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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사 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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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아사 겐은 일본의 의사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국에서 일본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생체 해부에 참여한 사실을 고백하여 주목받았다.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나 지케이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징집되어 중국으로 파견되었으며, 그곳에서 포로들을 대상으로 한 생체 해부를 여러 차례 시행했다. 종전 후 포로 생활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온 유아사는 자신의 전쟁 범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반전 및 평화 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일본 초국가주의자들의 위협 속에서도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며, 2010년 심부전으로 사망할 때까지 일본 전역에서 강연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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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사 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유아사 겐
원어 이름湯浅 謙
출생1916년 10월 23일
출생지일본 제국 사이타마현
사망2010년 11월 2일
사망지일본 도쿄도
직업내과 전문의
경력
군 복무일본 제국 육군 군의관
학력도쿄 지케이카이 의과대학

2. 초기 생애

유아사 겐은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나 도쿄도 교바시에서 의사의 아들로 자랐다. 1934년 도쿄 지케이회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1] 그는 의사가 없는 외딴 마을에서 소외된 환자를 치료하는 시골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제국 육군에 징집되었다.[1]

1941년 6월 징병 검사에서 제1을종 합격을 받았고,[1] 같은 해 10월 단기 현역 군의관을 지원하여 아사히카와 보병 제28연대에 입대했다.[1] 12월 20일 교육 기간을 마치고 군의 중위로 임관했다.[1]

2. 1. 출생과 성장

유아사 겐은 1916년 10월 23일 사이타마현에서 개업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도쿄도 교바시로 이사하여 의사인 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했다.[1] 1923년 도쿄도 주오구의 메이세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1] 같은 해 간토 대지진으로 안와에 전선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1]

연도사건
1934년도쿄 지케이회 의과대학 입학[1]
1941년도쿄 지케이회 의과대학 졸업, 도쿄 고마고메 병원 내과의 근무[1]


2. 2. 의학 교육

유아사 겐은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나 도쿄도 교바시에서 의사의 아들로 자랐다. 1934년 도쿄 지케이회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41년 3월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1] 같은 해 봄, 도쿄 고마고메 병원에서 내과의로 근무했다.[1] 그는 원래 의사가 없는 외딴 마을에서 소외된 환자를 치료하는 시골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1]

3. 전쟁 경험

어린 시절의 유아사 겐 (일본 제국 육군)


유아사는 중국에서 생체 해부와 세균전과 같은 전쟁 범죄에 가담했다.[2][3] 그는 이러한 경험에 대해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꼈지만, 점차 익숙해졌다고 진술했다.[2]

전쟁이 끝난 후, 유아사는 중국 한단에서 포로가 되었다.[6] 그는 자신이 저지른 만행을 기록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1956년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2][6] 유아사는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깊이 사과했다.[7]

1997년 인터뷰에서 유아사는 "위안부"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대부분의 일본 군인들이 비일본인 위안부를 성적 대상화하고 폭력을 가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지만, 드물게는 군인들이 위안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덜 잔인하게 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5]

3. 1. 징집과 중국 파견

1941년 10월, 유아사 겐은 단기 현역 군의관을 지원하여 아사히카와 보병 제28연대에 입대했다.[2] 1941년 12월 20일 교육 기간을 마치고 군의 중위로 임관했다.[2] 1942년 1월, 중국 산시성의 루안 육군병원으로 부임하여 전염병과 병리 검사실 군의관으로 근무했다.[2]

1942년 3월, 중국에 도착한 지 6주 만에 유아사는 산시성 창즈 (구 루안)에 있는 육군 병원에서 마취 없이 진행된 포로 생체 해부에 처음 참여했다.[2] 일본군은 일본 야전 부상자들을 더 잘 치료하기 위해 산 포로를 대상으로 수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2] 당시 20명의 다른 의사와 간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젊은 남성과 나이든 남성 두 명의 중국인 포로가 수술대에 수갑이 채워졌다.[2] 의식이 있는 환자에게 충수 절제술을 시행하고 상처를 수술 봉합한 후, 기관 절개술이 시연되었다.[2] 유아사는 포로 중 한 명의 오른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했다.[2] 그는 첫 생체 해부에서는 두려움을 느꼈지만, 세 번째 수술부터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밝혔다.[2] 또한 "실제 상황" 연습을 위해 고의로 총을 맞은 중국인 포로를 마취 없이 수술했던 경험을 회상했다.[2]

