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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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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곤일은 1830년 태어나 1902년 사망한 청나라 말기의 관료이다. 1855년 태평천국 운동 진압에 참여하였으며, 지현, 지주, 지부, 총독 등을 역임하며 재정 정비, 부패 척결, 양무운동을 추진했다. 청일 전쟁 시 흠차대신으로 활약했으며, 변법자강운동을 지지했으나 무술변법에는 소극적이었다. 의화단 운동 당시 동남호보를 주도하며 서태후의 선전포고를 무시했으며, 장지동과 함께 강초삼절 상소를 올려 청말신정을 이끌었다. 사후 충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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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곤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유곤일
이름유곤일
한자 표기劉坤一
로마자 표기Liú Kūnyī
출생일1830년 1월 21일
사망일1902년 10월 6일
직업정치가
경력
양광총독 임기 시작1875년
양광총독 임기 종료1879년
이전영한
이후장수성

2. 생애

유곤일은 1830년 호남성 신녕현 출신으로, 처음에는 늠생이었으나 1855년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참여하며 관직에 나섰다. 이후 강충원이 창설한 초용에 편입되어 전공을 세우고 지현, 지주, 지부, 광동 안찰사, 광서 포정사 등을 거쳐 1865년 강서 순무에 임명되었다.

1875년부터는 양광총독양강총독을 여러 차례 역임하며 재정 정비, 부패 척결, 양무운동 추진 등에 힘썼다. 1891년 해군 군무 보좌를 맡았고,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시에는 흠차대신으로서 산해관 방어를 지휘했다. 전쟁 후 1895년에는 강유위가 주도하는 강학회에 은 5천 냥을 기부하며 변법자강운동을 지지했으나, 1898년 무술변법에서는 급격한 개혁을 외면했다. 무술정변 이후 광서제 폐위에는 반대했으며, 같은 해 중국을 방문한 일본의 전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회견하기도 했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양강총독으로서 진압을 주장하며 장지동, 이홍장 등과 함께 동남호보를 결성, 서태후선전포고 명령을 거부하고 지역 안정을 도모했다.[2][3] 1901년 장지동과 연명으로 ‘강초삼절’(江楚三折)[3]이라는 상소를 올려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의 종합적인 개혁(청말신정)을 호소했다.

이듬해 1902년 72세의 일기로 사망했으며, 사후 충성(忠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2]

2. 1. 초기 생애 및 태평천국 운동 진압

1830년 1월 21일, 호남성(湖南省) 신닝현(新寧縣)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장학금을 지급하는 생원인 늠생(廩生)이었으나, 함풍 5년(1855년)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자 향용(鄕勇)을 조직하여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강충원(江忠源)이 창설한 초용(楚勇)에 편입되어 활동하며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현(知縣), 지주(知州), 지부(知府), 광둥성 안찰사(廣東按察使), 광시성 포정사(廣西布政使) 등으로 계속 승진하였으며, 남작 작위를 받기도 했다. 동치 4년(1865년)에는 강서성 순무(江西巡撫)로 임명되어 1874년까지 재직했다.

2. 2. 총독 재임

1875년(광서 원년) 양강총독에 임명되었으나, 거의 즉시 양광총독으로 전임되어 4년간 재임했다.[2] 이후 다시 양강총독으로 복귀하여 1881년(광서 7년)까지 재직했다.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재정을 정비하고 부패를 적발했으며, 양무운동을 추진했다.

1880년(광서 6년)에는 러시아일본에 대한 외교 정책과 관련하여 황제에게 조언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프랑스베트남 침공 문제에 대해서도 자문했다. 이후 몇 년간 은퇴했다가 1890년(광서 16년) 다시 양강총독으로 복귀하여 1894년(광서 20년)까지 재임했다. 이 기간 동안 여러 반선교사 운동을 제압했으며,[2]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흠차대신에 임명되어 직례만주 봉천성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산해관에서 군대를 지휘하며 작전을 수행했다.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후 잠시 물러났다가 1896년(광서 22년) 다시 양강총독에 임명되어 1902년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1900년(광서 26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양강총독으로서 의화단 진압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호광총독 장지동, 양광총독 이홍장 및 열강 영사들과 협력하여 '동남호보(東南互保)'를 내세웠고, 서태후가 내린 열강에 대한 선전포고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1901년(광서 27년)에는 장지동과 연명으로 '강초삼절'(江楚三折)[3]이라는 상소를 올려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다방면에 걸친 개혁안(청말신정)을 제시했다.

