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렬
1. 개요
이광렬은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의 동생으로, 천주교 신자이다. 그는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으며, 1839년 체포되어 신앙을 증언하다가 7월 20일 참수형을 받았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이름 | 이광렬 요한 |
|---|---|
| 로마자 표기 | I Gwangryeol Yohan |
| 한자 표기 | 李光烈 요한 |
| 출생 | 1795년 |
| 사망 | 1839년 7월 20일 |
| 출생지 | 경기도 광주 |
| 사망지 | 서울 서소문 |
| 직업 | 순교자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
| 축일 | 7월 20일 9월 20일 (로마 달력, 한국 순교자들과 함께) |
|---|---|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 시복자 | 교황 비오 11세 |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 시성자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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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기독교 성인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9세기 기독교 성인 -
다미앵 신부
벨기에 출신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예수 성심 성모 수도회 소속 선교사인 다미앵 신부는 하와이 몰로카이섬에서 한센인들을 16년간 헌신적으로 돌보며 사목 활동을 펼치다 자신도 한센병에 감염되었으나 봉사를 이어갔고, 사후 시성되어 소외된 이들을 위한 봉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1839년 사망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839년 사망 -
페르난도 소르
페르난도 소르는 스페인 출신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양식을 결합한 기타 음악과 교육용 연습곡집으로 유명하며 후대 기타리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광주 이씨 -
이순재
이순재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대한민국의 배우이자 전직 국회의원으로, 1956년 연극으로 데뷔하여 60년 이상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고, 드라마 '거침없이 하이킥',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등에 출연했으며 국회의원과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하고 예능 출연 및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
광주 이씨 -
이우재 (1934년)
이우재(1934년)는 육군 준장으로 예편 후 정치, 기업, 체육 분야에서 활동하며, 제11대 국회의원, 한국전기통신공사 초대 사장, 체신부 장관, 대한사격연맹 회장 등을 역임했다.
2. 생애
이광렬은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의 동생으로, 형을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정직하고 열정적이며 신심이 두터웠던 그는 북경을 왕래하는 천주교 신자단의 일원이었으며,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다. 귀국 후 금욕적인 삶을 살며 독신으로 살기로 결심했고, 그의 신앙생활은 모든 이들이 탄복할 정도로 충직하여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따랐다.
1839년 4월 8일 체포된 후, 이광렬은 혹독한 형벌에도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형 이광헌이 먼저 처형된 후 감옥에서 기다리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839년 7월 20일 45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순교했다.
2.1. 초기 생애와 신앙
이광렬은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의 동생으로, 형을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정직하고 열정적이며 신심이 두터웠다. 북경을 왕래하는 천주교 신자단의 일원이었으며,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금욕적인 삶을 살았으며 독신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의 신앙 생활은 매우 충직하여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그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따랐다.
2.2. 체포와 순교
1839년 4월 8일에 체포된 이광렬은 수차례 주뢰를 트는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당시 형법에 따르면 한 차례 심문 때마다 형리는 죄수를 각각의 몽둥이가 부러질 때까지 30 차례씩 매질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광렬은 모든 고통을 견디며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는 형 이광헌과 함께 처형될 예정이었으나, 조선 형법에 따라 형제가 같은 날 처형될 수 없었기에 형이 먼저 처형되고 이광렬은 감옥에서 기다렸다. 감옥에서도 그의 언행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1839년 7월 20일 일곱 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의 나이 4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