이후 유아사는 경찰의 요청으로 "공산주의자"들을 반복적으로 해부하는 진료소의 책임자가 되었다.[3] 이들은 공산주의 동조자 또는 평범한 범죄자들이었고, 대부분 중국인이었으며, 일부는 러시아인이었다.[3] 유아사는 총 6번의 생체 해부에 참여했다고 밝혔다.[3] 그는 생체 해부 외에도 장티푸스균을 배양하여 일본군에 공급했고, 이 균은 공산주의 점령 지역의 우물과 연못을 오염시키는 데 사용되었다.[3] 이로 인해 일본군 병사들도 병에 걸려 1,700명이 사망했다.[3]

유아사는 중국인 포로들과의 전쟁 경험을 회상하며, 생체 해부 동안 자신과 동료들이 "웃고 농담했다"고 말하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상한 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덧붙였다.[4]

3. 2. 생체 해부 가담

유아사 겐은 중국에 도착한 지 6주 만에 마취 없이 포로들을 대상으로 생체 해부를 실시했다.[2] 일본군은 야전 부상자들을 더 잘 치료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산 포로들을 대상으로 수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유아사의 첫 번째 생체 해부는 1942년 3월 산시성 창즈(구 루안)에 있는 육군 병원에서 이루어졌다. 젊은 남성과 나이든 남성, 두 명의 중국인 포로가 수술대에 수갑이 채워졌고, 다른 의사와 간호사 20명이 이를 지켜봤다. 먼저 의식이 있는 환자 중 한 명에게 충수 절제술이 시행된 후 의사가 상처를 수술 봉합했다. 그 다음에는 기관 절개술이 시연되었다. 유아사는 포로 중 한 명의 오른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진행했다. 유아사는 이 생체 해부 과정에서 두려움을 느꼈다고 인정했지만, 세 번째 수술에서는 기꺼이 참여하게 되었다고 인정했다.[2] 그는 "실제 상황"을 위한 연습용으로 고의로 총을 맞은 중국인 포로를 수술했던 또 다른 수술을 회상했다. 유아사는 마취를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유아사는 나중에 경찰의 요청에 따라 자신에게 보내진 "공산주의자"들을 반복적으로 해부하는 진료소의 책임자가 되었고, 이 모든 것은 연습 목적으로 이루어졌다.[3] 이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동조자 또는 평범한 범죄자들이었고,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많은 수가 러시아인이었다.[3] 유아사는 총 6번의 생체 해부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1942년 3월 중순, 제36사단 야전 부대의 군의 교육을 위한 훈련으로 생체 해부가 진행되었다. 제36사단에서 11~12명의 군의, 루안 육군 병원에서 신임 군의 5명, 그 외 2~30명이 참가했다. 피해자는 홑옷 차림의 중국인 남성 2명이었다. 훈련 내용은 요추마취, 전신 마취, 맹장염 (충수 절제술), 사지 좌멸창(팔뚝 절단), 복부 관통 총상 (복부 정중 절개 후, 장 절단 및 봉합), 후두 손상 (야전 기관 절개기로 기관 절개)이었다. 훈련 후, 아직 호흡이 계속되는 피해자에게 심장에 주사기로 공기 주입, 목을 조르는 경동맥 압박, 정맥에 마취 주사로 사망하게 했다.[9]

1942년 가을에는 니시무라 게이지 중좌(루안 육군 병원장)가 교육 책임자가 되어 제36사단에서 우지이에 소좌(동 사단 야전 병원장) 및 군의관이 참가했다. 피해자는 헌병대에서 넘겨받은 중국인 남성 2명이었다. 장관 봉합, 야전 기관 절개기에 의한 기관 절개, 턱뼈 골절을 예상한 정복 수술, 고환 적출이 이루어졌다.

