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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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벌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허, 호는 충재이다. 1478년 안동에서 태어나 1548년 삭주에서 사망했다. 연산군 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파방되었고, 중종 반정 이후 관직에 진출하여 예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사후 신원되었으며, 선조 때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정의 시호를 받았다.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칭송받았으며, 저서로 《충재집》이 있다.
2. 생애
2. 1. 가계와 초기 생애
1478년(성종 9) 11월 6일 권벌은 경상북도 안동군 북후면 도촌리(현,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 도계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 훤정(萱亭) 등이다. 복야 권수홍(權守洪)의 10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선략장군과 용양위부호군을 지낸 권곤(權琨)이고, 아버지는 성균관생원 증 의정부좌찬성과 증 의정부영의정 권사빈(權士彬)이고,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주부(主簿)를 지낸 윤당(尹塘)의 딸이다. 할아버지 권곤은 생전 관직이 선략장군 부호군이었지만 여러차례 추증되어 증 이조참판과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됐고, 아버지 권사빈은 성균관생원이었지만 여러번 거듭 추증되어 증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형제로는 현감을 지낸 형 권의(權木+義)와 동생 권예(權木+嗇) 그리고 진사 이함(李木+咸)에게 출가한 누이가 1명 있었다.
그는 안동에서 태어났지만 곧 안동부 내성면(乃城縣) 유곡리(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로 와서 생활했는데, 그의 5대조 예의판서(禮儀判書) 권인(權靷)이 안동에서 봉화 닭실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이후 화순최씨(和順崔氏)로 직장(直長) 최세연(崔世演)의 딸과 혼인하고, 아들 권동보(權東輔)와 권동미(權東美) 등이 태어났다. 부인 화순최씨는 그보다 먼저 사망하여 정경 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追贈)되었다. 그는 첩을 1명 더 들였고 첩에게서도 1남 2녀를 더 두었다.
그의 외가는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의 친인척간이었으므로 대우가 남달랐지만, 그는 오히려 더욱더 근신하고 회피하였다. 왕실과 친인척이 되는 재상들과 관료들이 명나라 연경(燕京)에 사절로 갔다가 돌아올 경우에는 반드시 진귀한 물건을 가져와 사적으로 선물을 바치었지만 그만 혼자 '나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여종이 밥상을 들고 오다가 미끄러져 그의 옷에 국물을 쏟아 더럽혔지만 그는 노여워하지도 않고, 노여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안동부의 교관(敎官)이 된 어떤 고향 사람이 그를 찾아와 뵙고 가다가 관청의 아전과 시비가 붙어 구타하였는데, 안동부사(府使)가 그 말을 듣고 그 교관을 대면하여 잘못을 따지자 교관이 다급한 나머지 거짓말로 내가 구타한 것이 아니라 권 영공(權令公)이 구타하였다고 했다. 안동부사가 권정승 도 사사로운 분노로 관가의 아전을 구타한단 말인가? 하며 그를 찾아와 분노의 말을 터뜨렸으나 그은 끝내 해명하지 않았다.
2. 1. 1. 유년기와 수학
권벌은 1478년(성종 9) 11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 북후면 도촌리(현,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 도계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 훤정(萱亭) 등이다. 복야 권수홍(權守洪)의 10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선략장군과 용양위부호군을 지낸 권곤(權琨)이고, 아버지는 성균관생원 증 의정부좌찬성과 증 의정부영의정 권사빈(權士彬)이고,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주부(主簿)를 지낸 윤당(尹塘)의 딸이다. 할아버지 권곤은 생전 관직이 선략장군 부호군이었지만 여러차례 추증되어 증 이조참판과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추증됐고, 아버지 권사빈은 성균관 생원이었지만 여러번 거듭 추증되어 증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되었다.
형제로는 현감을 지낸 형 권의(權木+義)와 동생 권예(權木+嗇) 그리고 진사 이함(李木+咸)에게 출가한 누이가 1명 있었다.
그는 안동에서 태어났지만 곧 안동부 내성면(乃城縣) 유곡리(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로 와서 생활했는데, 그의 5대조 예의판서(禮儀判書) 권인(權靷)이 안동에서 봉화 닭실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이후 화순최씨(和順崔氏)로 직장(直長) 최세연(崔世演)의 딸과 혼인하고, 아들 권동보(權東輔)와 권동미(權東美) 등이 태어났다. 부인 화순최씨는 그보다 먼저 사망하여 정경 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追贈)되었다. 그는 첩을 1명 더 들였고 첩에게서도 1남 2녀를 더 두었다.