2. 3. 청일전쟁과 변법자강운동

광서 17년(1891년)에 해군 군무원을 보좌하라는 명을 받았다. 광서 20년(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어 직례와 봉천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산해관 안팎에서 군대를 지휘하며 작전을 수행했다. 유곤일은 청나라의 승리를 위해 전쟁 연장을 황실에 촉구했으나, 광서 21년(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직책으로 돌아갔다.[2]

같은 해(1895년), 유곤일은 강유위가 주도하는 강학회에 은 5천 냥을 기부하며 변법자강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광서 24년(1898년) 무술변법 시기에는 급격한 개혁 추진에 대해 우려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같은 해 무술정변으로 변법 운동이 좌절된 이후에는 광서제의 폐위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또한, 그해 중국을 방문한 일본의 전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회견하기도 했다.

2. 4. 의화단 운동과 동남호보

광서 26년(1900년) 의화단 운동이 발발했을 때, 양강총독이었던 유곤일은 의화단의 진압을 강력하게 주장했다.[3][2] 그는 호광총독 장지동, 양광총독 이홍장 및 열강 각국의 영사들과 협력하여, 중앙 정부의 명령과는 별개로 동남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는 '동남호보'(東南互保)라는 양해를 맺었다.[3] 이를 통해 서태후가 내린 열강에 대한 선전포고 명령과 중국 내 모든 외국인을 몰살하라는 칙령을 따르지 않고 무시했다.[3][2] 이러한 결정은 당시 혼란 속에서 지역의 안정을 유지하고 외세와의 충돌을 피하려는 현실적인 판단으로 평가받으며, 유곤일의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2]

이듬해인 광서 27년(1901년), 유곤일은 장지동과 함께 '강초회주삼절'(江楚會奏三摺)[3]이라는 상소를 올려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다방면에 걸친 종합적인 개혁을 추진할 것을 청나라 조정에 강력히 요구했다. 이는 청말신정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

2. 5. 청말신정과 죽음

광서 26년(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양강총독이었던 유곤일은 의화단의 진압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열강 영사들 및 호광총독 장지동, 양광총독 이홍장 등과 협력하여 '동남호보'(東南互保)라는 양해를 맺고, 서태후가 내린 열강에 대한 선전포고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광서 27년(1901년), 유곤일은 장지동과 함께 '강초삼절'(江楚三折)[3]이라는 상소를 연명으로 올려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다방면에 걸친 종합적인 개혁을 추진할 것을 호소했다. 이는 청말신정(淸末新政, 또는 광서 신정)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상소를 올린 이듬해인 광서 28년(1902년), 유곤일은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사후 조정으로부터 충성(忠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평가

유곤일은 청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양무운동을 추진하고 국가의 이익을 지키고자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총독 재임 시절 재정을 정비하고 부정부패를 적발하는 등 개혁적인 면모를 보였다. 초기에는 강유위가 주도한 강학회에 은 5000냥을 기부하며 변법 운동을 지지하기도 했다.

1898년 무술 변법 당시에는 급진적인 개혁에 동조하지 않았으나, 무술 정변 이후 광서제의 폐위에는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같은 해 중국을 방문한 일본의 전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회담하기도 했다.

특히 1900년 의화단 운동이 발생했을 때, 그는 양강총독으로서 의화단 진압을 강력히 주장했다. 당시 서태후가 모든 외국인을 몰살하라는 칙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유곤일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대신 호광총독 장지동, 양광총독 이홍장 등과 협력하여 열강 영사들과 "동남호보"라는 상호 안전 보장 협약을 맺었다. 이를 통해 의화단 운동이 동남부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 관할 지역 내 외국인과 중국인의 생명 및 재산을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중앙 정부의 방침과 다른 독자적인 판단으로, 당시 상황에서 지역 안정을 우선시한 현실적인 조치로 평가받는다.[2]

1901년에는 장지동과 함께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다방면에 걸친 포괄적인 개혁안인 "강초회주삼절"을 조정에 제출하여 광서 신정이라 불리는 개혁 운동의 추진을 촉구했다. 이는 그의 개혁 의지를 보여주는 마지막 노력이었다.[2]

참조

[1] 백과사전 Political Leaders of Modern China: A Biographical Dictionary Greenwod Press
[2] 간행물 Liu K'un-i
[3] 문서 원래의 명칭은 강초회주삼절(江楚会奏三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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