1942년 12월에는 제1군 명령에 따른 군의 교육이 타이위안의 방역 급수부에서 산시성 각 부대의 군의 40~50명을 모아 실시되었다. 이때 타이위안 감옥에서 생체 해부를 실시했다. 피해자는 중국인 남성 4명이었다. 현장에서 권총으로 복부를 총격하여 탄환을 적출하는 수술을 했다. 그 동안 사지 절단, 기관 절개도 동시에 실시했다.[10]

1944년 4월, 루안 육군 병원에서 서무 주임으로 임명된 유아사는 군의의 질 향상을 위해 수술 연습(생체 해부)을 늘리라는 북지 방면군으로부터의 극비 명령을 목격했다. 이 명령을 받아 연 6회의 수술 연습 계획을 세웠지만, 실제로 행해진 수술 연습은 3회에 불과했다.

1944년 11월에 행해진 연습에서는 2명의 피험자가 있었지만, 군의들의 참여가 저조하여 1명의 생체 해부만 행해지고 연습이 종료되었고, 나머지 1명의 피험자는 원장이 일본도로 참수했다.

또한 유아사는 병원장의 의뢰에 따라 일본의 제약 회사에 보낼 목적으로, 생체 해부 연습 후의 피험자 두개골에서 뇌를 꺼내 포르말린 액체가 들어있는 용기에 뇌피질을 채취하여 병원장에게 건넸다.

3. 3. 팔로군 토벌 작전 참여

1945년 3월, 유아사 겐은 루안 육군 병원에서 독립보병 제5경비대(사령부는 윈청)로 파견되어 왕마오진에 본부가 있는 대대의 고급 군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부대는 팔로군에 대한 토벌 작전을 자주 실시했으며, 유아사 겐도 직접 출동하였다. 이 토벌 작전 당시, 부상당한 팔로군 병사를 총살하는 장면에 입회하기도 했다.[7]

1945년 6월, 노하커우 작전에서 제12군이 국민당군에 포위되어 탈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제1군은 포위 압력을 줄이기 위해 국민당군을 견제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에 따라 제5독립경비대는 산시성의 다른 부대를 지휘하여 이 임무를 맡게 되었다.

왕마오전에서 보급을 받기 위해 허난성 후이치진으로 향하던 중, 지시받은 부락에서 집결했다. 이 과정에서 지뢰를 피하기 위해 부대 선두에 인근 주민 4-5명을 걷게 하거나,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무인이 된 마을에서 약탈 등을 자행했다.

부대 종결 후, 펀관 작전을 시작했다. 이 작전은 국민당군이 점령하고 있는 펀다오커우와 관다오커우라는 두 거점을 공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펀다오커우 공략에서는 적의 강력한 토치카에 막혀 격전 끝에 점령에 성공했다. 이어서 관퉁커우 공격에서는 마을을 덮은 견고한 성벽과 공세적인 국민당군에 막혀 돌격에 실패하고 부대는 철수했다. 당시 돌격은 포격을 통해 성벽을 파괴한 후 돌격을 할 예정이었으나, 화력 부족으로 성벽을 파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대장은 후나카 중대장에게 무모한 돌격을 강요했고, 그 결과 후나카 중대장은 전사하고 해당 중대는 다수의 피해를 입는 결과를 초래했다.

