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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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애는 조선 세조 때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주도한 인물이다. 길주 출신의 지방 호족으로 회령부사를 역임했으며, 세조의 중앙 집권 강화 정책과 함경도 지역 차별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 등을 살해하고 함흥을 점령했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되어 처형되었다. 이시애의 난은 조선 초기 세조의 정책에 대한 반발과 지역 차별의 문제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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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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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표기 | 이시애 |
한자 표기 | 李施愛 |
로마자 표기 | I Siae |
인물 정보 | |
직업 | 반란 지도자 |
활동 시기 | 1467년 |
2. 생애
이시애는 길주 지방 명문가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함경도 여러 고을에 거주했다. 조선 초기 조정은 여진족과의 회유 정책으로 이 지역을 활용했고, 함경도는 태조의 고향이자 세력 기반이었다. 세종 시대에는 두만강까지 강역이 확장되었으나, 여진족 침략에 맞서 함길도를 방어하기 위한 인적, 물적 희생은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었다.[2]
세조 즉위 후, 중앙 집권 정책 강화로 북방 출신 관료가 줄고 남방 출신 관료가 파견되면서 이시애와 북방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꼈다.[3][4] 세조는 호패 제도를 통해 백성 이동을 규제했고, 북방 유력 가문들은 향리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불만이 커졌다. 중앙 정부 관료들은 성곽 건설 등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다.
함경도 주민에 대한 지역 차별로 인해, 백성들은 외지 파견 관료와 함경도의 향청(향청|鄕廳한국어)에 반발했고, 이시애 가문이 주도하여 중앙 정부에 대항하는 세력을 결집했다.[2] 1467년, 이시애는 4,500명의 익속군을 포함한 3만 명의 반군을 이끌고 단천, 홍원, 북청 등 함흥 북쪽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강효문 등 중앙 정부 관료를 처형했다.
반란 소식을 접한 조정은 귀성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3만 명의 정벌군을 파견했다.[2][3] 정벌군은 북청과 만령에서 승리했고, 이시애는 길주로 후퇴했다. 결국 이시애는 조카 허유례와 그의 아버지 허승도의 설득으로 부하들에게 배반당해 체포되었고, 능지처참되었다.[2] 이로써 4개월간의 반란은 종결되었고, 그의 머리는 한성으로 옮겨졌다.[3][2]
2. 1. 초기 활동
이시애는 이인화(李仁和)의 아들로, 본관은 길주(吉州)라고 전해지나 선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할아버지 이원경(李原京)은 함경도첨절제사와 문하부사를 지냈고, 아버지 이인화는 함길도첨절제사(첨사)와 판영흥대도호부사를 지냈다. 이시애의 집안은 대대로 길주에서 살아온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1]이시애는 길주의 지방 명문가 출신으로, 가문은 함길도(후에 함경도로 개칭)의 여러 고을에 거주했다. 1458년에 흥진의 병마사, 1461년에 부사, 1463년에 회령의 수령을 역임했다. 조선 초기, 조정은 여진족과의 회유 정책으로 이 지역을 활용했다.[1] 함길도는 조선 태조의 고향으로, 태조는 이 지역을 기반으로 여진족을 복속시키고 세력을 키웠다. 세종 시대에는 강역이 두만강까지 확장되었고, 강원도의 삼남 지방 사람들이 함길도로 이주해 왔다. 그러나 여진족의 침략에 맞서 함길도를 방어하기 위해 막대한 인적, 물적 희생이 불가피했고, 이는 함길도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조선 개국 후, 함길도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왕실 발상지에 대한 우대를 위해 지방 유력 가문 출신들이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2]
세조 즉위 후, 중앙 집권 정책 강화로 북방 출신 관료가 줄고 남방 출신 관료가 파견되면서 이시애와 북방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꼈다.[3][4] 세조는 호패 제도를 통해 백성 이동을 규제했고, 북방 유력 가문들은 향리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불만이 커졌다. 중앙 정부 관료들은 성곽 건설 등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다.
