고, 이 민간 자원봉사자들은 대일본제국 전쟁 화가 협회를 구성했다.[5] 1938년 후지타는 해군 정보국 설립과 함께 전쟁 화가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첫 번째 전쟁 그림(《전쟁화》)인 《난창 공항 화재》를 제작했다.[5]
1939년 4월, 육군은 대일본제국 전쟁 화가 협회를 육군 미술 협회로 개편했으며, 현역 군인인 새로운 회장 마쓰이 이와네의 감독하에 거대한 전쟁 그림을 의뢰했다.[5] 후지타와 그의 동료 화가 미야모토 사부로는 주요 회원이었다.[5] 1943년 후지타는 부회장이 되었다.[5] 육군 미술 협회와의 강력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후지타는 1939년 4월 파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와 기미요는 1년 조금 넘게 파리에 머물렀고, 벨기에 전투 이후인 1940년 5월 프랑스를 떠나 일본으로 돌아왔다.[5]

도쿄로 돌아온 후 후지타는 전쟁 노력을 지원하는 예술가로서 자신을 헌신했다.[6]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일본의 대표적인 전쟁 화가가 되었으며,[6] 수많은 전쟁 그림을 제작했고[6] 군을 위한 특별 전시회를 감독했다.[6] 그는 1941년에 그린 거대한 그림(약 1.5 x 4.5미터)인 《노몬한 전투》와 같은 중요한 작품을 의뢰받았다.[6] 이 그림은 그 당시까지 일본이 경험한 가장 큰 군사적 패배 중 하나를 묘사하고 있지만, 일본 군인들의 용기를 찬양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오자키 마사아키는 후지타의 전시 작품을 두 시기로 나눈다. 《노몬한 전투》와 같은 초기 작품들은 전쟁을 기록하고 군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4] 그러나 두 번째 시기는 일본이 승리보다 패배를 더 많이 경험하던 시기였다. 일본 국민들은 자신감을 잃기 시작했고, 전쟁은 더욱 절박해졌다. 후지타 그림의 출처는 전장 자체가 아니라 그의 상상력이었고, 그 결과 오자키가 고전 일본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지옥의 묘사에 비유하는 충격적인 극적인 구성이 나타났다.[4] 미술사가인 아야 루이스 맥도널드는 또한 그의 작품이 루브르 박물관의 19세기 프랑스 회화에 대한 그의 지식으로 더욱 풍부해졌다고 지적한다.[6]
이 시기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은 1943년 8월 완성된 《아투섬 최후의 항전》으로, 알류산 열도에서 미국군과의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일본군은 미국군에 항복하기보다는 전투에서 남은 병사들이 자결했다. 이 작품은 마치 제단처럼 감상자들에게 내장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 울거나 기도하기도 했다.[7] 후지타는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투섬 최후의 항전》과 유사한 그림을 계속 그렸다.
일본의 패전 후, 일본의 연합국은 후지타의 도움을 받아 모든 전쟁 그림을 수집하여 미국으로 보내려고 노력했다.[7] 이 그림들은 공식적으로 일본으로 "반환"된 적이 없지만, 1970년부터 1977년까지 그림을 받은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에 "무기한 대여"되었다.[7]
후지타는 전후 일본에서 많은 대중적 비판을 받았다. 그는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평화주의자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변호했지만, 일본미술협회(《일본비술회》)는 1946년 그를 전쟁 책임 예술가로 지목했다.[8] 1947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발표한 전범 명단에 후지타의 이름은 없었지만,[8] 그의 명성은 손상되었고,[8] 부분적으로는 그의 예술을 일본 제국 군대를 위한 선전으로 사용하고 전쟁 화가로서의 역할에 대한 비난에 맞서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8] 미국의 시인 해리 로스콜렌코는 뉴욕의 케네디 앤드 컴퍼니 갤러리에서 그의 그림 전시회를 열어 후지타를 지지하려고 했지만, 그림은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후지타와 로스콜렌코는 후지타를 파시스트, 제국주의자, 팽창주의자로 묘사한 쿠니요시 야스오를 비난했다.[8] 결국 후지타는 일본을 완전히 떠나기로 결정했다.[8]
2. 5. 프랑스 재정착과 말년 (1949-1968)