왕마오창진의 대대 본부로 귀환하자, 유아사 겐에게 루안 육군 병원으로의 귀대 명령이 도착했다. 1945년 7월 중순, 제5독립경비대 본부(윈청)에 출두한 후, 루안으로 향했다. 도중, 신고를 위해 타이위안의 제1군 군의부에 들른 후, 맹장염과 복막염이 합병되어 타이위안 육군 병원에 입원했다.[7]

3. 4. 패전

1945년 8월 15일, 유아사 겐은 타이위안 육군 병원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맞이했다.[7] 당시 병실에서 쇼와 천황옥음방송을 통해 패전 소식을 들었다. 병원은 혼란에 빠졌지만, 유아사 자신은 평정심을 유지하며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루안 육군 병원이 타이위안으로 철수하면서, 유아사는 위생 물자 소각 및 이송 불가능한 중환자 독살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루안 육군 병원이 방역급수부에 합류하면서, 유아사는 퇴원 후 방역급수부로 옮겨졌다. 생체 해부에 깊이 관여했던 일부 군의관들은 실험 은폐를 위해 베이징으로 전속되었다.

방역급수부에 합류한 육군 병원에서 유아사는 내과 병실 부속 겸 교육대 부속 군의관으로 근무하며 대위로 승진했다. 산시성에 잔류한 일본군 내에서는, 친일적인 국민당옌시산에 협력하여 중국을 굳건하게 함으로써 일본의 미국 지배를 타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유아사는 이 운동의 취지와는 별개로, 중국인과 잔류 일본인 모두에게 의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산시성에 남기로 결정했다.

1945년 12월 24일, 루안 육군 병원은 중국 측에 접수되었고, 부대는 베이징으로 철수했다. 유아사는 부대를 떠나 산시 공제 병원으로 이적했다. 이 병원은 중국 측의 관리 하에 있었지만, 일본인 거류민을 위해 운영되고 있었다.

4. 전후 활동

유아사 겐은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이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본 사회에 알리고자 자신의 전쟁 범죄를 고백한 몇 안 되는 의사 중 한 명이었다.[2] 1950년대 일본으로 돌아온 후, 그는 일본군의 잔혹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자세히 증언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유아사는 일본 초국가주의자들로부터 괴롭힘이나 폭력적인 협박을 받았고, 루안 육군 병원의 전 동료들로부터는 그의 폭로에 대해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2] 또한, 그는 자신의 학창 시절 교육의 획일성을 비판하며 학교에서 일본 국기와 국가를 강제로 사용하게 하는 규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다.[2]

1956년 6월 기소 면제를 받고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온 유아사는 1958년부터 중국 귀환자 연락회에 참가하여 시로주지 병원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전쟁 경험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이후 반전, 평화, 원수금, 중일 우호 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본 전역을 돌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쟁 경험을 이야기했다.

4. 1. 포로 생활

유아사 겐은 중국에 도착한 지 6주 만에 마취 없이 포로들을 대상으로 생체 해부를 실시했다.[2] 일본군은 일본 야전 부상자들을 더 잘 치료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산 포로들을 대상으로 수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유아사의 첫 번째 생체 해부는 1942년 3월 산시성 창즈(구 루안)에 있는 육군 병원에서 이루어졌다. 젊은 남성과 나이든 남성, 두 명의 중국인 포로가 수술대에 수갑이 채워졌고, 다른 의사와 간호사 20명이 이를 지켜봤다. 먼저 의식이 있는 환자 중 한 명에게 충수 절제술이 시행된 후 의사가 상처를 수술 봉합했다. 그 다음에는 기관 절개술이 시연되었다. 유아사는 포로 중 한 명의 오른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진행했다. 유아사는 이 생체 해부 과정에서 두려움을 느꼈다고 인정했지만, 세 번째 수술에서는 기꺼이 참여하게 되었다고 인정했다.[2] 그는 "실제 상황"을 위한 연습용으로 고의로 총을 맞은 중국인 포로를 수술했던 또 다른 수술을 회상했다. 유아사는 마취를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유아사는 나중에 경찰의 요청에 따라 자신에게 보내진 "공산주의자"들을 반복적으로 해부하는 진료소의 책임자가 되었고, 이 모든 것은 연습 목적으로 이루어졌다.[3] 이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동조자 또는 평범한 범죄자들이었고,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많은 수가 러시아인이었다.[3] 유아사는 총 6번의 생체 해부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생체 해부 외에도 유아사는 장티푸스균을 배양하여 일본군에 공급했으며, 이 세균 배양 튜브는 공산주의 점령 지역의 우물과 연못을 오염시키는 데 사용되었다.[3] 일본군 병사들도 병에 걸렸고, 1,700명이 이 질병으로 사망했다.[3]