함경도 주민에 대한 지역 차별로 인해, 백성들은 외지 파견 관료와 함경도의 향청(鄕廳, 향청|鄕廳한국어)에 반발했고, 이시애 가문이 주도하여 중앙 정부에 대항하는 세력을 결집했다.[2]
2. 2. 관료 생활
이인화(李仁和)의 아들로, 본관은 길주(吉州)라고 전해지나, 선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할아버지 이원경(李原京)은 함경도첨절제사와 문하부사(門下府事)를 검교(檢校)했고, 아버지 이인화는 함길도첨절제사(첨사)와 판영흥대도호부사(判永興大都護府事)를 지냈으며, 집안은 대대로 길주에서 살아온 지방 호족 출신이었다.일찍이 군관이 되었으며 조선 초 대북방민회유정책에 따라 중용되어 1451년(문종 1년) 호군이 되고 여러 지방관을 역임했다. 1458년(세조 4년) 경흥진(慶興鎭) 병마절도사를 거쳐 첨지중추원사, 판회령부사를 역임하고 1461년 행지중추원사가 되었다.[1]
그러나 왕권을 확립한 세조가 점차 북방민 등용을 억제하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자, 자신의 지위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세조의 정책에 불만을 품게 된다.
세조의 호패법 부활과 함길도의 지방관에 함길도 지역인사를 임명하지 않고 외지인을 임명했으며, 함길도인들에 대한 지역 차별이 계속되자 함길도의 토호였던 이시애 역시 자신들의 지위확보에 불안을 느꼈다.[2] 세종 시대에는 강역이 두만강까지 확장되었고, 강원도의 삼남니 사람들이 함길도를 도(道)로 만들기 위해 이주해 왔다. 그러나 항상 여진족의 침략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함길도를 방어하기 위해 막대한 인적, 물적 희생이 불가피했고, 이는 함길도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었다.
세조가 즉위한 후, 중앙 집권 정책을 강화하여 북방 출신 관료의 수를 점차 줄이고, 남방 출신 관료를 파견하여 이 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이로 인해 이시애와 북방 사람들은 세조의 통치에 불안감을 느꼈다.[3][4]
2. 3. 이시애의 난
1467년 이시애는 함경도 주민에 대한 지역 차별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2] 그는 4,500명의 익속군을 포함한 3만 명의 반군을 이끌고 단천, 홍원, 북청 등 함흥 북쪽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강효문 등 중앙 정부 관료를 처형했다.반란 소식을 접한 조정은 귀성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3만 명의 정벌군을 파견했다.[2][3] 정벌군은 북청과 만령에서 승리했고, 이시애는 길주로 후퇴했다. 결국 이시애는 조카 허유례와 그의 아버지 허승도의 설득으로 부하들에게 배반당해 체포되었고, 능지처참되었다.[2] 이로써 4개월간의 반란은 종결되었고, 그의 머리는 한성으로 옮겨졌다.[3][2]
2. 3. 1. 반란 배경
세조가 왕권을 확립하면서 북방민 등용을 억제하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자, 이시애는 자신의 지위에 불안을 느꼈다.[1] 또한 세조의 정책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세조는 호패법을 부활시키고 함길도 지방관에 함길도 출신이 아닌 외지인을 임명했으며, 함길도인에 대한 지역 차별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함길도의 토호였던 이시애는 자신들의 지위 확보에 불안을 느꼈다.[2]이시애는 길주의 지방 명문가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함길도(후에 함경도로 개칭)의 여러 고을에 거주했다. 그는 1458년에 흥진의 병마사, 1461년에 부사, 1463년에 회령의 수령을 역임했다. 조선 초기 조정은 여진족과의 회유 정책으로 이 지역을 활용했다.[1] 함길도는 조선의 창업 군주인 태조의 고향으로, 태조는 이 지역을 기반으로 여진족을 복속시키고 세력을 키웠다. 세종 시대에는 강역이 두만강까지 확장되었고, 강원도의 삼남 사람들이 함길도를 도(道)로 만들기 위해 이주해 왔다. 그러나 여진족의 침략에 맞서 함길도를 방어하기 위해 막대한 인적, 물적 희생이 불가피했고, 이는 함길도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조선 개국 후 함길도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왕실의 발상지에 대한 우대를 위해 지방의 유력 가문 출신들이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2]
그러나 세조 즉위 후, 중앙 집권 정책을 강화하여 북방 출신 관료의 수를 점차 줄이고, 남방 출신 관료를 파견하여 이 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이로 인해 이시애와 북방 사람들은 세조의 통치에 불안감을 느꼈다.[3][4] 세조는 또한 조선 백성의 이동을 더욱 규제하기 위해 호패 제도를 통과시켰다. 북방 지역의 유력 가문들은 향리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했고, 이는 북방 사람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관료들은 성곽 건설과 같은 사업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다.
