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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동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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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류동조론은 일본과 류큐(오키나와)의 기원, 문화적 동질성을 주장하는 이론으로, 미나모토노 타메토모의 류큐 도래 전설에서 기원한다. 16세기 겟슈 주케이의 기록을 통해 처음 나타났으며, 하네지 조슈는 류큐 왕가가 일본 왕실과 같은 세이와 겐지의 후예라고 주장하며 동질성을 강조했다. 에도 시대에는 아라이 하쿠세키, 후지 사다모토 등이 일류동조론을 주장했으며, 이파 후유는 일본과 오키나와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동조론'을 펼쳤다. 최근 유전자 연구 결과는 오키나와현 주민과 일본 본토 주민이 같은 조몬인을 기원으로 하며, 규슈에서 오키나와로의 이주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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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동조론
개요
명칭일류동조론 (日琉同祖論)
로마자 표기Irryudongjoron
일본어 표기日琉同祖論 (にちりゅうどうそろん)
영어 표기Japan-Ryukyu common ancestry theory
내용
주장일본인과 류큐인이 동일한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
핵심 내용언어, 문화, 풍습, 유전자 등의 유사성을 근거로 제시
언어적 유사성류큐어와 일본어의 어휘 및 문법 구조 유사성 주장
문화적 유사성종교 의식, 전통 예술, 생활 양식 등에서의 공통 요소 주장
풍습적 유사성제사, 축제, 의례 등에서의 유사점 주장
유전적 유사성유전자 분석을 통해 일본인과 류큐인의 혈통적 연관성 주장
역사
등장 배경에도 시대 후기, 국학 운동의 영향
주요 인물후지이 데이라이, 오리구치 신노부, 이가 세이이치로 등
발전 과정초기에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주장
이후 학문적 연구를 통해 발전
현대적 재조명유전자 연구, 고고학적 발견 등을 통해 새로운 시각 제시
평가
학계의 시각비판적 시각: 과학적 근거 부족, 민족주의적 편향성 지적
긍정적 시각: 언어학, 고고학 연구를 통해 일부 지지
사회적 영향류큐 정체성 논쟁에 영향
일본 민족주의 강화에 기여
논쟁점류큐어와 일본어의 관계 (방언 vs. 독립된 언어)
류큐인의 기원
일본 민족의 형성 과정
관련 정보
관련 연구언어학, 고고학, 유전학, 문화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 진행
참고 자료관련 서적, 논문, 학술 자료 등
관련 항목류큐, 일본 민족, 민족주의, 국학

2. 일류동조론의 기원

근래의 연구에 따르면, 일류동조론의 기원이 되는 미나모토노 타메토모 류큐 도래 전설은 16세기 전반에는 이미 일본에서 문헌에 나타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확인된 그 최초 출처는 교토 오산의 린자이 종 승려 겟슈 주케이(1470년 - 1533년)의 「학옹자명병서」에서이다.

그곳에서 겟슈는 신빙성은 알 수 없지만이라고 단서를 달면서, "일본에는 미나모토노 타메토모가 류큐로 건너가 지배자(창업주)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렇다면 그 자손은 겐 씨이므로, 류큐는 일본의 부용국이다"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2]。 이로부터 미나모토노 타메토모 류큐 도래 전설이 16세기 전반에는 일본에서, 특히 교토 오산의 승려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류큐 측에도 미나모토노 타메토모 류큐 도래 전설이 유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미나모토노 타메토모 류큐 도래 전설은, 일류 사이의 선종 승려의 교류를 통해 류큐로 전해졌을 가능성 외에, 타이츄의 『류큐 신도기』나 시마즈 씨의 외교 승려인 난포 분시가 기고한 「토류큐시병서」가 류큐에 전래, 1650년 하지 쵸슈에 의한 『추잔 세이칸』에 의해 이 전설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2. 1. 미나모토노 타메토모 전설

미나모토노 타메토모가 류큐로 건너가 지배자가 되었다는 전설은 16세기 전반에 이미 일본 문헌에 나타난다.[2] 현재 확인된 최초 출처는 교토 오산의 린자이 종 승려 겟슈 주케이(1470년 - 1533년)의 「학옹자명병서」이다.[2] 겟슈는 "일본에는 미나모토노 타메토모가 류큐로 건너가 지배자(창업주)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렇다면 그 자손은 겐 씨이므로, 류큐는 일본의 부용국이다"라는 내용을 기록했다.[2] 이 전설은 16세기 전반에 일본에서, 특히 교토 오산의 승려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2]

