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라-태프트 밀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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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러일 전쟁 종전 직전, 일본의 가쓰라 다로 총리와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육군 장관 간에 이루어진 비밀 회담의 내용을 담은 문서이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내용이 오갔다. 이 밀약은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 체결과 대한제국 병합에 영향을 미쳤으며, 대한민국에서는 미국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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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7월 - 사할린 전투 (1905년)
1905년 러일 전쟁 중 일본군이 강화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사할린 섬을 침공하고 점령했으며,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섬이 분할되었다. - 대한제국-미국 관계 - 대조선 주차 미국 화성돈 공사관
1888년 고종이 미국과의 외교 강화를 위해 워싱턴 D.C.에 설립한 최초의 한국 공사관인 대조선 주차 미국 화성돈 공사관은 을사늑약 이후 일본에 매각되었다가 2010년 대한민국 정부에 반환되어 현재는 역사 교육 및 문화 공간으로 활용되며 한미 관계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조약명 | 가쓰라-태프트 밀약 |
다른 이름 | 태프트-가쓰라 협정 태프트-가쓰라 각서 |
로마자 표기 | Katsura-Tafuto Kyōtei |
유형 | 밀약 외교 각서 |
주요 인물 | |
미국 대표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
일본 대표 | 가쓰라 다로 |
배경 | |
시기 | 1905년 |
주요 내용 | 미국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를 인정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 |
주요 내용 | |
미국의 입장 |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를 인정 |
일본의 입장 |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 |
논란 및 영향 | |
논란 | 밀약 논란 및 체결 여부 논쟁 |
영향 | 한국의 식민지화 과정 심화 일본 제국의 세력 확장 |
평가 |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 비판 일본의 침략적 야욕을 보여주는 사례 |
2. 배경
1904년 2월, 만주를 둘러싼 일제와 러시아 제국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던 중, 일제는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를 체결함과 동시에 아서항을 기습 공격하며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내부 혁명 세력의 반발로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겪던 제정 러시아 군대는 패전을 거듭했다. 1905년 5월, 일제는 대한시설강령을 통해 한반도 내 주요 시설을 강점하고, 대한해협 동쪽 수로인 쓰시마 해협을 통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던 러시아 제국 발트 함대를 격침시켜 승기를 잡았다.
러일 전쟁이 종결을 앞두던 1905년 7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도쿄에 파견하여 일본 제국 수상 가쓰라 다로와 비밀 회담을 갖게 했다. 7월 29일 작성된 가쓰라-태프트 밀약(각서)은 7월 27일 회동에서 오간 대화 중 기밀로 분류된 내용을 담고 있다.
태프트-가쓰라 협정은 1905년 7월 27일 오전 도쿄에서 열린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와 태프트 미국 전쟁장관 간의 대화 내용을 담은 영어와 일본어 회의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논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한 각서는 1905년 7월 29일에 작성되었다.
회의 주요 논의 사항
- 가쓰라의 동아시아 평화 견해: 일본 외교 정책의 기본 원칙이며, 일본, 미국, 영국 간의 이해를 통해 가장 잘 달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 필리핀 문제: 태프트는 미국과 같이 강력하고 우호적인 국가가 필리핀을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이익이 된다고 언급했고, 가쓰라는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공격적 의도가 없음을 주장했다.
- 한국 문제: 가쓰라는 한국의 일본 식민지화가 러일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한국 문제의 포괄적 해결책이자 전쟁의 논리적 결과라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이 방치되면 다른 강대국들과 경솔한 협정 및 조약을 맺을 것이므로, 일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한국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프트는 일본의 보호령 수립이 동아시아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는 데 동의하며, 테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역시 동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세 가지 중요 이해 영역1. 태프트는 미국 내 러시아 지지자들이 일본의 필리핀 공격 가능성을 주장한다고 언급했고, 가쓰라는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공격적 관심이 없음을 확인했다.[3]
2. 가쓰라는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의 정책은 일본, 미국, 영국 간의 이해를 통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3]
3. 가쓰라는 한국의 자치가 국제적 복잡성을 야기하여 러일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보고, 일본이 한국의 자치 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프트는 일본군이 한국의 외교 조약 체결을 통제하는 종주권 수립이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3]
서명된 협정이나 비밀 조약은 없었으며, 대화 메모만 존재했다. 이 대화는 20년 동안 비밀로 유지되었으나, 루스벨트는 태프트에게 "가쓰라 백작과의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정확하며, 내가 당신의 모든 말을 확인한다고 말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2][3]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 대화의 역사적 중요성과 외교적 언어가 실제 합의를 암시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1]
이 대화 메모는 1924년 역사가 타일러 데넷에 의해 발견되었으며,[1] 그는 국무장관 찰스 에반스 휴즈에게 발표 허가를 요청했다. 데넷은 이 메모를 "루스벨트 대통령의 일본과의 비밀 협정"이라고 칭했다.