함경도 주민에 대한 지역 차별로 인해, 백성들은 외지에서 파견된 관료와 함경도의 향청(향청|鄕廳한국어)에 반발했고, 이시애와 그의 가문이 주도하여 중앙 정부에 대항하는 세력을 결집했다.[2] 1467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3년상을 하던 중, 동생 이시합(李施合), 매부 이명효(李明孝)와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2. 3. 2. 반란 전개
1467년 이시애는 모친상으로 휴직 중이었다. 이 기회를 틈타 북도의 민심을 선동하고, 같은 해 12월 동북 지방의 군권을 쥐고 있던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康孝文) 등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5]이시애는 길주에서부터 단천, 북청, 홍원으로 남하하면서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들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왕명을 받은 절도사라 칭하며 거병하였다. 그는 '함길도의 절도사가 진장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고 선동하여 절도사 강효문(康孝文), 함경도관찰사 신면, 길주목사(吉州牧使) 설징신(薛澄新) 등을 죽이고 체찰사 윤자운(尹子雲)을 사로잡았다. 또한 '방금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올라와서 함길도 군민(軍民)을 다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여, 흥분한 함길도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일어나 타 지역 출신 수령들을 살해하는 등 함길도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5]
이시애는 함길도인들에 대한 지역 차별 철폐와 단종 폐위 문제를 구실로 회령에서 거병하였다. 이들은 남도의 군사가 해륙 양방으로 쳐들어와 북도의 군민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지방민들을 선동하고 민심을 혼란시켰다. 또한 당시 동북지방의 군권을 쥐고 있던 함길도절도사 강효문과 그 휘하 군관들을 살해하고 각 지방의 수령들을 살육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는 강효문을 역모죄로 처형하였다고 거짓 장계를 올렸다. 이시애는 본도 절도사가 제진장(諸鎭將)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여 이들을 처형하였다고 보고하여 자신들의 반란을 합리화했다. 또한 그 당인(黨人)으로 하여금 지금 각 읍의 인민이 모두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와언(訛言)이 분분하다고 상서하게 하는 한편, 본도인으로써 본도의 각 수령을 삼을 것을 요구하였다. 난이 일어나자 도내 각지의 유향소의 토호들과 농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거대한 반란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절도사를 사칭, 북도민의 환심을 사 차차 세력을 확보한 뒤 단천, 북청, 홍원 등을 공략하고 함흥을 점거하였다.
이시애는 길주의 지방 명문가 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함길도(후에 함경도로 개칭)의 여러 고을에 거주했다. 그는 1458년에 흥진의 병마사, 1461년에 부사, 1463년에 회령의 수령을 역임했다. 조선 초기 조정은 여진족과의 회유 정책으로 이 지역을 활용했다.[1] 세종 시대에는 강역이 두만강까지 확장되었고, 강원도의 삼남니 사람들이 함길도를 도(道)로 만들기 위해 이주해 왔다. 그러나 항상 여진족의 침략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함길도를 방어하기 위해 막대한 인적, 물적 희생이 불가피했고, 이는 함길도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었다. 조선 개국 후 함길도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왕실의 발상지에 대한 우대를 위해, 지방의 유력 가문 출신들이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2]
그러나 세조가 즉위한 후, 중앙 집권 정책을 강화하여 북방 출신 관료의 수를 점차 줄이고, 남방 출신 관료를 파견하여 이 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이로 인해 이시애와 북방 사람들은 세조의 통치에 불안감을 느꼈다.[3][4] 세조는 또한 조선 백성의 이동을 더욱 규제하기 위해 호패 제도를 통과시켰다. 북방 지역의 유력 가문들은 향리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것을 두려워했고, 이는 북방 사람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게다가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관료들은 성곽 건설과 같은 사업으로 백성들을 괴롭혔다.
