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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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디언 이주는 1783년 파리 조약 이후 미국이 급격한 인구 증가를 겪으면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추진된 정책이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 부족과의 조약을 통해 토지 매매를 시도했지만, 인디언에게 땅을 판다는 개념이 없어 갈등이 발생했다.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 등 초기 미국 지도자들은 인디언을 개인 또는 국가로 대우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으며, 제퍼슨은 인디언의 문화를 옹호하면서도 동화 또는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의 이주를 장려했다. 1830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인디언 이주법에 서명하여 강제 이주 정책을 가속화했으며, 이로 인해 체로키족의 '눈물의 길'과 같은 비극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인디언들이 사망했으며, 현재 인디언 이주는 민족 청소, 집단 학살 등으로 비판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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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이주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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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미국 |
대상 | 미국 동부의 아메리카 원주민 |
기간 | 1830년–1847년 |
유형 | 죽음의 행진 인구 이동 민족 청소 제노사이드 |
사망자 | 8,000명 이상 (최저 추정치) |
가해자 | 미국 연방 정부 미국 육군 주 방위군 |
동기 | 미시시피 강 동쪽의 아메리카 원주민 땅을 획득하려는 팽창주의적 욕망 (명백한 운명) 반 아메리카 원주민 인종차별 |
관련 사건 | 아메리카 원주민 제노사이드 |
배경 | |
원인 | 인디언 이주법 |
영향 | 수천 명의 체로키족, 크리크족, 세미놀족, 촉토족, 치카소족 원주민들이 강제로 고향에서 이주당함. 눈물의 길 원주민 땅의 확장 |
관련 법률 | 1830년 인디언 이주법 1834년 인디언 교류법 |
주요 사건 | |
강제 이주 대상 부족 | 체로키족 촉토족 크리크족 치카소족 세미놀족 기타 부족 |
주요 경로 | 눈물의 길 포함, 다양한 경로 |
목적지 | 주로 인디언 준주 (현재의 오클라호마주) |
추가 정보 | |
관련 인물 | 앤드루 잭슨 존 로스 조지아 주 사람들 |
논쟁점 | 합법성 논란 인권 침해 논란 도덕적 정당성 논란 |
현재 상황 | 부족들은 이 사건을 국가적인 수치로 여김. 미국 정부의 지속적인 배상 노력 |
2. 역사적 배경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 미국은 급속한 인구 증가를 겪었다. 늘어난 인구는 인디언 영토로 진출했고, 토지 매매를 비롯한 여러 연방 조약으로 인디언과 백인 간의 토지 협정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땅을 판다"는 문화가 없었던 인디언들에게 이는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8]
미국 연방 정부는 인디언 부족을 철저히 배제하는 정책을 채택하고, 당시 미국의 세력 범위 밖에 있던 서쪽 땅(보호구역)을 제시하며 부족들의 토지를 판매하도록 강요했다. 1830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인디언 이주법''' 가결로 이 정책은 가속화되었고, "인디언 준주(현재의 오클라호마 주)"가 1830년대에 북부에서 남부에 걸쳐 인디언 부족 거의 전부를 강제 수용하기 위한 토지로 마련되었다. 약 10만 명의 아메리카 인디언이 서부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다.[8]
이주법은 겉으로는 인디언의 이주를 강요하지 않았고, 이론상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면'''" 좋았다. 그러나 이주를 거부하면 연방 조약을 파기한 것으로 간주되어 보호나 연금을 받을 수 없게 되고, 백인에게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부족이 아닌 개인 단위로 취급되어 백인 정착민에게 둘러싸여 생활했다. 잭슨 행정부는 부족 지도자들에게 이주 조약에 서명(대부분 ×표를 썼다)하게 하기 위해 육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압력을 가했다.[8]
몇몇 부족에서는 지도자들이 이주에 대립했고, 이는 부족의 분열을 낳았다. 미국 정부는 이주에 저항한 지도자들을 무시하고, 이주를 지지한 지도자들과 거래했다. 뉴에코타 조약영어은 주요 체로키 지도자들의 파벌에 의해 합의되었지만, 선출된 부족 지도자는 아니었다. 마틴 밴 뷰런 대통령은 이 조약의 조항을 시행했고, 눈물의 길에서 약 4,000명의 체로키가 사망(대부분 과로와 질병)했다. 초크토족도 강제 이주 도중에 과로와 질병으로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8]
인디언의 강제 이주는 미국 육군이 기마로 호송했지만, 인디언들은 도보였다. "체로키의 눈물의 여정" 당시 기록에는 "무덤에 들어갈 것 같은 노파가,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고 있었다"라고 적혀 있다. 강제 이동 관리 대리인은 종종 최저 가격의 민간인 입찰자가 담당했기에 관리 부실, 호송 부실, 이주 전후 인디언의 법적 권리 보호 실패(대부분 사보타주)가 발생했고, 이는 인디언에게 엄청난 고통과 죽음을 안겨주었다.[8]
대부분의 인디언은 마지못해 평화적으로 이주 조약에 따랐지만, 일부 부족은 저항했다. 남동부에서는 두 개의 단기전(1832년 블랙 호크 전쟁, 1836년 제2차 크리크 전쟁)과 초토화 작전에 의한 전쟁(1835~1842년 제2차 세미놀 전쟁)이 발생했다. 세미놀 전쟁은 게릴라전이 되었고, "인디언의 베트남 전쟁"이라고 불린다.[8]
2. 1. 초기 미국의 인디언 정책
미국 독립 전쟁 이후 미국의 초기 지도자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개인으로 대우해야 할지, 아니면 국가로 대우해야 할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독립 선언서에서는 원주민들을 "무자비한 인디언 야만인"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인들의 일반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벤자민 프랭클린은 1775년 대륙 회의에 제출된 초안에서 이로쿼이 연맹을 포함한 원주민 부족들과의 "영구적인 동맹"을 제안했다.