2. 2. 하네지 조슈(羽地朝秀)의 일류동조론

하네지 조슈(羽地朝秀)는 1650년(게이안 3년), 류큐 최초의 정사인 『추산세감(中山世鑑)』을 편찬했다.[3] 이 책에서 하네지는 류큐 최초의 왕인 슌텐(舜天)이 미나모토노 타메토모의 아들이며, 류큐 왕가가 일본 왕실과 같은 세이와 겐지의 후예라고 주장했다.[4] 슌텐의 실존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슌텐'이라는 이름 자체는 1522년에 세워진 '국왕 숭덕비'에 새겨져 있어 16세기 초에는 류큐 최초의 왕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하네지 조슈는 1673년 3월 시치쇼(仕置書)에서 류큐 사람들의 조상이 과거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언급하며, 류큐와 일본의 동질성을 강조했다.[3] 그는 류큐와 일본이 말이 다른 것은 먼 나라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교류가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하네지의 주장은 당시의 관습을 타파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레토릭)로 해석되기도 한다.[4] 그러나, 류큐와 일본을 같은 조상으로 하는 마음을 가지고 류큐가 일본과 동등하게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는 연구도 있다.

하네지의 일류동조론은 류큐 왕국 말기의 정치가인 산시칸 기완 조호(宜湾朝保)에게 영향을 주었다. 기완은 일본의 고대 문헌과 류큐 방언을 비교하여 양자 간에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했다.[5]

3. 에도 시대 일본의 일류동조론

아라이 하쿠세키는 저서 『남도지』(1719년)의 총서에서 『산해경』에 보이는 "북왜", "남왜"의 남왜는 오키나와를 가리킨다고 언급하며, 류큐의 가요와 고어 등도 증거로 제시하며 일류동조론을 주장했다.[6]

후지 사다모토는 텐메이 원년(1781년)에 간행된 저서 『충구발』[7]에서 진무 천황은 오키나와의 "이에야 섬"(이헤야 섬)에서 탄생하여 거기에서 동쪽으로 정벌했다며, 황실의 조상은 오키나와에서 건너왔다는 설을 전개했다. 후지 사다모토는 이헤야 섬에는 아마미타케(쿠마야 동굴)라는 동굴이 있으며, 현지에서는 천손강림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곳이 고천원의 천손강림의 땅이라고 추정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이 설에 격분하여 텐메이 5년(1785년)에 완성한 저서 『겸광인』[7]에서 이를 철저하게 논박했다.[6]

3. 1. 아라이 하쿠세키의 주장

아라이 하쿠세키는 저서 『남도지』(1719년)의 총서에서 『산해경』에 보이는 "북왜", "남왜"의 남왜는 오키나와를 가리킨다고 언급하며, 류큐의 가요와 고어 등도 증거로 제시하며 일류동조론을 주장했다.[6]

3. 2. 후지 사다모토(藤貞幹)의 주장

후지 사다모토는 텐메이 원년(1781년)에 간행된 저서 『충구발』[7]에서 진무 천황은 오키나와의 "이에야 섬"(이헤야 섬)에서 탄생하여 거기에서 동쪽으로 정벌했다며, 황실의 조상은 오키나와에서 건너왔다는 설을 전개했다. 후지 사다모토는 이헤야 섬에는 아마미타케(쿠마야 동굴)라는 동굴이 있으며, 현지에서는 천손강림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곳이 고천원의 천손강림의 땅이라고 추정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이 설에 격분하여 텐메이 5년(1785년)에 완성한 저서 『겸광인』[7]에서 이를 철저하게 논박했다.[6]

4. 이파 후유(伊波普猷)의 "동조론"

이파 후유는 1911년에 간행된 『고 류큐』에 수록된 논설인 「류큐인의 조상에 관하여」, 「류큐사의 추세」[8], 「류큐어의 가결에 대하여」, 「P음고」, 『류큐의 신화』[9] 등에서 일본과 오키나와의 공통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류큐인의 조상에 관하여」에서는 오키나와인이 체질, 언어, 민속, 신화 등에서 "야마토 민족"과 공통성을 가지며, 기원 후 얼마 안 되어 일본에서 떨어져 남쪽으로 이주했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이는 류큐와 일본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류큐사의 추세」는 「류큐인의 조상에 관하여」를 바탕으로, 1609년 시마즈 씨의 류큐 정복과 그 후의 압제, 그리고 그 아래에서 류큐인들에게 나타난 면종복배의 성격을 지적한다. 또한 쇼 켄, 사이 온, 기와 초호 세 정치가를 칭송하였는데, 이는 다이쇼 천황 즉위 대전 때 증위의 은전에 참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0]

이러한 이파의 "동조론"은 일본으로의 동화와 이화라는 이항 대립 구조로 해석되기도 한다. 후세 연구자들은 이파 이전의 "일류 동조론"과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4. 1. 이파 후유의 주장과 그 의의