함경도 주민에 대한 지역 차별로 인해, 백성들은 외지에서 파견된 관료와 함경도의 향청(향청|鄕廳한국어)에 반발했고, 이시애와 그의 가문이 주도하여 중앙 정부에 대항하는 세력을 결집했다.[2] 이에 이시애는 선봉으로 4,500명의 익속군을 포함한 3만 명의 반군을 이끌고 단천, 홍원, 북청 등 함흥 북쪽의 여러 지역을 점령했다. 이시애는 강효문 등 중앙 정부 관료를 처형했다.
2. 3. 3. 관군과의 교전
세조는 이시애의 보고를 접하자 구성군 이준을 4도 병마도총사로 임명하여 4도의 군권을 주고, 호조판서 조석문을 부총사, 허종을 함길도절도사로 삼고,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을 대장으로 삼아 3만의 관군을 동원시켜 반란군을 진압하게 하였다.[1] 세조는 이들을 출동시켜 투항을 종용하였으나, 이시애는 반란이 아님을 상계하고 항복하지 않았으며, 북도민(북도 출신)의 중용을 거듭 요구하였다.[1]조정에서는 어유소, 귀성군, 남이 등에게 소수의 토벌대를 이끌고 출정시켰다. 그러나 반군의 기세가 거세자 귀성군 이준의 관군은 철원까지 퇴각했고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2] 반란군은 함길도와 평안도까지도 영향을 넓혀가고 있었다.[2] 세조는 다시 도총관 강순을 진북대장으로 삼아 평안도병력 3천 명의 지휘권을 주어 영흥으로 나아가게 하고, 병조 참판 박중선을 평로장군으로 임명하여 황해도 병사 1천 명을 이끌고 문천군으로 들어가게 하였다.[2] 장군 어유소에게는 한성부 소속 경병(京兵) 1천 명을 보내 구성군군을 돕게 하였다.[2]
1467년 5월 15일 귀성군은 겨우 강원도 북부에 있던 이시애군을 패퇴시키고 회양으로 나아갔다.[4] 세조는 5월부터 각종 효유문(曉諭文)을 내려 보내고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처벌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세웠으나, 통지문을 들고 간 사자는 죽임당했다.[4] 동시에 반군 지휘자들을 체포하는 자들에게는 현상금을 조건으로 걸었다.[4] 6월 1일 억류되었던 체찰사 윤자운이 병사 한 사람과 옷을 갈아입고 극적으로 이시애의 진영에서 탈출해오자 귀성군은 윤자운을 호송한 뒤 철령을 넘어 안변에 진을 쳤고, 허종은 영흥으로 들어가 반군과 교전하였다.[4]
그 동안에도 이시애는 때로 2백~5백여 명의 군졸을 이끌고 마곡역에 나오기도 하고, 이시합은 홍원군 하탄동에서 귀성군의 부장 차운혁에게 사로잡혔으나 거짓 속임수로 빠져나가기도 하였다.[5]
관군의 공격을 받아 북청에서 두 차례 격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였다.[6] 처음 세조는 단천인 최윤손을 그에게 보내어 위무하고자 하였으나, 최윤손은 도리어 그에게 붙어 조정의 밀사(密事)를 모두 고하는 등 조정 내부에서도 반란군과 내응하는 세력이 있었다.[6]
이시애의 후퇴로 구성군의 관군은 6월 19일 함흥을 점령하고 홍원으로 나아가 서쪽인 함관령 아래 신원에 새 막사를 짓고 근거지로 하여 전군을 지휘하였다. 구성군은 강순을 북청 공략의 선봉으로 삼고 종개, 산개의 두 산에 진지를 구축하게 하였다. 귀성군의 군사는 안변에서 평안도 지역의 이시애군을 격퇴하는 한편 강순은 박중선, 허종, 어유소 등과 더불어 종개령을 넘어 북청 앞의 평포에서 이시애군을 궤멸시키고 진을 쳤다.