유아사는 중국인 포로들과의 전쟁 경험을 회상하며, 생체 해부 동안 자신과 동료들이 "웃고 농담했다"고 말하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상한 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덧붙였다.[4] 1997년 인터뷰에서 유아사는 또한 "위안부"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대부분의 일본 군인들이 비일본인 위안부를 성적 대상화하고 폭력을 가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지만, 드물게는 군인들이 위안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덜 잔인하게 대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5]

전쟁이 끝난 후 유아사는 중국 한단에서 포로가 되었다. 그는 감금자들에 의해 중국에서 의사로서 저지른 모든 만행을 종이에 기록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 행동을 상세히 기록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자신이 저지른 일의 규모를 깨닫기 시작했지만, 당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여전히 부인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타이위안의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1952년 다른 포로와 결혼했다. 이 무렵, 유아사는 자신이 생체 해부로 살해한 남자 중 한 명의 어머니로부터 일본 헌병에 의해 아들이 납치되었을 때 느꼈던 공포에 대한 편지를 받았다. 이로 인해 유아사는 눈물을 흘렸다.[2][6] 결국 1956년에 그는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4. 2. 전쟁 범죄 고백

유아사는 중국에 도착한 지 6주 만에 마취하지 않은 포로들을 대상으로 생체 해부를 실시했다.[2] 일본군은 야전 부상자들을 더 잘 치료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산 포로들을 대상으로 수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유아사의 첫 번째 생체 해부는 1942년 3월 산시성 창즈(구 루안)에 있는 육군 병원에서 이루어졌다. 젊은 남성과 나이든 남성, 두 명의 중국인 포로가 수술대에 수갑이 채워졌고, 다른 의사와 간호사 20명이 이를 지켜봤다. 먼저 의식이 있는 환자 중 한 명에게 충수 절제술이 시행된 후 의사가 상처를 수술 봉합했다. 그 다음에는 기관 절개술이 시연되었다. 유아사는 포로 중 한 명의 오른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진행했다. 유아사는 이 생체 해부 과정에서 두려움을 느꼈다고 인정했지만, 세 번째 수술에서는 기꺼이 참여하게 되었다고 인정했다.[2] 그는 "실제 상황"을 위한 연습용으로 고의로 총을 맞은 중국인 포로를 수술했던 또 다른 수술을 회상했다. 유아사는 마취를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유아사는 나중에 경찰의 요청에 따라 자신에게 보내진 "공산주의자"들을 반복적으로 해부하는 진료소의 책임자가 되었고, 이 모든 것은 연습 목적으로 이루어졌다.[3] 이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동조자 또는 평범한 범죄자들이었고,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많은 수가 러시아인이었다.[3] 유아사는 총 6번의 생체 해부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생체 해부 외에도 유아사는 장티푸스균을 배양하여 일본군에 공급했으며, 이 세균 배양 튜브는 공산주의 점령 지역의 우물과 연못을 오염시키는 데 사용되었다.[3] 일본군 병사들도 병에 걸렸고, 1,700명이 이 질병으로 사망했다.[3]

유아사는 중국인 포로들과의 전쟁 경험을 회상하며, 생체 해부 동안 자신과 동료들이 "웃고 농담했다"고 말하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상한 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덧붙였다.[4]