연합 회의는 1787년 서북부 조례를 통과시켜 원주민의 "재산, 권리 및 자유"를 보호할 것을 요구했다. 1787년 미국 헌법(제1조, 제8절)은 의회가 인디언 부족과의 상업을 규제할 책임을 지도록 했다. 1790년, 미국 의회는 교류 금지법을 통과시켜 부족의 토지 권리를 보호하고 성문화했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1790년 세네카족에게 보낸 연설에서 헌법 이전의 인디언 토지 판매의 어려움을 "악"이라고 칭하며, 이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정당한 권리"를 지지할 것을 약속했다. 1792년, 워싱턴은 이로쿼이족을 포함한 50명의 부족 추장들과 만나 우호 관계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같은 해, 워싱턴은 의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평화, 신뢰, 상업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795년, 워싱턴은 의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미국 정부가 인디언과의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롭게 행동해야 하고, 미국의 "변경 거주자"의 습격도 중단되어야 함을 시사했다.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인정된 후, 미국은 급속한 인구 증가를 겪었고, 늘어난 인구는 인디언 영토로 진출했다. 토지 매매를 비롯한 여러 연방 조약으로 인디언과 백인 간의 토지 협정이 성립되었지만, "땅을 판다"는 문화가 없었던 인디언들에게 이는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결국, 미국 연방 정부는 인디언 부족을 철저히 배제하는 정책을 채택하고, 당시 미국의 세력 범위 밖에 있던 서쪽 땅(보호구역)을 제시하며 부족들의 토지를 판매하도록 강요하기 시작했다.
2. 2. 제퍼슨의 정책
토머스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에 관한 노트(1785)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원주민들이 "옳고 그름에 대한 도덕적 감각" 덕분에 법과 강압 없이도 잘 지낸다고 보았다. 그는 원주민이 백인과 신체적, 정신적으로 동등하다고 믿었다. 프랜시스 폴 프루차에 따르면 제퍼슨은 원주민과 유럽계 미국인이 섞여 한 민족이 되기를 원했다.제퍼슨은 대통령으로서 원주민 국가를 미국에 묶어두고, 수렵 채집 대신 농업을 하도록 "문명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조약과 무역을 통해 이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 1803년 2월 27일, 윌리엄 헨리 해리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퍼슨은 미국 정착지가 인디언들을 포위하여 결국 미국 시민이 되거나 미시시피 강 너머로 이주할 것이라고 썼다.[8] 그는 인디언들에게 관대함을 베푸는 것은 인도주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덧붙였다.[8]
제퍼슨은 원주민들이 문화 동화되기를 장려했다. 그는 1802년 11월 3일 세네카족 지도자 핸섬 레이크에게 편지를 보내 백인과 인디언의 통일된 국가에 대한 바람을 나타냈다. 체로키족이 시민권을 청원했을 때, 제퍼슨은 시민권을 원하는 국가에 시민권을 부여할 의향을 보였다. 1808년 의회 보고서에서도 백인과 인디언의 단결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제퍼슨은 인디언 동화에 대해 양면적인 감정을 가졌고, 저항하는 부족에 대해서는 강경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인디언의 생활 방식을 농업으로 바꾸려 했는데, 이는 사냥감 감소로 인한 생계 부족 때문이었다. 그는 농업으로의 전환이 원주민들을 백인에게 의존하게 만들어 땅을 넘겨주거나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이주하게 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1803년 윌리엄 헨리 해리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떤 부족이 도끼를 들면 모든 땅을 빼앗아 미시시피 강 건너로 몰아낼 것이라고 썼다.