6월 19일 이시애군은 북청을 떠나 퇴각하고, 이시합은 2만여 명의 군졸을 북청 근처인 여주을현에 주둔시키는 한편, 자신은 단천 이북의 여러 진군(鎭軍)과 여진족 500여 명을 합쳐 이성 고사리포에서 북청 어소로 나아가 관군을 협공하려 했다. 이를 모르는 관군은 북청성으로 진격해 들어갔다가 이시애군은 없었고, 주변에 있던 이시합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강순은 마침내 김교의 건의에 따라 목책(木柵)을 두르고, 또 밖에는 녹각(사슴뿔과 같이 대나무로 짜서 만든 적을 막는 물건)을 늘어놓는 한편, 성 밖에는 갱도를 파고 그 위를 평지처럼 하여 적군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6월 24일 새벽 총공격을 내렸으나 강순은 성문을 잠그고 버텼다.
관군은 이시애에게 대궐에 나아가 자수(自首)할 것을 권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북청에서 패퇴한 이시애군은 다시 군세를 정비하였다.
7월 14일 이시애는 자신의 사위인 이명효로 하여금 홍원·북청·갑산·삼수의 백성들을 모아 탕구령을 넘어 홍원 서쪽인 신익평에 주둔해 관군의 함흥과 북청 통로와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이시합은 이성 이북의 백성을 이끌고 마어령을 넘어 2진을 형성하게 하는 동시에, 이시애 자신은 회령 이북의 백성을 이끌고 대문령을 넘어 열여문평에 진을 쳐서 장기전을 펴고 관군의 자멸을 기다렸다.
한편, 관군은 북청에 있는 군사를 홍원으로 후퇴시키려 하여 1·2·3진으로 나누어 이시애군을 뚫고 나가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이시애는 이 틈을 타서 북청을 점령하였다. 그 동안에도 관군은 이시애 등에게 효유(曉諭)에 나섰으나 이시애가 듣지 않자 결국 장기전으로 나가게 되었다.
2. 3. 4. 전황 악화와 배신
1467년 5월 15일 귀성군은 강원도 북부에서 이시애군을 격파하고 회양(淮陽)으로 진군했다. 세조는 5월부터 항복하면 처벌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으나, 통지문을 가져간 사자는 죽임을 당했다. 또한 반란군 지휘자들을 체포하는 자에게는 현상금을 걸었다.[6] 6월 1일, 억류되었던 체찰사 윤자운이 탈출하자, 귀성군은 윤자운을 호송하고 철령을 넘어 안변에 진을 쳤고, 허종은 영흥으로 들어가 반란군과 싸웠다.이시애는 마곡역(麻谷驛)에 나타나기도 했고, 이시합은 홍원군 하탄동에서 귀성군의 부장 차운혁(車云革)에게 사로잡혔으나 거짓말로 빠져나갔다. 관군의 공격에 이시애군은 북청에서 두 번 격전을 벌였으나 크게 패했다. 조정 내부에서도 반란군과 내통하는 세력이 있었고, 한명회, 권람, 신숙주 등이 자신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거짓 선전하여 반란군 토벌에 혼란이 있었다.[6]
7월 말,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시애는 여진족과도 내통하며 저항했으나, 신숙주, 허종(許琮), 강순, 어유소(魚有沼), 남이(南怡) 등이 이끄는 3만 군대가 함경남도 홍원(洪原), 북청(北靑)에 주둔하던 이시애군을 격파하고 이원군 만령(蔓嶺)에서 반란군 주력 부대를 분쇄하였다.[6]
7월 31일, 이시애는 중봉을 거점으로 2천 명의 병력으로 3중 방어선을 구축하고 저항했다. 그날 유시(酉時)에[6] 어유소군이 이시애군의 좌측을 공격하여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관군은 육탄전으로 이시애군을 격퇴했고, 이시애는 밤을 틈타 이성 쪽으로 도망쳤다.