1949년 헨리 스기모토의 도움으로 미국 비자를 받아 브루클린 미술관 미술학교에서 강사직을 맡았고, 전시회도 열었다. 그러나 벤 샤른을 비롯한 예술가들로부터 파시스트라는 비판을 받으며 시위가 벌어졌다.[1] 당시 그의 그림은 파리에 대한 향수를 담고 있었다. 뉴욕에서 불행을 느낀 후지타는 파리로 돌아가고자 했고, 1950년 1월 비자가 승인되자 아내 기미요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왔다.[2] 그는 다시는 프랑스를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3]부부는 몽파르나스로 이사했고, 후지타는 "파리 풍경"이라 불리는 거리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4] 잠시 의상 디자인에도 참여하여 1951년 5월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된 나비부인의 "일본식" 의상을 제작했고,[5] 르네 에롱 드 빌포스의 책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4] 1954년 후지타는 기미요와 정식으로 결혼했다.[6] 1955년에는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1957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7]
1959년 10월 14일, 부부는 랭스 대성당에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멈 샴페인 하우스의 수장인 르네 라루와 프랑수아즈 테이탕제르가 대부와 대모였고, 후지타는 레오나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8] 개종 후, 후지타는 대부분의 작품을 종교적인 주제로 창작하는 데 쏟았다.[9]
1962년, 후지타는 앙리 마티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예배당을 짓고 장식하려는 계획을 세웠다.[10] 평화의 성모 마리아 예배당으로 명명되고 르네 라루의 자금 지원으로 건설된[11] 이 예배당은 그의 경력의 완성을 상징하고자 했다.[12] 1963년부터 1966년 일반에 공개될 때까지 그는 건물의 거의 모든 측면을 디자인했고,[13] 그리스도의 삶을 묘사한 성경 장면의 프레스코화로 내부를 장식했다.[14]
예배당 개관 몇 달 후, 후지타는 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1968년 1월 29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망했다.[15] 처음에는 예배당에 안치되었으나, 키미요는 그의 시신을 빌리에르르바클 묘지로 이장했다. 2003년, 그의 관은 예배당 건설 당시 그가 의도했던 자리인 바닥 돌 아래 후지타 예배당에 다시 안치되었다.[16]
3. 작품 세계
전쟁 후, 후지타 쓰구하루는 일본에서 전범으로 낙인찍혔다.[8] 1972년 미술 잡지 「미술첩(Bijutsu techō)」에 기고한 미술가 기쿠하타 모쿠마는 그를 광기 어리고 자기애가 강하며 죽음을 묘사하는 것을 즐긴 미술가로 비판하면서도, 전쟁의 참상에 책임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라고 결론지었다.[9] 후지타의 평판과 20세기 일본 미술사에서의 그의 위치는 오늘날 일본에서도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10]
프랑스에서 후지타는 주로 파리 화파(École de Paris)와 1920년대 활기찬 분위기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경쾌하고 섬세한 소재(파리 거리 풍경, 고양이, 풍만한 여성, 일상 용품 등)로 유명하다.
1980년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와 도쿄 국립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Tokyo)에서 후지타의 전쟁 시대 작품을 포함한 그의 전체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회가 기획되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취소되었다.[11] 2019년 파리 일본문화원(Musée de la culture du Japon)에서 개최된 「후지타 1886-1968. 일생의 작품(Foujita 1886-1968. Oeuvres d'une vie)」 전시회는 2018년 도쿄도 미술관에서 열린 「후지타: 회고전(Foujita: A Retrospective)」을 기반으로 하며,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후지타의 60년에 걸친 예술 활동을 개괄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전시에는 그의 전쟁 그림 두 점이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프랑스 대중이 몽파르나스 시절을 넘어선 후지타의 경력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11]
일본에서 후지타의 작품은 도쿄 아티존 미술관(Artizon Museum)과 도쿄 국립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Tokyo), 아키타 시(Akita (city)) 아키타 미술관(Akita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 파리 시립현대미술관(Musée d'Art Moderne de Paris) 등 주요 프랑스 컬렉션에도 포함되어 있다.