같은 편지에서 제퍼슨은 정착민의 불의로부터 인디언을 보호하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 1819년 2월 27일 조약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미시시피 강 동쪽에 거주하는 체로키족에게 시민권을 제공하고 가구당 640acre의 토지를 제공했다. 원주민의 토지는 조약이나 강압에 의해 매입되기도 했다. 1803년 제퍼슨은 원주민이 미시시피 강 동쪽의 땅을 서쪽의 비슷한 면적의 영토와 교환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이는 1817년 조약에 처음 포함되었으며, 인디언 이주법(1830)에도 반영되었다.
2. 3. 칼훈의 계획
제임스 먼로 대통령 재임 시절, 육군 장관 존 C. 칼훈은 인디언 이주에 대한 최초의 계획을 수립했다. 먼로는 1824년 말 칼훈의 계획을 승인했으며, 1825년 1월 27일 상원에 보낸 특별 메시지에서 아칸소와 인디언 준주의 창설을 요청했다. 미시시피강 동쪽에 있는 인디언들은 자발적으로 그들의 땅을 강 서쪽의 땅과 교환할 것이었다. 상원은 먼로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칼훈에게 법안 초안을 작성하도록 요청했지만, 이 법안은 조지아 대표단에 의해 하원에서 부결되었다.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은 칼훈-먼로 정책을 이어받아 비폭력적인 수단으로 인디언을 이주시키기로 결정했다.3. 인디언 이주법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의 독립이 공식 인정된 후, 미국은 급속한 인구 증가를 겪었고, 늘어난 인구는 인디언 영토로 진출했다. 인디언과 백인 간의 토지 협정은 토지 매매를 비롯한 여러 연방 조약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땅을 판다"는 문화가 없었던 인디언에게 이는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미국 연방 정부는 인디언 부족을 철저히 배제하고, 당시 미국의 세력 범위 밖에 있던 서쪽 땅(인디언 보호구역)을 제시하며 토지 판매를 강요했다. 이 정책은 1830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인디언 이주법''' 통과로 가속화되었다. 인디언 준주(현재의 오클라호마 주)가 강제 수용 토지로 제공되었고, 약 10만 명의 인디언이 서쪽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표면적으로 인디언 이주법은 강제 이주를 금지하고 "자발적" 이주를 명시했지만, 실제로는 잭슨 행정부가 부족 지도자들에게 이주 협약 서명을 강요했다. 이주 거부는 연방 조약 파기로 간주되어 보호 및 연금을 받지 못하고 백인에게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부족 지도자들은 육군의 무력을 배경으로 한 압력을 받아 서명해야 했고, 문자가 없던 인디언들은 대부분 'X' 표를 썼다.
이러한 강제 이주는 부족의 분열을 초래했다. 미국 정부는 이주에 저항하는 지도자들을 무시하고 이주 지지 지도자들과 거래했다. 뉴에코타 조약은 체로키족의 선출되지 않은 지도자들에 의해 합의되었고, 이는 눈물의 길에서 약 4,000명의 체로키족 사망을 초래했다. 초크토족도 강제 이주 중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인디언 강제 이주는 미국 육군이 호송했지만, 인디언들은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관리 부실, 불충분한 대책, 법적 권리 보호 실패 등으로 인디언들은 엄청난 고통과 죽음을 겪었다.
대부분의 인디언은 이주 조약에 따랐지만, 일부는 저항했다. 남동부에서는 블랙 호크 전쟁(1832), 제2차 크리크 전쟁(1836), 제2차 세미놀 전쟁(1835-1842)이 발발했다. 특히 세미놀 전쟁은 게릴라전으로 "인디언의 베트남 전쟁"으로 불린다.
3. 1. 인디언 이주법의 내용과 앤드루 잭슨의 입장
1830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인디언 이주법》을 통과시키면서 인디언 이주 정책이 가속화되었다. 이 법은 조약을 통해 토착 원주민인 인디언을 이주시키는 것을 허용했다. 표면적으로는 이주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명시되었지만, 실제로는 잭슨 행정부가 부족 지도자들에게 이주 협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이주를 거부하면 연방 조약을 파기한 것으로 간주되어 보호 및 연금을 받지 못하고 백인에게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잭슨 행정부는 육군의 무력을 동원하여 부족의 존망과 관련된 압력을 가하여 부족 지도자들이 이주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인디언들은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X' 표를 쓰는 방식으로 서명했다.
