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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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탁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3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3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여러 요직을 거치며 언관으로서 활동했고, 특히 윤원로를 탄핵하는 데 참여했다. 명종 시기에는 이조정랑, 홍문관 교리, 대사간 등을 역임하며 인사 행정과 언론 활동을 펼쳤으며, 임꺽정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공조판서, 호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윤원형을 탄핵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선조 즉위 후 우의정, 영의정을 거쳤으나, 1576년 판중추부사로 재직 중 사망했다. 그는 청렴하고 공정한 정치로 칭송받았으며, 30여 년간 권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을 지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탁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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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탁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31년(중종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535년(중종 30)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542년(중종 37)부터 언관으로 활동하며 윤원로를 탄핵하는 데 참여했고, 1546년(명종 원년)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임명되었다.

이후 1565년(명종 20)까지 이조정랑, 홍문관, 승정원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559년(명종 14)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가 임꺽정(林巨正)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1565년에는 대사헌으로서 박순 등과 함께 윤원형을 여러 차례 탄핵했고, 명종 말년에는 박순과 함께 윤원형을 제거했다.

1566년(명종 21)부터 1567년(명종 22)까지 호조판서, 판윤, 지중추부사,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568년(선조 원년) 우찬성과 이조판서를 거쳤고, 1571년(선조 4)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1573년(선조 6)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좌의정으로 물러났고, 다시 사직했다. 1576년(선조 9) 판중추부사로 재직 중 사망했다.

이탁은 전조(銓曹)에 있을 때 공정함을 추구하여 선비들의 신망을 얻었고,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검소하고 청빈하게 지냈다. 그는 30여 년간 벼슬하면서 권력에 굴하지 않았고, 윤원형을 탄핵하여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2.1. 초기 관직 생활 (1531년 ~ 1546년)

1531년(중종 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535년(중종 30)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했다. 1542년(중종 37) 정언, 좌랑, 지평 등을 역임하며 언관으로 활동했다. 홍언필, 윤인경, 유관, 성세창, 상진, 이준경, 이윤경, 윤개, 정옥형, 심연원, 권벌, 홍섬, 정사룡 등과 함께 윤원로를 탄핵하여 귀양 보내는 데 참여했다. 1546년(명종 원년)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2.2. 이조정랑 및 내외 요직 역임 (1546년 ~ 1561년)

1546년(명종 원년)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검상(檢詳)으로 옮겼다가 사인(舍人)으로 승진했다.

1548년(명종 3) 집의(執義)로 재직 중 대사헌(大司憲) 구수담(具壽聃) 등과 함께 좌의정(左議政) 이기(李芑)의 처벌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같은 해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으로 좌천되었다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쳤고, 이듬해 부응교(副應敎)로 승진했다가 5일 만에 응교(應敎)로 승진했다.

1551년(명종 6) 왕명으로 구황을 위해 경기도에 파견되었고, 같은 해 전한(典翰)과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쳤다.

1553년(명종 8)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서 진헌사(進獻使)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고,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옮겼다. 이듬해 다시 좌부승지로 옮겼다가 같은 해 우승지(右承旨), 그 이듬해 좌승지(左承旨), 도승지(都承旨)로 차례로 승진했고,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옮겼다.

1556년(명종 11) 예조참의(禮曹參議),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고, 1557년(명종 12) 공조참의(工曹參議), 대사간(大司諫), 이조참의, 도승지를 거쳤다. 1558년(명종 13) 용양위호군(龍驤衛護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우윤(右尹)을 거쳤으며, 1559년(명종 14) 도승지를 역임했다.

같은 해 황해도에 임꺽정(林巨正)이 이끄는 도적이 출몰하자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

2.3. 고위 관료 생활과 윤원형 탄핵 (1561년 ~ 1565년)

1561년(명종 16) 동지중추부사, 공조참판, 형조참판을 거쳐 청홍도관찰사로 나갔다. 1563년(명종 18) 예조참판, 이조참판을 거쳤고, 1564년(명종 19) 대사간,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다. 1565년(명종 20) 대사헌, 공조참판, 대사간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가 이조참판을 지낸 후 특명으로 공조판서로 승진했다.