1905년,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은 러시아 발틱 함대의 3분의 2를 격파하며 승리가 확실시되었다.[1]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시아와 일본을 평화 협상으로 이끌고자 했다.[1]
미국은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을 통해 필리핀을 점령했고, 태프트 전쟁장관은 필리핀으로 가는 길에 일본을 방문했다.[1]


협정 당시 일본군은 러일 전쟁 중이었으나, 일본해 해전 승리 후 러시아 제국군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강화 권고를 수용했다. 미국은 주한공사 호레이스 뉴턴 알렌을 해임하고,[5] 1905년 6월 대한제국을 떠나게 했다.[6]
루스벨트 대통령은 필리핀 정책 지지를 위해 태프트 육군장관을 단장으로 상원 7명, 하원 23명 등 총 83명의 대규모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
1905년 7월 8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사절단은 호놀룰루를 거쳐 7월 24일 요코하마항에 도착했다. 방일 목적은 러일 전쟁 평화 협상 역할, 앨리스를 통한 황실 외교 답례, 일본의 필리핀 불개입 약속 등이었다. 특히 1899년 필리핀 무기 운반선 누이비키마루 침몰 사건 이후 일본 내 필리핀 동정 여론을 잠재우는 것이 중요했다.[7]
이 협정에서 미국은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확인했다. 열강의 세력 다툼 속에서 미일 수뇌부가 상호 권리를 인정한 것으로, 이후 미일 관계를 원활하게 했다. 1902년 영일 동맹을 바탕으로 영미일 삼국의 동아시아 안보에 대한 의견도 교환되었다.
협정은 서명된 문서나 비밀 조약이 아닌 회합 각서(메모)였으며, 타일러 데넷이 미국 의회 도서관 내 루스벨트 대통령의 "개인 사료" 상자에서 발견, 1924년 잡지 "Current History"에 게재하며 공개되었다. 도쿄에서 가쓰라 총리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특사가 1905년 7월 27일 외무차관 진다 스테미의 통역 하에 진행한 회합 기록 중 장시간 기밀 대화 부분으로, 1905년 7월 29일 날짜가 기입되어 있다. 일본 측 원본은 소실되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엘리후 루트 미국 국무장관은 협정을 의회에 보고하지 않고 사적 문서로 처리했다. 루스벨트 정권 고위 관료 중 6명 정도만 내용을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 협정의 조약화는 상원 3분의 2 찬성이 필요했으나, 필리핀 병합 반대 세력으로 인해 가능성이 낮았다. 포츠머스 일러 협상 중재 역할 중 영일 동맹의 암묵적 파트너임을 공개할 수 없어 비밀로 유지했다.[8]
3. 내용
1905년 7월 29일, 러일 전쟁이 끝나갈 무렵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도쿄에 파견하여 일본 제국 수상 가쓰라 다로와 비밀 회담을 갖도록 했다. 이 회담에서 작성된 가쓰라-태프트 밀약(각서)은 7월 27일 회동에서 나눈 대화 중 기밀로 분류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회담에서는 동아시아 전반, 필리핀, 대한제국에 관한 세 가지 주요 의제가 논의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 대한 야심이 없음을 밝혔다.
- 극동의 평화는 일본, 미국, 영국 3국 간의 사실상의 동맹으로 지켜져야 한다.
-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에서의 지도적 지위를 인정한다.