4. 후지타 쓰구하루에 대한 평가
후지타 쓰구하루는 일본과 프랑스 양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화가이다. 독창적인 화풍과 기법으로 20세기 미술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전쟁 협력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존재하며, 그의 전쟁화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린다.
일본에서는 전범으로 낙인찍히기도 했으나,[8] 2006년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성공적으로 개최되는 등, 그의 작품 세계를 적극적으로 다루려는 움직임도 보인다.[8] 미술가 기쿠하타 모쿠마는 후지타를 광기 어리고 자기애가 강하며 죽음을 묘사하는 것을 즐긴 미술가로 비판하면서도, 전쟁 참상에 책임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라고 평가했다.[9]
프랑스에서는 파리 화파(École de Paris)의 일원으로, 1920년대 활기찬 분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는다. 파리 거리 풍경, 고양이, 풍만한 여성, 일상 용품 등을 경쾌하고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들로 유명하다. 2018년 마이욜 미술관(Musée Maillol)에서 열린 전시회는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의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업적을 조명했다.
1980년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와 도쿄 국립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Tokyo)에서 그의 전체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회가 기획되었으나 취소되기도 했다.[11] 2019년 파리 일본문화원(Musée de la culture du Japon)에서 개최된 전시회는 60년에 걸친 그의 예술 활동을 개괄적으로 보여주었으며, 그의 전쟁 그림 두 점이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프랑스 대중이 몽파르나스 시절을 넘어선 후지타의 경력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11]
면상필(面相筆)을 이용한 선묘(線描)를 살린 독자적인 기법으로 투명하고 독특한 화풍을 확립하여 살롱에 출품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살롱 도톤느 심사위원으로도 추천되었다.
당시 몽파르나스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몇 안 되는 화가 중 한 명이었으며, 맨 레이의 애인이었던 키키를 포함한 많은 모델들이 그의 방에 와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욕조를 사용하는 등의 소소한 사치를 즐겼다. 특히 『침실의 누드 키키 (Nu couché à la toile de Jouy)』는 1922년 살롱 도톤느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켜 8000프랑 이상에 팔렸다.
이 무렵 후지타는 프랑스어 표기 "'''Fou'''jita"에서 "FouFou(프랑스어로 장난꾸러기라는 뜻)"라고 불리며 프랑스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1925년에는 프랑스에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벨기에에서 레오폴드 훈장을 받았다.
후지타 쓰구하루(藤田嗣治)는 "嗣治"라는 이름이 "쓰구하루(つぐはる)" 와 "쓰구지(つぐじ)" 두가지로 읽혔으며, 작품의 사인도 "Foujita"와 "Fujita" 두 가지가 있다. 또한 프랑스 귀화 후의 표기도 "레오나르·후지타(レオナール・フジタ)"와 "레오나르도·후지타(レオナルド・フヂタ)"의 변화가 있다.[33]
4. 1.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더불어민주당 및 진보 진영에서는 후지타 쓰구하루의 전쟁 협력 행적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의 작품이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미화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34] 다만, 그의 예술적 성취와 독창성은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5. 주요 작품 목록
제목 | 제작 연도 | 기법·재료 | 크기 | 소장처 | 비고 |
---|---|---|---|---|---|
전쟁 기록화 | |||||
아쓰타 신궁에 바치는 그림[35] | 1943년 | 캔버스에 유채 | 193.5cm x 292.5cm |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 아쓰타 신궁에 봉납할 목적으로 제작. |
사이판 섬 동포 최후의 날[35] | 1945년 | 캔버스에 유채 | 205cm x 293cm |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무기한 대여 작품) | 사이판 전투를 소재로 한 작품. |
애와 어소[35] | 1943년 | 캔버스에 유채 | 259.5cm x 199.5cm |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무기한 대여 작품) |
후지타 쓰구하루는 중일전쟁 발발 후 일본 육군 보도부의 요청으로 전쟁 기록화(전쟁화)를 그렸다. 그는 국민을 고무하기 위해 큰 캔버스에 사실적인 그림을 그려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전쟁터의 잔혹함과 참혹함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일반적인 전쟁화의 틀에 맞지 않았다.[35] 또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사상을 전쟁화에 담아 표현했다.[35]
종전 후, 후지타는 연합군 점령하에서 일본 공산당에 입당한 우치다 이와오 등에 의해 "전쟁 협력자"로 비난받았다.[35] 그는 "화가는 그림만 그려주세요. 동료 싸움은 하지 마세요. 일본 화단은 빨리 국제 수준에 도달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프랑스로 떠났으며, 이후 "내가 일본을 버린 것이 아니다. 일본에 버려진 것이다"라고 말했다.[35]
6. 참고 문헌
이전 답변에서 "참고 문헌" 섹션은 원본 소스에 없다고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원본 소스만으로는 해당 섹션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이전 답변은 지시에 따라 정확하게 출력된 결과입니다.