전쟁이 끝난 후 유아사는 중국 한단에서 포로가 되었다. 그는 감금자들에 의해 중국에서 의사로서 저지른 모든 만행을 종이에 기록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 행동을 상세히 기록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자신이 저지른 일의 규모를 깨닫기 시작했지만, 당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여전히 부인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중에 타이위안의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1952년 다른 포로와 결혼했다. 이 무렵, 유아사는 자신이 생체 해부로 살해한 남자 중 한 명의 어머니로부터 일본 헌병에 의해 아들이 납치되었을 때 느꼈던 공포에 대한 편지를 받았다. 이로 인해 유아사는 눈물을 흘렸다.[2][6] 결국 1956년에 그는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

유아사는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깊이 사과했다.[7] 유아사는 이러한 만행이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본에 상기시키기 위해 행동하고자 했으며, 결국 자신의 범죄를 일본 대중과 세계에 고백한 소수의 의사 중 한 명이었다. 1950년대 일본으로 귀국한 후, 그는 군의 만행에 대해 공개적으로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일본 초국가주의자들로부터 괴롭힘과 심지어 폭력적인 협박을 받았으며, 루안 육군 병원의 전 동료들로부터 그의 폭로에 대해 "조심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유아사는 또한 자신의 교육의 획일성에 비유하며 학교에서 일본 국기와 국가를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규정에 대한 비판을 표명했다. 유아사는 사망할 때까지 일본 전역을 돌며 청중들에게 자신의 전쟁 경험을 이야기했다.

4. 3. 귀국 후 활동

유아사 겐은 일본이 저지른 만행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범죄를 일본 대중과 세계에 고백한 소수의 의사 중 한 명이었다. 1950년대 일본으로 귀국한 후, 그는 군의 만행에 대해 공개적으로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일본 초국가주의자들로부터 괴롭힘과 심지어 폭력적인 협박을 받았으며, 루안 육군 병원의 전 동료들로부터 그의 폭로에 대해 "조심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유아사는 또한 자신의 교육의 획일성에 비유하며 학교에서 일본 국기와 국가를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규정에 대한 비판을 표명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일본 전역을 돌며 청중들에게 자신의 전쟁 경험을 이야기했다.

1956년 6월 기소 면제되어 석방된 후 일본으로 귀국하여, 1956년 7월 폐결핵 치료를 위해 도쿄 적십자 병원에 입원했다. 1957년 3월 지케이 의대의 내과에서 재연수를 받았으며, 1958년 7월 중국 귀환자 연락회에 참가하여 시로주지 병원에서 처음으로 증언했다. 이후 반전, 평화, 원수금, 중일 우호 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58년 3월 민의련 · 니시오기쿠보 진료소에 근무, 소장이 되었다. 1976년에는 소장을 퇴임하고 근무 의사가 되었다. 1988년 가을 귀국 후 처음으로 타이위안으로 사죄 여행을 떠났고, 1991년 10월에는 4번째 방중하여 루안을 방문했다. 2010년 11월 2일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4. 4. 평화 운동

유아사는 이러한 만행이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본에 상기시키기 위해 행동하고자 했으며, 결국 자신의 범죄를 일본 대중과 세계에 고백한 소수의 의사 중 한 명이었다. 1950년대 일본으로 귀국한 후, 그는 군의 만행에 대해 공개적으로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일본 초국가주의자들로부터 괴롭힘과 심지어 폭력적인 협박을 받았으며, 루안 육군 병원의 전 동료들로부터 그의 폭로에 대해 "조심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유아사는 또한 자신의 교육의 획일성에 비유하며 학교에서 일본 국기와 국가를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규정에 대한 비판을 표명했다. 유아사는 사망할 때까지 일본 전역을 돌며 청중들에게 자신의 전쟁 경험을 이야기했다.