이파 후유는 1911년에 간행된 『고 류큐』에 수록된 논설인 「류큐인의 조상에 관하여」, 「류큐사의 추세」[8], 「류큐어의 가결에 대하여」, 「P음고」, 『류큐의 신화』[9] 등에서 일본과 오키나와의 공통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류큐인의 조상에 관하여」에서는 오키나와인이 체질, 언어, 민속, 신화 등에서 "야마토 민족"과 공통성을 가지며, 기원 후 얼마 안 되어 일본에서 떨어져 남쪽으로 이주했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이는 류큐와 일본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류큐사의 추세」는 「류큐인의 조상에 관하여」를 바탕으로, 1609년 시마즈 씨의 류큐 정복과 그 후의 압제, 그리고 그 아래에서 류큐인들에게 나타난 면종복배의 성격을 지적한다. 또한 쇼 켄, 사이 온, 기와 초호 세 정치가를 칭송하였는데, 이는 다이쇼 천황 즉위 대전 때 증위의 은전에 참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0]

이러한 이파의 "동조론"은 일본으로의 동화와 이화라는 이항 대립 구조로 해석되기도 한다. 후세 연구자들은 이파 이전의 "일류 동조론"과 관련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5. 현대 유전자 연구와 일류동조론

최근의 유전자 연구에서 오키나와현 주민과 규슈 이북의 본토 주민은 조몬인을 기초로 성립되었으며, 현재의 동아시아 대륙부의 주요 집단과는 다른 유전적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11][12].다카미야 히로토(가고시마 대학)는 오키나와 섬에 인간이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조몬 중기 후반부터 후기 이후이며, 10세기부터 12세기 무렵에 농경을 하는 사람들이 규슈에서 오키나와로 이주한 것이 아닌가라고 지적하는 것처럼, 근년의 고고학 등의 연구를 포함하여 난세이 제도의 주민의 선조는 규슈 남부에서 비교적 새로운 시기(10세기 전후)에 남하하여 정착한 것이 주체라고 추측되고 있다[13][14]

사이토 나리야 등이 종합연구대학원대학에 의한 대규모 조사에서 아이누인 36개체분, 류큐인 35개체분을 포함한 일본 열도인의 DNA 분석을 실시한 결과, 아이누인에서 보면 류큐인이 유전적으로 가장 근연이며, 양자의 중간에 위치하는 본토인은 오키나와에 사는 일본인 다음으로 아이누인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분석 결과에서 현대 일본 열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일본 열도에 사는 조몬인의 계통과 야요이계 도래인의 계통이 공존한다는 이중 구조설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2021년 11월 10일, 막스 플랑크 인류사 과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중국일본한국유럽뉴질랜드미국의 연구자를 포함한 국제팀이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미야코지마시의 나가하카 유적의 선사 시대의 인골을 DNA 감정한 결과 "100% 조몬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져, 선사 시대의 사키시마 제도 사람들은 오키나와 제도에서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 성과가 나왔다[15]。또한 언어학고고학에서는 중세(구스쿠 시대, 11세기~15세기)에 규슈에서 "본토 일본인"이 류큐 열도로 이주했다는 것이 추정 가능하며, 다카미야 히로토(가고시마 대학)는 "결과적으로 류큐 방언의 근원이 되는 언어를 가진 농경민이 본토에서 식민했다. 저명한 '일본인 이중 구조론'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15][16]

5. 1. 유전자 연구 결과

최근의 유전자 연구에서 오키나와현 주민과 규슈 이북의 본토 주민은 조몬인을 기초로 성립되었으며, 현재의 동아시아 대륙부의 주요 집단과는 다른 유전적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11][12].다카미야 히로토(가고시마 대학)는 오키나와 섬에 인간이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조몬 중기 후반부터 후기 이후이며, 10세기부터 12세기 무렵에 농경을 하는 사람들이 규슈에서 오키나와로 이주한 것이 아닌가라고 지적하는 것처럼, 근년의 고고학 등의 연구를 포함하여 난세이 제도의 주민의 선조는 규슈 남부에서 비교적 새로운 시기(10세기 전후)에 남하하여 정착한 것이 주체라고 추측되고 있다[13][14]