8월 1일, 관군은 이시애군을 추격해 이성까지 쫓아갔으나 이시애군은 이성군의 객사, 창고 등을 불태우고 다시 북쪽으로 도망쳤다. 8월 8일 이성을 출발한 귀성군 등의 관군은 마운령(磨雲嶺)을 넘어 영제원으로 나아가고, 이시애는 단천에 진을 쳐서 남대천(南大川)을 사이에 두고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다시 패하여 길주로 달아났다.[6]
8월 12일 관군 연합군은 이시애군을 추격하여 단천에서 격파하고 탈환, 다시 마천령(磨天嶺)을 넘어 영동역(嶺東驛)까지 이시애군을 밀고 나갔다. 이때 이시애는 허종 휘하의 허유례(許惟禮)의 계략에 빠져 이시합과 함께 체포되었다.[6]
2. 3. 5. 패전과 최후
7월 말,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시애는 여진족과 내통하여 그들을 끌어들여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여진족에 파견했던 사자가 당도하기도 전에 신숙주, 허종,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이 이끄는 3만 군대가 함경남도 홍원(洪原), 북청(北靑)에 주둔하던 이시애군을 격파하고 이원군의 만령(蔓嶺)에서 반란군 주력부대를 분쇄하였다.[6]7월 31일, 이시애는 중봉을 거점으로 2천 명의 병력으로 3중 포열을 한 뒤 결사적으로 버텼다. 그날 유시(酉時)에 만령 동봉에서 어유소군이 이시애군이 중봉으로 간 것을 알고 이시애군의 좌측을 공격하여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이어 관군은 육탄전으로 이시애군을 패퇴시켰다. 결국 이시애는 야음을 틈타 이성 쪽으로 도망쳤다.[6]
8월 1일, 관군은 이시애군을 추격해 이성까지 쫓아갔으나 이시애군은 이성군의 객사, 창고 등을 불사르고 다시 북으로 패주하였다. 8월 8일, 이성을 출발한 귀성군 등의 관군은 마운령(磨雲嶺)을 넘어 영제원으로 나아가고, 이시애는 단천에 진을 쳐서 남대천(南大川)을 사이에 두고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다시 패주하여 길주로 달아났다.[6]
8월 12일, 관군 연합군은 이시애군을 추격하여 단천에서 교전하여 패퇴시키고 탈환, 다시 마천령을 넘어 영동역(嶺東驛)까지 이시애군을 밀고 나갔다. 이때 이시애는 허종 휘하의 허유례(許惟禮)의 계교에 빠져 이시합과 함께 체포되었다. 세조의 유서(諭書)로 반란임을 알게 된 백성들이 협력하지 않고 조정에서 논상절목(論賞節目)이 반포되어 부하 장수들의 동요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반란이 일어난 지 3개월이 지난 8월에 이르러서야 관군의 전열이 가다듬어져서 홍원, 북청, 이원 등지의 전투에서 관군이 크게 승리하였다.[6]
이시애는 처조카이자 조정에서 밀파된 길주 출신인 허유례의 계교로 부하인 이주(李珠)·이운로(李雲露)·황생(黃生) 등에 의하여 체포된다. 허유례는 자기 아버지가 억지로 이시애의 일파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하인 이주, 황생 등을 포섭한다. 허유례는 자신의 아버지가 이시애의 수하에서 길주권관(吉州權管)으로 있음을 알고서 거짓 항복하는 척하고는 경성 운위원(雲委院)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이시애의 수하인 이주·이운로·황생 등을 설득해 이시애와 이시합 등을 체포하게 했다. 이들을 설득하여 자연스럽게 이시애 형제에게 접근하여 이시애 형제를 묶어 남이 등 토벌군에게 인계하였다. 8월 12일, 토벌군 진지에서 처형당한다.[6]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鏡城)으로 퇴각하여 여진으로 도망치려 하였으나, 조선에 인도되어 처형되었다.[6]