참조
[1]
서적
À travers un cristal étrange. Foujita et la France
Maison de la culture du Japon à Paris
[2]
서적
The Politics of Painting. Fascism and Japanese Art during the Second World War
University of Hawai'i Press
[3]
웹사이트
Aicha , 1914–1914
https://www.artnet.c[...]
2024-09-19
[4]
서적
Foujita et le Japon: à travers le prisme de la critique japonaise de l'époque
Maison de la culture du Japon
[5]
학술지
New Art Collectives in the Service of the War: The Formation of Art Organizations during the Asia-Pacific War
https://read.dukeupr[...]
2013-05-01
[6]
서적
Fujita Tsuguharu: An Artist of the Holy War Revisited
Brill
[7]
서적
War Art and Its Era
Brill
[8]
학술지
Fujita Tsuguharu Retrospective 2006: Resurrection of a Former Official War Painter
2009-12
[9]
웹사이트
Dear Foujita....An Examination of the Pacific War Record Paintings
artplatform.go.jp/re[...]
1972-03
[10]
서적
Foujita et le Japon. À travers le prisme de la critique japonaise de l'époque and Tsuguharu Foujita and Japan
Maison de la culture du Japon and Éditions Snoeck and the Musée des Beaux-Arts de Reims
[11]
서적
Foujita, une rétrospective. En guise d'introduction
Maison de la culture du Japon
[12]
서적
The Foujita Donation
Éditions Snoeck and the Musée des Beaux-Arts de Reims
[13]
사진
1930년 9월 4일, 파리의 알베르 카한 사저에서 오토크롬 기법으로 촬영된 초상사진
[14]
웹사이트
藤田嗣章
http://jahis.law.nag[...]
[15]
뉴스
藤田嗣隆さん 『レオナルド藤田嗣治覚書』 身内だからこそ書ける姿
https://www.sankei.c[...]
산케이 신문
2022-06-08
[16]
서적
天皇の起源 法社会学的考察
書肆心水
[17]
뉴스
藤田嗣治の肖像
http://www.nishinipp[...]
서일본신문
2009-03-03
[18]
방송
日本人と自画像~東京芸術大学 4800枚の証言~
https://www.nhk.or.j[...]
NHK ETV特集
2007-08-19
[19]
웹사이트
極楽寺
http://www.vill.kiso[...]
2019-02-19
[20]
뉴스
藤田嗣治の風景画 未発表作見つかる 渡仏前に描いた「榛名湖」
https://www.asahi.co[...]
2019-02-18
[21]
문서
ユーゲニズム(幽玄主義)을 미국에서 퍼뜨린 화가
[22]
웹사이트
異邦人の視線 -金子光晴とジャン・コクトー
http://www.kyoai.ac.[...]
[23]
문서
후에 아내가 되어, 일본에서 급사
[24]
뉴스
戦乱のパリから帰国
昭和ニュース事典編纂委員会
1940-07-09
[25]
서적
日本ダービー物語
丸善
[26]
뉴스
秘史こぼれ話
1976-05-31
[27]
웹사이트
レオナール・フジタ (藤田嗣治)
https://www.polamuse[...]
