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커원
1. 개요
위안커원은 청나라 무관 위안스카이의 서자로, 1889년 조선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국 고전 문학, 서예, 수묵화에 능했고 미술품과 골동품 수집에 열중했다. 아버지의 중화 제국 황제 즉위에 반대하고 방탕한 생활로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으며, 상하이로 도망쳐 깡패 집단에 가담하기도 했다. 1931년 톈진에서 42세로 사망했으며,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 이름 | 위안커원 |
|---|---|
| 원래 이름 | 袁克文 |
| 작위 | 중화민국 대총통 영식 (中華民國 大總統 令息) 중화제국 황실 원자 (中華帝國 皇室 元子) |
| 출생일 | 1890년 7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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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
| 사망일 | 1931년 (42세) |
| 사망지 | 허베이성 톈진에서 병사 |
| 별칭 | 자(字)는 바오천(豹岑), 호(號)는 한윈(寒云) |
| 배우자 | 본부인 류메이전(劉梅眞), 그 외 기첩 785명 |
| 자녀 | 슬하 4남 3녀(모두 본부인 소생), 셋째 아들 위안자류(袁家骝) |
| 아버지 | 홍헌제 위안 스카이 |
| 학력 | 중학당 졸 |
| 정당 | 무소속 |
| 어머니 | 조선 안동 김씨 여인(생모), 황후 위씨(적모) |
| 친인척 | 양조부 위안바오칭(袁保慶), 친조부 위안바오중(袁保中), 삼자부 우젠슝(吳健雄), 친손자 빈센트 유언(Vincent Yu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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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거주한 중국인 -
한국 화교
한국 화교는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계 주민을 의미하며, 1882년 이후 형성된 사회로 경제적 어려움과 정책 변화를 겪었으나 한중 수교 이후 다시 활성화되었고, 한국식 중화 요리 발전에 기여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 존재한다. -
한국에 거주한 중국인 -
가유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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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황자 -
유계원
유계원은 세조 유민의 외손이자 예종 유균의 양자로, 예종 사후 이부형 유계은이 즉위하자 곽무위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요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송나라의 침공으로 북한이 멸망하자 송에 항복하여 팽성군공에 봉해졌다. -
중국의 황자 -
이종가
이종가는 후당의 황제였으며, 이사원의 양자가 되어 군사적 공을 세웠으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고 민제를 살해한 후 황위에 올랐지만, 석경당의 반란과 요나라의 침략으로 자결했다. -
청나라의 귀족 -
구왈기야 할라
구왈기야 할라는 청나라 시대 주요 가문으로, 여러 갈래로 나뉘어 활동했으며, 군공을 세워 관직을 받거나 유명 인물을 배출한 만주족의 8대 성씨 중 하나이다. -
청나라의 귀족 -
이영방
이영방은 명나라 무순 유격 출신으로 후금에 투항하여 청나라에 항복한 첫 번째 명나라 장수가 되었으며, 사르후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정묘호란에 참전하여 삼등총병관에 제수되었고, 변발한 한인 고관의 시초이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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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커원은 1889년 조선 한성부에서 청나라의 무관이었던 위안스카이의 서자로 출생하였다. 그의 자는 바오천(豹岑, 표잠)이고 호는 한윈(寒云, 한운)이며, 원적지는 중국 허난성 샹청 현이다. 어머니는 조선 출신의 안동 김씨 여인으로 아버지 위안스카이의 측실(側室)이었다.
위안커원은 아버지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머물던 중 출생하였으며, 경상도 안동에서도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직후, 일가족과 함께 조선을 떠나 청나라로 귀국하였다. 그 후 허난성 쉬창 부 샹청 현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핑으로 옮겼다.
위안커원의 형은 위안커딩이다. 그는 중국 고전 문학에 능통했고, 서예와 수묵화의 달인이었으며, 미술품과 골동품 수집에 열중했다. 아버지 위안스카이의 중화 제국 황제 즉위에 반대하고 방탕한 생활 태도를 보여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난 이듬해 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되고 청나라가 멸망한 후, 위안커원은 중화민국의 장기와 마작 유단자로 명성을 날렸다. 아버지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을 성립하여 황제로 재위하던 시기에는, 위안커원은 적모인 황후 위씨 외에도 생모인 후궁 진씨를 포함한 후궁 11명을 거느린 아버지의 서자이자 차남으로 왕위 계승자 1순위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1916년 아버지 위안스카이가 중국 국민당의 항거로 보위에서 쫓겨나고 중화제국이 멸망한 후, 같은 해 6월 6일 아버지 위안스카이가 베이징에서 요독증으로 병사하자 다시 샹치 및 마작 유단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위안커원은 중국 전통 문학 전문가이자 서예와 수묵화의 대가였다. 시와 가사에 뛰어났으며, 미술품과 골동품 수집에 열중했다. 아버지의 군주제 부활에 반대했고, 문란한 생활을 하여 아버지를 분노하게 했다. 위안커원은 상하이로 도망쳐 깡패 집단에 가담했고, 상하이와 톈진에서 많은 제자를 모았다.
1889년 위안스카이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위안스카이의 첩으로 조선 출신인 김씨이다. 위안커원은 어머니의 고향인 조선 경성부(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형으로는 위안커딩/袁克定영어이 있다.