그의 외가는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의 친인척간이었으므로 대우가 남달랐지만, 그는 오히려 더욱더 근신하고 회피하였다. 왕실과 친인척이 되는 재상들과 관료들이 명나라 연경(燕京)에 사절로 갔다가 돌아올 경우에는 반드시 진귀한 물건을 가져와 사적으로 선물을 바치었지만 그만 혼자 '나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여종이 밥상을 들고 오다가 미끄러져 그의 옷에 국물을 쏟아 더럽혔지만 그는 노여워하지도 않고, 노여운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안동부의 교관(敎官)이 된 어떤 고향 사람이 그를 찾아와 뵙고 가다가 관청의 아전과 시비가 붙어 구타하였는데, 안동부사(府使)가 그 말을 듣고 그 교관을 대면하여 잘못을 따지자 교관이 다급한 나머지 거짓말로 내가 구타한 것이 아니라 권 영공(權令公)이 구타하였다고 했다. 안동부사가 권정승 도 사사로운 분노로 관가의 아전을 구타한단 말인가? 하며 그를 찾아와 분노의 말을 터뜨렸으나 그은 끝내 해명하지 않았다.
2. 2. 과거 급제와 관직 진출
1496년(연산군 2년)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후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燕山君) 때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정시(庭試)에 합격하였지만, 삭방(削榜)되었다. 정경세(鄭經世)가 쓴 그의 묘비문에 의하면 당시 그가 정시 과거의 답안지로 낸 글 가운데에 처(處)자가 들어 있다는 이유로 합격했다가 취소당했다 한다. 연산군이 일찍이 김처선(金處善)의 직간(直諫)하는 말에 분노하여 김처선을 죽인 뒤, 사람 이름은 물론이고 안팎의 모든 문건에서 김처선의 이름인 처(處)와 선(善) 두 글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종 반정 이후에도 이때 그가 파방된 것에 대한 보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1507년(중종 2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때 중종에게서 상으로 받은 꽃이 후대에 전하고 있다. 승문원(承文院)을 거쳐 예문관주서(藝文館注書)가 되고, 이후 예문관검열, 홍문관수찬, 부교리,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했다.
1508년 기사관이 되고, 1510년 경연검토관이 되었는데, 이후 조정 내직으로 근무할 동안에는 예겸 임명과 상관없이 항상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참찬관 등에 겸임되어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다.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휴가를 받아 고향에 내려가려다가 당시 신윤무(辛允武), 박영문(朴永文) 등의 흉계를 알고도 즉시 알리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일을 알자 그의 당상관계(堂上官階)를 삭탈하도록 청하였다.
결국 중종이 그의 청을 받아들여 정막개 등이 삭탈되고, 그는 직신(直臣)으로 명망을 얻었다. 이후에도 그는 유자광, 정막개, 용관(冗官) 등을 규탄하여 임금에게 계속 아뢰었다.
1512년 11월에는 현덕왕후의 복권을 건의하였다. 이후 사헌부지평, 성균관사성(司成)을 거쳐 1514년 이조정랑에 임명되었고, 사건으로 인해 해직되었다가 그 뒤 얼마 안 되어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얼마 뒤 외직으로 영천군수로 발령되었다. 1517년(중종 12년) 사헌부장령, 그해 10월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1518년 승정원동부승지, 좌승지가 되었다. 1518년 가을 좌승지로 재직 중 중종이 유생(儒生)을 불러 친강(親講)할 때 그는 단종과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주고 제사지내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우승지 김정국(金正國) 등과 같이 단종과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주고 제사지내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부 훈신들의 반대로 비판받고 무산되었다. 그러나 그의 단종 복권과 연산군 후사 입양 건의는 시론(時論)이 옳게 여겼다.
2. 2. 1. 연산군과의 악연
그는 연산군 때 정시에 합격하였지만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파방되었다. 그러나 1518년 승정원좌승지에 있을 때는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서 제사지내게 해줄 것을 중종에게 적극 상소하였다.
2. 3. 중종반정과 사림파의 일원
1518년 승정원좌승지에 있을 때 중종에게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해줄 것을 적극 상소하였다.