사이토 나리야 등이 종합연구대학원대학에 의한 대규모 조사에서 아이누인 36개체분, 류큐인 35개체분을 포함한 일본 열도인의 DNA 분석을 실시한 결과, 아이누인에서 보면 류큐인이 유전적으로 가장 근연이며, 양자의 중간에 위치하는 본토인은 오키나와에 사는 일본인 다음으로 아이누인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분석 결과에서 현대 일본 열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일본 열도에 사는 조몬인의 계통과 야요이계 도래인의 계통이 공존한다는 이중 구조설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2021년 11월 10일, 막스 플랑크 인류사 과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중국일본한국유럽뉴질랜드미국의 연구자를 포함한 국제팀이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미야코지마시의 나가하카 유적의 선사 시대의 인골을 DNA 감정한 결과 "100% 조몬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져, 선사 시대의 사키시마 제도 사람들은 오키나와 제도에서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 성과가 나왔다[15]。또한 언어학고고학에서는 중세(구스쿠 시대, 11세기~15세기)에 규슈에서 "본토 일본인"이 류큐 열도로 이주했다는 것이 추정 가능하며, 다카미야 히로토(가고시마 대학)는 "결과적으로 류큐 방언의 근원이 되는 언어를 가진 농경민이 본토에서 식민했다. 저명한 '일본인 이중 구조론'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15][16]

5. 2. 고고학 및 언어학적 연구 결과

최근의 유전자 연구에서 오키나와현 주민과 규슈 이북의 본토 주민은 조몬인을 기초로 성립되었으며, 현재의 동아시아 대륙부의 주요 집단과는 다른 유전적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11][12]다카미야 히로토(가고시마 대학)가 오키나와 섬에 인간이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조몬 중기 후반부터 후기 이후이며, 10세기부터 12세기 무렵에 농경을 하는 사람들이 규슈에서 오키나와로 이주한 것이 아닌가라고 지적하는 것처럼, 근년의 고고학 등의 연구를 포함하여 난세이 제도의 주민의 선조는 규슈 남부에서 비교적 새로운 시기(10세기 전후)에 남하하여 정착한 것이 주체라고 추측되고 있다.[13][14]

사이토 나리야 등이 종합연구대학원대학에 의한 대규모 조사에서 아이누인 36개체분, 류큐인 35개체분을 포함한 일본 열도인의 DNA 분석을 실시한 결과, 아이누인에서 보면 류큐인이 유전적으로 가장 근연이며, 양자의 중간에 위치하는 본토인은 오키나와에 사는 일본인 다음으로 아이누인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분석 결과에서 현대 일본 열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일본 열도에 사는 조몬인의 계통과 야요이계 도래인의 계통이 공존한다는 이중 구조설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2021년 11월 10일, 막스 플랑크 인류사 과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중국일본한국유럽뉴질랜드미국의 연구자를 포함한 국제팀이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미야코지마시의 나가하카 유적의 선사 시대의 인골을 DNA 감정한 결과 "100% 조몬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져, 선사 시대의 사키시마 제도 사람들은 오키나와 제도에서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 성과가 나왔다.[15]또한 언어학고고학에서는 중세(구스쿠 시대, 11세기~15세기)에 규슈에서 "본토 일본인"이 류큐 열도로 이주했다는 것이 추정 가능하며, 다카미야 히로토(가고시마 대학)는 "결과적으로 류큐 방언의 근원이 되는 언어를 가진 농경민이 본토에서 식민했다. 저명한 '일본인 이중 구조론'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15][16]

6. 한국의 관점에서의 일류동조론

참조

[1] 서적 日琉同祖論 沖縄大百科事典 下巻
[2] 간행물 為朝伝説と中山王統 https://doi.org/10.1[...] 法政大学沖縄文化研究所 2010-03
[3] 문서 真境名安興全集 第一巻
[4] 서적 向象賢の論理 新琉球史 近世編 上
[5] 문서 真境名安興全集 第一巻
[6] 문서 真境名安興全集 第一巻
[7] 문서 日本思想闘争史料 第4巻
[8] 서적 『古琉球』 沖縄の淵
[9] 서적 日琉同祖論 愛郷者 伊波普猷 戦略としての日琉同祖論
[10] 서적 琉球史の趨勢 古琉球
[11] 뉴스 自然人類学から見たアイヌ民族 http://www.kantei.go[...] 内閣総理大臣官邸 2009-02-26
[12] 뉴스 人類の移動誌 http://idoushi.jp/?p[...] 国立民族学博物館共同研究会 2010-09-13
[13] 뉴스 ルーツ解明 沖縄に注目 http://www.asahi.com[...] 2010-04-16
[14] 뉴스 ルーツ解明 沖縄に注目 http://www.asahi.com[...] 2010-04-16
[15] 뉴스 宮古島先史の人々「北側の沖縄諸島から」「南から」説を覆す 人骨DNA分析で100%縄文人 https://www.okinawat[...] 2021-11-12
[16] 뉴스 トランスユーラシア言語は農耕と共に新石器時代に拡散した https://www.kyushu-u[...] 202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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