4. 5. 사망

유아사 겐은 2010년 11월 2일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94세였다.[11]

5. 상세 경력

1916년 10월 23일 사이타마현에서 개업의(개인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쿄도 교바시로 이사했다.[1]

1923년 도쿄도 주오구의 메이세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해 간토 대지진으로 인해 재해를 입어, 눈 주위에 전선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2]

1934년 도쿄 지케이회 의과대학에 입학했다.[3]

1941년 봄, 동 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고마고메 병원에 내과의로 근무했다. 같은 해 6월 징병 검사에서 제1을종 합격을 받았다. 10월에는 단기 현역 군의관에 지원하여 아사히카와 보병 제28연대에 입대했다. 12월 20일 교육 기간을 마치고 군의 중위로 임관했다.[4][5][6][7]

1942년 1월 중국 산시성의 루안 육군병원으로 부임하여 전염병과 병리 검사실 군의관으로 근무했다. 3월에는 팔로군으로 추정되는 병사의 생체 해부에 관여했다. 생체 해부는 위생병 교육, 제약회사의 연구 자료 제공을 위해 이루어졌다. 지도적인 입장이 된 후, 신임 군의관의 연수를 위해 자신의 계획 및 실행 하에 총 6회, 연인원 10명의 생체 해부를 실시했다.[8][9]

1945년 8월 15일 타이위안 육군병원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그 후, 타이위안에 잔류한 일본인과 함께 의사단의 일원으로서 잔류하여, 일본인 거류민을 위한 산시 공제 병원에 근무했다. 더 나아가 일본의 동일회에서 경영하는 지케이 병원으로 이적했다.[10]

1947년 타이위안 우체국 보험 과장의 차녀였던 케이코와 결혼하여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11]

1949년 4월 인민 해방군이 타이위안을 해방했다. 중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성립 병원에 근무했다.

1950년 양취안의 병원으로 이동했다.

1951년 1월 포로로서 허베이성 융녠의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생체 해부에 대해 고백했다.

1952년 전범으로 타이위안 감옥에 구금되었다.

1956년 6월 기소 면제되어 석방되었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7월 폐결핵 치료를 위해 도쿄 적십자 병원에 입원했다.

1957년 3월 지케이 의대의 내과에서 재연수를 받았다.

1958년 7월 중국 귀환자 연락회에 참가하여 시로주지 병원에서 처음으로 증언했다. 이후 반전, 평화, 원수금, 중일 우호 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월 민의련 · 니시오기쿠보 진료소에 근무, 소장이 되었다.

1976년 니시오기쿠보 진료소 소장을 퇴임하고 근무 의사가 되었다.

1988년 가을, 귀국 후 처음으로 타이위안으로 사죄의 여행을 떠났다.

1991년 10월, 4번째로 중국을 방문하여 루안을 방문했다.

2010년 11월 2일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94세.

참조

[1] 학술지 Mad Scientists and Their Prey: Bioethics, Murder, and Fiction in Interwar Japan https://www.jstor.or[...] 2005
[2] 뉴스 Vivisectionist recalls his day of reckoning http://www.japantime[...] Japan Times 2007-10-30
[3] 뉴스 Unmasking Horror — A special report. Japan Confronting Gruesome War Atrocity https://www.nytimes.[...] 1995-03-17
[4] 학술지 Forbidding Nasty Knowledge: On the Use of Ill-gotten Information https://www.jstor.or[...] 1997
[5] 학술지 From Imperial Gifts to Sex Slaves: Theorizing Symbolic Representations of the 'Comfort Women' https://www.jstor.or[...] 2000
[6] 웹사이트 証言 https://www2.nhk.or.[...] 2005
[7] 뉴스 Unmasking Horror -- A special report.; Japan Confronting Gruesome War Atrocity https://www.nytimes.[...] 1995-03-17
[8] 웹사이트 Vivisectionist recalls his day of reckoning {{!}} The Japan Times https://web.archive.[...] 2023-01-06
[9] 뉴스 Unmasking Horror -- A special report.; Japan Confronting Gruesome War Atrocity https://www.nytimes.[...] 2023-01-06
[10] 웹사이트 Japanese Doctor > Pacific Front > Testimonies > WW2History.com http://ww2history.co[...] 2023-01-06
[11] 문서 해부의 이유는 신임 군의관과 의무병교육목적, 제약회사에 연구재료를 제공하기 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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