3. 이시애의 난의 영향
이시애의 난은 1467년(세조 13년) 함경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으로, 조선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난은 진압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이시애는 체포되어 능지처참되었고, 그의 머리는 한성으로 옮겨졌다.[3][2]
3. 1. 조선의 대응
1467년, 이시애는 함경도의 토호와 농민을 조직하여 4개월에 걸친 반란을 일으켰다. 중앙에서 파견된 강효문을 살해하고 함흥을 점령했으며, 함경도 출신을 지방관으로 임명할 것을 왕실에 요구했다. 그러나 반란은 진압되었고, 이시애는 압록강을 넘어 여진족에게 도망쳤지만 조선에 인도되어 처형되었다.[1]3. 2. 지역 사회에 미친 영향
세조가 즉위한 후 중앙 집권 정책을 강화하면서 함경도 주민에 대한 지역 차별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외지에서 파견된 관료와 함경도의 향청(향청|鄕廳한국어)에 반발했고, 이시애와 그의 가문은 이러한 불만을 바탕으로 중앙 정부에 대항하는 세력을 결집했다.[2] 이시애는 1467년에 봉기하여 함경도의 토호와 농민을 조직하여 4개월에 걸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단천, 홍원, 북청 등 함흥 북쪽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을 처형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이시애는 함경도 출신자의 지방관 임명 등을 왕실에 요구했지만, 결국 진압되었다. 압록강을 넘어 여진족에게 도망쳤지만 조선에 인도되어 처형되었다.4. 평가
이시애는 함경도 길주 지방 호족 출신으로 회령부사를 역임했다. 1453년 이징옥의 난 이후 세조가 지방 호족을 배제하고 중앙 집권 강화를 꾀하며 전세, 군역 등의 부담을 증가시킨 것에 반발하여 1467년에 봉기하였다. 함경도의 토호와 농민을 조직하여 4개월간 반란을 일으켰고, 중앙에서 파견된 강효문을 살해하고 함흥을 점령, 함경도 출신 인사의 지방관 임명 등을 왕실에 요구했지만 진압되었다. 압록강을 넘어 여진족에게 도망쳤지만 조선에 인도되어 처형되었다.[1]
4. 1. 역사적 의의
이시애는 함경도 길주 지방 호족 출신으로 회령부사를 지냈으나, 1453년 이징옥의 난 이후 세조가 지방 호족을 배제하고 중앙 집권 강화를 꾀하며 전세·군역 등의 부담을 늘린 것에 반발하여 1467년에 봉기하였다. 그는 함경도의 토호와 농민을 조직하여 4개월간 반란을 일으켰다.[1] 중앙에서 파견된 강효문을 살해하고 함흥을 점령, 함경도 출신 인사의 지방관 임명 등을 왕실에 요구했지만 결국 진압되었다.[1] 그는 압록강을 넘어 여진족에게 도망쳤지만 조선에 인도되어 처형되었다.[1]4. 2. 대중 문화에서의 이시애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할아버지 | 이원경(李原京) |
아버지 | 이인화(李仁和) |
어머니 | 미상 |
동생 | 이시합(李施合) |
누이 | 이씨 |
매부 | 이명효(李明孝) |
부인 | 양천 허씨 |
처조카 | 허유례 |
참조
[1]
웹사이트
이시애(李施愛)
http://encykorea.aks[...]
[2]
웹사이트
이시애의 난 지역감정이 덧씌워진 중앙권력과의 갈등 1467년(세조 13)
http://contents.hist[...]
[3]
웹사이트
이시애의 난(李施愛ㅡ亂)
http://encykorea.aks[...]
[4]
웹사이트
이시애
http://100.naver.com[...]
[5]
문서
[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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