이러한 강제 이주 정책은 부족 내 분열을 야기했다. 미국 정부는 이주에 반대하는 부족 지도자들을 무시하고 이주를 지지하는 지도자들과 거래했다. 예를 들어, 뉴에코타 조약은 체로키족의 주요 지도자들이 아닌 일부 파벌에 의해 합의되었다.
앤드루 잭슨은 1829년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인디언 이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이전 대통령들의 정책을 폐기하고 미시시피 강 동쪽에 거주하는 인디언들을 공격적으로 몰아냈다. 잭슨의 요청으로 의회는 인디언 이주 법안을 통과시켰고, 1830년 5월 30일 잭슨은 이 법안에 서명했다.
3. 2. 미국 시민들의 이주 반대
인디언 이주 정책은 널리 지지를 받았지만, 법적 및 도덕적 근거에서 반대도 있었다. 또한 연방 정부와 원주민 국가 간의 공식적이고 관례적인 외교적 상호 작용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체로키 이주 직전인 1838년에 "조지아주 체로키 인디언 이주에 대한 항의"라는 널리 배포된 서한을 썼다. 에머슨은 이 서한에서 정부와 이주 정책을 비판하며, 이주 조약이 불법이고 미국 정부가 지지해서는 안 되는 "가짜 조약"이라고 주장했다.[9] 그는 이주를 "세상이 만들어진 이래로 국가가 자신의 동맹국 및 보호자와 거래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모든 신념과 미덕의 포기, 정의의 부정...사기 및 강탈 행위에 대한 항의로부터 어떠한 선의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절망감, 불신의 일반적인 표현은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도움과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라고 묘사했다.[10] 에머슨은 그의 서한을 정치적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마틴 밴 뷰런 대통령에게 체로키 이주 시행을 막도록 촉구했다. 미국 전역의 다른 개인 정착민과 정착민 사회 단체들도 이주에 반대했다.[11]3. 3. 원주민들의 대응
원주민 집단들은 정부를 개편하고, 헌법과 법전을 만들었으며, 자치권을 지키고 연방 정부가 약속한 주(state)의 침해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 정책 및 조약을 협상하기 위해 워싱턴에 대표단을 보냈다.[12] 그들은 미국이 원했던 대로 적응하는 것이 이주 정책을 막고 연방 정부 및 주변 주들과 더 나은 관계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아메리카 원주민 국가들은 이주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향 땅에 남아서 이를 보장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하고 싶어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백인이 아닌 지역으로의 이주가 그들의 자치권과 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이라고 믿었다.[13] 미국은 이러한 분열을 이용하여 (종종) 소수 집단과의 이주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들은 이주가 그들의 민족에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14] 이러한 조약은 종종 해당 국가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의회가 이주 조약을 비준하면, 연방 정부는 조약에 명시된 날짜까지 이주하지 않았거나 (또는 이주를 시작하지 않은) 원주민 국가들을 군사력을 동원하여 이주시킬 수 있었다.[15]
모든 지파에서 지도자끼리 이주정책에 대해 대립하여, 이 강제 이주의 압력은 부족의 씁쓸한 분열을 일으켰다. 미국 정부 당국은 이주 협약에 대한 합의에 저항하는 부족 지도자들을 무시하고 이주를 지지했던 부족 지도자들과 거래했다. 예를 들어 뉴에코타 조약은 체로키의 주요 지도자들과 파벌에 의해 합의되었지만, 그들은 부족에서 선발된 지도자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인디언은 마지못해 평화적으로 이주 조약에 따랐지만, 일부 부족 집단은 이주 조약의 실현에 저항하기 위해 싸웠다. 남동부에서는 두 개의 단기전(1832년의 블랙 호크 전쟁과 1836년의 제2차 크리크 전쟁)과, 수렁에 빠진 초토화 작전에 의한 전쟁(1835년부터 1842년까지 7년에 걸친 제2차 세미놀 전쟁)을 초래했다. 세미놀 전쟁은 게릴라전이 되었고, 현재는 "인디언의 베트남 전쟁"이라고 불린다.
4. 눈물의 길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인디언 이주법은 이론상 부족의 이주를 자발적으로 규정했지만, 실제로는 정부 관리들에 의해 자주 악용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1835년 12월 29일, 체로키 부족 지도부가 아닌 소수의 구성원 20명이 서명한 뉴에코타 조약이다. 이 조약은 마틴 밴 뷰런 대통령에 의해 강행되었고, 선교사 제레미아 에바츠는 체로키 족에게 이 사건을 미국 대법원에 제소할 것을 촉구했다.