2. 3. 1. 단종과 연산군 후사 문제
1518년 승정원좌승지에 있을 때 중종에게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해줄 것을 적극 상소하였다.
2. 4.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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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도승지와 겸임 경연참찬관, 예문관직제학 등을 거쳐, 1519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중종 대에 그는 조광조, 김정국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하는 개혁 정치에 영남사림파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했다. 조광조, 김안국 등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 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 하였다. 그는 기호지역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를 조정, 화합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519년 예조참판이었을 때 다시한번 훈구파와 기호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 했지만 실패한다. 이후 아버지 권사빈이 나이가 연로하고, 풍병이 있음을 들어 외직인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갔다.
삼척부사로 발령받아 부임했다가 1519년(중종 14) 11월에 중종이 훈구파 심정, 외척 홍경주, 온건 사림파인 남곤, 김전 등을 부추겨서 기묘사화를 일으키고 조광조 일파를 제거할 때, 연루시켜서 파직당하고 귀향하였다. 1520년(중종 20년) 안동부 내성면 유곡(酉谷)에 은거하였다. 이후 15년 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0년 직첩을 돌려받았다가 곧 환수되었다.
1533년(중종 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에 임명되었다. 1533년 밀양부사로 임명되었으며, 1537년 11월 충무위 상호군, 12월 한성부좌윤이 되었고 이듬해 2월 경상도관찰사, 10월에는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8월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 세력이 대윤(大尹) 윤임(尹任)을 역모로 몰았을 때, 권벌은 유관과 유인숙의 이름까지 언급되자 불가함을 건의하였다.
권벌은 윤임, 유인숙(柳仁淑), 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 8월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여 의금부사로 이언적과 함께 심문에 참여하였다. 그는 밤새도록 계사의 초안을 썼으나, 이언적이 계사 중 위험한 말은 모두 삭제해 버리고 보고했다. 그러자 그는 이처럼 삭제해 버렸으니, 계사를 올리지 않느니만 못하다며 탄식하였다.
8월 30일 추성위사홍제보익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고 길원군(吉原君)에 봉작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우의정 이기(李芑), 우찬성 정순붕(鄭順朋) 등이 그가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곧 훈적에서 삭훈(削勳)되고, 중추부지사로 좌천되었다가 그해 10월 사헌부와 사간원의 거듭 탄핵을 받아 파면되어 고향 안동 유곡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고신을 빼앗기고, 1547년(명종 2) 한성 양재역에서 한글로 문정왕후를 비방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발생하자, 여기에 연루되어 구례(求禮)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가 벽서를 붙였거나, 사주했거나 벽서를 붙이는데 영향을 줬다는 증거는 없었다.
2. 4. 1. 기묘사화 전후와 은거
이후 도승지와 겸임 경연참찬관, 예문관직제학 등을 거쳐, 1519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중종 대에 그는 조광조, 김정국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하는 개혁 정치에 영남사림파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했다. 조광조, 김안국 등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 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 하였다. 그는 기호지역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를 조정, 화합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519년 예조참판이었을 때 다시한번 훈구파와 기호사림파 사이를 조정하려 했지만 실패한다. 이후 아버지 권사빈이 나이가 연로하고, 풍병이 있음을 들어 외직인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갔다.
삼척부사로 발령받아 부임했다가 1519년(중종 14) 11월에 중종이 훈구파 심정, 외척 홍경주, 온건 사림파인 남곤, 김전 등을 부추겨서 기묘사화를 일으키고 조광조 일파를 제거할 때, 연루시켜서 파직당하고 귀향하였다. 1520년(중종 20년) 안동부 내성면 유곡(酉谷)에 은거하였다. 이후 15년 간 고향에서 지내다가 1530년 직첩을 돌려받았다가 곧 환수되었다.
1533년(중종 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에 임명되었다. 1533년 밀양부사로 임명되었으며, 1537년 11월 충무위 상호군, 12월 한성부좌윤이 되었고 이듬해 2월 경상도관찰사, 10월에는 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
2. 4. 2.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 사건
1545년(명종 즉위년) 8월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 세력이 대윤(大尹) 윤임(尹任)을 역모로 몰았을 때, 권벌은 유관과 유인숙의 이름까지 언급되자 불가함을 건의하였다.
