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윤하영 (목회자)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윤하영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북장로교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문하여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을 지원했다. 이후 미국 유학 후 신의주 제일교회에 부임했으나, 중일 전쟁 발발 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친일 행적을 보였다. 광복 후 신의주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창당했으나, 소련군의 진주로 월남하여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충청북도 지사를 지냈고, 한국 전쟁 중에는 미군 극동사령부에서 근무했다. 귀국 후 문교부 교과서 편수관을 역임하며 문맹퇴치 운동을 하다 사망했으며,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 생애

윤하영은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으로, 선천군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남행리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문했다.[1] 남행리의 보조로 활동하다 선천 성경학원을 거쳐 191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생하자, 윤하영은 고향 의주로 돌아가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 복역했다.[1] 출옥 후 평양신학교에 복학하여 1921년 졸업하였다.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평안북도 용천군 용계동교회, 광화교회, 덕동교회 등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1] 1923년 목사직을 사임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을 잠시 하였다.[1]

이후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 1924년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 귀국, 신의주 제일교회에 부임했다.[1]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한 뒤로 일제의 종교 황민화와 신사참배 강요는 강압적으로 변화했다.[1] 감리교가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한 뒤 장로교도 1938년 홍택기 총회장 주도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조선총독부의 황민화 정책에 적극 따랐다. 윤하영은 1939년 홍택기의 뒤를 이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임원교체 뒤 곧바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고 궁성요배 등의 의식을 거행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은 장로교단의 체계적인 친일 활동을 위해 정인과가 앞장서 결성된 단체로, 정인과는 총간사를 맡고 윤하영은 강제적으로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1]

1941년 이후로는 일제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창시개명도 하지 않음) 목사직에서 물러났으나, 1년 감옥생활과 일제의 최우선 감시자로 감시당했다.[1] 광복 직후 신의주 제1교회에 복직한 뒤 1945년 9월에 신의주 제2교회의 한경직과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1]

그러나 윤하영이 활동하던 38선 이북 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여 소군정이 시작되면서 종교 활동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신의주 반공학생사건까지 발생하면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되어 대한민국으로 월남하였다.[1]

월남 후, 미군정의 후원을 받아 충청북도 지사를 잠시 지냈고, 한국 전쟁 때는 도쿄의 미군 극동사령부 공보요원으로 근무했다.[1] 귀국 후에는 문교부 교과서 편수관을 역임했고, 대한기독교계명협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 운동을 하다가 사망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종교 부문에 선정되었으나,[1]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활동 및 의주만세 사건 주동자로 형무소 복역 사실이 인정되어 독립 유공자로 심의 중이다.[1]

2. 1. 초기 생애와 독립운동 (1889~1923)

윤하영은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으로, 선천군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남행리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문했다.[1] 남행리의 보조로 활동하다 선천 성경학원을 거쳐 191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생하자, 윤하영은 고향 의주로 돌아가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 복역했다.[1] 출옥 후 평양신학교에 복학하여 1921년 졸업하였다.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평안북도 용천군 용계동교회, 광화교회, 덕동교회 등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1] 1923년 목사직을 사임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을 잠시 하였다.[1]

2. 2. 미국 유학과 신의주 사역 (1923~1937)

윤하영은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으로, 선천군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남행리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문했다. 남행리의 보조로 활동하다 선천 성경학원을 거쳐 1916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1]

1919년 3·1 운동 당시 의주로 돌아와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1년 6개월 동안 복역했다. 출옥 후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평안북도 용천군 용계동교회, 광화교회, 덕동교회 등에서 근무하다 1923년 목사 사임 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였다.[1]

이후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 1924년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 귀국, 신의주 제일교회에 부임했다.[1]