ポーラ美術館
2023-12-04
[28]
웹사이트
藤田嗣治と5人の妻 ~パリで評価され、最後はフランスに帰化した画家の孤独
https://www.suiha.co[...]
SUIHA Gallery
2023-12-04
[29]
웹사이트
DOSSIER DE PRESSE – mars 2010, Foujita Monumental ! Enfer et Paradis
https://www.fondatio[...]
2018-09-14
[30]
웹사이트
東京国立近代美術館アートライブラリ所蔵 藤田嗣治旧蔵書
http://www.momat.go.[...]
[31]
웹사이트
Chapelle Foujita - Portail officiel des Musées de Reims(フランス語)
https://musees-reims[...]
MUSEUMS OF REIMS
2023-12-04
[32]
뉴스
藤田嗣治の日記・写真6000点 東京芸大に寄贈「生涯知る資料」
2011-02-09
[33]
서적
[34]
학술지
近代画説 19
[35]
서적
日本近代絵画全集7 藤田嗣治
講談社
[36]
書籍
(不明)
2010
[37]
ニュース
藤田嗣治、あの乳白色はベビーパウダー
http://otona.yomiuri[...]
2011-02-15
[38]
雑誌
フランスの画家たち
中央公論美術出版
2004
[39]
書籍
「かたち」への挑戦―岡田三郎助と藤田嗣治
平凡社
2014-12-17
[40]
書籍
(不明)
2010
[41]
書籍
(不明)
2010
[42]
書籍
藤田嗣治 手しごとの家
集英社新書
2010-03
[43]
書籍
藤田嗣治 手しごとの家
集英社新書
2010-03
[44]
웹사이트
『開運!なんでも鑑定団』2016年8月16日放送 レオナール・フジタの円形机
https://www.tv-tokyo[...]
テレビ東京
2016-09-23
[45]
전시회 카탈로그
藤田嗣治展 東と西を結ぶ絵画
[46]
전시회 카탈로그
没後50年 藤田嗣治展
[47]
전시회 카탈로그
ユニマットコレクション フランス近代絵画と珠玉のラリック展 ―やすらぎの美を求めて―
神戸新聞社
2017-09-16
[48]
전시회 카탈로그
藤田嗣治展 東と西を結ぶ絵画
[49]
전시회 카탈로그
「松本竣介 創造の原点」展
神奈川県立近代美術館
2016
[50]
웹사이트
横たわる裸婦
http://www.moma.pref[...]
[51]
전시회 카탈로그
藤田嗣治展 東と西を結ぶ絵画
[52]
전시회 카탈로그
藤田嗣治展 東と西を結ぶ絵画
[53]
전시회 카탈로그
TAD 富山県美術館
富山県美術館
2017
[54]
웹사이트
二人裸婦
http://www.moma.pref[...]
[55]
전시회 카탈로그
長島美術館図録
1989-10-05
[56]
전시회 카탈로그
藤田嗣治展 東と西を結ぶ絵画
[57]
書籍
ウッドワン美術館所蔵 近代日本絵画の巨匠たち
青幻舎
2011-02
[58]
잡지
芸術新潮
2018-08
[59]
잡지
芸術新潮
2018-08
[60]
전시회 카탈로그
没後50年 藤田嗣治展
[61]
웹사이트
島根県立美術館 収蔵品データベース
http://jmapps.ne.jp/[...]
[62]
전시회 카탈로그
日本赤十字社徳島県支部創立130周年記念展 今に生きる「人道博愛の心」ー美術に見る日本赤十字社の歩みー図録
今に生きる「人道博愛の心」展実行委員会
2017-04-22
[63]
전시회 카탈로그
熱田神宮名宝図録
1992-04-01
[64]
전시회 카탈로그
吉野石膏コレクション 西洋編
吉野石膏株式会社
2018-08-31
[65]
웹사이트
偽版画流通、丸善が公表せず 大阪の画商、17年前販売か―藤田嗣治
https://web.archive.[...]
時事通信
2021-06-28
[66]
書籍
平野政吉 世界のフジタに世界一巨大な絵を描かせた男
新潮社
200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