권벌은 윤임, 유인숙(柳仁淑), 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 8월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여 의금부사로 이언적과 함께 심문에 참여하였다. 그는 밤새도록 계사의 초안을 썼으나, 이언적이 계사 중 위험한 말은 모두 삭제해 버리고 보고했다. 그러자 그는 이처럼 삭제해 버렸으니, 계사를 올리지 않느니만 못하다며 탄식하였다.
8월 30일 추성위사홍제보익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고 길원군(吉原君)에 봉작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우의정 이기(李芑), 우찬성 정순붕(鄭順朋) 등이 그가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곧 훈적에서 삭훈(削勳)되고, 중추부지사로 좌천되었다가 그해 10월 사헌부와 사간원의 거듭 탄핵을 받아 파면되어 고향 안동 유곡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고신을 빼앗기고, 1547년(명종 2) 한성 양재역에서 한글로 문정왕후를 비방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발생하자, 여기에 연루되어 구례(求禮)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가 벽서를 붙였거나, 사주했거나 벽서를 붙이는데 영향을 줬다는 증거는 없었다.
2. 5. 유배 생활과 죽음
처음에는 전라북도 구례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평안북도 태천(泰川)으로 바뀌었다. 유배되어 압송하기 전 의금부 관원이 집에 도착하자 그는 태연한 기색으로 길에 오르며 이별하러 온 향당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의 은혜이다."라 하였다. 그를 방문하러 온 이들 중 진사 금원정(琴元貞)이 그의 손을 잡고 목놓아 통곡하자 그는 웃으면서 "나는 처음에 자네를 대장부로 보았는데, 도리어 이와 같은 사람밖에 안 되는가?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은 모두가 하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다."라며 애써 달랬다. 또한 글을 지어 주면서 아들 권동보에게 이르기를 "범충선(范忠宣)은 나이 70에도 만리나 되는 먼 길을 갔으니, 너의 아비가 받은 죄는 거기에 비하면 아주 관대한 은전이다. 그리고 나는 선왕의 은혜를 저버림이 이에 이르렀으니, 내가 죽거든 박장(薄葬)을 하라." 하였다. 1547년 태천에서 다시 다시 평안북도 삭주(朔州)로 이배(移配)되었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주로 독서를 하면서, 동리 어린아이들에게 천자문과 글을 가르쳤다.
1548년(명종 3년) 영의정 윤인경(尹仁鏡), 좌의정 이기, 우의정 정순붕(鄭順朋), 좌찬성 민제인(閔齊仁), 우찬성 황헌(黃憲), 좌참찬 임권, 우참찬 김광준(金光準), 이조판서 윤원형(尹元衡), 한성부 판윤 최연(崔演) 등이 모여서 양재역 벽서 사건 관련 자 중 가산을 적몰하지 않은 자들을 논핵할 때, 그의 이름도 언급되었지만 명종이 듣지 않았다. 이기와 민제인은 그가 안명세의 문집에 이름이 언급된 것도 지적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이기 등은 그를 반드시 사형에 처하려고 온 힘을 다해 계청하였으나, 문정왕후가 따라주지 않았다.
이때 그의 아들로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으로 재임 중이던 권동보(權東輔)까지 탄핵하였지만, 왕이 듣지 않다가 여러번 건의하니 삭직시켰다. 권벌은 조정에 있는 동안 경연시독관·참찬관 등으로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으며, 평소 독서를 좋아해 자경편(自警篇), 근사록(近思錄) 등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 말년에는 송정(松亭)이라는 아호도 사용하였다. 그 해 1548년(명종 3) 3월 26일 삭주의 유배지에서 병으로 죽었다.
2. 5. 1. 유배지에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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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 사후 복권과 평가
1567년(명종 22년) 신원(伸寃) 복권되었고, 선조 즉위 직후 그해 10월 선조의 명으로 직첩을 되돌려받았다. 이후 기대승은 '당시 학문했던 사람으로 이언적이나 권벌 같은 이들이 어찌 추호인들 윤임에게 붙을 리가 있겠느냐'며 억울함을 상주하였다. 그가 복권되자 미암 유희춘(柳希春)은 교지를 읽다가 권벌과 이언적의 누명을 씻어 주시는 말씀에 이르러서는 저도 모르게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한다.선조는 그를 가리켜 급제 권벌은 덕행이 갖추어졌고 충성 또한 지극했다(故及第權橃, 德行純備忠誠俱至)고 평하였으며, 1568년(선조 1년) 2월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감춘추관사에 추증되었다. 1571년 9월 충정(忠定)의 시호가 추서되었는데, 사군진절왈충 순행불상왈정(事君盡節曰忠 純行不爽曰定)이라 하여 충정으로 정해진 것이다.