같은 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대사간 박순 등과 함께 영의정 윤원형을 여러 번 탄핵했다. 명종 말년에는 박순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하여 제거하였으나, 그의 당여(黨與)를 끝까지 다스리지 않고 진정시키기를 힘썼다.

2.4. 정승 임명과 사망 (1565년 ~ 1576년)

1566년(명종 21) 호조판서, 판윤, 지중추부사, 공조판서를 거쳐 1567년(명종 22)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1568년(선조 원년) 우찬성, 이조판서를 거쳤다.

1571년(선조 4) 복상(卜相)으로 우의정·영경연감춘추관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아홉 번이나 사직 상소를 올려 사직했다.

1573년(선조 6) 영의정 복상이 있었는데, 좌의정 박순이 영중추부사 홍섬과 판중추부사 이탁을 추천했다. 이때 이탁이 낙점되어 영의정·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홍섬영의정이 되자 좌의정으로 밀려났으며, 이 해 스물여섯 번이나 사직 상소를 올린 끝에 사직했다.

1576년(선조 9) 판중추부사로 재직 중 사망했다. 그는 전조(銓曹)에 있을 때 공정한 도(道)를 넓히고자 힘써 선비들의 신망이 매우 두터웠으며,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검소하고 청빈하게 지내며 녹봉 외에 따로 재산을 늘리지 않았다. 고을에서 간혹 예물을 보내오면 이웃과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주방에 남겨두는 일이 없었다. 죽음에 임하여 아들 이해수에게 관곽(棺槨)을 반드시 임금이 주는 것을 쓰고 바꾸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망 후 사람들은 애석해하며, 근래 전조(銓曹)의 정사(政事)가 공정하기로는 이탁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탁은 30여 년간 조정에 벼슬하면서 한 번도 권문(權門)에 몸을 굽혀 찾아가지 않았다. 명종 말년에는 박순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하여 제거했으나, 그의 당여(黨與)는 끝까지 다스리지 않고 진정시키려 힘썼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따르게 되어 정승에 임명되었을 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3. 평가

이탁은 30여 년간 조정에 벼슬하면서 권력에 굴하지 않고 공정한 정치를 펼치고자 노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특히 인사행정에 있어서 청렴하고 공정함을 유지하여, 전조(銓曹)의 정사(政事)가 공정하기로는 이탁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다고 평가받았다.

명종 말년에는 박순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하여 제거하였으나, 그의 당여(黨與)를 끝까지 다스리지 않고 진정시키기를 힘썼다. 이는 붕당 정치의 폐단을 경계하고 화합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탁은 사후에도 근세 전조(銓曹) 정사의 공정함에 있어서 으뜸으로 꼽힌다는 평가를 받았다.

4.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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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비고
증조부이굉식(李宏植)구례현감, 증 이조판서
조부이맹희(李孟禧)광양현감, 증 좌찬성
아버지이창형(李昌亨, 1485 ~ 1536)신천군수, 증 영의정
외증조부박서창
외조부박유(朴維)제용감첨정
어머니밀양 박씨
이수(李鐩, 1507 ~ ?)현감
남동생이추(李錘, 1512 ~ ?)현감
남동생이상(李鏛, 1516 ~ ?)
남동생이용(李鏞, 1523 ~ ?)군수
누이광산 김씨
매형김조(金銚)
장인이종번(李宗蕃)
부인용인 이씨
장녀이묵석(李墨石, 1533 ~ ?)
장남이해수(李海壽, 1536 ~ 1599)도승지, 증 이조판서
차남이회수(李淮壽, 1538 ~ ?)충청수사
3남이명수(李溟壽, 1545 ~ ?)
그의 먼 후손으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책임자이자 가해자인 기업인 이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