가쓰라는 대한제국이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하며,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대한제국이 또다시 다른 세력과 조약을 맺어 러일전쟁과 같은 상황을 반복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태프트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이에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태프트는 이 회담에서의 합의를 미국 연방 정부에 전문으로 보냈고, 전문을 읽은 루스벨트는 7월 31일, "가쓰라와 태프트 간의 회담은 모든 점에서 전적으로 옳은 것이며, 태프트가 말한 모든 것을 자신이 확인했다"는 내용의 전문을 태프트에게 보냈다.[10]
3. 1. 동아시아 평화
동아시아의 평화가 일본 외교의 근본적인 원칙이며, 이러한 동아시아의 평화는 일본, 미국, 영국 간의 협조가 있을 때 가장 잘 이뤄질 수 있다는 가쓰라의 견해가 논의되었다.[3] 가쓰라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의 정책은 일본, 미국, 영국 간의 이해를 통해 달성되어야 하는 일반적인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3]3. 2. 필리핀 문제
태프트는 미국과 같이 강력하고 일본에 우호적인 나라가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이 일본에 최선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가쓰라는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어떠한 공격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3]3. 3. 대한제국 문제
가쓰라는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대한제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대한제국이 또다시 다른 세력과 조약이나 협정을 맺어 러일전쟁과 같은 상황을 반복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대한제국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이 러일 전쟁의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주장했다. 가쓰라는 대한제국이 일본과 다른 나라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는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하며, 이는 일본에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3]태프트는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령을 갖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또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이에 동의할 것이라고 우회적으로 언급했다.[3]
가쓰라 백작은 한국의 자치가 다른 강대국들과 경솔하게 협정과 조약을 체결하게 만들었고, 이것이 일본과 러시아 간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국제적인 복잡성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의 자치 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느꼈다. 태프트는 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 외국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요구하는 일본군의 강제력 동원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 수립은 전쟁의 논리적 결과이며 동양의 영구적인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루스벨트 대통령도 동의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덧붙였다.[3]
가쓰라는 "대한제국 정부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조선반도에서의 문제의 광범위한 해결이 러일전쟁의 논리적인 결과이며, 만약 대한제국 정부가 단독으로 방치되는 상황이 된다면, 다시 같은 방식으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어 일본을 전쟁에 끌어들일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가 다시 다른 외국과 일본에 전쟁을 강요하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9]
태프트 특사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직접 기여하는 것에 동의했다. 또한 그의 의견으로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 점에 동의할 것이라는 확신을 보였다.[9]
3. 4. 각서의 요지
가쓰라 다로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간의 회담에서는 주로 세 가지 주요 의제가 논의되었다.[16]
-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 대해 야심이 없음을 표명한다.
- 극동의 평화는 일본, 미국, 영국 3국에 의한 사실상의 동맹에 의해 지켜져야 한다.
- 미국은 일본의 대한제국에서의 지도적 지위를 인정한다.
이 협정에서 가쓰라는 "대한제국 정부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다"라고 지적하고, "한반도에서의 문제의 광범위한 해결이 러일전쟁의 논리적인 결과이며, 만약 대한제국 정부가 단독으로 방치되는 상황이 된다면, 다시 같은 방식으로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어 일본을 전쟁에 끌어들일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가 다시 다른 외국과 일본에 전쟁을 강요하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6]
가쓰라의 주장을 들은 태프트 특사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성에 직접 기여하는 것에 동의했다. 태프트는 또한 그의 의견으로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 점에 동의할 것이라는 그의 확신을 보였다.[16]
태프트는 이 회담에서의 합의를 미국 연방 정부에 전문으로 보냈고[9], 전문을 읽은 루스벨트는 7월 31일, "가쓰라와 태프트 간의 회담은 모든 점에서 전적으로 옳은 것이며, 태프트가 말한 모든 것을 자신이 확인했다"는 내용의 전문을 태프트에게 보냈다.[10]
4. 결과 및 영향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 체결 이전에 이미 대한제국의 자치 능력을 부정하고, 대한제국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도출해야 한다는 미국의 인식을 재확인받았다. 이로써 일본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배제하고, 같은 해 제2차 영일동맹(1905년 8월 12일)과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 5일)을 체결하여 한반도 지배권을 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고종은 을사조약을 뒤엎기 위해 1907년에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일으켰으나, 결과적으로 퇴위당했다. 이후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병합이 이루어졌다.
