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옹주
1. 개요
은천옹주는 고려 충혜왕의 후궁으로, 사기그릇을 팔던 상인 임신의 딸이다. 1340년 충혜왕의 눈에 들어 궁인이 되었고, 1342년 은천옹주에 봉해졌다. 충혜왕의 총애를 받아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아들 왕석기를 낳았다. 충혜왕이 원나라로 압송된 후 궁에서 추방되었으며, 이후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왕석기는 유배 후 처형되었고, 그의 아들 또한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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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후궁 -
순정왕후
순정왕후는 고려 공민왕의 후궁으로, 한씨이며, 1371년 우왕의 법적 어머니로 선포되었고 1374년 순정왕후로 추존되었으나 우왕 폐위 후 의릉이 철폐되었다. -
고려의 후궁 -
경화궁부인
고려 혜종과 의화왕후의 딸인 경화궁부인은 이복 숙부 광종과 혼인하여 경화궁부인의 호를 받았으나, 왕비가 아닌 부인의 위치에 머물렀으며, 소생 없이 생몰년과 능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다. -
14세기 한국 사람 -
태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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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한국 사람 -
충선왕
충선왕은 고려 제26대 왕으로 즉위 후 원나라 간섭 속에서 심양왕에 봉해졌으며, 고려와 심양을 동시에 통치하는 동군연합을 이루었으나 개혁 정치는 실패하고 티베트로 유배되었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2. 생애
은천옹주는 본래 충렬왕의 손자인 단양대군을 섬기던 종이었다. 아버지는 사기그릇을 팔던 상인 임신(林信)이며, 아버지와 함께 도자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다가 충혜왕에게 발탁되어 그의 후궁이자 가장 총애받는 부인이 되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 1년) 충혜왕의 눈에 들어 입궁하였으나, 별다른 봉작 없이 궁인 임씨(宮人 林氏)로만 불리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년) 음력 2월 화비 홍씨가 충혜왕의 제3비로 책봉되었는데, 임씨가 이를 질투하자 충혜왕은 임씨를 은천옹주(銀川翁主)에 봉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임씨가 사기그릇을 팔던 것을 비꼬아 사기옹주(沙器翁主), 오지옹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충혜왕은 평소 열약이라는 정력제를 복용하였고,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임질에 걸린 후 관계하는 여성들에게 이 병을 옮기기도 하였다. 당시 다른 여성들은 충혜왕의 정력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임질에 걸려 고생했는데, 은천옹주만은 이러한 충혜왕과 죽이 잘 맞아 더욱 사랑을 받았다. 은천옹주가 아들을 낳았을 때에는 충혜왕이 시장에서 베와 비단을 강탈하여 폐백으로 주었다.
은천옹주는 사치가 심하여 충혜왕에게 자신이 거처할 신궁을 짓게 하였다.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충혜왕은 신궁 건축에 동원된 무리들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나희, 춤 등을 경연하게 하면서 시상을 하였는데, 이때 은천옹주도 50냥을 보태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궁을 지을 때 은천옹주의 명으로 맷돌과 디딜방아를 많이 놓게 하였다.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음력 11월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잡아가면서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도 모두 끝이 났다. 이때 고용보 등이 충혜왕을 끌고 가는데, 충혜왕이 예복만 입은 것을 슬퍼한 은천옹주는 고용보에게 간청하여 충혜왕에게 갖옷을 바쳤다. 은천옹주는 충혜왕이 끌려간 후 충혜왕의 다른 궁인들 120여 명과 함께 곧바로 궁에서 추방되었다. 궁에서 추방당한 후의 은천옹주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생몰년 및 능에 대한 기록도 없다.
2.1. 가계
아버지는 사기그릇을 팔던 상인 임신(林信)이며, 본래 종실인 단양대군 왕후의 여종이었다. 충렬왕의 손자인 단양대군을 섬기던 중, 아버지와 함께 도자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다가 충혜왕에게 발탁되어 그의 후궁이자 가장 총애받는 부인이 되었다.
2.2. 후궁 책봉
은천옹주는 충렬왕의 손자인 단양대군을 섬기던 상인 임신(임신한국어)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도자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다가 충혜왕에게 발탁되어 후궁이 되었으며, 충혜왕의 가장 총애받는 부인이었다.
2.3. 후궁 시절
1340년(충혜왕 복위 1년) 충혜왕의 눈에 들어 입궁하였으나, 별다른 봉작 없이 궁인 임씨(宮人 林氏)로만 불리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년) 음력 2월 충혜왕의 제3비로 화비 홍씨가 책봉되었는데, 임씨가 이를 질투하자 충혜왕은 임씨를 은천옹주(銀川翁主)에 봉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임씨가 사기그릇을 팔던 것을 비꼬아 사기옹주(沙器翁主), 오지옹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충혜왕은 평소 열약이라는 정력제를 복용하였고,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임질에 걸린 후 관계하는 여성들에게 이 병을 옮기기도 하였다. 당시 다른 여성들은 충혜왕의 정력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임질에 걸려 고생했는데, 은천옹주만은 이러한 충혜왕과 죽이 잘 맞고 충혜왕을 능히 감당해내어 더욱 사랑을 받았다. 은천옹주가 아들을 낳았을 때에는 충혜왕이 시장에서 베와 비단을 강탈하여 폐백으로 주었다.
은천옹주는 사치가 심한 성품으로, 충혜왕에게 자신이 거처할 신궁을 짓게 하였다.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당시 충혜왕은 신궁 건축에 동원된 무리들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나희, 춤 등을 경연하게 하면서 시상을 하였는데, 이때 은천옹주도 50냥을 보태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궁을 지을 때 은천옹주의 명으로 맷돌과 디딜방아를 많이 놓게 하였다.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음력 11월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잡아가면서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도 모두 끝이 났다. 이때 고용보 등이 충혜왕을 끌고 가는데, 충혜왕이 예복만 입은 것을 슬퍼한 은천옹주는 고용보에게 간청하여 충혜왕에게 갖옷을 바쳤다. 은천옹주는 충혜왕이 끌려간 후 충혜왕의 다른 궁인들 120여 명과 함께 곧바로 궁에서 추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