2. 3. 친일 논란과 해방 (1937~1945)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한 뒤로 일제의 종교 황민화와 신사참배 강요는 강압적으로 변화했다.[1] 감리교가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한 뒤 장로교도 1938년 홍택기 총회장 주도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조선총독부의 황민화 정책에 적극 따랐다.[1] 윤하영은 1939년 홍택기의 뒤를 이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임원교체 뒤 곧바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고 궁성요배 등의 의식을 거행했다.[1]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은 장로교단의 체계적인 친일 활동을 위해 정인과가 앞장서 결성된 단체로, 정인과는 총간사를 맡고 윤하영은 강제적으로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1]

1941년 이후로는 일제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창시개명도 하지 않음) 목사직에서 물러났으나, 1년 감옥생활과 일제의 최우선 감시자로 감시당했다.[1] 광복 직후 신의주 제1교회에 복직한 뒤 1945년 9월에 신의주 제2교회의 한경직과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1]

2. 4. 해방 이후 활동과 월남 (1945~1950)

윤하영은 1945년 광복 직후 신의주 제1교회에 복직한 뒤 한경직과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1] 그러나 윤하영이 활동하던 38선 이북 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여 소군정이 시작되면서 종교 활동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신의주 반공학생사건까지 발생하면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되어 대한민국으로 월남하였다.[1]

2. 5. 한국전쟁과 말년 (1950~?)

윤하영은 3·1 운동 당시 의주 지역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 동안 복역했다.[1] 출옥 후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1] 1923년 목사 사임 후 상해로 건너가 잠시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였다.[1] 이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유학하고 1929년 귀국하여 신의주 제일교회에 부임했다.[1]

1939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이사장으로 강제 선임되었다.[1] 해당 단체는 장로교단의 친일 활동을 위해 정인과가 주도하여 결성되었고, 윤하영은 강제로 이사장에 선임되었다.[1]

1941년 이후 일제와의 관계로 인해 목사직에서 물러났으나, 광복 후 1945년 9월 한경직과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1] 소군정 시작과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발생으로 월남했다.[1]

월남 후, 미군정의 후원을 받아 충청북도 지사를 잠시 지냈고, 한국 전쟁 때는 도쿄의 미군 극동사령부 공보요원으로 근무했다.[1] 귀국 후에는 문교부 교과서 편수관을 역임했고, 대한기독교계명협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 운동을 하다가 사망했다.[1]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종교 부문에 선정되었으나,[1]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활동 및 의주만세 사건 주동자로 형무소 복역 사실이 인정되어 독립 유공자로 심의 중이다.[1]

3. 논란과 평가

3. 1. 친일 행적 논란

3. 2. 소련군 만행 폭로

한경직 목사와 함께 1945년 9월 26일, 광복 직후 소련군 점령하의 평안북도 정황을 미국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영문 비밀청원서를 작성하여, 당시 미군정 정치고문이었던 베닝호프(Merrell H. Benninghoff)에게 전달했다.[2] 이 청원서는 2017년 8월에 발견되었다. 베닝호프는 이 청원서를 미 국무부에 보내면서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의 정치 활동에 관한 최초의 믿을 만한 목격자 증언"이라고 평가했다.

청원서에서 그는 소련군의 만행을 "상상을 넘어선다"고 표현하며 자세히 기술했다. 신의주에서 소련군이 은행에서 120만엔을 탈취하고, 가정집에 침입하여 귀중품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사례가 셀 수 없이 많다고 폭로했다.[3][4] 또한,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38선을 넘으면서 소련군에게 약탈과 강간을 당한다고 밝혔다.[3][4]

4.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친일파 99인 3 돌베개 1993-04-01
[2] 간행물 RG 59, Central Files, The Decimal File, 1910-63, 740.00119, Control(Korea) Series, 1945.10-1945.12, Attitudes towards Occupation Forces in Korea http://archive.histo[...] 국사편찬위원히 전자사료관 2018-07-25
[3] 뉴스 광복 직후 소련군 만행 폭로…故 한경직 목사 ‘비밀청원서’ 발견돼 http://news.joins.co[...] 중앙일보 2017-08-16
[4] 뉴스 故 한경직 목사가 증언한 해방 후 북한, '비밀청원서' 발견 http://www.ytn.co.kr[...] YTN 2017-08-1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