존 마셜 대법원은 ''체로키 네이션 대 조지아 주''(1831) 사건을 심리했지만,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이 주권 국가가 아니며 미국 법원에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판결을 거부했다. 이후 마셜 대법원장이 작성한 ''우스터 대 조지아 주''(1832) 판결에서는 개별 주가 아메리카 원주민 문제에 대한 권한이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조지아 주는 대법원 판결을 무시했고, 정착민과 토지 투기꾼들의 인디언 토지에 대한 탐욕은 멈추지 않았다. 일부 백인들은 인디언이 평화와 안보를 위협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지아 주 의회는 1831년 3월 31일 이후 주 면허 없이 인디언 영토에 정착민이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켜 인디언 이주에 반대하는 선교사들을 배제하려 했다.
4. 1. 눈물의 길의 참상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집행한 협약 조항으로 인해 눈물의 길에서 약 4,000명의 체로키 부족이 사망했다. 이들은 대부분 과로와 질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초크토족 역시 강제 이주 과정에서 과로와 질병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인디언 강제 이주는 미국 육군이 말을 타고 호송했지만, 인디언들은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당시 "체로키의 눈물의 길" 기록에는 "무덤에 들어갈 노파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걷고 있었다"라는 증언이 남아있다. 강제 이주 관리는 최저 가격으로 입찰한 민간인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관리 소홀, 부실한 호송 대책, 이주 전후 인디언의 법적 권리 보호 실패(대부분 사보타주) 등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인디언들은 엄청난 고통과 죽음을 겪어야 했다.
대부분의 인디언은 마지못해 평화적으로 이주 조약에 따랐지만, 일부 부족은 이주 조약에 저항하며 싸웠다. 남동부에서는 1832년 《블랙 호크 전쟁》, 1836년 《제2차 크리크 전쟁》, 1835년부터 1842년까지 7년간 지속된 《제2차 세미놀 전쟁》이 발발했다. 《제2차 세미놀 전쟁》은 게릴라전 양상을 띠며, "인디언의 베트남 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5. 각 부족별 이주
인디언 이주법에 따라 여러 부족이 이주 대상이 되었으며, 이들은 각기 다른 조약을 통해 이주를 시작했다. 남부 부족들 외에도 구 북서부의 부족들도 이주 대상이었는데, 이들은 남부 부족들보다 규모가 작고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약과 이주 과정이 좀 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북서부 인디언 전쟁 이후, 1795년 그린빌 조약을 통해 오늘날 오하이오 주 대부분의 땅이 원주민 국가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미 쫓겨난 레나페 (델라웨어 부족), 키카푸, 쇼니와 같은 부족들은 1820년대에 인디애나, 미시간, 오하이오에서 이주되었다. 1838년 말 포타와토미는 위스콘신과 미시간에서 강제로 쫓겨났으며, 캔자스 준주에 재정착했다. 현재의 오하이오에 남아있는 공동체는 당시 스페인의 통치를 받던 루이지애나로 강제로 이주해야 했다.
쇼니 부족, 오타와, 포타와토미, 소크, 메스쿼키 (폭스) 부족은 조약에 서명하고 인디언 준주로 이주했다. 1832년, 소크족 지도자 블랙 호크는 소크족과 폭스족을 이끌고 일리노이의 그들의 땅으로 돌아왔지만, 블랙 호크 전쟁에서 패배하고 현재의 아이오와로 이주되었다. 마이애미는 분열되었고, 부족의 많은 사람들이 1840년대에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재정착했다.
버팔로 크릭 제2 조약 (1838)에서, 세네카족은 뉴욕의 모든 토지 (작은 보호구역 하나 제외)를 인디언 준주에 있는 200,000에이커의 토지와 교환했다. 하지만 토지는 정부 관리들에 의해 판매되었고, 그 수익금은 미국 재무부에 예치되었다. 세네카족은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하며 미국 청구 법원에 배상을 청구했고, 1898년에 미국은 "뉴욕 인디언"에게 199만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미국은 각각 1842년과 1857년에 세네카족 및 토나완다 세네카와 조약을 체결했다. 1857년 조약에 따라 토나완다는 오그던 랜드 컴퍼니로부터 토나완다 보호구역을 다시 사들일 권리를 얻는 대신 미시시피 서쪽의 모든 토지에 대한 청구를 포기했다. 한 세기 후, 세네카족은 버팔로 시내에 있는 9에이커 부지 (원래 보호구역의 일부)를 구입하여 세네카 버팔로 크릭 카지노를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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