위안커원은 중국 고전 문학에 능통했고, 서예와 수묵화의 달인이었다. 미술품과 골동품 수집에 열중했다. 아버지의 중화 제국 황제 즉위에 반대했고, 방탕한 생활 태도 때문에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다. 그는 아버지의 비서였던 보샹펀(장우)과 함께 상하이로 도망쳐 청방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상하이와 톈진에서 많은 수하를 거느리게 되었다.
1931년 톈진에서 42세로 병사하였다.
2.1. 출생 배경 및 어린 시절
위안커원은 1889년 조선 한성부에서 청나라의 무관이었던 위안스카이의 서자로 출생하였다. 그의 자는 바오천(豹岑, 표잠)이고 호는 한윈(寒云, 한운)이며, 원적지는 중국 허난성 샹청 현이다. 어머니는 조선 출신의 안동 김씨 여인으로 아버지 위안스카이의 측실(側室)이었다.
위안커원은 아버지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머물던 중 출생하였으며, 경상도 안동에서도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직후, 일가족과 함께 조선을 떠나 청나라로 귀국하였다. 그 후 허난성 쉬창 부 샹청 현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핑으로 옮겼다.
위안커원의 형은 위안커딩이다. 그는 중국 고전 문학에 능통했고, 서예와 수묵화의 달인이었으며, 미술품과 골동품 수집에 열중했다. 아버지 위안스카이의 중화 제국 황제 즉위에 반대하고 방탕한 생활 태도를 보여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2.2. 청년 시절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난 이듬해 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되고 청나라가 멸망한 후, 위안커원은 중화민국의 장기와 마작 유단자로 명성을 날렸다. 아버지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을 성립하여 황제로 재위하던 시기에는, 위안커원은 적모인 황후 위씨 외에도 생모인 후궁 진씨를 포함한 후궁 11명을 거느린 아버지의 서자이자 차남으로 왕위 계승자 1순위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1916년 아버지 위안스카이가 중국 국민당의 항거로 보위에서 쫓겨나고 중화제국이 멸망한 후, 같은 해 6월 6일 아버지 위안스카이가 베이징에서 요독증으로 병사하자 다시 샹치 및 마작 유단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위안커원은 중국 전통 문학 전문가이자 서예와 수묵화의 대가였다. 시와 가사에 뛰어났으며, 미술품과 골동품 수집에 열중했다. 아버지의 군주제 부활에 반대했고, 문란한 생활을 하여 아버지를 분노하게 했다. 위안커원은 상하이로 도망쳐 깡패 집단에 가담했고, 상하이와 톈진에서 많은 제자를 모았다.
1889년 위안스카이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위안스카이의 첩으로 조선 출신인 김씨이다. 위안커원은 어머니의 고향인 조선 경성부(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형으로는 위안커딩/袁克定영어이 있다.
위안커원은 중국 고전 문학에 능통했고, 서예와 수묵화의 달인이었다. 미술품과 골동품 수집에 열중했다. 아버지의 중화 제국 황제 즉위에 반대했고, 방탕한 생활 태도 때문에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다. 그는 아버지의 비서였던 보샹펀(장우)과 함께 상하이로 도망쳐 청방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상하이와 톈진에서 많은 수하를 거느리게 되었다.
2.3. 말년과 사망
위안커원은 1889년에 태어났다.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인 위안스카이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위안스카이의 첩으로 조선 출신인 김씨이다. 위안커원은 어머니의 고향인 조선 경성부(현재의 서울)에서 태어났다. 형으로는 위안커딩/袁克定영어이 있다.
위안커원은 중국 고전 문학에 능통했고, 서예와 수묵화의 달인이었다. 그는 미술품과 골동품 수집에 열중했다. 아버지의 중화 제국 황제 즉위에 반대했고, 방탕한 생활 태도 때문에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다. 그는 아버지의 비서였던 보샹펀(장우)과 함께 상하이로 도망쳐 청방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상하이와 톈진에서 많은 수하를 거느리게 되었다.
1931년 톈진에서 42세로 병사하였다.
3. 가족 관계
위안커원은 정처인 류메이전(刘梅真) 외에도 칭윈로우(淸雲樓), 샤오타오훙(小桃紅), 탕즈쥔(唐志君), 위페이원(于佩文), 야시엔(亞先) 등 다섯 명의 첩을 두었다. 그 외에도 애인이 다수 있어, 평생 관계를 맺은 여성은 7, 80명에 달한다고 한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으며, 이들은 모두 학자가 되었다. 셋째 아들 위안자류(袁家騮)는 저명한 고에너지 물리학자로, 역시 물리학자인 우젠슝과 결혼했다.
4. 기타
위안커원은 정처인 류메이전 외에 정운루, 샤오타오훙, 탕즈쥔, 위페이원, 야셴 등 5명의 첩을 두었다. 그 외에도 애인이 다수 있어, 평생 관계를 맺은 여성은 7, 80명에 달한다고 한다.
위안커원에게는 4남 3녀의 자녀가 있었고, 그들 모두 학자가 되었다. 셋째 아들 위안자류는 저명한 고에너지 물리학자이며, 역시 물리학자인 우젠슝과 결혼했다.
위안커원은 마작 게임 연구로도 알려져 있으며, 『작보』를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