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주 (종교인)
1. 개요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다. 그는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았다. 김효주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굴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택하였으며,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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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된 사람 -
악비
남송 시대 장군 악비는 금나라에 맞선 애국 영웅으로, 진회의 모함으로 처형되었으나 사후 충절을 인정받아 무목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만강홍이라는 시와 함께 현대 중국에서도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최근 그의 군사 행위에 대한 재평가 논의가 있다. -
참수된 사람 -
주문모
청나라 출신 가톨릭 신부 주문모는 1794년 조선에 잠입하여 선교 활동을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으며, 초기 조선 천주교회 성장에 기여하여 2014년 시복되었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김대건
김대건 안드레아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순교자로, 천주교 신앙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의 길을 걸으며 마카오와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26세에 순교하였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프랑스 출신 로마 가톨릭 주교이자 조선교구 사도대목구장이었던 안토니 다블뤼는 1845년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 및 문서 선교에 기여, 주교 서품 후 사도대목구장을 이어받았으나 병인박해 때 순교, 1984년 시성되었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839년 사망 -
페르난도 소르
페르난도 소르는 스페인 출신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양식을 결합한 기타 음악과 교육용 연습곡집으로 유명하며 후대 기타리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1839년 사망 -
윌리엄 스미스 (지질학자)
윌리엄 스미스는 영국의 지질학자이자 측량사로, 최초의 영국 지질도를 제작하고 층서학의 기초를 확립하여 "영국 지질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그의 업적은 현대 지질학과 지질도 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배경
김효주는 1816년에 한강 변의 밤나무 섬을 의미하는 밤섬이라는 마을에 있는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에게는 두살 터울의 언니 김효임 콜룸바가 있다. 본래 그들의 가족 중에서는 천주교 신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어머니가 일찍이 천주교 신앙에 관심을 갖고 서서히 그것과 가까워지고 있던 반면, 그들의 아버지는 전혀 믿지 않았다. 사실, 그들의 아버지는 집에서 교회라는 소리 조차 듣기 싫어할 정도로 엄격히 그것을 금하였다.
2.2. 신앙 생활
김효임 콜룸바와 김효주 아녜스 자매, 그리고 여동생 김 클라라는 모두 세례를 받은 직후 동정을 지키며 하느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는 이들이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자매들은 결혼한 여자처럼 쪽머리를 땋아 올리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들은 오빠 김 안토니오와 함께 한양 근교의 고양군 용머리(현재의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서 살았다. 이들은 기도, 주 2회 단식, 성경 읽기, 묵주기도, 자선 활동 등을 하며 신앙 생활에 매진했다.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속세의 재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온화하고 인정 깊은 삶을 살았다. 주변 교우들은 이들의 자선과 모범에 감탄하며 존경을 표했다. 독실한 신자였던 이들의 어머니는 용머리에서 선종했으며, 샤스탕 신부가 종부성사를 집전했다.
2.3. 체포와 투옥
1839년 기해박해 발발로 천주교인들이 체포되기 시작했으나, 세 자매는 두려워하지 않고 감옥의 교우들을 위해 기도했다. 1839년 5월 3일, 김사문의 밀고로 포졸들이 용머리 집을 습격했다. 김 안토니오는 자리를 비웠고, 김 루치아(안토니오의 부인), 김 베네딕타, 김 클라라는 피신했으나, 김효주는 조카와 함께 방에 남아 있었다. 김효임은 옆집에 숨었으나 결국 발각되어 김효주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두 자매를 붉은 밧줄로 포박하고 마을 이장에게 보인 후 한양으로 압송했다. 김효임은 포졸들에게 위엄있게 말하기를 "당신들이 우리를 체포하면 우리는 순순히 따라갈 터인데, 어째서 당신들은 이 나라에서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에게 그런 몰지각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항의했다.
2.4. 심문과 고문
포도청에서의 심문에서 김효임은 자신이 천주교도임을 당당히 밝혔다. 조상 제사에 대한 질문에 김효임은 조상 제사가 무의미하며, 감옥에 갇힌 부모에게 음식을 차려 드리는 것과 같다고 반박했다. 포장은 신앙을 버리고 다른 교우들과 책의 위치, 오빠의 위치를 밝히라고 강요했으나, 자매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꺾을 수 없으며 오빠의 위치도 모른다고 답했다.
형리들은 자매에게 매질, 못 박힌 몽둥이, 주뢰 등 혹독한 고문을 가했지만, 자매는 침묵하며 기도로써 신앙을 지켰다. 형리들은 자매의 등에 주문을 쓰고 달군 쇠꼬챙이로 지지는 잔혹한 고문을 가했지만, 자매는 흔들리지 않았다.
포장은 자매의 독신에 대해 질문하고, 학춤을 추게 하는 등 굴욕적인 고문을 가했다. 또한 자매의 처녀성을 훼손하면 신앙을 포기할 것이라 생각하여 남자 죄수들만 있는 옥방에 집어넣었으나, 하느님의 보호로 자매는 무사했다.
형조로 이송된 후, 형조 판서는 천주교 외에 다른 덕행의 길이 없느냐고 질문했고, 김효임은 "없다"고 단호하게 답했다. 김효주는 포도청에서 겪었던 굴욕적인 사건을 폭로하며 양반과 평민을 막론하고 젊은 여성의 순결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형조 판서는 김효주의 말에 감탄하며 사건 조사를 명하고 의정부에 보고했다.
자매는 법정에서 끌려나와 다시 매질을 당하며 심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다른 교우들과 오빠의 위치를 밝히지 않고 순교자의 길을 택했다.
2.5. 순교
1839년 9월 3일 김효주는 한양의 서소문 밖에서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었다. 그녀의 나이 24세였다. 9월 26일에는 김효임도 같은 장소에서 참수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 26세였다.
3. 시복 · 시성
김효임 콜룸바와 김효주 아녜스 자매는 1925년 7월 5일에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