1588년(선조 21년) 경북 봉화(奉化)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현종 때 가서 사액을 받았다. 1591년(선조 24) 대명회전 (大明會典)이 수정되어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인임에서 이자춘으로 수정되자, 그는 조선의 종계(宗系)가 바로잡히게 한 데 노력한 공으로 광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다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그 해 불천위(不遷位)로 지정되었다. 문집에 《충재문집 (冲齋文集)》등이 있다.
권벌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선조는 권벌을 “참으로 정승감”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기대승은 권벌이 “나라를 위한 마음은 쇠와 돌처럼 굳고, 임금을 향한 충절은 해와 별처럼 빛난다”고 칭송했다. 유희춘은 권벌을 가리켜 “맑은 덕과 곧은 절개는 뭇 신하들의 모범”이라고 평가했다.
2. 6. 1. 후대의 평가
권벌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선조는 권벌을 “참으로 정승감”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기대승은 권벌이 “나라를 위한 마음은 쇠와 돌처럼 굳고, 임금을 향한 충절은 해와 별처럼 빛난다”고 칭송했다. 유희춘은 권벌을 가리켜 “맑은 덕과 곧은 절개는 뭇 신하들의 모범”이라고 평가했다.
3. 저작 및 작품
충재일기는 권벌의 일기로서 翰苑日記중국어 2책, 堂後日記중국어 1책, 承宣時日記중국어 2책, 新昌令推斷日記중국어 1책 등 모두 6책이 있다.
이 중 翰苑日記중국어는 그가 예문관 검열로 재직할 때의 일기이다. 1책은 1508년 1월 5일부터 9월 20일, 2책은 12월 1일부터 1509년 9월 14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堂後日記중국어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재직시에 적은 일기로 1510년 3월 1일에서 3월 30일까지의 기록이다.
承宣時日記중국어는 승정원 승지로 재직할 당시의 공사를 기록한 일기로 1책은 1518년 5월 15일부터 7월 5일, 2책은 7월 10일부터 11월 6일까지의 기록이다.
新昌令推斷日記중국어는 승정원 주서 재직 시 서얼 출신 종친 신창령(新昌令) 이흔(李訢)의 역모사건 전말을 추단한 기록으로 1509년 10월 28일에 작성되었다. 이들 일기는 중종실록을 편찬할 때에 자료로서 채용되었으며, 권벌의 문집인 충재집(沖齋集)에도 일부 실려 있다. 당시 관료로서의 생활실태와 중앙정부의 일상 행사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밖에 권벌 및 그의 자제들의 교류와 당시 사대부들의 시문과 서예 등의 묶음인 유묵, 그가 방목과 어머니 윤씨 남매의 재사분배기록인 재산분배기 등 각종 공,사적 문서를 보관해둔 권벌 종가 고문서 등이 후대에 전하여 현대까지 전래되고 있다.
3. 1. 충재일기
권벌의 일기로서 한원일기(翰苑日記) 2책, 당후일기(堂后日記) 1책, 승선시일기(承宣時日記) 2책, 신창령추단일기(新昌令推斷日記) 1책 등 모두 6책이 있다.
한원일기는 권벌이 예문관 검열로 재직할 때의 일기이다. 1책은 1508년 1월 5일부터 9월 20일, 2책은 12월 1일부터 1509년 9월 14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당후일기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재직시에 적은 일기로 1510년 3월 1일에서 3월 30일까지의 기록이다.
승선시일기는 승정원 승지로 재직할 당시의 공사를 기록한 일기로 1책은 1518년 5월 15일부터 7월 5일, 2책은 7월 10일부터 11월 6일까지의 기록이다.
