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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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 황제는 무굴 제국과 영국 통치 시기에 사용된 칭호로, 무굴 제국에서는 파디샤라는 칭호로 불렸으며, 1857년 세포이 항쟁 이후 무굴 왕조가 멸망했다. 1876년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여황제로 추대되면서 영국 국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게 되었으며,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과 함께 칭호가 폐지되었다. 조지 6세는 인도와 파키스탄이 공화국이 될 때까지 각국의 왕으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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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황제 | |
---|---|
지도 | |
기본 정보 | |
명칭 | 인도 황제 |
원어 명칭 | Emperor of India |
원어 명칭 (힌디어) | Kaisar-i-Hind |
![]() | |
칭호 | 폐하 |
영역 | 인도 |
국경 | 제국 |
시작 | 1876년 5월 1일 |
종료 | 1948년 6월 22일 |
통치자 | |
초대 황제 | 빅토리아 |
마지막 황제 | 조지 6세 |
마지막 황제 (계승) | 인도 군주 및 파키스탄 군주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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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굴 제국의 인도 황제
16세기부터 인도 대륙 대부분을 통치해 온 무굴 제국은 '파디샤'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1857년 세포이 항쟁이 진압된 후, 바하두르 샤 2세는 체포되어 미얀마
2. 1. 바하두르 샤 2세
16세기 이후 무굴 제국이 인도 대륙의 대부분을 다스렸지만, 지리적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간단하게 파디샤(서구에서는 '황제'와 같은 뜻으로 취급됨)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1857년 인도인들의 반란 동안 세포이 반란군은 델리를 점유하였으며 무굴의 바하두르 샤 2세를 인도 황제로 선포하였다. 반란이 진압되고나서 바하두르 샤 2세는 체포되어 1858년에 버마의 랑군(지금의 미얀마 양곤)으로 추방되었다. 이로써 무굴 왕조의 시대는 끝났다.군주 | 시작 | 끝 | 배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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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바하두르 샤 2세 (바하두르 샤 자파) | 1857년 5월 델리에서 인도 황제로 선포; 1837년 이후로 무굴 황제 | 1857년 9월 | align="center"| |
1857년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는 해산되고, 영국 정부가 인도를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1876년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여제' 칭호를 받으면서, 영국 국왕은 인도 황제를 겸하게 되었다.
3. 영국의 인도 황제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하자 아들인 에드워드 7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인도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 이 칭호는 1947년 8월 15일 밤,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인도 황제” 칭호 자체는 1948년까지 유지되다가 조지 6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왕-황제 또는 여왕-여제로 군림한 영국의 통치자들은 인도와 관련된 공문서 등에 자신들의 이름을 서명할 때 이름 뒤에 머리글자인 ''R I'' (''Rex/Regina Imperator/Imperatrix'') 또는 생략형인 ''Ind. Imp.'' (''Indiae Imperator/Imperatrix'')를 사용하였다. 왕-황제의 배우자인 왕비-황후의 경우엔 ''R''이라고 서명하였다. 또한, 이 칭호는 조지 6세의 1948년 동전들을 포함한 많은 영국 동전들에도 새겨졌다.
3. 1. 인도 여제 칭호의 제정
영국 동인도 회사가 무굴 황제를 퇴위시키고 해산된 후, 1876년 5월 1일부터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여제"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이 칭호는 19세기 영국의 속령과 보호령이 대영 제국에 정식 합병되고 나서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의 인도 대부분(포르투갈 식민지인 시킴 주의 고아 주와 프랑스 식민지인 퐁디셰리 제외)과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버마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가 빅토리아 여왕을 위해 “인도의 여제”라는 칭호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빅토리아 여왕의 딸인 빅토리아 공주가 남편이 독일 황제가 됨에 따라 황후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여왕인 모후보다 지위가 높아지는 경우가 발생하여 대다수 사람들이 이를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러한 때에 이 칭호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G.W. 라이트너는 인도에서 영국 군주를 위한 공식적인 황제 칭호로 "카이사르-이-힌드"를 만들었다.[9] "카이사르-이-힌드"는 힌디어와 우르두어로 인도 황제를 의미한다. '황제'를 의미하는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칭호인 caesar|카이사르it(페르시아어와 오스만 튀르크어를 거침 – 참조)에서 유래했으며, 더 이전에 라틴어에서 빌려온 독일어 칭호 Kaiser|카이저de와 동족어이다.[10]
3. 2. 델리 두르바르
1876년 5월 1일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 여황제"로 추대되었고, 다음 해 1877년 1월 1일 델리에서 열린 즉위식(Delhi Durbar)에서 공식적으로 즉위가 선포되었다.[5]
1910년 영국 국왕에 즉위한 조지 5세는 1911년 12월 12일 델리에서 자신의 즉위식(다르바르)을 거행하면서, 인도 황제의 왕관을 새로 제작하게 하였다.[18] 이 왕관은 920g이며 6,170개의 다이아몬드, 9개의 에메랄드, 4개의 루비, 4개의 사파이어가 박혀 있다. 앞면에는 32carat인 매우 좋은 에메랄드가 있다.[12] 조지 5세는 일기에서 "왕관을 3시간 반 동안 쓴 후 다소 피곤했다. 무게가 상당해서 머리가 아팠다"라고 적었다.[13]
3. 3. 인도 황제 목록
윈저에드워드 8세 - 없음 없음 윈저 조지 6세 -
(1948년 6월 22일 칭호 폐기)없음 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