이 협정은 현대 대한민국에서 한국의 생존 및 주권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이 신뢰할 수 없는 국가임을 보여주는 실례로 자주 인용된다.[11] 일부 한국 정치인들은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2]
4. 1.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
이 비밀협정은 20세기 초 미국의 대-동아시아 정책의 기본 방향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열리기 전에 이미 대한제국의 자치능력을 부정하고, 대한제국이 또다시 다른 세력과 조약이나 협정을 맺어 러일 전쟁을 일으켰던 것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경솔한 모습을 보일 것이므로, 대한제국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이야말로 러일 전쟁의 논리적인 귀결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이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이로써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배제한 일본은 같은 해 제2차 영일 동맹(1905년 8월 12일)과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 5일)을 체결함으로써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세계 열강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조약을 통해 간단히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을 수 있었으며, 미국은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11] 가쓰라-태프트 협정 및 제2차 영일 동맹, 러일 전쟁의 결과 일본의 승리로 강화가 성립되어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러시아 제국에도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모든 열강이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면서 사실상 보호국이 된다. 그러나 고종은 이 제2차 한일협약을 뒤엎는 형태로 1907년에 다시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퇴위당하게 된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병합이 이루어진다.
이 협정은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의 생존 및 주권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이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국가인지 보여주는 실례로 자주 인용된다.[11] 한국의 정치인들 중에는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12]
4. 2. 한국의 역사적 관점
한국의 역사학자 이기백 등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1882년 5월 22일 인천에서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한다. 조선 정부는 미국과 달리 이 조약을 사실상의 상호 방위 조약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조약 제1조에는 "만약 다른 강국이 어느 한 정부에 불공정하거나 압제적으로 대우할 경우, 다른 한 정부는 그 사건을 알게 되면 우호적인 해결을 가져오기 위해 선의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이로써 그들의 우호적인 감정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명시되어 있었다.[4]그러나 미국은 러일 전쟁 이전에 이미 대한제국의 자치 능력을 부정하고 있었으며,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이러한 입장을 재확인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미국은 이를 사실상 묵인했다.
이 밀약은 현대 대한민국에서 미국이 한국의 안보와 주권 문제에 대해 신뢰할 수 없는 국가임을 보여주는 예시로 자주 언급된다.[11] 일부 정치인들은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2]
참조
[1]
논문
The Taft-Katsura Agreement—Reality or Myth?
[2]
잡지
President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
http://www.icasinc.o[...]
1924-10-01
[3]
웹사이트
THE TAFT-KATSURA AGREEMENT
https://web.archive.[...]
[4]
뉴스
'Katcheura-Taepeuteu Miryak'eun hyeonjae jinhaenghyeong '가쯔라-태프트 밀약'은 현재진행형 (Katsura-Taft Agreement is Present Progressive)
http://newsmaker.kha[...]
Gyeonghyang dat keom 경향닷컴 (Kyunghyang.com)
2005-09-06
[5]
웹사이트
米國公使 「알렌」 後任으로 「에드윈 모간」 任命 件
http://db.history.go[...]
[6]
웹사이트
Former Chiefs of Mission in Korea
http://seoul.usembas[...]
[7]
서적
日米衝突の萌芽
草思社
[8]
서적
日米衝突の萌芽
草思社
[9]
웹사이트
타프트가 루트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 대한 설명
[10]
서적
セオドア・ルーズベルトと韓国
未来社
[11]
서적
セオドア・ルーズベルトと韓国
未来社
1992-01-01
[12]
웹사이트
韓国与党の大統領候補「米国の承認で日本が韓国を併合」 米議員との面会で
https://jp.yna.co.kr[...]
聯合ニュース
2021-11-12
[13]
웹사이트
미국의 제27대 대통령(1909년 ~ 1913년)과 제10대 연방 대법원장(1921년 ~ 1930년)을 지냄.
[14]
논문
The Taft-Katsura Agreement - Reality or Myth? and The Taft-Katsura Memorandum Reconsidered
http://www.jstor.org[...]
[15]
웹사이트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내용 설명
[16]
서적
한국사강좌 5 - 근대편
일조각
200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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