신창령추단일기는 승정원 주서 재직 시 서얼 출신 종친 신창령(新昌令) 이흔(李訢)의 역모사건 전말을 추단한 기록으로 1509년 10월 28일에 작성되었다. 이들 일기는 중종실록을 편찬할 때에 자료로서 채용되었으며, 권벌의 문집인 충재집(沖齋集)에도 일부 실려 있다. 당시 관료로서의 생활실태와 중앙정부의 일상 행사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그밖에 권벌 및 그의 자제들의 교류와 당시 사대부들의 시문과 서예 등의 묶음인 유묵, 그가 방목과 어머니 윤씨 남매의 재사분배기록인 재산분배기 등 각종 공,사적 문서를 보관해둔 권벌 종가 고문서 등이 후대에 전하여 현대까지 전래되고 있다.
3. 2. 기타 문서
권벌 및 그의 자제들의 교류와 당시 사대부들의 시문과 서예 등을 묶은 유묵, 그가 방목과 어머니 윤씨 남매의 재산분배기록인 재산분배기 등 각종 공적, 사적 문서를 보관해둔 권벌 종가 고문서 등이 후대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권벌 충재일기는 그의 일기로서 한원일기(翰苑日記) 2책, 당후일기(堂后日記) 1책, 승선시일기(承宣時日記) 2책, 신창령추단일기(新昌令推斷日記) 1책 등 모두 6책이 있다.
한원일기는 그가 예문관 검열로 재직할 때의 일기이다. 1책은 1508년(중종 3년) 1월 5일부터 9월 20일, 2책은 12월 1일부터 1509년(중종 4년) 9월 14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당후일기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재직시에 적은 일기로 1510년(중종 5년) 3월 1일에서 3월 30일까지의 기록이다.
승선시일기는 승정원 승지로 재직할 당시의 공사를 기록한 일기로 1책은 1518년(중종 13년) 5월 15일부터 7월 5일, 2책은 7월 10일부터 11월 6일까지의 기록이다.
신창령추단일기는 승정원 주서 재직 시 서얼 출신 종친 신창령(新昌令) 이흔(李訢)의 역모사건 전말을 추단한 기록으로 1509년(중종 4년) 10월 28일에 작성되었다. 이들 일기는 중종실록을 편찬할 때에 자료로서 채용되었으며, 권벌의 문집인 충재집(沖齋集)에도 일부 실려 있다. 당시 관료로서의 생활실태와 중앙정부의 일상 행사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4. 가족 관계
권벌의 할아버지는 권곤(權琨, 1427년 ~ 1502년)이고, 할머니는 서원정씨(西原鄭氏)이다. 아버지는 권사빈(權士彬, 1449년 9월 ~ 1535년 9월)이며, 호는 오선정(五先亭)이다.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주부 윤당(尹塘)의 딸이며 42세에 사망하였다.
백부로는 권사영(權士英)이 있고, 숙부로는 권사화(權士華)와 권사수(權士秀, 1462 ~ 1522)가 있다. 형제로는 형 권의(權⿰木義, 1475년 ~ 1558년 8월 26일)와 동생 권예(權⿰木嗇, 1482년 ~ 1562년년)가 있다. 누이 안동권씨는 진사 이함(李⿰木咸)에게 출가하였다.
부인은 화순 최씨(和順崔氏)로, 직장(直長) 최세연(崔世演)의 딸이다. 아들로는 군수(郡守) 권동보(權東輔)와 현감(縣監) 권동미(權東美)가 있다. 권동미의 아들로는 권채(權采), 권내(權來) (권동보의 양자로 출계), 권집(權集), 권비(權棐)가 있으며, 딸 안동권씨는 부사(府使) 이영도(李詠道)에게 출가하였다.
첩(이름 미상)에게서는 서자 권동신(權東愼)과 권동진(權東進)을 두었다. 서녀는 좌랑(佐郞) 홍인수(洪仁壽)에게 출가하였고, 홍인수의 아들 즉 서외손자로는 승문원 정자 홍사제(洪思濟)와 진사 홍사려(洪思厲)가 있다.
5. 기타
그는 연산군 때 정시에 합격하였지만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파방되었다. 그러나 1518년 승정원좌승지에 있을 때는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서 제사지내게 해줄 것을 중종에게 적극 상소하였다.
5. 1. 일화
권벌은 연산군 때 정시에 합격하였지만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파방되었다. 그러나 1518년 승정원좌승지에 있을 때는 연산군의 후사를 세워서 제사지내게 해줄 것을 중종에게 적극 상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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